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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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에 갔습니다. 갈매기들이 잠시나마 동행했습니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해명산(海明山)으로 갔습니다. 이른 봄이라 해명산에는 봄꽃이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산에 올랐습니다. 머지않아 호흡이 빨라졌습니다. 그럴수록 주위의 풍경이 흔들거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길가나 바위에 앉아 쉴 때면 호흡이 한결 부드러워집니다. 무엇보다도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기암절벽이며 산들이 어깨를 겨룬 산세의 위용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순간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깨닫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여행의 기술』에서 이와 같은 감정을 ‘작아진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산에서 부는 바람이 그냥 바람이 아니라 초록색 바람이라고 했을 때 산에서 느낌 또한 그냥 느낌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초록색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록색이 말해주듯 숭고한 자연 광경을 보고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저자 말대로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 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행하는 것은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가슴에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높은 산에 올랐다거나 몇 시간 만에 정상에 올라갔다거나 자랑하는 것은 진정한 산행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산행은 산의 높이가 아니라 마음의 높이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워즈워스가 말한 ‘시간의 점’입니다. 그는 자연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 때마다 현재의 어려움과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행의 기술』은 매력이 돋보입니다. 어느 여행서와 달리 여행의 심리적인 문제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여행하면 시작과 끝이 보는 것이며 먹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물론 이것을 가볍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다운 여행의 기술은 곧 삶을 긍정하는 아름다음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가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몸은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인즉 여행하는 남들처럼 여유롭지 못해 정작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떠난다고 해도 잠은 어디서 자야 할까? 노심초사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여행의 가짜 욕망입니다. 여행의 진짜 욕망은 플로베르가 말한 대로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라도 떠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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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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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그곳으로 가는 길에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사람들은 벚꽃이 하늘거리는 빛깔의 향연 아래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따사로운 봄날의 오후였습니다. 일찍이 소동파 시인은 춘소(春宵)라는 시에서 ‘춘소일각지천금(春宵一刻指千金)’이라고 했습니다. 풀이하자면 봄밤의 일각은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봄날의 밤이 이런데 낮은 이보다 더 할 것입니다.

내가 그곳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툼한 책은 아프카니스탄이라는 나라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장편소설입니다. 전쟁, 살인, 약탈, 강간…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물컹거렸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나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비극입니다. 더구나 폭탄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터집니다. 최소한의 사람에 대한 예의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폭탄이 터지는 밤을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카불의 사진전」을 보고 싶었습니다. 눈으로만 읽었던 그곳 사람들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의 숨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비록 두려움의 정체를 29장의 사진이 다 보여줄 수 없었지만 어쩌면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리암과 라일라 같은 두 여자의 영혼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29장의 사진 하나하나를 볼 때 마다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사진이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이 책은 내 가슴을 슬프게 지나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프카니스탄의 참상을 보았습니다. 알듯 하면서도 알 수 없는 고통이 온 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들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슬픔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남의 일이라고 하며 침묵했던 양심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더 이상 그곳이 파괴되지 않기를 희망했습니다.

페르시아어로 ‘꽃 속에 있는 물’이라는 뜻을 카불은 예로부터 문명의 십자로였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공존했으며 특히 한때는 불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대 인도에서는 카불을 이상의 도시로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한 여행가는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찬란함도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암울한 역사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곧 공산주의에 맞서 무자히딘이 독립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자히딘이 정권을 쟁취했을 때는 민족 간의 분열로 인해 수많은 내전이 수많은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전쟁의 당사자는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이 오늘을 기약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면서 엄격한 이슬람주의로 인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프카니스탄의 역사는 고통에 가깝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내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다거나 안타깝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원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누군가가 무섭다고 고백하는 것이 오히려 맘 편한 일입니다. 누군가는 신(神)이기도 하고 민족(民族)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믿는 그들은 누군가를 믿지 않는 상대방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가족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딸을 강간하게 합니다.

