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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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있다.
당신을.
사실 이해하지 않은 적이 없다.
당신들을.

핵 노이해! 라고 말하고 쓰지만 이해하기 싫은 것이다. 그게 단순할 수록, 수가 다 보일 수록 더 이해 안하고 싶어진다. 아주 조금 노력해서 이해하게 되버리면 미워지지가 않으니까. 그래도 네가 이해해야 해. 그래도 우리가 이해해야 해. 이해하고 나면 좀 화가 누그러지니까. 그것은 살기 위해 매일 매일 투항하라는 주문이었는 데, 그래서 아주 많이 이해할 수 있어졌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읽는다고 말한다. 도통 교훈을 찾을 줄을 모르는 맹점을 가진 인간들이 쳐대는 사고들. 그것의 화학 작용들. 어떤 인간은 혁명을 위해 수도승처럼 살고 어떤 인간은 혁명과 상관없는 욕망의 포로로 살면서 제가 혁명을 하고 있다 믿는다. 수도승처럼 사는 인간이 혁명에 바치는 진심보다, 엉망진창으로 살면서도 혁명을 하고 싶어했던 인간의 진심이 더 간절하고 맹목적일 수 있다는 것을 난 이해한다. 굶주린 빈민가의 아이들을 위해서 펑펑 흘리는 그 눈물의 진심을 —그것은 진심이다— 그런 아이들을 위한 정당에 투표않는 하녀를 꾸짖으며 들고 있던 그릇을 집어던지는 그의 분노를— 그런 캐릭터를 모순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지, 모순적이지 않지. 사실 우린 모두 그래서. 가까이서 보면 비극 같아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옳고 그름 보다 우선하는 것은 당장에 작용하고 있는 미묘한 심리적 권력이라서.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잘 보이고 싶은 형 앞에서는 저런 말을 하고, 정부 앞에서는 다른 소리를 하고, 거들먹거려야하는 이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오만하게 거들먹거리고, 내 앞에선 누구보다 신사인 척, 그 모든 게 그다. 그리고 그 연기는 모두 진심이다. 그러므로 연기가 아니다.

현실에서 아이언 린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스무살의 나였다면 네이선과 별반 다르지 않게 그를 추앙했을 테지. 그의 난잡한 사생활을 알게 되면 충격을 먹었을 거고, 혁명을 넘어 인간 자체에 대해 회의 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채로운 인물.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만큼만 그를 보았을 것이고 빠졌을 것이고 매료되었을 것이며 실망했을 것이며 그가 내 세계에서 차지했던 비율 만큼 그만큼 아팠을 것이다.

경험치가 길고 넓었다면 비율은 작아지고, 경험치가 짧고 얕았다면 비율은 줄어들고. 아, 이건 또 너무 정량적인 평가인가? 그러나 뭐 그렇다는 소리다. 지금 만났으면 적당히 인맥관리하고 거리두기 하면서 지냈을 것 같다. 알아둬서 나쁠 것 없는 인물. 그리고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닥친다? 그거 아니라는 청원운동에 동의하는 싸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만… 솔직히 비웃을 것이다. 아니, 뭐 공산주의자가 저래. 공산주의한테 1도 도움안되는 데 무슨 공산주의노ㅋㅋㅋ 야 니는 하지마라 공산…ㅋㅋㅋ

나는 인간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삶에서 마주치는 한 개인을 책이라고 놓고 본다면, 나는 그 앎/책들이 나를 해칠 때까지 이해하곤 했던 사람이다. 나를 읽을 생각 없는 이들의 생각들을 다 읽고 이해한 후 미워하지 않았다. 그 넓은 이해력을 나 자신을 위해서 써야 했는 데…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나를 해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쓰면서 나 한테는 안썼다. 내가 착해서였다기 보단 편해지기 위해서 였다. 나를 편하게 만드는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그게.

