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 색깔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부지불식중에 가슴속에 자리한 색. 나에게는 분홍이 그런 색이다. 신호대기의 차 안에서 바라본 분홍의 옷을 통해 그 시절을 헤아려본다. 짝사랑의 추억이 묻어있는 색,  분홍이다.

1.분홍색 파카

고향집은 여중과 여고 앞이었다. 학교 등교길은 매일 수백명의 여학생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가야하는 길이었다. 그 길을 택한다면 5분 정도의 거리였으나 내가 택한 길은 여학생들의 등교길을 피하여 빙 둘러서 가야하는 15분 정도의 길이었다.그 당시만 하더라도 쑥쓰러움을 많이 탔나보다. 고3의 이른 봄날, 등교 시간이 늦어 어쩔수 없이 5분 거리의 길을 가방을 둘러메고 뛰어가는데 분홍색이 눈에 확 들어왔다. 누굴까? 교복위에 분홍색의 파카를 입은 저 여학생이 누굴까? 그런 호기심으로 다음날부터 그 길을 걸어다녔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인가 분홍은 단순한 분홍이 아닌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선명한 분홍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2. 리차드 클레이더만과 똥개

친구들과 몰래 하교길의 뒤를 밟아 집을 알아내었다. 어차피 어리숙하기는 마찬가지인 몇몇 녀석과 머리를 맞대어 생각해낸 것이 TAPE 선물이었다. 그 당시에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리차드와 몇몇 사람들의 경음악을 녹음하여 나름대로 포장을 하였는데 문제는 전해주는 방식이었다. 최종 선택은 새벽에 대문앞에 몰래 갖다 놓는 것이었다. 내가 떨려서 못하겠다고 하니 친구 한 녀석이 나섰다. 의기양양하게 언덕을 올라가 대문앞에 다다른 녀석이 냅다 뛰기 시작한다. 똥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새벽 자전거 세대는 새벽길을 똥개에게 쫓겨 달아났다. TAPE 물어뜯으면 보신탕을 만들어 버린다고 다짐하며 달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TAPE는 무사했고 똥개 또한 보신탕의 운명을 면했다.

3. 성당의 종소리

언덕에 위치한 천주교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뱃길의 좌표로 이용될 정도로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천주교 앞 언덕에서 보면 그 여학생의 집이 바로 보인다. 해가 지는 저녁이나 별이 총총한 밤에 가끔 올라 그리움의 눈으로 바라다 보곤 했다. 그러던 주말 어느 날, 언덕에 앉아있는데 말로 설명할수 없는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다. 성당의 종소리, 난 지금도 가장 아름다웠던 소리를 물으면 그때의 성당 종소리를 말한다. 그 종소리에 이끌려 성당을 한달 정도 다녔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가끔 찾는 이곳은 성당의 종소리와 짝사랑했던 여학생의 모습으로 가끔 떠오른다.

4. 부치지 못한 편지

내 생애 최초의 연애편지이다. 그 당시는 알지도 못하는 조르주 무스타키의 방랑한 음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야말로 느끼함으로 포장한 유치찬란한 편지이다. 아마도 어디에서 인용했었는가 보다. 직접 전해주리라는 나의 오기로 그 편지는 지갑속에서 반년을 넘는 세월을 허리를 구부린채 지냈다. 우표와 함께 누군가에게 전해질 운명을 다하지 못한채 지금도 그때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물함 속에서 잠자고 있다.

5. 그리고 피천득의 <인연>

우연찮게 만나게 된것은 대학교 1학년때였다. 아는 후배가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만나고 돌아서 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것이 피천득의 <인연>이다. [ 아사코를 세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처음의 만남이었지만 가끔은 그냥 이대로의 추억으로 남아야 하는 것도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만났다는 자체가 괜히 아쉬웠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 추억은 가끔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꿈 하나 간직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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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7-26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에 저도 이런 비슷한 글을 썼고 잉크님이 댓글을 달아주셨죠.
그때 잉크님도 비슷한 사연이 있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추억을 감춰놓고 계셨군요^^
분홍이라... 저도 분홍색 참 좋아합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이뻐보이기도 하구요.