생각해보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6.25을 겪어야 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흘렸던 눈물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여전히 그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은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립니다.『천개의 찬란한 태양』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가장 무서운 무기이라는 것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또 다른 눈물이 눈시울을 젖게 했습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순식간에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바로 이슬람 국가의 뿌리 깊은 전통 때문입니다. 즉 여성들이‘부르카’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르카는 눈만 빼고 온 몸을 가리는 옷입니다.

우리와 사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나라든지 그들의 문화와 함께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카가 여성의 차별과 희망을 상징하는 대명사된 것은 너무나 모순적입니다. 분명 그것은 감옥이었을 것입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한 평생을 숨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슬람 여성들이 사는 단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것은‘타하물(참는 것)’입니다.

그동안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을 보면 단지 독특한 의상을 입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라시드에 의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마리암과 라일라를 생각할수록 타하물이 이런 것이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라시드는 전형적인 이슬람주의자입니다. 그는 하라미(사생아)로 태어난 마리암과 결혼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이었고 마리암은 15세였습니다. 그는 한 손에 코란을 또 한 손에는 돈으로 마리암에게 사소한 것 까지 조롱하고 경멸했습니다. 가령, 마리암이 “공산주의가 뭔데요?” “칼 마르크스가 누군데요?” 몰라서 물어보면 “춥고(입 닥쳐)”라고 쏘아댑니다. 마리암은 그와 결혼 생활하면서 두려울 때는 견딜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마리암이 라시드를 떠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남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면 라시드보다 집이라고 해야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라시드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 중에서 집이 제일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그녀에게 집은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삶의 굴레인 동시에 희망이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집을 떠났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지겠지만 그 끝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제 목숨을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가 엄마가 되고 싶은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비록 아기를 낳다가 7번 실패했지만 그녀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 자기의 아까운 생을 사랑할 방법이라는 것을 진솔하게 들려줍니다.

마리암은 굳이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해도 그럴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위험천만하고 앞날은 민둥산만큼이나 갈색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희망은 무모해보입니다. 더구나 딸 같은 라일라가 라시드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오면서 뜻하지 않는 반쪽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이제 라시드의 집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라일라 또한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습니다. 결국 라일라에게 남아있는 것은 운명적으로 마리암과 함께 살아야 하는 라시드의 집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라일라는 딸을 낳고 아들을 낳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낳기 전에 라일라는 심각한 갈등합니다. 그녀의 딸은 사랑했던 타이크의 선물이었다면 아들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일라는 아들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라일라는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이 부분이 무척이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두 여성을 괴롭혔던 수많은 고통을 보며 적지 않게 분노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들의 마음은 따뜻했으며 아물지 않을 것만 같았던 상처마저도 “나는 엄마야.”라고 말하던 잔잔한 외침이 아직도 귓속을 맴돌았습니다. 피보다 눈물이 날카롭기 때문일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녀들이 참고 견뎌야 했던 아픔을 기꺼이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라일라가 라시드의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도 마리암이 라일라를 위해 폭력적인 라시드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이순간의 삶을 이해하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라일라가 불안한 카불로 되돌아갔던 것도 용서와 함께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카불의 미래가 없다고 하며 떠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일라는 여자가 아니라 엄마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카불의 사진전」을 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태양이 떠 있고 그 태양 아래 벚꽃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 나오는 마리암과 라일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찬란한 인생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한창 꿈 많고 아름다울 나이에 오히려 삶과 죽음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할퀴고 간 혼돈 속에서 웃음이 말라버린 얼굴은 건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두 여자는 마침내 엄마와 딸이 되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살아가는 방법이 이 보다 더 극적일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있을 때 두 여자는 적이 아니라 동반자로 ‘사와브(착한 일)’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지 연약한 여자라고 해서 사랑받기 위한 사와브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와브! 이것이 매혹을 잃어버린 도시 카불이 말하는 위로의 메시지였습니다. 만약 사와브가 없었다면 카불의 비극은 여전히 포연(砲煙)이 자욱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슬람 여성들이 차별을 온 몸에 감싼 부르카를 입으며 망사로 세상을 보는 것 보다 더 흐릿합니다. 어쩌면 두 여자가 보여주는 가슴 떨리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위로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사와브입니다. 그것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무방합니다. 찬란한 태양 아래 같은 인간으로 사는 삶의 문제입니다.