그 때 내가 화내도 되었던 건 ‘그래도 그건 아니지!’라고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들. 사회가 세운 원칙들 상식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기준들. 그것은 어떤 윤리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일단은 그런 기준들을 만들어낼 시각이나 배움도 없었지만, 용감하지 못했다. 나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가 있고 난 이후다. 그리고 세상의 기준과 맞댄 뒤 나를 실현시킬 만큼의 배짱도 있어야 하겠지. 지금 그게 있냐면 아니다. (발명 중이라니까ㅋㅋㅋㅋ) 일단은 자아 확립 중임. (반칠십에도 자아는 만들어진다. -어느 성장서사 중독자의 외침-)

너무 많이 이해해버리는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낼 수 있는 근거는 ‘나 자신’이라기 보다는 내가 ‘그래야한다고 믿는’ 어떤 규범들이고 그렇게 된 것은 어떤 규범들이 나 자신을 통과하면서 대체로 평가의 기준으로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경험을 반복하면서 어떤 규범들은 이상하더라도 그냥 일단 내게는 맞는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내가 없었다. 내가 없는 존재를 움직이는 것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 그보단 고립감에 대한 두려움. 내가 없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대다수가 기준 삼는 것을 기준 삼는다. 그럼 내가 없다는 것을 좀 숨길 수 있다. 쉽게 다수에 세상의 기준에 동일시 하는 마음. 내가 없는 사람들. 내가 없는 나. 내가 없었던 나.

‘자존감이 낮다’,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굳건한 자아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없는 것은 미덕이 아닌 것 처럼 나쁘게 이야기되는 것이 오늘 날의 윤리 같지만, 나는 종종 ‘자아’라는 실체가 자명하게 있는 것 처럼 이야기되는 세상이 더 혼란스러웠다. 난 나의 언어랄게 없었고, 사랑받고 사랑할수 있다면 (그게 뭔지도 생각 안하면서. 그냥 달뜬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 내가 있고 없는 게 대순가… 내가 없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수 일 수 밖에 없고… 대체로 혼융되어 있는 그들은 따뜻하다. 난 삶에서 자아 발견이 그닥 필요 없는 종류의 사람들 손에서 길러졌고, 기도조차 할 줄 모르는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떠날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나는 따뜻하고 자아가 없는 사람.

난 자아를 잘 비우는 습관이 체화되어 있어서… 조금의 시간을 내고, 조금의 마음을 쓰면, 그런 노동을 하면 누구라도 거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기도 전에 당신들을 이해하기를,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은 받아들이기를 그냥 받아들이기를, 그런 역할에 익숙했던 난 이해한다. 그럴 수 있지, 관대하고 그래 뭔가 내가 모를 사연이 있을 것이다, 라고.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워하지 않고 싶으니까.

한 인간의 특징을 파악해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인과 관계를 추론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을 납득하게 되면 무엇이 남느냐고? 아무것도 안남는다. 그랬구나,그랬나보다. 다 이해할 수 있는 내가 좀 착한 것 같은 데? 하는 도덕적인 우월감이 좀 더 있을라나 모르겠는 데…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 그런 태도를 찐으로 가진 사람은 우월감을 들여다 보거나 느낄 새도 없다. 모두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한 노동이라서… 코페르니쿠스 적인 어떤 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계속 모든 에너지를 외부에 써야한다. 당연히 몸이 해쳐진다.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잊어야하고.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나는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어지면 나를 의심한다. 너는 지금 미워하지 않고 싶구나. 뭐가 미웠을까. 그게 너여서? 그에게서 네가 보여서?

지금의 나에게는 내가 있다. 물론 이건 내 몸이고… 나는 언제나 있었는 데… 그리고 나에겐… 언어가 있다. 나에게 내가 다룰 수 있는 어떤 언어가 있다는 것은… 나를 위해 내가 다듬어 온 어떤 글씨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음. 그 때부터의 이해는 다르다. (나, 지금 주말이라고 아침부터 또 너무 심각해지는 데…) 어쨌든 글을 읽고 쓰면서 ‘나’를 만들어 온, 가까스로 존재감을 스스로에게서 획득한, ‘나’는 더 이상 사랑하고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져 버렸다. (이 역시 건강하지 않은가… 갸웃.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더 살아보자.)

