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읽은 철학 서적은 플라톤의 [국가]였다. 그리고 그 [국가]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이론'이었다. 플라톤은 보통 인간은 동굴에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혀서 동굴의 벽 쪽만 보도록 되어 있는 죄수와 같은 상태와 같다고 말한다. 죄수는 동굴 입구에서 비춰오는 태양에 의해서 만들어진 실제 물체의 허상을 동굴 벽을 통해 볼 뿐이다. 그러던 중에 한 죄수가 우연히 결박을 풀고 동굴 입구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태양을 보고, 실제 물체들을 본다. 그는 순간 밝은 빛에 정신을 잃지만, 곧 자신이 그동안 실제라고 믿었던 것은 허상이며, 자신이 지금 보는 것이 참다운 세계임을 깨닫게 된다.

그 후 근대철학을 접하면서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도 플라톤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지식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식이란 것이 확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체계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의심의 극단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한 가지 가정을 한다.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전능한 악마가 있어서, 모든 허상을 우리의 감각과 마주하게 한다. 결국 우리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허상들을 접하지만, 악마의 속임에 의해서 그들이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지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결국 실제로 존재한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여기서 데카르트는 악마가 모든 것을 속이더라도 속는 나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리고 근대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도출해 낸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비록 시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서양 철학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와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며, 자신의 주체적인 자각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 낸다. 특히 데카르트의 '코키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에서 근대철학, 근대성이 시작된다. 결국 근대철학이란 사회의 대다수가 인정하는 권위나 가치, 사상들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던 개인이, 그것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하며,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구성원들 간의 자유로운 연대가 가능해진다. [근대성과 자아의식]의 저자인 차인석 교수는 이것을 '자아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아의식이야 말로 근대성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자아의식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자각이자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주체라는 믿음이며, 이 의식의 부재나 미숙은 상하 예속 질서의 사회관과 타율에 맡기는 생활태도를 개인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한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모든 제도가 형식적으로는 합리화되더라도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개인들의 주체의식 없이는 제도의 합리화가 순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P 69-70

"근대성으로의 이행은 사회 구성원들이 주체라는 것을 자각하고 각자가 다른 주체들과의 연대에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P90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단기간에 근대화가 되었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자아의식은 형성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존의 권위주위적인 유교사상이나 물질적 숭배만을 강조하는 기복사상이 사회의 상층부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근대화가 되었지만, 내부적인 사상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자아의식의 개발 없는 경제 발전의 기도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생산수단의 합리화에 의해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적 정치의 발전은 이룩되지 못하고 종국에 가서는 경제 발전도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놓이게 된 상황이다." P 69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사회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주체성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행동과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 채,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물질적인 부의 축적과 쾌락 추구만을 쫓아가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저급해지는 이유이다. 저자는 이것이 단지 한국의 문제뿐만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병폐이지만, 한국에서만 유독 그 병폐가 심하다고 말하고 있다.



 

"상품 숭배 사회에서는 오관에 주어지지 않는 것들은 인식 대상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현세적이며, 초월적 존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초월적 윤리 또한 상정되지 않으며 오로지 쾌와 불쾌가 선악의 기준일 다름이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소비문화는 삶을 복과 재앙으로 그리고 도덕을 쾌와 불쾌로 규정하는 무속문화와 친화성을 강하게 갖기 마련이었으며,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면서 외래의 상품 숭배와 토속의 물신 숭배가 결합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두 축이 되어 버린 셈이다." - P 84-5



 

근래에 언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김영란법'이다. 이 법의 시행을 앞두고 말들이 많다. 대부분 언론들이 하는 말은 일반적인 음식점이나, 농수산업자들, 생산자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 법이 득보다는 실이 많다며, 헌법재판소까지 가기도 했었다. 그리고 많은 대중이 그 언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과연 이런 논쟁이 근대사회라고 말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뇌물을 금지하면, 경제가 죽기에 뇌물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어떻게 21세기 근대화 사회에서 가능할까? 아직도 한국 사회에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아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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