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상자 시론(詩論)


종이 상자가 납작하게 접혀 있다

종이 상자는 물건을 담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이 상자에도 글씨가 있다

종이 상자를 나타내지 않고

내용물을 대변한다


주로 흔한 재생 종이로 만든다지만

파도 모양 골판질로 음양의 힘을 깨치며

중심에 어께 맞댄 비움의 뼈대를 촘촘히 세운다


종이 상자는

나란히 연대하고

차곡차곡 공간을 절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세상의 마음을 잘 담아내는

시가 더 깊은 시라면)


종이 상자는

과묵한 시집이다

나무처럼 우직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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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서늘한 날에

서늘한 대화를 읽네

오직 정재승만이 가능한 이야기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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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들어 주는 벤치 - 열네 명의 할머니, 한 개의 벤치, 오십만 명을 살린 마음 치유의 혁명
딕슨 치반다 지음, 주민아 옮김 / 판미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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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똑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나잇값을 해야 합니다. 나잇값이라고 해서 단순히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하는가를 계산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이에 맞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노인의 나잇값이 도서관이라고 하면 정말이지 마음의 달인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딕슨 치반다의 『마음을 들어주는 벤치』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머니들을 만나려면 벤치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는 게 바빠 지척에 두고도 벤치에 갈 일은 없습니다. 설령, 벤치에 간다고 하더라도 혼자 있으면 왠지 머쓱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벤치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 순간, 당신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삶의 중심에서 넘어지는 고통을 당합니다. 때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커먼 함정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약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의 세계가 무너지면서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 엉망진창이 될 때입니다. 더군다나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 사회적 낙인 때문에 무서워서 죽을 지경입니다. 삶이 가속화되면서 우리의 감정 또한 기복이 극도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구멍이 생기면서 살아갈 이유마저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럴 때 최선의 치료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정신과 전문의라는 경험을 통해 현대의학이라는 전문적인 치료보다는 ‘공감과 경청’이라는 치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신건강을 위해 약물이 만연한 현실에서 오히려 저자는 스토리텔링에 공감합니다. 이유인즉, ‘시간을 초월하는 공동체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혼자서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모순적으로 사람이 혼자서 치료하려고 하다 보니 상상하기 싫은 불행한 결과를 남깁니다.

 

이 책에서 내가 받아들인 벤치는 이제까지와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짊어지기 힘든 삶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워 잠시 쉬는 공간이 아닙니다. 제목에 나와 있듯 마음을 들어주는 벤치는 자신의 내면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의 아픔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함께 응답할 때 비로소 큰 우정(友情)이 됩니다.

 

14명의 할머니에게는 공동체의 지혜가 있습니다. 인터넷에 우울증이라는 세글자를 치면 수면, 식욕, 무기력 등 정신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사를 읽다 보면 괜히 없던 걱정까지 생깁니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할머니들이 쓰는 말에 의하면 ‘쿠풍기시사’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과도한 생각’입니다. 결국 문제는 우울증이라는 병명의 실타래를 감아올리며 들여다보면 과도한 생각이 엉켜 있습니다. 마음이 아픈 상담자가 ‘마음을 들어주는 벤치’에서 할머니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3단계의 과정을 통해 상담자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즉,

 

쿠부라 풍그와(마음 열기)

쿠시무드지라(희망과 용기 주기)

쿠심비사(역량 높이기)

 

삶의 회복력이란 무엇일까요? 삶의 고민을 짊어지고 벤치에 온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끝났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지난날의 간절한 고뇌만을 발견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현실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과 용기를 줘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벤치를 찾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다독이고 회복하는 힘을 고스란히 끌어안아야 합니다. 오늘날 마음을 들어주는 벤치가 우리가 함께 살아갈 쉼터이자 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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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배봉산 근린공원

에 갔지 사는 게 바빠 지척에 두고도 십년 동안 한번도 가

보지 못했던 그곳 상수리나무라는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고독인지 낙엽인지 죽음인지 삶인지 오래 묵은 냄새

가 푸근했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는 바퀴를 돌리며 혼자 놀고 있

었지 어차피 잠시 동안만 그렇게 함께 있는 거지 백년 후에

는 아이도 나도 없지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아 오래전 먼저

저를 안아버렸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줄 테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그것에 갔지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상수

리나무를 만나러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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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문, 그리고 마주 보는 다정함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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