비로그인 2004-07-2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빛바랜 흑백 영화 한 편 본 듯한 느낌입니다. ^^
다른 사람들에겐 스쳐지나가는 그저 그런 것도 내게만은 설렘으로 기억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건 그렇고, 잉크 냄새 님이 쓰셨다는 그 최초의 연애 편지..살짝이 훔쳐 보고 싶은 맘, 간절하네요. ^^*

미네르바 2004-07-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누구나 가슴 속에 그런 추억 하나 품고 살고 있죠.
생각만으로도 왠지 풍요로워지는 푸근함, 설레임...
그러나 저도 그런 생각 들어요. <...세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같은...

그런데 George moustaki 음악은 정말 감미롭지요. 지금도 샹송가수 중에 제일 좋아해요.
특히 Le facteur(우편 배달부)를 좋아해요. Ma solitude(나의 고독)도 좋고...

잉크냄새 2004-07-2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고 나면 다 푸근하고 설레이는 추억으로 남는가 봅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결국 그런 인연의 산물이 인생이 아닌가도 싶고요...

ceylontea 2004-07-2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은 잉크냄새님이 직접 겪으신 것이란 거죠??
너무 멋져요... 전... 고등학교때 다닐 때 친구들하고 우~~하고 몰려다닌 기억밖에는 없는데... 잉크냄새님은 참 낭만적이네요...
좋은 추억입니다..

icaru 2004-08-0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분홍색 파캅니까? 저는 파랑색 남방인데..하하..
님 휴가 떠나신겁니까?
저 휴가다녀오니...님은 안뵈시고....

좋은 휴가 되셨으면 좋겠다고... 코멘트 하고가유~~
 

중학교 시절 유난히 울음이 많으신 여선생님이 계셨다. 도덕 선생님, 막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발령을 받은 학교가 우리 중학교였다. 학생들의 짖궂은 장난에 눈물을 참 많이 흘리신 분이란 기억이 난다. 처음 매를 드신 날도 울었고 출입문에 올려논 세숫대의 물세례를 받았을때도 울었다. 수업 시간에 잠시 나가 눈물을 닦고 들어와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수업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도덕 선생님에게 흑기사가 한명 있었다. 기술 선생님, 그 당시 노총각 선생님으로 솔직한 행동과 유머감각으로 학생들에게 꽤나 인기가 좋았다. 그 선생님의 T자를 이용한 종아리 치기 타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뼈속까지 깊은 울림을 남기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도덕 시간에 발생한 문제까지 연관하여 매를 드시니 불만이 있을수밖에, 지금의 우리라면 그 아련한 심정 십분 헤아려 흔쾌히 맞아주겠지만 그때는 정말 싫었다.

흑기사의 체벌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이 한겨울의 체벌이었다. 그 당시 중학교는 3층만 올라가도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라 한겨울 바다바람이 엄청나게 몰아치는 곳이었다. 한겨울의 바다바람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혹독한 바람이다. 살을 벤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도덕 선생님이 울고간 어느 겨울날, 기술시간에 제도실 대신 옥상으로 집합했다. 그 혹독한 체벌이란 것이 눈 쌓인 옥상에서 팬티만 남기고 전부 벗은 후 양팔벌리기로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물통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수업 내용 물어보고 얼굴이나 가슴에 물방울 튀기기였다. 이빨을 달그락거리며 부들부들 떠니 답인들 생각나겠는가. 거의 백전백패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부러움의 눈길을 받는 녀석이 바로 팬티 안입고 온 녀석이다. 꼭 한둘은 있었던것 같다. 인간의 기본 존엄성이 있는지라 어찌 홀라당 벗길수 있겠는가. 팬티 안 입은 애들은 바지입고 체벌을 받으니 의기양양(?)해 질수 밖에...대신 물 세례는 더 받았지만...

