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이를 테면 이런 문장은 섹시하다. 놀라지 마시라. <독서의 기술>이다.
“(94)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가 모호하다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혹은 쓰는 이와 읽는 이가 공유하는 것은 단순한 단어에 불과한 것이지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려면 양자가 같은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쓰는 이가 단어로 나타내고 있는 의미를 읽는 이가 바르게 이해하여야만 비로소 쓰는 이와 읽는 이는 하나의 사상을 공유한다. *두 개의 정신이 사상(思想)을 통하여 만나는 기적(奇蹟)이 일어난다.*”
내 생각에 정말로 그것은 기적이다. 두 개의 정신이 사상을 통해 만나기 위해서 *같은 의미*를 사용하며 소통하기 위해서 어떤 개념들은 가지치고 잘라내져야 한다. 어쩌면 정말로는 복잡한 개념을 다룰 수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생겨나는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책 앞에서 무너진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마음으로 마음으로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조금씩 하기는 한다. 그리고 가끔 책에서 내가 이해받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있다. <김대식의 인간 vs기계>다.
“(103) 나와는 다르게 보는 것이 분명 하지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보이는 색과 가장 가까운 언어는 ‘빨강’입니다. 그래서 빨갛죠? 라고 물으면 ‘네, 빨갛습니다’ 라고 응답하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소통했다는 착시를 얻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훨씬 더 낮음에 있습니다.* 인식의 해상도는 우주의 해상도 보다 훨씬 더 낮겠지요. 이렇다 보니 수학적인 문제가 생기 게 됩니다. 매니 투 원 맵핑 Many to one mapping이란 것이 있습니 다. 예를 들어, 생각과 언어를 봤을 때 상당히 다양한 생각들 이 동일한 단어로 맵핑mpping될 수가 없겠죠. 왜냐하면 생각의 숫자가 언어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으니까요. 일대일 매칭matching이 안 되는 거죠. 따라서 단어만 보고 역으로 ‘어떤 생각을 했었는가?’ 라는 재구현 역시 불가능합니다. 핵심은 우리가 말, 단어만 통해서는 상대방의 생각을 절 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건 수학적으로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낮다는 것은 더 높은 인식의 해상도를 가진 사람은 단순한 언어의 조합에서 더 깊은 인식에 가닿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책 <독서의 기술>은 언어로 읽어낸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로 이해한 것이라며, 언어-언어의 해상도를 일치시키길 요구한다.) 그러나 언어화되지 않은 인식의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어쨌든 현재의 인공지능은 언어의 한계(논리적/기호적 규칙)를 넘어서 인간 뇌의 시각 겉질의 계층적 구조가 학습하는 방법을 본뜬 방식으로 빅데이터들을 딥러닝하고 있다고 한다. 적어도 시각에 한해서는 7의 침묵을 넘어서게 된다는. 조만간 우리의 뇌가 아이클라우드처럼 동기화 되는 날도 올까? (나는 오지 않는다고 올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서양 남 과학자들은 된다고 생각하고 계속 연구 할 거 같다. 그 전에 인류가 끝장 날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두 개의 정신이 사상으로 만날 수 있는 건가? 현 시점의 내가 만나고 싶은 정신은 두 명의 대머리 철학자 그리고 피아니스트(웃음).
이런 세상에서 인공지능보다 불완전한 언어로 감히 글을 쓰고 책을 읽겠다고 하고 있는 나는 뭔가. 그래도… 읽는다. 나는 이런 게 섹시하니까.
게다가 읽으면서 도달하고 싶은 세계가 생겼다. 그건 꼭 언어의 세계는 아니다. 음... 천재의 세계?ㅋㅋ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이다.
“(232) 유일한 방법은 진정한 목적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의 *천재성에 움츠러든다면, 부끄럽지 않게 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의 영혼을 성장시키고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나는 이 작품이 좋아. 그러니 남은 내 삶을 다 바쳐서라도 완전히 터득하고 말겠어.” 그 순간부터 그 작품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자발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다가 환상에서 깨어나면 그와의 관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진지해집니다. 몰입이나 인내가 없다면 중요한 어떤 것도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런 세 단계를 거쳤으면 이제 깨우침을 얻어 마지막 단계인 ‘통합’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당신이 사랑의 첫 순간에 느끼고 꿈꾸고 직관적으로 이해했던 모든 것이 실현됩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지식과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죠. 메타 지식으로 무장한 당신은 이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아름다움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연주에 나설 준비가 되었습니다.”
“(236) 나는 위대한 음악가가 아닙니다. *대단히 진지한 음악가일 뿐이에요.* 누가 위대한 음악가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나는 그들과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만큼 뛰어나지 않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있어요. 나는 내가 가진 재능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발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음악의 언어는 내가 전혀 모르는 영역이다. 난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음악이 주는 아름다움을 잘 감각하지 못한다. 몇년 전 이 책의 여백에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더란다. *내가 읽을 수 있는 능력으로 최대한 읽고 싶을 뿐. 나는 ‘대단히 진지한 독서가’가 되고 싶다.* 그랬다 그랬나보다. 이토록 오만한 나는 감히 넘보지 못할 천재들 이름을 냉장고에 써 붙여놨다. 천재성에 움츠러들지 않을테다. (내가 좀 눈이 높다.)
