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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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는 동네 구립 도서관 열람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거기서 일도 하고, 책도 보고 했었다. 한번은 내 자리 맞은 편(칸막이 열람실이 아닌)에 참으로 지속적으로 밀어를 속삭이며 쑥덕거리는 대학생 커플이 앉아 있는 거였다. 소싯적 학교 다닐 때의 도서관에서도 그랬지만, 연애할 장소들이 쎄고 쎘는데 신성한 도서관 열람실 자리차지하고 앉아서 본래의 사무는 뒷전이고, 노닥노닥이는 커플들의 모습은 참고 보아 주기가 힘들다. 그 때 나는 고개 들어 정면을 바라보고 그 두 사람에게 눈총을 주려 시선을 올리던 중이었다. 그 때 커플의 앞에 놓여 있는 책 한 권 철커덕 들어왔다. 사막의 밤에 혼자 길 떠나는 객의 뒷모습을 담은 예쁨직한 삽화. 제목은 ‘연금술사’다. (전공서적이나 수험서 외의 책을 펼쳐 놓은 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소설 책 읽는 대학생이 기특들해서 쏘아 봐 주지 않기로 했다. ) 그 때의 느낌으로 이 책은 대학생들이 읽는 책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그 꼬리표에 덧달아 ‘철없이 한창 좋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좋겠다.


하지만 이것이 이 책에 대한 얼마나 단편적이고도 잘못된 인상이랴. 일단 이 책은 세대나 직업군 별로 독자층을 따로 갖지 않을 그러니까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것에, 자신의 영혼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현대판 고전이랄 수 있겠다. 아, 게다가 동화처럼 쉽게 잘 읽힌다.

 

살아오면서 항상 의문을 갖곤 했다. ‘나만의 길’이라는 게 있을까 하는,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게 과연 있다고 해도, 나는 그 숙명을 제대로 온몸으로 체감하고 그 신화에 도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수가 있을 것인지, 드디어는 신화를 이룩할 수가 있을 것인지.

이 책은 자아의 신화를 찾아 사막을 건너 이집트로 향하는 이야기인데, 음 과연 주인공 양치기는 ‘자신의 신화’를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이며, 이것이 또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나도 예전엔 꿈이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도 쉽게 마음이 미욱하여져서 나는 그걸(꿈을) 이룰 자격이 없거나 아니면 아예 이룰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곤 했다. 이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 양치기 청년이 담대한 마음을 갖으면서도 시시종종 두려움에 사로잡히듯 말이다. 그리고 점점 생활이랄까 생존의 법칙 같은 것은 빨리 체득하고, 상대적으로 꿈은 빨리 포기하게 되었다.


아 그렇기는 하지만, 음... 인생에서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이 되지만,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 법이란다. 이 때 우리의 마음들은 항상 이 가혹한 시험에 고통을 받을까봐 두려워하게 되는데, 그럴 땐 우리의 마음에게 이렇게 조용히 속삭여 주어야 한다.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 나쁜 거'라고. 사실은 꿈을 찾아가는 매순간이란 신과 영겁의 세월을 만나는 빛나는 순간이다. 사실 우리의 마음은 신과 조우하는 빛나는 시간들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평소에 잘 대화하는 습성을 키워 두어야 하고, 또 항상 마음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아의 신화를 찾는 일 즉 위대한 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하루하루 자아의 신화를 살아내는 세상 모든 사람 앞에 조용히 열려 있는 것이다. 과시할 필요도 자랑할 필요도 없다. 묵묵히 나의 길을 갈 뿐.


사족, 이 책에서 말하는 ‘연금술’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일이고, 곧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예정된 진정한 보물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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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0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아직도 못 읽어 보았네요. 왠지 자주 서점에서 보다 보니 읽은 듯한 착각이 드는 책 중에 하나예요. 그냥 이제는 많이 미루었다가 살기가 아주 힘들 때 읽어 볼까 싶기도 하고요. 읽게 된 과정이 참 재미있네요. 요즘은 그 책을 어떻게 해서 읽게 되었는지를 다 잊고 사는데 그런 에피소드는 책을 더 오래 기억에 남게 해주잖아요. 님이 포기한 꿈은 뭘까요. 제가 포기한 꿈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꿈은 포기했어도 뭔가 아직 발견할 꿈들이 조금은 남아 있어서 하루하루 사는 게 아닌가 싶어요.

