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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ㅣ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을.
사실 이해하지 않은 적이 없다.
당신들을.
핵 노이해! 라고 말하고 쓰지만 이해하기 싫은 것이다. 그게 단순할 수록, 수가 다 보일 수록 더 이해 안하고 싶어진다. 아주 조금 노력해서 이해하게 되버리면 미워지지가 않으니까. 그래도 네가 이해해야 해. 그래도 우리가 이해해야 해. 이해하고 나면 좀 화가 누그러지니까. 그것은 살기 위해 매일 매일 투항하라는 주문이었는 데, 그래서 아주 많이 이해할 수 있어졌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읽는다고 말한다. 도통 교훈을 찾을 줄을 모르는 맹점을 가진 인간들이 쳐대는 사고들. 그것의 화학 작용들. 어떤 인간은 혁명을 위해 수도승처럼 살고 어떤 인간은 혁명과 상관없는 욕망의 포로로 살면서 제가 혁명을 하고 있다 믿는다. 수도승처럼 사는 인간이 혁명에 바치는 진심보다, 엉망진창으로 살면서도 혁명을 하고 싶어했던 인간의 진심이 더 간절하고 맹목적일 수 있다는 것을 난 이해한다. 굶주린 빈민가의 아이들을 위해서 펑펑 흘리는 그 눈물의 진심을 —그것은 진심이다— 그런 아이들을 위한 정당에 투표않는 하녀를 꾸짖으며 들고 있던 그릇을 집어던지는 그의 분노를— 그런 캐릭터를 모순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지, 모순적이지 않지. 사실 우린 모두 그래서. 가까이서 보면 비극 같아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옳고 그름 보다 우선하는 것은 당장에 작용하고 있는 미묘한 심리적 권력이라서.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잘 보이고 싶은 형 앞에서는 저런 말을 하고, 정부 앞에서는 다른 소리를 하고, 거들먹거려야하는 이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오만하게 거들먹거리고, 내 앞에선 누구보다 신사인 척, 그 모든 게 그다. 그리고 그 연기는 모두 진심이다. 그러므로 연기가 아니다.
현실에서 아이언 린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스무살의 나였다면 네이선과 별반 다르지 않게 그를 추앙했을 테지. 그의 난잡한 사생활을 알게 되면 충격을 먹었을 거고, 혁명을 넘어 인간 자체에 대해 회의 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채로운 인물.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만큼만 그를 보았을 것이고 빠졌을 것이고 매료되었을 것이며 실망했을 것이며 그가 내 세계에서 차지했던 비율 만큼 그만큼 아팠을 것이다.
경험치가 길고 넓었다면 비율은 작아지고, 경험치가 짧고 얕았다면 비율은 줄어들고. 아, 이건 또 너무 정량적인 평가인가? 그러나 뭐 그렇다는 소리다. 지금 만났으면 적당히 인맥관리하고 거리두기 하면서 지냈을 것 같다. 알아둬서 나쁠 것 없는 인물. 그리고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닥친다? 그거 아니라는 청원운동에 동의하는 싸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만… 솔직히 비웃을 것이다. 아니, 뭐 공산주의자가 저래. 공산주의한테 1도 도움안되는 데 무슨 공산주의노ㅋㅋㅋ 야 니는 하지마라 공산…ㅋㅋㅋ
나는 인간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삶에서 마주치는 한 개인을 책이라고 놓고 본다면, 나는 그 앎/책들이 나를 해칠 때까지 이해하곤 했던 사람이다. 나를 읽을 생각 없는 이들의 생각들을 다 읽고 이해한 후 미워하지 않았다. 그 넓은 이해력을 나 자신을 위해서 써야 했는 데…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나를 해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쓰면서 나 한테는 안썼다. 내가 착해서였다기 보단 편해지기 위해서 였다. 나를 편하게 만드는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그게.