이제 난 세상의 규범과 기준 보다는 나 자신의 마음이 궁금하다. 타인을 대할 때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 어떤 사건에서는 아주 뜨끈한 분노를 느끼는 내 감정. 어떤 것은 분노의 대상이되고 어떤 것은 조롱의 대상이 되는 지에 대한 그 차이. 그건 나와 달라서… 또 어떤 부분은 너무 같기도 해서…

우리는 코넬이 나와 너무 닮아서 싫기도 하고, 칸트가 나와 너무 달라서 좋기도 하며, 이브 프레임은 내게 하나도 치명적이지 않아서 분노스럽지 않고, 아이언 린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여성으로서는 분노하며, 그를 비열하게 공격한 여자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협조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입체적인… 살아서 숨쉬는… 자기들의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다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자아가 있거나 없거나 오로지 자아만 있는… 좋은 소설을 읽으면서 살아서 펄떡이는 인간들을 만난 다는 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구체화 시키는 방법이고(나는 어디에 찔리는가, 무엇이 싫은가), 동시에 구체적이지 않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나라는 (어디까지 변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용납이 안되는가) 인간을 아는 것이며.

어쩌면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하는 방법 밖에 몰랐던 (내가 얼마나 모지리였냐면 심지어 일베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너무 쉽게 이해되는 종류의 인간들… 권력 앞에서 자신을 속이거나 연기하는 방식으로 양육되거나 살아오지 않아 강약약강 만이 인간사를 헤쳐나가는 딱 하나의 스킬인 쩝쩝거리면서 먹어도 되는 멍청이들… 을 싫어한다. 애들아, 연기를 좀 해. 입체적으로 살아라. 그럼 문학도 즐길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아아, 이 말은 정말 쓰지 않고 싶은 데… 나를 짠해하지 않는… (난 가끔 내가 너무 짠한데 나를 짠해하는 내가 넘 싫다… 진짜 짠하니까…) 방법이 될지도. 그들을 이해할지 말지 ‘나’라는 한정적인 세상과 자원이 허락하는 한에서. 그 가늠을 시험해 보기.

이건 책 이야기고 현실에서… 가끔 공들여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어떤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은 동기가 아니다. 음… 어쨌든 오늘의 나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은 어떤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거나 곁에 남는데, 절반의 진실, 절반의 거짓. %나 함량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 관계가 만들어졌고 이어져왔다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대충 절반 절반이지 않았을까. 


한 때는 미워하고 싶어서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이별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사실 노력할 필요도 없이 다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안든다는 표현이 더 맞다. 내 쪽에서 먼저 끊어내는 경우는 좀체 없었는 데, 그러다 내 인생 사라질 위기에 처해가지고… 삼십대 이후부턴… 인연 끊기 열심히 연습… 이젠 아주 능수 능란해져서 확장패치로 딸려온 끊어진 거 암시랑토 않게 이어 붙이기도 잘함 ㅋㅋㅋ 암튼 내가 좀 살만한 건지 맘이 여유로와 진 건지… 사람들에 대해서… 내게 남은 것들과 내가 받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 데…. 그러면, (내가 준 것은 알 수 없다) 어떤 고마움과 안도감이 남아. 아쉽고 슬픈 것은 관계는 끝났기 때문에. 이젠 더 바랄 수 없다는 것인 거고. 단념. 언제나 단념 앞에서. 난 좀 멋지지. 아주 깨끗하게 포기할 줄 안다.

