13
유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붉은 도복의 노인이 주는 봉신 명부를 받았다. 명부를 받자 명부가 빛무리로 변하며 유로를 에워싸더니 유로의 몸으로 스며들듯이 감싸고는 가야 시대 철갑옷의 형태를 띠다가 검은색 수트로 변했다.
-너는 이제 명실상부한 신계의 봉신을 받은 수호령이니라. 언젠가 수호신이 될 수도 있을 게다.
-수호신이요? 그건 수호령이랑 다른가요?
-능력치와 권한이 다르다. 먼 이야기이니 지금은 그 정도만 알고 있거라.
유로는 수호령이든 수호신이든 그런 건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젠 수이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때 하얀 수트의 중년 천사는 한창 짜증이나 있었다.
-이건 상도덕에 어긋나죠. 무슨 원칙도 없이 영혼이 살아있을 때 가장 아끼던 사람을 지켜주게 하겠다면서 수호천사 아니 수호령 지위까지 급임명해 버리고.. 이게 도의에 맞는 일입니까?
-규약에 어긋난 것이 있는가? 우리가 이 아이를 강제로 납치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영혼을 홀려 강제 귀의라도 시켰다는 말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원칙이 없잖아요 원칙이. 우리 천국측과 그쪽 천당측이 맺은 규약으로도 인간들 시간으로 49일 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영혼이 자신이 갈 길을 선택할 시간을 주기로 해놓고 지금 이게 뭡니까? 저더러 호객행위를 한다더니 그쪽 분들 처사는 말도 안되는 거 아닙니까? 죽자 마자 수호천사 아니 수호령 지위를 물건 강매하듯이 넘겨 버리고 말이에요.
천사의 말에 붉은 도복의 노인이 경우를 벗어난 것이 없음을 짚었지만 천사는 더 볼멘소리로 원칙을 따지려 했다.
-규약에는 영혼 자신의 선택에 따른다고 하지 않나? 이젠 자네 참견은 끝났네. 얘는 이제 우리 관할의 수호령이니 자네는 이만 돌아가시게.
-네. 일단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 멈춰진 공간에서 사라졌다.
14
내리는 비도 멈춰져있고 달리는 트럭도 멈춰있으며 도로를 향해가고 있는 수이도 걷던 모습 그대로 멈춰져 있었다. 그 멈춰진 공간에 다시 선 젊은 여성 차사가 유로를 향해 지적했다.
-수호령이라고 자신이 맡은 사람의 행동에 다 참견할 수는 없는 거야. 지켜보다가 그 사람이 위험해지는 순간에 한 해서 도와야 해.
-그 말을 몇 번째 하세요. 오른쪽 귀랑 왼쪽 귀랑 개통될 지경이에요. 주의 사항과 임무는 이미 다 전달하셨잖아요. 이제 저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 그렇구나. 너도 이제 엄연한 수호령이니 알아서 해야지.
-근데 계속 이 옷만 입고 있어야 하나요?
-옷은 네가 원하는 어떤 옷으로도 변하는 거야. 그냥 생각만 하면 돼.
유로는 그 말을 듣고 동방신기의 유노윤호가 입었던 무대의상을 떠올려 보았다.
-와. 이게 진짜 되네.
-니가 가수냐? 공연이나 패션쇼할 일 없으니까. 맡은 직무나 잘 챙겨.
의상이 뜻대로 바뀌는 것에 유로가 신기해하자. 차사 누나는 직위를 처음 받는 영혼들마다 왜 다 이렇게 한심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가면 넌 바로 이 세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멍 때리다 소중한 사람 다치게 하지 마라, 알겠니.
-예.
그리고 젊은 차사 누나가 사라지자 공간 속에 멈춰있던 비가 다시 내렸다. 멈춰있던 수이도 트럭이 달려오는 도로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제자리를 찾자 수이 머리 위에 보이던 그 마법써클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유로는 잽싸게 수이의 뒤에서 수이를 안고 도로에서 물러났다. 수이는 몸이 저절로 뒤로 떠오르자 놀라 주저앉으며 쓰러졌다. 그때 아슬아슬하게 트럭이 지나갔다.
유로는 수이의 뒤에서 '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수이의 얼굴을 보러 수이 앞으로 가려 했지만 무슨 보이지 않는 막이 있는지 수이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수이가 지친 모습으로 빗속에서 쓰러진 채 땅을 짚고 울고 있다가 다시 도로를 바라봤다.
수이 머리 위의 마법써클이 오렌지빛에서 강렬한 붉은빛을 띠며 빠르게 회전하다가 멈춰 섰다.
유로는 수이가 자꾸 평소 같지 않게 구는 것이 저 마법써클 때문이라 생각하고 마법써클을 없애려 손을 댔다. 무언가 저릿하고 뜨거운 느낌이 나며 손이 마법써클을 지나쳐 갔다.
수이가 일어나 다시 도로로 향하려 했다. 유로는 조급해졌다.
-지도령님 도와주세요.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붉은 도복의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유로의 가슴 뒤 등뼈 쪽에 손을 대고는 말했다.
-이제 저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거라. 만지지는 말구.
유로가 손을 뻗자 손바닥에서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유로의 손에서 하얗고 파란빛이 터져 나와 수이 머리 위의 마법써클을 부숴버렸다. 마법써클은 부서지며 어두운 기운을 흩뿌리다 사라졌다.
-괜찮아. 수이야!
다시 한번 수이의 앞으로 가려던 유로는 무언가가 가로막는 듯해 벽을 치듯 공간을 쳤다.
-너는 그 아이 앞으로 가지 못한다.
-네. 수호령에게 그런 제한도 있나요?
-아니다. 니 소원을 다시 되짚어 보거라. 너는 저 소녀의 뒤에서 보호해 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느냐?
-아니, 그 말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러게 소원은 신중히 기원해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차원에서는 직설적으로 이뤄지니까 말이다.
-그럼 저는 계속 수이의 뒷모습만 볼 수 있는 건가요?
-그게 어디란 말이냐? 다시는 볼 수 없었을 수도 있는데.
유로는 이 꽉 막힌 저승 사람들 아니 저승 영혼들이 한참이나 답답하게 여겨졌지만 그의 말마따나 뒤에서라도 지켜줄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럽다고도 생각했다.
마침 장례식장에서 유향이가 우산을 들고 나오다 도로 앞에 서있는 수이를 보고는 달려왔다.
-너 여기서 뭐 해! 형 따라 죽으려구.
-난.. 난..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야. 다 돌려놓고 싶어, 다.
-그래서 너 죽으면 형이 잘 왔다. 고맙다. 그럴 것 같아.
-나 유로 오빠한테 너무 미안하단 말이야. 어떻게 해야 모든 게 다 원래대로 될 수 있을지.. 난 모르겠어. 모르겠다구.
형을 따라 죽으려는 듯한 수이를 보고 유향이 진지한 어조로 나무라자 수이는 울면서 절규했다. 수이는 자신이 이별을 말하려는 날 유로가 죽자 마치 자신이 유로를 죽인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모든 걸 원상태로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괴로움만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건 없이 말이다.
-일단 너네 집으로 가자. 너 좀 쉬고 정신 차려야 할 것 같아.
-아니야. 나 유로 오빠 곁에 있을래.
-형은 죽었어. 어떻게 곁에 있겠어... 집에 가자. 바래다줄게.
유향은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는 수이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택시를 잡으려 했다. 유로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