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산 아래에서 물괴들이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자 일행이 모두 어쩔 수 없다는 듯 동굴로 들어갈 때 지민이 동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방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런 시급할 때 무슨 말을 한다는 거요.


지민이 자신을 서방님이라며 부르자 동영도 더 이상 예탁을 속이려 할 필요도 없어 지민에게 단둘이 있을 때처럼 예를 갖춰 답했다. 


-저 아이를 가진 것 같습니다.


-아..


순간 동영의 낯빛이 어지러운 빛을 띠었다. 


=지금 이 상황에 아기라니.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아기라니. 가문의 존망도 알 수 없는데 축복받지 못할 상황에 찾아온 아기로구나.


이리 생각하면서도 동영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내게 첫아이를 선물해 줘서 고맙소.


지민은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동영을 따라 억지 미소를 지었다.


17 


동굴 안에 들어서자 지성은 삼지창을 들었고 염석도 도끼 보다 긴 무기인 삼지창을 따라 들었다. 철재는 화살통 두 개를 둘러메고 다른 화살통은 동굴 입구 한쪽에 모아뒀다.


지민도 삼지창을 들었지만 제법 무쭐했다. 동굴 한 쪽에 군사들의 시신이 흩어져 있는 곳에 검이 한 자루 놓여 있었다. 예탁이 집어들려 다가서려는데 동영이 그녀를 앞질러 가더니 검을 들었다.


예탁은 무기 하나 없이 멍한 채 서있다가 화살촉으로라도 찌를까 생각했지만 '그리 덤벼들다가는 물괴에게 당하기 더 쉽상이겠구나' 생각했다.


-마님, 이리 오세요. 제 뒤에 계세요. 위험합니다. 


-어, 그래.


예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지성 곁으로 갔다.


철재는 활을 들어 거의 다 와가는 물괴들의 이마 정중앙을 맞추기 시작했다. 철재가 화살을 뽑을 때마다 물괴들이 하나 둘 고꾸라졌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수의 물괴들이라 어느새 동굴로 들이닥쳤다. 


-캬악


동굴 입구에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물괴들의 목을 동영이 베고 염석과 지성, 지민이 각자 삼지창으로 찔렀으나 찔린 놈들이 하나하나 지금 뭐 하냐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팔을 뻗으며 덤벼 들려 했다. 


철재는 그 물괴들의 이마 정중앙을 맞춰 숨을 끊어 놓았다.


-에라이 씨!


염석이 안되겠는지 들고 있던 삼지창을 던져 버리고 도끼를 들어 다가오는 물괴들의 이마를 가격하자 물괴가 쓰러졌다. 


-크허허어엉 


한창 난타전이 일 때 동굴 안에서 포효하며 곰이 뛰쳐나왔다. 잠자던 곰이 자기 동굴이 소란스럽자 성난 채 깨어난 것이다. 모두 놀라서 동굴 벽에 바짝 붙자 동굴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물괴 무리를 향해 거대한 수콤이 달려들었다.


수콤이 달려들어 물어 던지고 앞발로 이놈 저놈 머리를 치자 물괴들이 우수수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야. 일당백일세 그려.


-이제는 어쩐 답니까? 


-물괴도 걱정이지만 저 수콤이 야성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 또한 큰 걱정이 아니오.


철재는 다행스럽다는 투였지만 예탁과 동영이 걱정을 드러냈다. 


예탁이 그때 동굴 밖으로 멀어져 가며 물괴 무리들과 싸우는 수콤 뒤로 머리에 상처를 심하게 입은 물괴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염석이 그것에 머리를 도끼로 내려치려는 찰나 바닥에 놓인 활과 화살을 짚은 예탁이 화살을 쏴 물괴의 이마를 맞췄다. 물괴가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갔다.


-어라. 타고난 신궁이라도 되는 거야. 언제 활쏘기 연습이라도 하셨어 아씨?


-몇 번, 아버님을 따라갔다가 쏴보기는 했습니다.


염석의 말에 예탁이 어깨를 펴며 대답했다.


물괴가 사라지자 다들 한숨을 놓았다. 


동영이 검을 든 손을 내리고는 지민에게로 다가갔다. 


-이제는 괜찮소. 다 지나갔소.


지민은 넋이 나간 듯 들고 있던 삼지창을 떨어뜨리고는 피 묻은 저고리 소매를 걷었다. 팔뚝에 물괴가 할퀸 것인지 생채기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을 거요. 물괴한테는 물려야 옮는 거잖아?


동영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두려운 얼굴로 검을 힘줘 잡았다. 


지민이 몇 번 경련을 하고는 동영에게 달려들자 동영은 놀라 그녀의 배를 찔렀다. 동영의 어깨를 물어뜯은 지민이 고개를 돌리자 예탁이 그녀의 이마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넋 나가 바로 옆 바닥에 쓰러진 지민의 시신을 바라보는 동영의 곁으로 예탁이 다가왔다. 예탁은 지민의 배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부인.. 부인.. 내가.. 캬악


예탁을 부르다가 경련을 하며 괴성을 지르는 동영이었던 물괴의 목을 예탁이 잘라버렸다.


-서방님 잘 가셔요.



18


예탁과 지성, 철재와 염석은 동굴에서 나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제 곧 정상이었다.


남자들은 뒤에서 다시 물괴 무리가 쫓아올까 경계하며 천천히 오르고 예탁이 앞장섰다. 


정상에 올라섰다. 예탁은 동영의 피가 묻은 치마와 저고리를 벗었다. 


-아이고 마님, 이게 무슨 짓이랍니까? 예법이 지엄한데 양갓집 아씨가 너른바지만 입고 치마저고리를 벗어버리시다니요.


-예법이 오늘 날 살린 게 아니잖아! 벗어야... 벗어나야 사는 거야. 그래야 살 수 있어. 


그리 말하며 예탁은 가슴 아래 호피를 가로로 묶어 짧은 치마처럼 걸쳤다.


정상에 오르며 예탁은 자신을 뒤따르는 지성의 손을 잡아당겨 주었다. 


염석이 말했다. 


-이제 이 고비만 넘으면 문제인 모든 것들이 더불어 사라질 거야! 새날이 시작되는 거야. 새로운 세상이 말이야!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예탁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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