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운동을 다녀왔고, 다락방님 페이퍼를 읽었으니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실은 자가 격리 이후 부터 후유증으로 고생한 열흘 정도는 정말 엉망이었다. 37살의 버지니아 울프는 ‘쉰살의 버지니아 울프를 위해’일기를 쓴다. 나도, 나도요, 나는 5~10년뒤의 나였는 데.. 좀 더 시기를 넓혀볼까. 쉰 살은 너무 까마득 한데…
<울프 일기>. 올해 초에 천천히 다 읽겠다고 해 놓고 책장 안에서 낡아가고 있었다. 하루에 조금씩 다시 읽어 보자 하는 중인데 역시 좋다. ‘나만을 위해 글을 쓰는 습관은 글쓰기의 좋은 훈련이 된다는 신념’,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그러나 산만함은 곧 지저분 함이 된다’
- 작가들 다 우울증 환자였어, 글 써서 다 산 거야.
라는 말을 친구가 해줬는데, 그 말을 떠올리면 따끈한 토마토 수프 마신 것처럼 몸이 따뜻해진다. 사람들은 울프의 비극적 죽음을 이야기 하지만 나는 그가 글을 썼기 때문에, 59세까지 살았다고 생각한다. 고흐도 그렇다. 그의 그림은 광기가 아니라 치유의 노력이라는 걸 조금 알아볼 수 있다.
(분수에 맞지 않게) 똑똑한 여자는 불행하다, 미쳐버린다는 사회적 통념은 너무 세서… 너 그만 생각해, 너 그만 읽어, 너 그만 파고들어 라고 하는 나를 위한다는 말들이… 나를 위한 건 줄 알았는 데… 완전 뒤바뀐 진술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똑똑한 건 사실이다.) 나는 불행해지거나 미쳐버리 않기 위해서 읽고, 쓰고, 생각하고, 파고 들었던 것이다. 5년 전의 내 일기는 이렇게 읽다가 미치거나 사회 부적응자가 될까 걱정한다. 정말 너무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네, 나는. 피식. 병든 것들에 적응하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아팠던 거다. 아프니까 글씨를 읽고 쓰기 시작한거고. 확실해졌다. 스물 스물 기미를 보이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시간이었고, 오로지 쓰는 것만 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그것은 거기 머물러 있기 위함이 아니라 빠져나오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안전한 사람들이 보였다. 참 다행이었다.
쉰 살의 공쟝쟝을 위해 투자가 아니라 일기를 쓰자.
버지니아 울프보다 오래 오래 살아서 더 많이 쓰자.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지나친 아첨과, 가난한 사람들을 힘들이지 않고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한다거나, 지도한다거나, 자기 의지를 강요하는 따위의 행동에 내 반감은 더욱더 커진다. - P24
레너드는 이 책에 담긴 철학이 매우 우울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제 레너드가 했던 말에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인간 전체를 바라보고,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쓸 때, 어떻게 우울해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희망을 잃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참 묘한 말이 되었다. 그리고 상식적인 해답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아직 대신할 만한 새로운 해답이 없는 채 낡은 해답을 버리는 과정은 슬픈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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