어쨌든 그해 겨울, 팬티 안 입은 애들 빼고는 상당히 추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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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25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 옆반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던 생각이 나네요. 하지만 국어 선생님이 어느 날 결혼을 하시더라고요. 괜히 생물 선생님이 안 되어서 마음이 짠했었는데.
그 기술 선생님 체벌 방법 독특하시네요. 그리고 바지 입고 체벌 받은 학생들도 참 그렇네요. 그래서 흑기사 기술 선생님은 좋은 결과를 얻으셨는지도 궁금하고요.

stella.K 2004-07-2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 팬티 안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남?
바다가 보이는 학교라...생각만으로는 정말 낭만적일 것 같은데, 선생님한테 잘못 걸리면 그런 일도 당하는구랴. 그 모진 칼바람 잘 견디고 이제까지 잘 살아오셨수. 기특하구랴! ^^

Laika 2004-07-25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첫 눈이 오는구나
은유법도 문장성분도 잠시 덮어두고
저 넉넉한 평등의 나라로 가자
오늘은 첫눈 오는 날
산과 마을과 바다위로 펼쳐지는
끝없는 백색의 화해와 평등이
내가 너희들에게 준 매운 손찌검의
너희들 가슴에 칼금을 그은 편애를
스스로 뉘우치게 하는구나

 

노총각 선생님의 사랑 얘기와 상관없이 바다가 보이는 학교라는 말에 "정일근"의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 생각나네요.. 그때의 체벌이 많이 힘드셨겠는데, 이런 더운날 들으니 좀 시원해지도하네요....ㅎㅎ 잉크님의 학창시절 얘기는 들을때마다 재밌어요..^^ 그나저나 정말 팬티 안입고 다니는 애들은 뭐랍니까? ^^

 


잉크냄새 2004-07-2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촌구석 남학교여서 그런 모양입니다.^^ 특히 소금강 자락에 살던 아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죠. 체육 시간에 늦게 나오는 사람, 한번쯤 의심해볼만 합니다.가끔 불시에 신체검사 비슷하게 하면 꼭 한두명 걸려들었거든요.^^;

미네르바 2004-07-2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이야기 보따리는 여전히 웃음을 자아내는군요.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겠어요. 그 여선생님과 노총각 선생님의 후일담은 없나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은 정말 부러워요.
 

<가을에 우는 매미 / 그 목소리에 / 죽기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 - 소세키-
<너무 울어 / 텅 비어 버렸는가, / 이 매미 허물은 > - 바쇼-
<여름 매미 / 나무를 꼭 껴안으며 / 마지막 울음을 운다 > - 이싸 -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쓰라려,쓰라려 > - 이싸 -

하이쿠 시인들은 대부분 방랑자였다고 한다. 평생을 소유하지 않고 걸식하며 걸어다니며 자연의 풍경과 하찮은 미물에 숨어있는 삶의 본질에 대하여 많은 하이쿠를 남겼다. 인생의 유한함, 어찌할수 없는 숙명, 바닥에 다다른 외로움과 허무...

그들이 다룬 많은 소재에서 그들의 방랑생활을 엿볼수 있다. 이, 벼룩, 귀뚜라미, 허수아비, 나비, 거미, 매미...이 사물들이 그들의 심정에 따라 때론 서글픈 모습으로 때론 해학적인 요소로 처리되곤 한다.

그런데, 유독 매미만큼은 모든 하이쿠에서 서글픈 운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왜? 짧은 생의 허무함 때문일까?  한 세상 살고가면서 구차하게 허물을 남겨서일까? 우리도 매미소리를 울음소리로 표현하지 노래소리로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다. 왜 매미만 유독 서글픈가?

올 여름 찌는듯한 더위속에 들리는 매미소리. 인생이 짧고 쓰라려 울음 우는 소리가 아닌 인생이 즐거워 어찌할줄 모르는 노래소리로 듣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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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25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년을 땅속에 있다 세상에 나와 일주일을 살다 가는 삶이라 그런 것 아닐까요...

stella.K 2004-07-25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근사하네요.^^

잉크냄새 2004-07-2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미는 매워서 우는군요.^^
삼땡은 33 이고 3333은 대통령이 아닌지요?
 


옛날 가방을 정리하다 편지가 한장 떨어졌어요.

아, 이것을 뭐라고 이름붙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요. 다른 학교의 같은 반 같은 번호에게 편지를 보내던 것 말이죠. 그해 봄날에 아마 54장의 편지가 저희 반에 배달되었을 겁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옆 여학교 24번이 저한테 보내온 편지네요. 그때 내 번호가 24번이었구나!

음~ 답장을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 당시에 참 수줍음이 많아서 머뭇머뭇하다 답장을 한것 같기도 하네요.^^

꽃다운 나이 18세란 표현도 있네요. 그런 시절도 있긴 있었나봐요.

