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개정판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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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하느님만이 최고의 진지함을 행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놀이를 놀아 주는 자이고 그것이 그의 가장 좋은 역할이다. 


놀이 개념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더 높은 질서 속에 있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배제하려고 하는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잘 포섭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든 게임을 망치는 자는 마법 세계를 망치는 자이고,

따라서 비겁한 자이며 축출되어야 마땅하다. 


놀이가 끝나도 그 효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놀이 바깥에 있는

일상적 세상에 안정, 질서, 번영의 광휘를 뿌려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한다.

다음번의 신성한 놀이-계절이 돌아올 때까지. 


놀이하는 사람은 그 게임에 무아 상태로 몰두하고 

그것이 '단지'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잠시 사라진다.

게임에 결부되어 있는 즐거움은 긴장을 낳을 뿐 아니라

정신의 고양을 가져온다. 놀이는 무의미함과 황홀감이라는 

두 기둥 사이에서 움직인다. 


문명이 놀이 속에서 혹은 놀이로서 발전해 온 과정에는 

두 개의 반복적인 형태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신성한 공연이고 다른 하나는 축제의 경기이다. 


어떤 행위가 진지하고 신성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놀이의 특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경기는 곧 놀이를 의미한다. ...... 
어떤 경기가 되었든 거기에 놀이의 요소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가면을 쓰는 사람을 다른 '존재'로 변모시켰다.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싸움은 바로 그 제약 때문에 놀이의 형태적 특징을 띠게 된다. 


놀이의 행동 뒤에는 고양과 긴장의 감정이 뒤따르고 이어 환희와 이완이 수반된다. 


아이스킬로스에선 가장 비범한 진지함은 놀이의 형태로 체험된다.
에우리피데스에선 어조가 충만한 진지함과 경박함 사이를 쉴 새 없이 왕복한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시인은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이어야 하며, 
인간의 삶 전체는 비극과 희극의 혼합으로 체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요한 하위징아는 18세기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러 놀이의 요소가 쇄락해 왔다고 말하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 세계의 역사와 경제, 문화에 있어 놀이의 요소는 더욱더 강해져 오지 않았나 싶다. 


신자유주의의 옷을 입고 국제경제기구를 등에 업은 초국적 기업들의 각국 경제 침탈의 국면도 그렇고 중동에서의 전쟁과 각국에서의 테러는 문명충돌이라는 색깔을 띠며 벌어진 잔인한 놀이였으며 그로 인해 그에 대한 각국의 대처와 각국 정치, 이슬람의 확장 등이 진지한 놀이의 형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 최근의 K-pop과 한류의 재확장도 시대의 흐름을 타고 흐르는 놀이의 색깔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경제와 군사, 정치가 특정 플레이어들이 다수의 눈치를 보는 순간도 있으나 다수의 삶에 형태에 영향을 끼치는 게임의 진행이라면 인터넷, SNS, 유투브, 개인방송 등은 개인이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이라는 놀이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세계의 역사가 하나의 게임(아곤)으로 인식 되었었는데 호모루덴스를 읽고 세계를 보니 "모든 것은 놀이다"라는 관념이 좀더 와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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