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
윤대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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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그런 날이 있다. 국내 작가의 멜로(?) 소설이 읽고 싶어지는 즈음. 은희경이나 배수아가 쓰는 풍의 소설이라면 더더욱 OK. 젊은 날의 삶에 8할의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기'. 그것이 잘 되지 않고 삐걱일 때, 목마른 사람이 냉수 찾듯이 이런 류의 소설을 읽는다. 연애하는 건 정말 힘든 것이라는 걸, 강하게 동의해 줄 수 있는 소설 말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상 시간은 대략 15년을 오락가락한다. 일상에 매너리즘에 빠진 듯 건조하고 고독한 한 남자와 같은 이름(미란)을 가진,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두 여자가 나온다. 그리고 이 주인공 남자는 두 여자 미란 사이를 방황한다. 첫 번째 미란은 제주도에서 만난 첫사랑이자, 비련의 개인사를 간직한 여인이고, 두 번째의 미란은 현실의 아내가 되었다. 두 여인 모두, 행복한 생을 꾸린다고 할 수 없지만 현실의 미란 편이, 열대의 말레이시아에 도피 중이며, 병에 걸린 첫사랑 미란보다야 그나마 행복하지 싶다. 그럼 왜 두 미란은 행복하지 않은가. 먼저 현실의 미란은 주인공 남자의 공허한 마음을 간파한 때문이고, 첫사랑 미란의 삶에 불행은 스스로 타고난 운명의 덫 때문인데, 첫사랑 미란의 불행한 운명의 그림자는 주인공 남자의 일상의 무의식에까지 그늘을 드리운 것이다.

이름이 같은 두 여자 사이에 한 남자의 갈등이라니....어디서 많이 본 듯한 멜로적 구조물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자칫 상투적인 설정에 지극히 현실다운 옷을 입혔다. 시종일관, '다음엔 뭔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하며 조리는 마음으로 읽어내리게 하였으니...... 윤대녕의 전작들에서 보여지던 모호한 듯, 그러나 어느 순간 목덜미를 잡아끄는 듯한 매력은 이 소설에서 확실히 덜해졌고, 대체로 서술이 신변잡기적으로 변했다. 이를 애석하게 독자들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글줄에서 현실감이 많이 느껴지고, 속독이 가능해졌다는, 즉 빠르게 읽힌다는 점에서 <미란>을 통한 이 작가의 또다른 시도( 작가는 이번 작품에 “과감하게 멜로 구조를 도입했다”고 했다.) 가 성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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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 - 2000 제2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만교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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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소설을 두고, 심심한 일요일에 읽어보라 했었던가, 어제가 바로 그 심심한 일요일이었기에, 나는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구한 이 책을 읽었다. 그 지인은 '이 책 어떼?'라고 묻는 나에게 '그냥그래.'라고 답해 주었다. 내가 물었듯, 누군가가 나에게 이 책을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거 같다. '별로야.'

'별로인데, 왜 서평을 쓰고 앉았다지.' 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나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궁색한 변명을 대신할까 한다.

최근에 알게 된 한 친구가 말하기를,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책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단 자기 얘기를 하기 위한 핑계라고 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행위는 바로, 어떻게 해서든 타인의 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무의적 본능의 반복이며 지극히 생물학적인 노력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이런 독서 행위를 한 마디 쉬운 말로 정의하면 '혼자 노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했다.

각설하고, 책 읽는 행위가 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했던 거였다면, 나는 도데체 조금은 파격적이고 과격한 제목의 이 소설에서, 어떤 글귀가 나에게 말을 걸어 오길 바라며,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작가가 나에게 '결혼은 이러이러하기에 미친 짓이라고 하는거야, 나의 이러이러하기에를 들을 소감이 어떼? 내 말이 살벌하게 들어 맞지?'라는 목소리를 내지르기를, 아니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사실은 엄청 울겠다는 의미이면서도 겉으론 죽어도 눈물 안 흘리겠다고 했던 그 방식대로, 이 소설의 제목이 '결혼은 미치(도록 행복한)ㄴ 짓이야. 라고 말해주길 바랬나... .