추억은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은 아닌가봐요. 10년이 훨씬 지난 이 편지가 오늘 저녁 저 앞에 우연히 나타난 걸 보니까요.

아마 추억도 오래된 친구처럼 어느 날 문득 저를 찾아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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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7-2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낭만이네요. 심하게 부럽습니다^^

Laika 2004-07-2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From 24 " - ^^ .....그 24번 여학생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요? 재밌는 추억이네요...전 저렇것도 한번 못해보고 졸업하다니.....

비로그인 2004-07-2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니또라고 했었던가요? -.-a
그건 그렇고, 갈대 님 말씀처럼...아~ 학창 시절의 낭만과 추억이 깃든 보물이네요.
근데, 편지 내용이 너무 재밌어요. 꼭 왕년의 펜팔(?) 편지 같은..... ^^
근데 겨우 한 번의 편지 왕래로 끝난 건 아니겠죠? 그죠? ^^


잉크냄새 2004-07-2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즐거운 한때였지요. 낭만이니 뭐니 하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기에는 좀 그렇고요.
편지 왕래...글쎄요 한번 하고 말았던것 같은데요.^^

stella.K 2004-07-2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4번요? 그때 키가 별로 크시지 않으셨나 보네. 그때 그 여학생은 좋은 추억을 만들뻔한 기회를 놓친 것 같네요. 그 여학생 지금이라도 알리딘 회원되지...

icaru 2004-07-2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음...
내 추억인것마냥...잠시...그 시절로 돌아가봤습니다~~ 님 덕분에...

잉크냄새 2004-07-2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근히 내비추시는 속내들이 한번쯤 경험이 있으신듯 싶은데...
정확한 명칭이 뭔지는 모르시나 봅니다...
냉열사님의 마니또는 닭고기 상표명이 아닌가요?

icaru 2004-07-2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날로 늘어나는 잉크 냄새 님의 입담 .. 게그...

미네르바 2004-07-2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 냄새님, 멋진 추억을 갖고 계시는군요. 정말, 추억은 억지로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닌가봐요. 시간이 흐를수록 잉크냄새님의 이야기 보따리는 더욱 풍성해지는 듯 해요.

잉크냄새 2004-07-23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보따리 바닥날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땐 개그로 한판?
 

처음 집을 사러 다닐때 나름대로 조건으로 잡은 것이 햇볕이 잘 드는 구조와 앞이 트인 구조였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비록 아파트이지만 베란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광경은 그나마 대자연의 푸르름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한 부분만 놓고 본다면 대관령의 목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비록 밭작물이지만 6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장을 그려볼수도 있고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그리기에도 손색이 없다.

봄이 지나 낮이 길어지면서 새로운 생활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이 베란다이다. 퇴근후 책 한권을 들고 노을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는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삶의 즐거움이다. 중학교 시절 배운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나 또한 노을을 바라보며 글을 읽고 있다. (다만 해가 떨어지는 모습은 아쉽게도 옆 건물에 가려지고 만다.) 예전에 낚시 다닐때 가지고 다니던 긴 등받이 의자를 설치하고 탁자 비슷한 것도 하나 구하여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한낮의 빨래의 하늘거림 속에서 읽는 책의 맛도 좋고 저녁 노을 속에서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깨어나는 경험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일찍 잠이 깬 새벽녘의 몽롱한 안개 속에서 읽는 책도 묘미가 있다.

이 곳은 특히 안개가 심하다. 평균 열흘에 한번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새벽녘에 온 천지를 뒤덮곤 한다. 출근하는 날의 안개는 출근의 적과도 같지만 휴일 새벽의 안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울림을 담아내곤 한다. 얼마전에도 새벽녘에 잠이 깨어 바라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책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 아침 햇살에 안개가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책을 읽었다. 이것이 도원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풋~ 하고 웃으며 들어왔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밭이다. 얼마전 할머니들이 무엇인가를 심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푸르른 들판을 만들어 버렸다.


