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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귀신의 노래 - 지상을 걷는 쓸쓸한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편지
곽재구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76~ 80쪽
1979년 6월 나는 군에서 제대했다. 친구 나해철의 어머님이 나를 찾았다. 어머님은 내게 돈 5만 원을 주셨다. 이걸로 방을 하나 얻고 싸로가 연탄을 사렴. 어머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 줄 알지? 이 돈은 뒤에 꼭 갚아야 한다. (...)
그해 나는 50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국립대학 3학년이었던 나의 등록금은 8만 몇천 원이었으니 이 상금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나해철의 어머님을 찾아갔다. 고맙습니다 어머님. 내가 말했을 때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그 돈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구나. 젊은 놈이 자존심 상할까봐 꼭 갚으라고 얘기했지.
89쪽
나는 그 무렵 한참 쓰고 있던 시의 제목으로 '남광주역에서'가 아닌 '사평역에서'를 선택했다. 만약 이 시를 '남곽주역에서'라고 했다면 그 시적 환기력은 훨씬 약해졌을 것이다. 상상력은 현실 속에서 태어나지만 상상력은 강력한 현실을 만나면 죽는다.
95쪽
<사평역에서>가 발표된 지 서른 해가 넘었다. 처음 십 년 정도는 누군가 내게 <사평역에서>를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 시를 썼던 시절의 용맹정진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누군가 내게 <사평역에서>를 이야기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1981년 이래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작가가 된다.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기도 하다. <사평역에서>가 나의 감옥이 된 것이다.
101쪽
어느 해 봄 이곳 바다에 들른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개펄에서 일하는 아낙들을 바라보며 '봄날의 꽃보다 와온 바다의 개펄이 더 아름답다'는 얘길 했거니와 이는 훌륭한 육체노동을 하는 갯마을 아낙들의 삶에 대한 헌사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쓴 시 한 쳔이 농부가 수확한 감자 한 망태나 토마토 한 광주리 같은 쓸모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오랜 관심사였으니 평생 글을 써온 선생에 있어서는 그 소회가 오죽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