언니 생각 얼마나 많이 나는데요, 제 청춘의 한 페이지에 언니가 있어요. 언니, 이제 우리 다 돈버는 데 계하면 안되요? 라고 말하는 후배들을 3년 만에 만나러 나간다. (치밀하게 피해왔는 데 이제 코로나 끝남ㅋㅋㅋ 이런 식으로 연락오고 만나야 할 사람이… … ) 안돼. 계 안돼. 자발적 의사가 생긴 사람이 주도적으로 주도해. 그리고 난 절/대/안/해.

은둔자인 척 하지만 난 인기가 많다ㅋㅋㅋㅋ 한 때 관계 중독자였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바로 다시 중독 모드(이제 출근도 할 필요가 없으니 아주 흥청망청 살 수 있다) 전환 가능한 데… 음, 난 나랑 노는 게 더 재밌어서…ㅋㅋㅋㅋ 일주일에 한 번 사람 만나는 거 너무 인구 밀도 높다. (그렇다. 이것은 은둔자의 인맥 자랑이다) 어쨌든 얘들은… 친구라고 하긴 좀 그렇고 후배들인 데… 근데 얘들은 왜 날 좋아하는 걸까. 왜 관계를 끝내고 싶어하지 않는 거지? 아, 나도 별로 끝낼 생각이 없구나? 근데…ㅋㅋㅋㅋ 뭘까… 목적이나 의도없이도 쭉 이어지는 관계… 일상적이지 않지만 한 번씩은 모일 수 있는 관계… 그 관계와 이제는 완전이 딱 끝나버린 절단 면이 보이는 관계들의 차이… 그것들을 대했던 내 진지함의 차이… 오늘 만나면 물어봐야지. 니들은 대체 왜 나랑 놀고 싶어하니…?

오늘의 일기를 마무리 짓자.
좋은 소설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더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지는 그 지점.
그것이 나를 더 많이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나는 아이언린을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이해하기 싫은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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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런 문장은 섹시하다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01-19 01:12 
    이를 테면 이런 문장은 섹시하다. 놀라지 마시라. <독서의 기술>이다. “(94)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가 모호하다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혹은 쓰는 이와 읽는 이가 공유하는 것은 단순한 단어에 불과한 것이지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려면 양자가 같은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쓰는 이가 단어로 나타내고 있는 의미를 읽는 이가 바르게 이해하여야만 비로소 쓰는 이와 읽는 이는 하
 
 
라파엘 2022-07-0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둔자인 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인기쟁이 쟝님~!!! 알라딘에도 쟝님 좋아하는 사람이 수두룩함 😆

공쟝쟝 2022-07-09 12:10   좋아요 1 | URL
엄청까진 아닙니다 ㅋㅋㅋㅋ 대하기에 따라 재밌는 대화가 가능한 상대죠, 전 ㅋㅋㅋㅋ (그러나 관심없거나 너무 세속적인 주제들에 대해선 입다물어버림 ㅋㅋㅋ)

yamoo 2022-07-09 13:01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ㅎ

감은빛 2022-07-09 1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유는 모르지만 저도 인기가 좀 많습니...... 흠흠.

일베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니, 의외네요.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엄청난 노동이라는 건, 무조건 동의할 수 밖에 없네요.
저는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적당히 유지할 수준의 이해는 대체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들어가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긍정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 겉으로는 아주 친한 관계로 지내는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그들을 모두 잘 이해하고 지내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어요.
친밀감의 정도에 따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사람들이 남죠.
저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을 깊이 따지면 부부관계나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요.
평생 아버지나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여겼던 아이들 엄마도 그랬으니까요.

현재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계신 공쟝쟝님은 좀 멋져 보여요. 저도 최근에는 에너지를 외부에 쏟지 않고 나 자신에게로 돌리려고 노력 중입니다. 워낙 그렇게 살아와서 쉽지는 않더라구요.

