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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러시아 작가(이 책을 쓴 작가는 우크라이나의 작가이지만)의 글은 왠지 묵직할 것 같이 느껴지는 편견 아닌 편견이 내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 왠지 이 책은 끌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귀여운 펭귄이 그려진 표지에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할 때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류의 묵직함은 없었지만 그간 내가 다른 러시아 소설을 읽었을 때처럼 '무거운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기분은 이러한 무거운 느낌을 잠시 잊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책 속에는 동물원에서 먹이를 줄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동물을 분양할 때 황제펭귄 한 마리를 분양받아온 빅토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실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이 부분만을 봤을 때는 '음. 그럼 펭귄과의 코믹한 일상을 그리고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이런 예상 역시 또 빗나가버렸다. 이 책 속에서 펭귄이 하는 일이라곤 고작 밤에 조용히 빅토르의 무릎에 몸을 기대거나 뒤뚱뒤뚱 걸어다니는 정도이다. 그들은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며 유대관계를 다지지만 그 유대관계란 룸메이트와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다. (물론, 이들은 룸메이트가 아닌 양육자-피양육자의 관계지만)
주인공인 빅토르는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아서 원고료도 얼마 받지 못하는 작가이다. 그러던 그는 어느날 자신의 원고를 한 신문사에 갖다주게 되고 그 곳에서 다소 희안한 제안을 받게 된다. 다름아닌 죽은 사람들의 '조문弔文'을 써달라는 것. 그가 조문을 쓰는 것은 대개가 하나 둘씩 비밀을 갖고 있는 정부관계자, 군인, 사업가 등인데 희안하게 그가 쓴 조문은 금방 사용할 기회를 얻게 되고 그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우연히 알게된 펭귄이 아닌 미샤의 딸도 맡게 되고, 그녀를 위해 보모를 들이면서 미완성적이긴 하지만 가족의 형태도 꾸리며 살아가게 된다. 새로운 변화. 하지만 어디로 치달을 지 모르는 변화는 그렇게 빅토르의 삶을 흔들기 시작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추리소설이라서 추리소설적 기법이 사용되었거나 그런 분위기라도 풍기는 작품이면 사족을 못 쓰는데 이 작품이 그랬다. 열린 결말의 형태이고, 책의 뒷표지에도 다음 작품인 <펭귄의 실종>이 있다고 하니 계속되는 빅토르와 펭귄 미샤의 이야기가 등장할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어지는 이야기보다는 빅토르가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이 더 실감있게 다가왔다. 이유도 모른채 편집자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하는 모습,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이대로가 좋다는 생각에 가슴에 품고 자는 여자, 개인의 이익에 따라 만났지만 그 정체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만나는 친구 등 빅토르가 접하는 인간관계는 우리가 현재 이루고 있는 인간관계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자신의 고향과 멀리 떨어져있어서 우울한(것으로 추정되는) 펭귄 미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우울한 일인가. '나의 자리',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것. 이 점에서 빅토르도, 미샤도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던 것 같다. 타인이 정한 곳에서 타인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둘의 모습은 결국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빅토르와 미샤, 그리고 나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이어질 <펭귄의 실종>에서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더 궁금해진다. 안드레이 쿠르코프. 처음 듣는 작가였지만 솔 출판사의 3세계 작가를 소개한 책답게 흥미로웠다. (여기서 헝가리의 작가인 산도르 마라이도 만날 수 있었고, 핀란드의 작가인 아르토 파실린나도 만날 수 있지 않았던가!) 시큰둥하게 집어든 책이었지만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때문인지 모처럼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었던 책.
덧)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이 정도 두께라면 책갈피를 할 수 있는 책끈을 하나쯤 달아줬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