사실, 이 소설에, 소피스트들의 괘변같이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독특한 언어 유희 또한 곳곳에 보임에도, 나에게 별로 남을 게 없는 소설쯤으로 전락되어버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인간이 만나 티격태격이나마, 결국에는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의미의 (결혼) 생활에 대한 어떤 함축이나 은유 같은 것은 쏙 빠진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시니컬한 입장을 보인다는 점. 둘째, 주인공 나(그 남자) 포함, 모든 등장 인물들은 진실(적어도 사랑의 유무에서)되어 보이지 않는 남녀 관계망(일례로, 주인공 남자의 친구인 규진은 유리와 결혼을 한 상태이고, 신혼이다. 표면적으로는 유리와 어떤 불만과 갈등이 있는지 독자인 나는 정보 하나 주어듣지 못한채, 옛친구인 지영과 바람을 피고 있는 규진을 보게 된다. 게다가 아내인 유리는 임신 중인데...)을 갖는다는 점.

성인에게 있어, 결혼이란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선택 사항이긴 하다. 그럼에도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당면한 현실이다. 따라서 글을 쓰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누차 다루고, 공공연하게 말해지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모순'과 같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것에 대해 작가가 풀어낸 방식이 어쩐지 한물 간 농담처럼 여겨지니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아무리 그럴싸한 문학적 장치로 포장하여 내놓았다해도,) 재탕삼탕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는 내 내부의 소리를 듣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렇다.

이 소설에서 보면, 주인공 그 남자가 또다른 주인공 그 여자(두 주인공 모두 작중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아, 옮길 수 없음.)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봤어? <정사>는? .....'

이 소설 또한 영화로 만들어졌다하니, 아마도 위의 작중 인물들이 나누던 대화 속에 열거된 우리 나라 영화의 아류작 한 편이 또 나온 모양이다. 비디오로나 나오면 소설과 비교도 해 볼겸 한번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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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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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요일 저녁,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은 아마존의 밀림을 배경으로 하는 이 책,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이고, 어제 오후에 본 비디오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부제 : 부에노스아이레스)'이며, 어그제 본 텔레비젼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파라과이에서 있었던 한인 남매 살인 사건(파라과이의 졸속 형사 사법 처리 제도에 관한 고발이랄까)에 관한 것을 다루었다.

지리적으로, 우리 나라와 가장 반대편에 있는 남미는, 인천에서 출발하는 비행길 직항 노선으로 그 거리감을 따지자면 대략 서른두 시간이라는 간격을 두고 있다. 이런 남미는 당연히 나에게는 신비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 책의 작가 루이스 세풀바다에게 붙는 수식어는 무척 많다. 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망명길에 올랐다가, 연극단도 꾸린 적이 있으며, 기자로도 활동했고, 왕성한 여행가에다가 환경 운동가이기까지 하다니. 작가가 무척 바쁘고, 고단하며 험난하고 모험적인 인생을 살아왔으리란 건 눈감고도 알 거 같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의 문체는 약동적이며, 플롯은 분명하고 선이 굵다. 한마디로 읽는 재미가 나는 소설이랄까. 게다가 마지막 부분의 노인과 살쾡이의 대결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아마도 두 등장 인물(?)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참으로 매력적인 한 사람(노인)과 동물(살쾡이)이 나온다. 노인은 그림 속에나 남겨진 다정했던 몇십년 전에 죽은 마누라를 가슴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순애보이자,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읽을 수는 있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방식의 연애 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아내가 죽자, 이후 수십년을 인디오들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살아온 탓에 밀림과 자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소설에 언급된 것 중,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는, 소리에 민감한 박쥐들이 위험을 느끼면 재빨리 몸을 가볍게 하고 날기 위해 뱃속에 있는 걸 몽땅 쏟아낸다는 거였다. 즉, 박쥐들을 놀래키면 여지없이 배설물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력적인 두 번째 주인공(?)은 읍장 뚱보나 밀렵군 양키들 같은 시종잡배, 여타의 인간들보다 훨씬 위풍당당한 살쾡이이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살쾡이가 노인과 생사를 가름하는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엔 살쾡이의 죽음으로 이 대결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싸움은 지구상에 잡다구리하게 존재하는 오만한 인간들의 치졸한 대결들과는 비할 수가 없다. 이 싸움의 발단은 무엇이었나? 싸움을 먼저 걸어온 쪽은 암살쾡이의 어린 자식들과 수컷살쾡이 마저도 무심코 쏘아 죽게 만든 개발업자이자 밀렵꾼들인 양키들이다. 이 동물은 인간들이 걸어 온 싸움에 맞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 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살쾡이는 짐승들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몸소 보여 주고 있다. ('양키들 대 살쾡이'의 대결이면 대결이지, 왜 우리의 다크 호스인 '노인'과 위풍당당 '살쾡이'의 대결이 되어야 하는지 이 역설적인 모순은 이 책을 읽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다.)