그들이 만들어낸 글씨를 읽다가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건 사상과 태도인데. 내가 다룰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가성비인 도구 언어(한글)를 통해서 나의 망가진 몸과 약해진 삶을 잘 다루고 싶어졌다. 시모어 선생님이 알려주셨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연습하라고. 자신을 구하라고. 그 때 부터였나. 읽고 쓰면서 더 깊게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의 얄팍한 인식을 조금 더 깊게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다시 돌아와서 <독서의 기술>이다.
“(11) 이것은 ‘책을 읽는 사람’을 위해 쓴 책이다. ... 즉, ‘읽음’으로써 지식을 얻고 이해를 깊이 하여, 훌륭한 독서가가 되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씌어진 책이다. (14) 필자의 의도를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완전히 이해하는 독자도 있다. 어느 정도로 잘 받아낼 수 있는가? 그것은 독자의 적극성과 숙련도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15) 자기의 이해를 초월하는 책을 읽을 때야말로, 읽는 이는 일체 외부로부터의 도움에 의지하지 말고 씌어진 글자만을 실마리로 하여 그 책과 맞붙지 않으면 안 된다. 읽는 이가 적극적으로 책에 작용하여 ‘얕은 이해에서 보다 깊은 이해로’ 읽는 이 자신을 끌어올려가는 것이다.”
국어 사전에 따르면 ‘이해(X)’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1.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X1) 2.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X2) 3.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X3)
언젠가 나는 더 이상은 인간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읽는다는 종류의 글을 썼었다. X3은 나의 특기였다. 세상에는 이해할 필요가 없는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좀 뒤늦게 알았다. 대체 왜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는 지 그 때의 나를 X2 하지 못하겠다. 그러니까, 나를 조금 더 좋아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X1이 필요했던 것 이다.
더는 이해할 필요가 없는 종류의 인간들을 갈라보기 위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졌고, 그러기 위해 책을 읽다 보니 책에서 또 훌륭한 인간들을 만난다. 물론 완벽하지 않은, 흠결이 많은,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지금의 나보다는 오래 살았다. 고통을 포함한 삶을 끌어안은 내가 가닿지 못한 어떤 이해의 영역에 가있는 사람들. 나는 세상이, 사람이, 너무 미웠던 시간들이 좀 지나간 걸까.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인간을 비워낸 자리에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면 더 깊게 이해해보마 생각하고 있다니. 미련하기도 하지.
묻는다. 나는 어떤 인식의 해상도를 가진 인간이 되고 싶은지.
나는 이제야 좀 알 것도 같다. 독서는 나만의 내밀한 경험이다.
그것은 언어로 된 읽기가 시작이겠지만, 언어가 다는 아니다.
<번역의 말들>에는 이런 글이 있다.
“(19) <개선문> 주인공인 독일인 망명자 라비크는 사랑하는 이탈리아인 단역배우 조앙의 임종을 지키며 그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그곳은 파리. 두 사람에게는 모두 타지였고 그전까지 둘은 프랑스어로 소통했다. 그런데 지금은 지상에서 그들이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이 담뿍 담긴 고백을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선사했다. 하지만 알아듣지는 못했다. 남자는 독일어로, 여자는 이탈리아 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진실한 표현은 모국어로만 가능하니까.”
감정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자주 말을 통해서 전해진다. 곁에 있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도, 말이 아닌 말도 전해진다. 타인의 경험과 이야기를 음악과 영화와 글씨로는 읽어내면서, 곁의 몸에서 일어나는 감정 반응을 지켜보거나 받아내는 것을 곤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곁의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나는 그들이 민감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쓰는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나는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상처에 반응하는 내 몸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몸을 잊고 싶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 머리보다는 내 몸이 훨씬 소중해. 나는 ‘몸의 말’ 혹은 ‘삶을 살아낸 몸’에 관심이 많다. 언어(논리구조)를 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언어의 물성과 몸과 말의 연결됨을 궁구한다.
고통이야 말로 정치적이다. 고통이야말로 보편적이지 않으며 해석된 감정이다. 권력에 고문 받은 지식인 청년 남성의 몸에 대한 이입/ 진짜로 남파된 간첩의 몸에 벌어진 고문에 대한 이입/ 젊은 여성의 육체를 노예화하고 강간을 공유하는 데 돈을 낸 수십만 명의 시선을 문제 삼는 동세대의 젊은 여성들의 이입/ 어떤 몸들은 어떤 고통에만 민감하다. 어떤 고통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하고, 어떤 고통은 해결할 수 없으므로 무력하라한다.
그것은 고통에 위계가 있다기보다는 고통에 언어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다른 몸을 산다. 그것은 소통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각기 다른 몸에서 나오는 각기 다른 언어들에 자리를 내어주는 가능성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러니까.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없는 고통들에 언어가 입혀져 말해진다면. 듣는 이들의 몸이 감응할 것이다. 언어의 해상도 혹은 고통에 대한 해석의 해상도. 그것들을 결국 언어로 높여야 하는 몫들.에 대해서 생각 중이다.
고통의 곁에 있고 싶어했었던 나의 몸은 말이 남긴 어떤 상처들과 미안함으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몸에 삶에 맞는 말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고. 읽는 나는 그런데 쓰는 나는 요즘 좀 고민스럽다. 나는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제대로 잘 말하고 있는 건가. 난 어디까지 오해되지 않은 채 이해될 수 있을까. 감히 인식의 채 10%도 안된다는 문장으로. 글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