icaru 2004-07-0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정말..서점가에서 오래도록 자리 차지하구 있더군요...음...님~! 님의 꿈은 무엇일지 이거 무지 궁금한데요...!! 흐흐.........음....정말..저하고 다르면서도..유사한 게 아녔을까...하는 깊은 심증이 ㅋㅋ
그런데...님...아직은 포기란 말이 이른듯합니다..님은 지금...하루하루 조용히..자신만의 연금술 세계로 향하고 있진 않나요?

비로그인 2004-07-2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 리뷰 읽던 날, 이 책 구입했어요. 근데 아직까지 읽진 못 했네요.
이번 휴가 차에 이 책이랑, 그 있잖아요...<애크로이드 살인사건>요...그 두 권 중에 한 권을 가져갈까 생각 중이랍니다. 그런데 왠지 추리 소설 쪽으로 맘이 기울어가는 것은?...^^*

icaru 2004-07-27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제 생각에도 애크로이드~ 부텀 읽으시라...하고프네요...
곧 휴가신가요?~~ 저두요~~!!

내가없는 이 안 2004-08-05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표현, 때로는 너무도 쉽게 마음이 미욱하여져서 나는 그걸(꿈을) 이룰 자격이 없거나 아니면 아예 이룰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곤 했다, 이 구절이 왜 이리 마음에 와닿는지, 잠시 생각했는데 '미욱하여져서'란 표현이 너무 사랑스러워서인 듯합니다. 저 이 표현 제 머리로 퍼나를게요. ^^
 
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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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속성을 두 줄로 말하라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나,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여지없이 반하게 될 소설이다. 둘, “글 쓰는 행위”와 다른 여타의 힘들 사이의 극적인 긴장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의 작품을 먹는 것에 비유하자면, 칼국수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밀가루 음식은 별로라 그냥 그래 했다. 그런데 회사 근처에 자주 가는 칼국수집이 있는데, 처음에는 동료의 손에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갔었다. ‘칼국수가 맛있어 봤자지.’ 그렇게 해서 처음 먹은 그 집 칼국수는 그냥 썩 괜찮은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을 한번 다녀갔던 이후로는 맑은 날이나, 비오는 날이나 흐린 날이나 그 면발이 삼삼히 떠오르곤 한다. 도시락을 준비 못한 점심 때가 되면, 발걸음이 알아서 예의 그 칼국수 집으로 향한다. 그 칼국수가 왜 그렇게 좋을까. 잡다하게 이것저것 갖은 양념들이 들어간 것도 아니다. 밀가루를 손수 밀어 만든 면발, 넉넉한 바지락, 그리고 김부스러기와 국물이다.


폴 오스터의 소설들도 내게는 그 집의 칼국수 같다. 그의 소설의 힘은 언어의 탐구와 우연의 일치 등이 관계의 중복 등이 얽히고 설키는 것인데, 특별할 것 없을 듯한 이 장치들이 배합되어 오묘하게도 그 집 칼국수 같은 작품이 되어 나온다.


독자는 그의 소설을 읽는 그처럼 짧은 기간에 무진장 많은 삶의 형태와 사건과 만남이라는 우연의 계곡을 따라 헤엄쳐 돌아댕긴다. 글쟁이 시드니 오어의 이야기를 읽는가 했더니, 주석으로 밀려난 글을 따라 다니게 되고, 그러다가 소설 속의 소설인 닉 보언의 이야기에 몰두하다가는, <플리트크래프트>라는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가고, 다시 시드니 오어가 우찌되는가에 예의주시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좇아가는 (물리적으로 짧다면 짧다고 볼 수 있는) 시간 동안에, 독자는 주인공(혹은 독자)가 세상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 조금은 소름끼치는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사실. 그것은 두 글자로 ‘우연’이 아니겠느냐는 것.