그 때 내가 화내도 되었던 건 ‘그래도 그건 아니지!’라고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들. 사회가 세운 원칙들 상식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기준들. 그것은 어떤 윤리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일단은 그런 기준들을 만들어낼 시각이나 배움도 없었지만, 용감하지 못했다. 나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가 있고 난 이후다. 그리고 세상의 기준과 맞댄 뒤 나를 실현시킬 만큼의 배짱도 있어야 하겠지. 지금 그게 있냐면 아니다. (발명 중이라니까ㅋㅋㅋㅋ) 일단은 자아 확립 중임. (반칠십에도 자아는 만들어진다. -어느 성장서사 중독자의 외침-)
너무 많이 이해해버리는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낼 수 있는 근거는 ‘나 자신’이라기 보다는 내가 ‘그래야한다고 믿는’ 어떤 규범들이고 그렇게 된 것은 어떤 규범들이 나 자신을 통과하면서 대체로 평가의 기준으로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경험을 반복하면서 어떤 규범들은 이상하더라도 그냥 일단 내게는 맞는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내가 없었다. 내가 없는 존재를 움직이는 것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 그보단 고립감에 대한 두려움. 내가 없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대다수가 기준 삼는 것을 기준 삼는다. 그럼 내가 없다는 것을 좀 숨길 수 있다. 쉽게 다수에 세상의 기준에 동일시 하는 마음. 내가 없는 사람들. 내가 없는 나. 내가 없었던 나.
‘자존감이 낮다’,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굳건한 자아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없는 것은 미덕이 아닌 것 처럼 나쁘게 이야기되는 것이 오늘 날의 윤리 같지만, 나는 종종 ‘자아’라는 실체가 자명하게 있는 것 처럼 이야기되는 세상이 더 혼란스러웠다. 난 나의 언어랄게 없었고, 사랑받고 사랑할수 있다면 (그게 뭔지도 생각 안하면서. 그냥 달뜬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 내가 있고 없는 게 대순가… 내가 없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수 일 수 밖에 없고… 대체로 혼융되어 있는 그들은 따뜻하다. 난 삶에서 자아 발견이 그닥 필요 없는 종류의 사람들 손에서 길러졌고, 기도조차 할 줄 모르는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떠날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나는 따뜻하고 자아가 없는 사람.
난 자아를 잘 비우는 습관이 체화되어 있어서… 조금의 시간을 내고, 조금의 마음을 쓰면, 그런 노동을 하면 누구라도 거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기도 전에 당신들을 이해하기를,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은 받아들이기를 그냥 받아들이기를, 그런 역할에 익숙했던 난 이해한다. 그럴 수 있지, 관대하고 그래 뭔가 내가 모를 사연이 있을 것이다, 라고.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워하지 않고 싶으니까.
한 인간의 특징을 파악해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인과 관계를 추론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을 납득하게 되면 무엇이 남느냐고? 아무것도 안남는다. 그랬구나,그랬나보다. 다 이해할 수 있는 내가 좀 착한 것 같은 데? 하는 도덕적인 우월감이 좀 더 있을라나 모르겠는 데…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 그런 태도를 찐으로 가진 사람은 우월감을 들여다 보거나 느낄 새도 없다. 모두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한 노동이라서… 코페르니쿠스 적인 어떤 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계속 모든 에너지를 외부에 써야한다. 당연히 몸이 해쳐진다.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잊어야하고.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나는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어지면 나를 의심한다. 너는 지금 미워하지 않고 싶구나. 뭐가 미웠을까. 그게 너여서? 그에게서 네가 보여서?
지금의 나에게는 내가 있다. 물론 이건 내 몸이고… 나는 언제나 있었는 데… 그리고 나에겐… 언어가 있다. 나에게 내가 다룰 수 있는 어떤 언어가 있다는 것은… 나를 위해 내가 다듬어 온 어떤 글씨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음. 그 때부터의 이해는 다르다. (나, 지금 주말이라고 아침부터 또 너무 심각해지는 데…) 어쨌든 글을 읽고 쓰면서 ‘나’를 만들어 온, 가까스로 존재감을 스스로에게서 획득한, ‘나’는 더 이상 사랑하고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져 버렸다. (이 역시 건강하지 않은가… 갸웃.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더 살아보자.)
이제 난 세상의 규범과 기준 보다는 나 자신의 마음이 궁금하다. 타인을 대할 때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 어떤 사건에서는 아주 뜨끈한 분노를 느끼는 내 감정. 어떤 것은 분노의 대상이되고 어떤 것은 조롱의 대상이 되는 지에 대한 그 차이. 그건 나와 달라서… 또 어떤 부분은 너무 같기도 해서…
우리는 코넬이 나와 너무 닮아서 싫기도 하고, 칸트가 나와 너무 달라서 좋기도 하며, 이브 프레임은 내게 하나도 치명적이지 않아서 분노스럽지 않고, 아이언 린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여성으로서는 분노하며, 그를 비열하게 공격한 여자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협조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입체적인… 살아서 숨쉬는… 자기들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다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자아가 있거나 없거나 오로지 자아만 있는… 좋은 소설을 읽으면서 살아서 펄떡이는 인간들을 만난 다는 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구체화 시키는 방법이고(나는 어디에 찔리는가, 무엇이 싫은가), 동시에 구체적이지 않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나라는 (어디까지 변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용납이 안되는가) 인간을 아는 것이며.