공쟝쟝 2022-07-10 02:07   좋아요 2 | URL
그것은 이해하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요?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을 조건없이 상황과 까닭모두 합쳐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습니다. 나와 공모하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요. 나는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맹점은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나 자신에게 작동하죠.
쉽지않겠지만 조금 더 노력해보시길 바랍니다. 노력 안하셔도 상관은 없죠… 그러나 나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복잡하게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라는 말의 뒤에 숨지않기를 바랍니다. 지배하기 위한 이해와 나의 이해관계까지 포함한 이해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죠.

감은빛 2022-07-10 12:54   좋아요 2 | URL
글쎄요. 공쟝쟝님 서재에서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관점이 다르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어요.

현재 시점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대략 7명 정도 있어요. 그냥 갑자기 전화해서 급한 일이 생겼다고 돈 좀 빌려달라고 해도 빌려주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을 이해하고 있냐고 물으면 아니라는 답이 나와요. 그정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구요.

일단 맹점이 나 자신이라는 말씀에는 무조건 동의하고, 이해관계까지 포함한 이해는 다르다는 말씀도 동의합니다.

다만 복잡하게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라는 말 뒤에 숨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씀에는 조금 동의하기 어렵네요. 한참을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과연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표층과 심층을 나눈다고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은데, 겉으로는 대체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속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공쟝쟝 2022-07-10 13:02   좋아요 1 | URL
네, 다른 말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꼰대들을 지적하기 위해 안다, 이해한다는 것의 오만함을 경계하기 위한 내용으로 상투어처럼 나는 타인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라는 말들이 쓰이잖아요. 거기까지 이해해본 사람들이, 그래 인간, 이해할 수 없지, (냉소) 이렇게 마음을 접는 구실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지않을까 그리고 저는 그 사람이 아닌 이상 당연히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벽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영화나 문학이 있는 대화와 이야기가 있는 이유겠지요?) 그 이해를 바탕으로 어떤 행동을 할건지는 다르지만요.

공쟝쟝 2022-07-10 22:04   좋아요 2 | URL
제 페이퍼에서 논쟁하는 것 저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지(1.니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저를 가르치기 위해서 물어보는 건지(2.네 관점이 틀렸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의도를 파악하고 2번의 경우는 굳이 내가 쓴 내 페이퍼에서 나를 가르치려드는 의도가 괘씸하여 (제가 덜 배운 젊은 여자라서 그런 걸까요? ㅋㅋㅋ) 상대하지 않습니다. 종종 좋은 질문들은 저를 더 사색하게 하기 때문에 어떤 논쟁은 즐겁고 좋습니다.

일단 제 독후감의 1독자는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저만 알아보면 되는 비약들이 좀 즐비한 편이고, 기왕이면 저와 같은 곤란을 겪는 여자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쓰긴 합니다. (그분들은 제 넘나드는 비약을 이해하기도 전에 감응할 수 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좀 없어보이긴 하지만… ㅋㅋㅋ 건강한 논쟁을 위해 이 독후감에 대해 좀 친절하게 해설을 해야겠네요.

