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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나는 인생
성석제 지음 / 강 / 199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와 함께 교정을 보고 편집을 하는 선배 언니 중에 도가 지나칠 정도의 특유의 꼼꼼함과 완벽주의로, 함께 일하는 상대방을 두손두발 다 들게 하는 놀라운 마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래서 그 언니를 완전주의자라고 부른다. 물론 소리내어 불러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석제의 이 소설집에 <완전주의자를 위하여>라는 단편이, 마치 '나를 읽어보라'는 듯 내 눈앞에 버젓이 있는게 아닌가.

소설 속에 묘사된 주인공 '완전주의자'는 이런 식이다.
'류 박사' 로 불리는 이 분은 무슨 학위를 갖고 있는지 모르겠으되, 텔레비전의 심야 토론에 나오는 어떤 박사보다도 더 박사처럼 생겼다. 그는 그가 사는 동네의 문관의 제왕이자, 배지없는 보안관에 정치평론가, 경제사가, 거기다가 유일무이한 언어학자이다.
특히, 언어학자의 면모가 돋보이는 것이, 그 동네의 약수터 옆에 만남에 광장이라는 푯말을 동사무소에 호통을 쳐서 '만남의 광장'으로 바꾸게 하였다. '뇌쇄(惱殺)'를 '뇌살'로 읽은 어떤 사람을 된통 망신을 주기도 하고, 그 동네 음식점의 차림표에서, '떡복기'를 '떡볶이'로, '김치찌게'를 '김치찌개'로 '육계장'을 '육개장'으로 일일히 지적하여 바꾸게 해 놓는다. 심지어 동네 미용실의 '스트레스 파마'가 '스트레이트 파마'로 까지 바르게 고쳐지도록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압권은 이런 완전주의자의 완전치 못한 일화를 하나 챙기는 데 있다. 드라마 <전원일기>를 <저녁 연기>로 잘못 알고 있는 일화와, 빨대를 영어로 '스트롱'으로 발음했던 일이다.

이 글을 읽고, 나에게 변한 게 있다면, 우리 회사의 완전주의자에게 전에 없던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완전한 사람은 진짜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것. 우리 회사의 완벽주의자 언니도 내가 보지 않는 어느 곳에서 가끔 이런 가당치 않은 실수도 하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게 아니겠느냐는, 다 그렇게 완벽하지 못하니깐 서로 부족한걸 채워 주며 어울리고 살아가는 게 아니겠느냐는 생각 말이다.

40편의 소설이 묶어져 있는 소설집이지만 총 페이지가 200페이지도 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짧은 글들이 뒤틀리고 우스꽝스럽기까지한 우리들의 일상을 코믹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이 작가 놀라운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혹세무민에 천박해질대로 천박해져서 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누가 재미없음을 말하는가..
그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단편적이고 가벼운 꺼리로서의 재미가 아니라, 요절복통할 인생의 아이러니로서의 재미를 위하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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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문성현 - 창비소설집
윤영수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착한 사람 문성현'.

이 책의 제목에는 어느모로 보나, 주인공의 신체적 장애를 암시하는 말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책을 펼치고, 잠시 후엔 주인공 문성현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뇌성마비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착한 '이라는 수식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착하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집의 현관을 나서는 순간 경쟁 사회임을 실감하게 되는 세상의 문법으로 읽어 낸 '착함'이란, 특혜받는 계층으로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요긴한 조건들의 '결핍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작가는 착한 사람의 모델을 신체 건강한 보통 사람이 아닌 불구의 몸을 가진 문성현을 통해 보여 주려 했을까?' 그건 아마도, 곧이곧대로 착한 사람, 다른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을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며, 과실을 고쳐 가는 착한 사람을 성한 사람들 중에서는 찾기가 어려웠던 때문은 아닐까?

요즘 세상에 착한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나조차도, 얼마나 시시때때로 다른 사람을 난처하게 하고, 세상의 명리, 번듯한 무언가를 좇아, 이리저리 휩쓸렸던지. 그러나 그저 이렇게 착한 심성을 끝까지 지키고 삶을 마감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따뜻한 인간됨을 만나는 것만으로 나는 감동을 받았다.

(이 책을 읽고 난 영향이 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12월을 마지막으로 다니던 회사를 조금은 홀가분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그만두었다. 곧이곧대로 본성을 잃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예전의 너그러움을 되찾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

내가 그동안 학교에서 읽고 배웠던 <백치 아다다>나 <벙어리 삼룡이>, 그리고 <난장이가 쏘아 올린...>에서도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겪는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 소설들에서는 주인공의 '불구의 몸'을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에 대한 일종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불구의 삶이 얼마나 불편하며, 그들의 삶이 얼마나 외로운가, 그의 불편한 신체에 대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얘기들은 접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뛰어난 소설가라 할지라도 자기가 직접 겪거나 보고 들은 일이 아닌데도 마치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실감나는 이야기로 풀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작가는 '인간 문성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그 불쌍한 삶 속에서 어떤 성취를 일구어 내는가를 그리고 그 소중한 인간적 성취와 더불어 길지 않은 삶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까지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의 작가가 정말 위대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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