이곳은 안개가 심하다. 앞을 가늠할수 없을 정도의 안개가 자주 낀다. 휴일날의 안개는 또 다른 신비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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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7-1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잉크 냄새 님은 참 행복한 분이시네요. 냉열사 집 배란다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아파트 신축 공사가 만들어 놓는 살풍경 그 자체랍니다..
사진을 보니 제 맘이 다 탁 트여 지네요...베란다에서 책 한 권 들고 책 읽으시는 모습...참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지네요. ^^

호밀밭 2004-07-18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개가 가진 신비한 느낌 좋아해요. 멋진 풍경이 보이시는 곳에서 사시는군요. 베란다에 의자가 있다니 좋으시겠어요.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서 좋은 풍경도 바라보시고, 멋진 배경을 안주 삼아 맥주를 드셔도 좋겠네요. 쉬는 날 안개를 보게 되면 몽롱하면서도 편안해져서 현실을 조금은 잊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stella.K 2004-07-18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은 어디 사시길래 베란다에 나서면 이런 풍경이 펼쳐지는 거죠? 정말 베란다에서 책을 읽으시는 님의 모습이 퍽이나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럽습니다.
저의 집은 사방이 건물로 둘러쳐져 있을뿐인데...그나마 길건너에 숲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네요. 잘은 안가지만...

ceylontea 2004-07-1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은 놀이터가 보여요...^^
잉크냄새님.. 베란다에서 밖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지겠어요...

水巖 2004-07-19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멋진 풍경을 보면서 사십니다. 부럽습니다. 우리 아파트도 옆에 신축 아파트를 짓는 바람에 그나마 손주올때 같이 보던 기차며 전철도 못 보게 되었답니다.
탁 트인 베란다에 흔들의자를 놓고 책을 보거나, 아니면 앙증맞은 티 테이블에서 커피 한잔 마셔도 좋으련만.....

잉크냄새 2004-07-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기도 이천입니다. 이곳은 예전부터 지하수와 관개수로가 발달하여 물과 흙이 좋고 쌀과 도자기가 유명하죠. 호수가 없음에도 안개가 많은 것은 지하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얼마후면 지하철이 이곳까지 연장된다고 하던데, 그때는 아마 이곳도 살벌한 풍경이 형성되지 않을까 합니다.

icaru 2004-07-19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란다로 보이는 풍경이 저러하다면..음...저같으면 집밖으로 도통 나가려 하지 않을 듯 합니다...

메시지 2004-07-1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저희 집도 창밖으로 나무가 보이고 매미소리와 새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아합니다만 잉크냄새님댁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네요.

겨울 2004-07-1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창문을 여는 순간 참새 한 마리가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며 담장 위를 걸어가더군요. 총총 걸어가던 모양이 어찌나 우습던지요. 잉크냄새님은 정말 근사한 곳에 사시네요. 도심 안에서는 저런 풍경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지요. 늘 지나는 길에 공한지가 있는데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께서 들깨며 상추며 열무를 심어 가꾸는 모습을 종종 보았죠. 무단으로 투기한 쓰레기들 옆에 무성히 자란 채소를 보는 일은 참 기분이 좋았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누군가 모조리 싹둑 베어버렸고 할머니는 그 옆에 서서 못된 사람들이라고 푸념을 하시더군요. 아마도 땅에 관련된 누군가가 그리한 듯. 근처에 잔뜩 버려진 쓰레기는 방치하면서 자라고 있는 채소를 그렇게 몰인정하게 짓밟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Laika 2004-07-2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잉크님이 산속에 사시는건가 생각 했답니다. 좋네요..저는 저런 풍경 안펼쳐지고 그냥 베란다만 있어도 좋겠어요. 저는 창문 열면 뒷집 빨간 벽돌만 보인답니다. 그래도 햇볓은 들어오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잉크냄새 2004-07-20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 트인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아요. 매미소리, 새소리 들리는 것도 좋고, 여름밤이면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 소리 들리는 것도 좋고요. ^^

아영엄마 2004-07-2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책을 읽다, 모니터를 들여다 보다, 눈이 피곤하거나 문득 하늘을 보고 싶을 때 눈을 돌렸을 때 볼 확 트인 공간과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자 행운이죠.. 잉크냄새가 저를 이끌어 왔더니 근사한 자연 풍경이 보이네요..^^*(저 아시죠? ^^;; 즐겨찾기 하나 늘면 그건 바로 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