1. 이 글은 나의 ‘읽기’를 주제로 쓴 글입니다. 자아를 없애고 약자의 포지션에서 더 많이 이해하기를 강요받았던 시절의 ‘나’를 생각하며 썼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아온 편이라 이른바 원문에 충실하게 읽기, 저자의 의도를 의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읽기(역지사지?), 그런식으로 독서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판적인 사고를 훈련하기 위해서 독서를 한다고도 합니다. (실제로 공산주의… 이 책의 화자 중 하나인 머리 선생님은 그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읽는 주체인 ‘나’가 있어야겠죠. 저의 경우 독서 초보라 인문학 서적에 비판적 사고를 하면서 읽지는 못하지만 소설의 경우에는 그걸 하면서 읽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 찔리는 지 (이해하지만, 이해라는 노동을 하기 싫어지는 지점)를 독서하면서 훈련하면서 가까스로 ‘나’를 찾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 독후감에 썼네요. (소설은 인간을 보여주니까요)
여담이지만 언제부턴가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 소설의 도구로 쓰일 때, 작위적일 때, 저는 그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느낌이 안드는 듯 합니다. 이 소설의 경우에는 모든 인물들이 그럴듯 했기 때문에, 각자의 인물들이 좋고 싫음과 상관 없이 저는 이해할 수 있었고, 현실이라면 싫어했을 인물마저 ‘이해’가 되어 ‘싫지 않아’져 버렸으므로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감은빛님은 그런 제 읽기(어쩌면 이해하기)에 인간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건 오만 아닌가? 나는 타자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글쎄, 그게 맞지만 가까운 지인이든 먼 타인이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면서 폭을 좁히는 것은 여전히 태도로서 유효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요. 다만, 어쩌면 여성주의적인 관점이 섞여있을 지도 모르는 데… 그런 ‘이해’가 어느 한쪽 일방의 이해하기 위한 노동 (참으라는 노동)이라면 더는 이해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싫다’는 거죠.

물론, 완벽에 가까운 이해에 도달하기는 신이 아닌 이상 어렵겠지요. 그러나 그 위치에 나를 세워보려는 노력으로서의 ‘이해’는 훈련이고 노동이고 연습이며 미덕으로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미덕입니다. 어떤 종류의 (주로 여성들) 사람들에게는 미덕이 아닐 수도 있고요. 그래서 타인을 이해하고 있다고 단정짓지 말라… 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공감되는 저변에는 납작하게 몰이해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있겠지만 ‘이해하기 싫은’ 무의식이 들어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 입니다. 더 섬세한 이해를 촉구하는 것과 어느 일방의 이해를 강요하는 것 사이에 각자의 위치와 삶의 경험이 있는 거고. 비판적 읽기든, 공감적 읽기든 확실히 소설 읽기는 좋은 훈련법이라는 생각였습니다.

이해... 어디까지가 싫은 지 어디까지가 감당 가능 한지는 각자들이 스로에게 물어보면서 노력해야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에겐 어떤 사람들을 더는 이해하지 않는 것(주로 서구/남성/엘리트 ?)이 저를 발견하고 지키고 다듬어 나가기 위해서 더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미국 남자가 쓴 이 소설이 좋았으므로 제 모순이 참으로 수치스럽네요ㅋㅋㅋ

감은빛 2022-07-11 22:52   좋아요 1 | URL
하, 북플 앱에서 긴 댓글 쓰는 일은 어렵군요. 한참 쓰다가 두 번이나 내용을 날렸어요. 이게 글을 날리고 나니까 다시 처음에 하려고 했던 말을 쓰기가 쉽지 않네요. ㅎㅎ

저는 처음 댓글을 달 때, 공쟝쟝님께 ‘오만 아닌가?‘ 라고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요. 순전히 제 관점에서 저는 남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는 말을 남기고 싶은 의도였어요.

이 글에 쓰신 말씀과 제게 남긴 답글들 모두 대부분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여전히 ‘이해‘ 라는 단어를 좀 더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제게 하신 말씀처럼 단순히 제가 게을러서 노력을 덜 했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암튼 두 번이나 쓰다가 날려서 원래 의도보다는 조금 느낌이 달라졌는데, 이렇게 여러 차례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좋네요. 혹시 제 댓글 때문에 기분이 나쁘셨거나 귀찮게 여기시지 않으셨다면 말이죠.