그런 단순하고도 복잡함 때문에 목울대가 따끔따끔해질 정도의 이상한 기운으로 몸서리쳐지는 게, 단지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 동안만이고 도무지 지속 효과라는 게 없다고 할지라도, 우짜하든 나는 좋다. 그의 소설이 그리고 <신탁의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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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7-0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문했어요!! 오늘 와야 하는데.. 왜 씨제이 택배총각이 안 온담.. 1시에 띵똥하는데.. 흠.. 추천 한 방 날리고..^^

panda78 2004-07-0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칼국수 먹어 보고 싶네요... (딴 소리.. ^^;;;) 저도 추천! 망설이는 중이었는데, 사야겠군요!

icaru 2004-07-02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모엄니도 신청했어요??!! 재미나게 읽으실 수 있을거예요...(딴소리..씨제이 택배는 씨제이몰과 관련이 있나요?? 있겠죠??)

판다 님...그 집 칼국쉬....당췌 질리지가 않더라구요.... 정말 놀라워요...!!

비로그인 2004-07-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복순 아짐. 꾸준한 독서와 글쓰기. 제가 이래서 서재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당게요. 아, 이거 책도 안 읽고 리뷰도 안 쓰는 저, 정말 창피해지는 걸요. 암턴 오스터의 소설을 칼국수로 비유하시다니. 멋지세요. 이 주에도 복순 아짐의 리뷰가 당선되었으면 좋겠네요.

icaru 2004-07-0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복돌 성님...넘..칭찬해 주시는거 아녜요!! 에구구...저 짐...한 쪽 손으로 얼굴 반을 가리구 있어용...부끄..
 
서바이버 메피스토(Mephisto) 9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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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척 팔라닉을 읽고 있노라니, 떠오르는 국내 작가가 한 사람 있다. 바로 백민석.

아마도 세상에 대한 냉소와 파격적인 문체, 그리고 한 번만 읽어서는 잘 알 수 없는 플롯 때문인 거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살아봤자 이로울 것 하나 없는 세상. 괜히 머뭇거리다간 고통받는 시간만 늘 거’라고 조언하고, ‘특별한 인연과의 첫 만남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들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땅 속에 묻혀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그리고는 ‘영원한 외로움. 변화 없는 생활.’을 꾸리지. 하지만, 생산되고 길러지고 팔려나온 나(주인공)는 결국 짜여진 인생을 거부했다. ‘나’를 지배해 오던 노예 의식을 깨부수었다.


지금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이끌어 주길 원하고 있다. 그 뿐인가, 자신들의 과거엔 깜깜하면서 텔레비전 시트콤에 나오는 가족들의 사연엔 훤하다. 우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똑같은 것들을 보고 자랐으니.......) 또 같은 공포를 가지고 있다. 아,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진실은 반짝거리거나 빛나지 않는 법. 그리고 이 밝지 않은 무엇이 진실이란다.


이 책의 서평을 쓴다는 것은 허공에 탑 쌓기 같은 일이다. 음. 나에게는.


질식 이후 읽은 서바이버 그리고 영화로 본 파이트 클럽....글쎄....팔라닉의 소설은 패턴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 패턴 위의 패턴. 패턴에 영향을 주는 패턴, 패턴 뒤에 숨어 있는 패턴. 패턴 속의 패턴. 이 세상엔 자유 의지란 없고, 또 삶의 변수도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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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6-26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량콩나물을 제치고 어느날 등장한 무공해콩나물의 꾀죄죄한 모습과 왜소한 팔목을 보고
진실이란 이런 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확실한 것은 태어난 자는 죽는다는 것,만난 자는 헤어진다는 것인데,왜 불교에는 헤어진 자는 다시 만난다는 경구까지 덧붙여놓았는지.

icaru 2004-06-2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진실은 반짝거리거나 빛나지 않는다는 것..!!
하물며 콩나물도 그렇거늘.....!!!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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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소설에 나오는 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등장 인물의 특징은 바로 현대성이다. 주인공이 현대의 빡빡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 빡빡함의 정도는 가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정도라는 것. 그들이 하는 행동은 얼핏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인 듯 하지만 이상하게도 깊은 공감을 준다는 것. 등등