이 책을 번역한 정창이라는 역자는 꽤 실력있는 번역가인 것 같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 취향의 견해이다. 그럼에도 내가 실력있는 번역가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번역서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와 로사 몬테의 <시대를 앞서 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를 그의 무난한 번역 덕분으로 꽤 수월하고도 쉽게 읽어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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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 모험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영표 옮김 / 하문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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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일상 생활을 살아간다.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에서였던가, 삶은 때로 우리를 속일지라도 일상 생활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없다고 했다. 때맞춰 먹여주고 문지르고 닦아주기만 하면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상 생활의 와중에 모험을 꿈꾸는 한 청년이 이 소설 속에 나온다.

일상 생활의 모험이라는 제목 자체에 아주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이 소설. 일상 생활에서 모험이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공 청년은 일상 생활에서 모험을 꿈꾸었던 죄(?)로 좌충우돌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입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소설의 첫 문구는 이렇게 시작된다. '당신은 소중한 친구가 자살했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의 고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 여기서의 친구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데 즉, 주인공은 등장할 때부터 이미 죽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구성은 살아남은 '나'라는 존재가 죽어버린 모험가 친구와 얽힌 일담을 회상하는 구성 방식이다.

주인공 청년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청년 사이키치는 '20세기 후반의 철학적 명상가'라 할 수 있다. 특히 노인과 동물들에게는 자상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범죄자적 소질도 가지고 있었다.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주인공의 모습은 바로 '모랄리스트'의 면모였다. 말그대로, '도덕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의 모랄리스트는 '인간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이키치는 이렇게 '나'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지. 본질적인 문제는 모두 스스로 생각해보고, 자기만의 해답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 즉, 그는 백과사전적인 지식에 의존하고 모든 사유에 있어서 역할 분담을 체계가 확실한 현대 사회와는 괴리되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머리만으로 생각해 낸 원칙과 도덕은 두 가지 성격을 갖곤 한다. 먼저, '반사회적인 성격'이 그것이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비인간적인 지배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년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많은 일탈 행위들을 저지른다. 둘째는 '행동적인 성격'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도덕 원칙은 글자로 나타낼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 하면 궁극적인 삶의 모랄은 인간의 근본적인 삶에 대한 방식이지, 글자로 나타낸 어떤 지식이 그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란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사이키치는 소설가인 '나'의 소설을 '갑옷과 투구를 걸친 무거운 글자들'이라고 폄하하고, '나'인 소설가가 자기 기만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사이키치는 사상의 실천을 보이기 위해, 연극계에 투신하려 하며, 억지로 외운 대사를 앵무새처럼 외치는 연극을 타개하고 스스로 연극의 혁신을 구하기 위해, 재벌의 딸과 결혼을 감행한다. 성적으로 완벽한 결합을 이루었던 열여덟 살의 아내 히미코를 버리고 말이다.

