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역사 중에서 타인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타인은 과연 실재적인 것의 이름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비밀스럽게 존재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타인이 존재하며 그들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왔다고 하는 것은 텔레비전의 선전이거나 종교의 광고문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들 타인을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실제로는 만난 일이 없기 때문이다.(「회색 時」)
시간은 이렇게 그를 지나쳤고, 그는 그렇게 ‘타인’을 지나쳤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시간을 스쳐갔고, 타인들 역시 그렇게 그를 스쳐갔을지도 모르겠다.
데뷔한 지 십삼 년, 그는 그렇게 변화해왔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고 실재하지 않는 ‘타인’과 마주하며.
1993년 데뷔 후 지난해까지 각각 한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포함 열일곱 권의 책을 펴냈으니(번역서 두 권까지 포함하면 열아홉 권!) 이 년에 세 권꼴로 책이 나온 셈이지만 1999년 『그 사람의 첫사랑』이 나온 이후 창작집은 칠 년 만이다. 그사이 출간된 산문집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를 제외한 여덟 권이 모두 장편소설이다.
그사이, 배수아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공무원과 소설가라는 투잡(two-job)족--이 말은 배수아가 맨 처음 사용한 말이다--에서 전업 소설가가 되었고, 공항과 자택을 오가던 그는 이제 독일과 한국을 오간다. 독특한 문체 때문에 폭넓은 독자 대신 열혈 팬들을 거느리고 있던 그는 이제, 사유하는 문장의 힘으로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2004년 『독학자』를 내놓으며 그는 “나의 초기 소설 및 그 독자들과 결별하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지만 독자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을 듯하다. 그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 역시 독자들에겐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이므로.
“뭐예요?”
“죄송하지만 문을 좀 열어주시겠어요? 난 이곳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집주인이 잊었는지 문을 열어주지 않는군요.”
“뭐라구요?”
“문을 좀 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난 바이올린 레슨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서, 그런데 이곳이 가르쳐준 주소이고 오늘 시간도 맞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들어갈 수가 없군요. 그러니, 문을 좀 열어주었으면 해서요.”
“도무지 못 알아듣겠네. 그러니까 당신은, 이곳에 찾아온 사람이 맞는데, 당신이 이곳에 들어와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문을 대신 열어달라는 거군요. ……찾아갈 방이 몇호인데요?”
“1323.”“그런데 왜 내가 문을 열어줘야 하는 건지, 별일이네, 참. 이봐요, 난 1105호에 사는데, 그말은 당신이 벨을 누른 이곳은 지금 1105호란 말이에요. 1105호와 1323호는 비슷하지도 않은 숫자인데, 이상하군요. 왜 그러는 거지요? 내 생각에는 당신은 그의 이웃에게 부탁해야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나도 물론 그러려고 했지만, 아무도 집에 있질 않아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당신은 오늘 그냥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니면 다른 이웃에게 부탁해보든가요. 나는, 내가 문을 열어주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돈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마짠 방향으로」)
그는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린 어쩌면 대화가 아니라 끊임없는 독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내 앞에 있는 것은 ‘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우리)의 이야기는 허공을 맴돈다. 그 이야기는 결국 나(우리)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던가. 언제나 그랬듯이. 문득, 그의 소설을 읽으며 떠올려본다. 진짜 ‘대화’라는 것을, 나는 ‘나누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어쩜 듣는 이 없는 무언가에 대고 끊임없이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결국은 그가 나이고, 내가 너인 이 세상에서.(「훌」)
나는 말이지, 언제나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왜냐하면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었거든. 내 할머니도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 게다가 가까운 친구 중의 한 명의 할머니도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 뭐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아이들 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언제나 한 명 이상은 반드시 있었어.(「마짠 방향으로」)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던져놓기만 하는 줄 알았던 그가 이번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최근 몇 년간 그의 인물들(실은 그의 ‘인물’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고민스럽다. 대부분 그의 인물들은 웬일인지 그 자신으로 읽혔다)은 그와 마찬가지로 항상 ‘길 위’ 어딘가에 있었다. 그들은(그리고 그는) 왠지 ‘지금-여기’가 아닌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듯했다. 분명 실재하는 어떤 세계이기는 하나 ‘지금-여기’는 아닌 듯한. 그런데, 이제, 조금씩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살갑게 다가와 말을 건네거나 조근조근 맛깔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소설을 두고 ‘이야기’가 없다고 하는 독자들은 곰곰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들이 지금 나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지.
나는 완벽히 소외된 자였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사방에 무수히 많은, 그런 식으로 소외된 자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그들처럼 그의 공간과 환호를 채우기 위해 징집된 존재였습니다. 내 탄생은 예술을 위한 징집이었을 뿐입니다.(「양곤에서 온 편지」)
이로써 어쩌면 대답이 된 걸까? 그가 “삶이 주는 모욕을 견디”(「병든 애인」, 『그 사람의 첫사랑』)며 살고 있는 이유가? 어쩌면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야기하고 있었던 그 무엇을 우리가 너무 늦게,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작가’ 배수아는 이제, 끝나지 않을 듯 보이던 길 위에서의 서성거림 끝에서 천천히 길을 찾는 듯하다.
사유는 더욱 깊어지고, 문장은 더욱 치밀하고 견고해졌다. 그것은 지금 활자화된, 지면 위에 붙박인 그 내용 이상의 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우리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정확해서 오히려 암호와도 같아진 그의 문장을 다시 한번 한 자 한 자 해독해나가야 한다.
난 어떤 하나의 문학적 언어가 ‘완성’의 단계에 가 닿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도구로서의 언어가 항상 폐쇄적인 룰을 갖고 있다고 믿지는 않아. 적어도 나는 가능한 한 최경계에서 작업하고 싶어.(『당나귀들』)
“작가란 동시대 정신을 대표하는 자가 아니라 그 경계에 있는 자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언제가 말했다. 그는 분명 ‘작가’이다. 그저 ‘소설가’가 아니라.
1993년, 데뷔 당시 독특한 신세대 작가 중의 하나였던 그는, 이제 경계에 있는 자의 대표가 되려는 듯하다.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혼에 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날 뿐이다.(「회색 時」)
그의 영혼이 또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지, 또 어떤 잠재력을 보여주게 될지, 그의 앞으로가 더욱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 배수아 |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소설과사상』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따.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 발표작품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소설집, 고려원, 1995
『랩소디 인 블루』, 장편소설, 고려원, 1995
『바람인형』,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1996
『부주의한 사랑』, 장편소설, 1996
『만일 그대가 사랑을 만나면』, 시집, 르네상스, 1997
『심야통신』,소설집, 해냄, 1998
『그 사람의 첫사랑』,소설집, 생각의나무, 1999(『No.4』로 재출간, 생각의나무, 2005)
『철수』, 중편소설, 작가정신, 1998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장편소설, 이룸, 2000
『붉은 손 클럽』, 장편소설, 해냄, 2000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 산문집, 이룸, 2000
『이바나』, 장편소설, 이바나, 2002
『동물원 킨트』, 장편소설, 이가서, 2002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2003
『에세이스트의 책상』, 장편소설, 문학동네, 2003,
『독학자』, 장편소설, 열림원, 2005
『당나귀들』, 장편소설, 이룸, 2005
* 초판발행 | 2006년 1월 9일
* 신국판 | 320쪽 | 9,500원
* ISBN | 89-546-0071-9 0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