공쟝쟝 2022-07-12 00:32   좋아요 0 | URL
귀찮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해시키는 노동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공들여썼습니다. 아마 부족하실 겁니다. 세상은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심층적인 이해라는 노동을 시키지 않거든요. 자아를 없애고 조절하는 노동인 이해라는 영역은 특정 성별이 오랫동안 감내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 더 많이 발달했다고 생각해요. 사고의 습관과 체화자체가 달라요 (전 메일바디는 그래서 안된다고 표현하죠 ㅋㅋㅋ) 단 사회생활을 많이한 남자들의 경우엔 경험치가 좀 더 많겠죠. 군대 이야기 싫지만 군대가 영원히 지속될 때 선임을 사사건건 미워하는 것보단 스타일 위치 처한 곤란한 상황등을 이해해버리고 군대의 구조도 다 깨닫고 나면 안미워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게 낫겠죠? 그걸 계속 한다고 해서 후임에게 자아가 없진 않을 텐데, 선임은 모를 테고요. 요컨대 ‘위치’를 제거한 말 그대로의 낱말 ‘이해’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댓글은. (표층, 심층이 아니라 위치와 상황으로 나누셨어야 했을 듯 합니다) 제 글이 혼탁했기 때문이겠지만 글을 누군가를 선명하게 설득할 목적으로 쓰진 않았습니다.
감은빛님이 게을렀다기 보단 할 필요없으셨을 겁니다. 더 사랑하고/받고 싶다면 더 인정을 구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노력하셔야겠죠^^ 일부 젊은 여성들이 한남을 싫어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노력안하고 거저 사랑받고 싶어하는 지점ㅋ 노력이 뭔지 전혀 모르는 지점. 우리는 얼굴을 깎고 거식증에 걸리고 매일 화장하는 노동을 하는 데 말이죠 ㅋㅋㅋ

난티나무 2022-07-09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탄한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감탄한다!!!! 👍👍😍😍😍

공쟝쟝 2022-07-10 02:08   좋아요 1 | URL
😩😩😩😩 또 천재 돋았나? ㅋㅋㅋㅋ

청아 2022-07-09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쟝쟝님만큼 읽어내고 이해하고 싶어요. 쟝쟝님 글을
읽으며 많이들 그런 생각할꺼예요. 고뇌조차 너무 매력적인, 스스로 발명중인 철학자 쟝쟝 ^^

저는 자신을 이해하는 만큼만 타인을 이해한다고 생각해요. 요즘들어 더 그래요. 나에 대한 이해와 타인에 대한 이해가 과거에는 다른 수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나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런 면에서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야겠죠?!

공쟝쟝 2022-07-10 02:20   좋아요 2 | URL
자신을 이해한 만큼 타인을 이해한다. 저는 다른 문장 추가할게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해도 깊은 이해로 삶으로 타인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쓸 수 있는 사람은 씁시다. 쓰지 않으면 내 이해는 나만의 이해로 멈춥니다. 적어도 저는 읽겠습니다, 미미님의 글을!

바람돌이 2022-07-09 1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왜 읽느냐? 음 저는 제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머릿속이 보이는게 너무 신기해요. 현실에서 진짜 이해 안가는 인간들의 극단이 소설속에서는 많이 나오잖아요. 아 얘들은 이렇게 사고하는구나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그 사고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현실에서 그 비슷한 걸 만났을 때 분노수치가 좀 줄어드는 효과가 있더라구요. ㅎㅎ

후배들 만나면 물어보지 마세요. 그냥 좋으니까예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데도 계속 만나는건 공쟝쟝님을 만나는게 좋으니까요. 그 맘 하나만으로 이어지는 관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멋지잖아요. 저도 그런 관계 있걸랑요 ^^

공쟝쟝 2022-07-10 02: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바람돌이님 댓글은 이제 읽어버려서 ㅋㅋㅋㅋㅋ 그러더라고요ㅋㅋㅋ 확인할 의도로 물어봤는데 ㅋㅋㅋㅋ 같은 대답을 들어바렸습니닼ㅋㅋㅋㅋ 니들 왜 날 좋아하냨ㅋㅋㅋㅋ 뭔 소리냐 좋아하는데 왜가 어딨냨ㅋㅋㅋㅋ
나: 난 있는데? ㅋㅋㅋㅋ (구체적으로 설명)
애들 : 그래서 언니가 좋음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