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다.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출생.
1939년 덕수공립보통학교 졸업, 경기공립중학교 입학.
1944년 명신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 입학.
1945년 광복 후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올라옴. 종로 3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 茉莉書舍’ 개업.
1947년 시 <남풍>과 산문 <아메리카 시론>을 종합지인《신천지 新天地》에 발표.
1948년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시 동인지 《신시로新詩論》창간에 참여. 자유신문自由新聞사 문화부 기자로 활동.
1949년 4월 신시론 동인들의 5인 합동 사화집詞華集《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출간.
1950년 모더니즘 동인그룹 후반기後半期에 참여하여 시작時作 발표.
1951년 1․4후퇴로 대구에서 《경향신문》전선판戰線版 발행 종군기자로 활동.
1955년 선박 ‘남해호 南海號’의 사무장으로 부산항을 떠나 미국을 여행함. 첫 시집《박인환 선시집選詩集》출판.
1956년 시 <세월이 가면>을 쓰고 친구 이진섭李眞燮이 곡을 부침. 3월 20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 것”
한국인의 애송시 ‘세월이 가면’ 과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50주기 기념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세월이 가면’ 한 소절 읊조려 보지 않거나 한 잔 술로 버지니아 울프를 노래해 보지 않은 이들은 드물 것이다. 박인환, 그는 한국문단사에서 잃어버린 시대로 평가받는 해방 후 1950~60대에 문학뿐 아니라 영화와 노래 등을 즐겼던 댄디이자 ‘명동백작’으로 군림했던 한국 모더니스트의 기수였다. 31년의 ?은 삶을 살다간 그가 생전에 남긴 시집은《박인환 선시집》단 한 권뿐이지만, 최근에는 문단에서도 그의 50주기를 앞두고 전란 중의 피폐함과 전후의 상실감을 가장 잘 드러낸 시인으로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다. 지분향기 가득한 오늘의 명동의 거리에 그의 향기는 가고 없지만, 한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추억되는 박인환의 시,산문,사진 자료들을 이 한권에 집대성했다.

 

이국에 대한 선망으로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려한 문학청년의 내면적 풍경

이 시집은 1920년에 태어나 태평양 전쟁의 실감 속에서 성장기를 잘 보내고 해방과 더불어 성년을 맞은 뒤 곧바로 참혹한 내전을 겪은 조선 문학청년의 평균적 내면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분단과 전쟁으로 찢겨진 옛 식민지 출신 청년으로서 이국에 대한 선망과 감상주의로 제 상처를 어루만지며 궁핍한 시대를 버텨내려고 하였으며, 댄디의 옷을 벗어던지고 한 가족의 책임 있는 가장으로서 시대와 결합하는가 하면, 연극․영화 쪽에까지 관심을 뻗치며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전방위 예술인을 꿈꾸었다. 그의 시와 세계관은 새로운 지평을 겨냥하고 있다. 박인환의 생애는 서른 해에도 채 이르지 못했으나 그의 작품 활동은 생애 마지막 열해 동안 이뤄졌다. 20대의 10년은 큰 시인이 되기에 짧은 기간이 아니나 한국문학을 위해서, 박인환은 더 살았어야 했다.

소설가-한국일보 논설위원 고종석


“문단에 뿌린 화제만큼 시인으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으나, 외상술을 마실 때에도 ‘꽃피기 전에 갚을게’란 말을 남겼던 시인다운 시인이었다. 그의 ‘맑은 가난’이 그립다.”
-천양희(시인)

"전란 중의 피폐함과 전후의 상실감이 박인환의 시에서처럼 잘 반영된 시는 없었다. 박인환 문학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홍섭(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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