일상 생활에서 모험을 꿈꾸었던 한 청년은 결국 스물다섯살의 나이에 죽음으로 삶을 완결지었다. 사상은 행동에서 나온다는 말을 실천하고 싶었던 치기어린 그 인물은 자신이 그토록 외치던 몸으로 보여 주는 혁신적인 연극 한 편을 끝마친 것이다. 이 소설은, 방금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나에게 다음과의 질문을 던져 주고 있는 것 같다. '모험의 끝은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죽음이 두려워 당신은 모험을 포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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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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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러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저 멀리, 장화홍련전으로 가면 두 자매를 사악하게 괴롭히던 계모가 허씨였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 생활의 애환을 노래하던, 그 주인공 생원이 허씨였고,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백면서생으로 글만 읽다가 갑자기 돈모으는 재주를 부리는 위인으로 뒤바뀌어, 지상 낙원을 꿈꾸는 주인공 양반도 허씨다. 인생의 중요한 국면마다 피를 팔아 해결을 보는 이 소설의 주인공 허삼관도 허씨이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거다. 참 허허롭다. 이렇게 싱거운 소리로 이 글을 시작하는 건 뭘까, 이건, 이 소설, 내내 삼관이네 가족에게 닥치는 모진 인생 역정 속에서도 유유하게 흐르던 해학을 내가 전수받고자 애썼던 결과인가보다.

이 책의 유난한, 처절함 속에서 나오는 희극미와 해학의 압권은 여러 주인공의 행태를 통해 나타나지만, 그 중에 백미는 바로 삼관이이다. 그가, 친자식이 아님이 밝혀진 일락이만 뺀 온 식구를 데리고 국수를 먹으러 가는 장면이나,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임분방과 바람을 피는 장면에서는 '허삼관 참 소갈머리 없다,' 하기도 했지만 다음에 벌어지는 사건에서, 일테면 일락이를 따스하게 감싸고, 아내 허옥란의 결혼 전 일을, 당신도 잘못(하소용과의 일) 나도 잘못(임분방과의 일)이라고 덮어주는 일 등등, 그의 희극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면서 '사람살이가 다 이렇지 뭐.'하게 된다.

내가 정말 박장대소하며 읽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었다. 결혼전 하소용과의 일로 곤란함을 겪던 허삼관 마누라 허옥란이, 길거리에서 하소용의 부인과 대판 싸움이 붙는다. 동네 사람들이 이 사실을 허삼관에게 알리는데 허삼관이 동네 사람들의 반응에 응수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다. '삶은 돼지가 뜨거운 물 무서워하는 거 봤수'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하는 부분이었다. 삶은 본래 싸움터처럼 질펀한 것. 여간한 일이 아니라면 일일이 핏대를 올리고, 충격을 받거나, 당황할 것까진 없다는 듯한 뉘앙스가 이 삶은 돼지~ 운운에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소설을 읽다보면 대개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거 같다. 약간의 억지(?)의 요소를 보이는 이 내맘대로의 구분은 이렇다. 작가가 머리로 쓴 소설과, 몸으로 쓴 소설. 이 소설을 굳이 껴 넣자면 어디에 넣을 수 있을까. 작가의 체험을 토대로한 육성이 녹아 흐른 작품인지는 내 수준에서 감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머리로 쓴 관념 소설이 아니기에, 주인공들의 삶의 극한적인 고통에서 유발되는 웃음과 울음이 독자로 하여금 더더욱 값지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작가의 다른 소설 <살아간다는 것>과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를 얼른 수소문하여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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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3-2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의 독서 일기를 읽다보니 그런 말이 나온다. 모국어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중국 사람들은 축복받은 느낌이었을 거라는... 모든 여타의 찬사와 칭찬의 말을 짧고 간결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지 않을까...

icaru 2005-08-22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신용의 <고백>1994에도 밥을 사먹기 위해 혈액원에 피를 팔러 가는 장면이 마지막에 나온다.
눈 내리는 겨울날 주인공이 피를 팔려 갔는데 의사가 "당신은 이제 피를 뽑으면 죽어요"라며 체혈을 거부한다.
주인공은 혈액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눈을 미사포처럼 쓰고 있는 지게를 발견하고, 지게에 묻은 눈을 턴 후 삐그럭거리는 지게에 돌멩이로 못질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 어깨에 둘러메고 청계천 쪽으로 사라진다. 바이러스에겐 고단위 항생제가 생존의 위협이자 그 상황이 곧 새로운 종의 기원이 되듯, 즉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주인공을 지게꾼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