어쩌면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하는 방법 밖에 몰랐던 (내가 얼마나 모지리였냐면 심지어 일베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너무 쉽게 이해되는 종류의 인간들… 권력 앞에서 자신을 속이거나 연기하는 방식으로 양육되거나 살아오지 않아 강약약강 만이 인간사를 헤쳐나가는 딱 하나의 스킬인 쩝쩝거리면서 먹어도 되는 멍청이들… 을 싫어한다. 애들아, 연기를 좀 해. 입체적으로 살아라. 그럼 문학도 즐길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아아, 이 말은 정말 쓰지 않고 싶은 데… 나를 짠해하지 않는… (난 가끔 내가 너무 짠한데 나를 짠해하는 내가 넘 싫다… 진짜 짠하니까…) 방법이 될지도. 그들을 이해할지 말지 ‘나’라는 한정적인 세상과 자원이 허락하는 한에서. 그 가늠을 시험해 보기.
이건 책 이야기고 현실에서… 가끔 공들여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어떤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은 동기가 아니다. 음… 어쨌든 오늘의 나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은 어떤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거나 곁에 남는데, 절반의 진실, 절반의 거짓. %나 함량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 관계가 만들어졌고 이어져왔다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대충 절반 절반이지 않았을까.
한 때는 미워하고 싶어서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이별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사실 노력할 필요도 없이 다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안든다는 표현이 더 맞다. 내 쪽에서 먼저 끊어내는 경우는 좀체 없었는 데, 그러다 내 인생 사라질 위기에 처해가지고… 삼십대 이후부턴… 인연 끊기 열심히 연습… 이젠 아주 능수 능란해져서 확장패치로 딸려온 끊어진 거 암시랑토 않게 이어 붙이기도 잘함 ㅋㅋㅋ 암튼 내가 좀 살만한 건지 맘이 여유로와 진 건지… 사람들에 대해서… 내게 남은 것들과 내가 받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 데…. 그러면, (내가 준 것은 알 수 없다) 어떤 고마움과 안도감이 남아. 아쉽고 슬픈 것은 관계는 끝났기 때문에. 이젠 더 바랄 수 없다는 것인 거고. 단념. 언제나 단념 앞에서. 난 좀 멋지지. 아주 깨끗하게 포기할 줄 안다.
언니 생각 얼마나 많이 나는데요, 제 청춘의 한 페이지에 언니가 있어요. 언니, 이제 우리 다 돈버는 데 계하면 안되요? 라고 말하는 후배들을 3년 만에 만나러 나간다. (치밀하게 피해왔는 데 이제 코로나 끝남ㅋㅋㅋ 이런 식으로 연락오고 만나야 할 사람이… … ) 안돼. 계 안돼. 자발적 의사가 생긴 사람이 주도적으로 주도해. 그리고 난 절/대/안/해.
은둔자인 척 하지만 난 인기가 많다ㅋㅋㅋㅋ 한 때 관계 중독자였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바로 다시 중독 모드(이제 출근도 할 필요가 없으니 아주 흥청망청 살 수 있다) 전환 가능한 데… 음, 난 나랑 노는 게 더 재밌어서…ㅋㅋㅋㅋ 일주일에 한 번 사람 만나는 거 너무 인구 밀도 높다. (그렇다. 이것은 은둔자의 인맥 자랑이다) 어쨌든 얘들은… 친구라고 하긴 좀 그렇고 후배들인 데… 근데 얘들은 왜 날 좋아하는 걸까. 왜 관계를 끝내고 싶어하지 않는 거지? 아, 나도 별로 끝낼 생각이 없구나? 근데…ㅋㅋㅋㅋ 뭘까… 목적이나 의도없이도 쭉 이어지는 관계… 일상적이지 않지만 한 번씩은 모일 수 있는 관계… 그 관계와 이제는 완전이 딱 끝나버린 절단 면이 보이는 관계들의 차이… 그것들을 대했던 내 진지함의 차이… 오늘 만나면 물어봐야지. 니들은 대체 왜 나랑 놀고 싶어하니…?
오늘의 일기를 마무리 짓자.
좋은 소설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더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지는 그 지점.
그것이 나를 더 많이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나는 아이언린을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이해하기 싫은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