주인공은 자신의 근원을 찾으러 나선다. 물론 그 애초의 시작은 세 편이 모두 다르다. 첫번째 '유리의 도시'에서는 소설가인 자신을 탐정으로 오인한 어느 여인으로부터 받은 전화를 계기로, 어떤 편집증적인 노인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지만, 결국 노인의 행적과 미스테리적인 사건의 결말이 중요했던 게 아니었다. 소설가인 나 자신이 우연한 기회에 탐정이라는 외부적 직함을 얻고 소설가였던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 하며 탐정으로 거듭나려는 일련의 과정이 중요하다. 그리고 두 번째 '유령들'에서는 주인공 블루도 처음엔 다른 누구(블랙)를 감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블랙에게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잠겨 있는 방'에서의 팬쇼는 다른 누가 자기의 정신을 특징짓는 것이 싫어서 예전의 자기로 알려져 있던 모든 것과 단절하기로 마음먹는데 이 세 번째 이야기는 다시 첫 번째 이야기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관련이 없는 듯하면서도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가 서로 의지해야만 전체로서 읽히는 이상한 작품이다.


그의 소설에서는 항상 삶에는 유리하게 접어줄 조건도 없고 불운에 제한을 둔다는 규칙도 없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요지가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정말 대단한 작가다. 정말 그의 말처럼, 이야기(소설)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생겨나는 법인가 보다. 경험 역시 마찬가지로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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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6-0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맑은 날씨네요.오늘도 많이 웃으시길,맛있는 거 많이 드시길.

물만두 2004-06-08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넘 어려웠어요...

호밀밭 2004-06-0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작품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 같아 느낌이 새로웠어요. 폴 오스터의 매력이 고스란히, 완전하게 드러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가요.

2004-06-09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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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결국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하며 이 책을 읽었다.

무슨 일인지 이 글 속의 '나'인 롤랑 기는 자신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했다.  최근에는 흥신소에서 위트라는 사내를 도와 일을 했다는 것이 그가 알고 있는 자신의 신상의 전부다. 하지만 위트도 흥신소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고향인 니스로 떠난다. 이제 기 그가 자신의 과거를 찾아나선다.  그가 ‘나’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을 - 한 사람의 일생으로부터 남은 것과 남겼던 것이 무언지를 생각해 보면서 - 조용히 따라가 보았다. 그 과정에서 만났던 몇몇 사람들이 건넨 과자통이나 낡은 상자 속에 담겨 있는 사진에는,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로 추정되는 인물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물었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남자는 나와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아뇨, 꼭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는데요. 그렇지만 어쩌면......”


과거를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기’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살지 않는다면 추억해서 무엇하나? 지금 이 순간을 찬란한 감동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무심히 흘러 망각의 무(無 )로 변해갈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이 작품은 마치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언뜻 지나쳐본 장면, 창에서 내려다본 낯익은 거리의 풍경,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서 포착하는 과거 한 때의 체험, 끊어진 한 토막의 대화들이 무채색의 그림처럼 사람을 매료시킨다. 신문지상에 나왔던 모 작가의 말처럼, 참 매혹적인 소설이다.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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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5-3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파트릭 모디아노를 좋아했다가 도라 부르더를 읽고 실망해서 지금 다른 책을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중입니다...

icaru 2004-05-3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책 날개를 보니, 이 작가의 그 뭐랄까......어렴풋한 기억의 실루엣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이 책과 유사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도라 브루더>를 꼽았던데...말이죠..
<외곽도로>는 좀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 약력을 보니, 상복은 많은 작가로구나 싶네요...

호밀밭 2004-05-3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아하는 책이에요. 이런 분위기의 책, 너무 좋아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게 참 큰 공포라는 걸 느끼게 해 줘요. <도라 브루더>나 <외곽 도로>는 읽지 못했네요.

icaru 2004-05-31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저두 이런 분위기의 책을 좋아하죠...뉴욕 삼부작처럼요..ㅋㅋ
<도라 브루더>나 <외곽 도로>는 저도 읽지를 못했네요... 이 작가의 작품은 이게 처음이죠~!

물만두 2004-05-3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라 부르더를 싫어하는 이유는 요즘의 이팔관계와 상관있습니다. 제가 감정적이라서요...

icaru 2004-05-3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구낭.. 그런 역사적인 맥락의 것이 나오는군요..음... 저도 감정적인 편이라...<도라 부르더>를 잘못 읽었다간 자칫...혈압이 오르거나 빈정이 상할 수도 있겠구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