이 책을 통해 아프카니스탄의 고통을 봤습니다. 고통이라는 단어를 되씹을수록 가슴이 저렸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똑같이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아프카니스탄에서 폭력적인 한 남자의 아내가 된 두 여자의 운명은 이슬람 사회의 모순을 눈물겹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걸까? 라는 고민 때문에 답답하다 못해 막막했습니다.

과연 신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잘못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카뮈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 세상 모든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그 책임은 전능한 신에게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인간이 자유롭기에 그에게 책임이 있다면 신은 전능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잘잘못을 논하기 보다는 우리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폐허 앞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우리가 정말로 가슴 벅차게 ‘사와브’를 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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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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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철학하면 소크라테스를 떠올립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너무나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소크라테스의 정신은 하나의 분수령이 됩니다.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거인입니다. 그 거인의 어께위로 플라톤이 오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플라톤의 어께에 오릅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위상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중요한 철학자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사에 있어 최초의 철학자는 놀랍게도 탈레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탈레스는 최초의 자연철학자입니다. 만약 철학이라는 것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봤을 때 자신을 ‘철학자’로 불렀던 피타고라스가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우리가『철학의 탄생』에 주목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탈레스, 피타고라스 같은 철학의 비주류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들 자연철학자들 즉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동안 우리와 함께 호흡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의 주장이 비합리적이라는 한계에 부딪치면서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고 맙니다. 보다 실천적인 해결책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가령, 플라톤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물질을 불, 흙, 공기, 물, 우주로 보았습니다. 이를 기하학상의 정다면체로 했는데 이들을 각각 정4면체, 정6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피타고라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피라미드에서 불이, 주사위로부터 흙이, 정8면체에서는 공기가, 정 12면체에서는 우주가, 정20면체에서는 물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또한 칼 포퍼가 인간 사상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대담하고 가장 혁명적이며 가장 인상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던 것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관입니다. 그는 지구가 떨어져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물 위에 떠 있어야 한다는 탈레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리고는 등방적(等方的) 대칭이라는 원리를 비판적으로 적용하여 “지구는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우주에 떠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자연철학자들에 대한 탐구는 고대 그리스 정신이 탄생하는 비밀을 밝혀줍니다. 그들을 자연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까지 신화의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으로 사유하면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날처럼 실험으로 증명될 수 없었으나 그들의 사유는 합리적인 사고와 직관을 결합하여 보편적 법칙성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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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의 복수 -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가 경고하는 인류 최악의 위기와 그 처방전
제임스 러브록 지음, 이한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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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촨성 지진을 비롯한 지구온난화의 재앙이 갈수록 사나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남의 나라 일만 같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타인의 고통을 잊고 만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렇듯 무감각해진 것은 그만큼 고통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하자면 우리가 가이아의 직격탄을 피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동안 지구를 동물로 비유하자면 낙타와 같았다. 대다수 동물들과 달리 낙타는 두 가지 안정 상태로 체온을 조절한다. 뜨거운 사막의 낮에는 체온을 40도에 가깝게 조절한다. 그리고 추운 사막의 밤에는 체온을 34도로 조절한다.

가이아 이론에 따르면 지구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지구를 하나의 진화하는 시스템으로 긴밀하게 결합된 생물, 지표면암석, 바다, 대기 전체로 이루어진 자기 조절 시스템으로 보고 있다. 덧붙이면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생명체로 바라보면서 지구가 생물에 의해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낙타에게 더위나 추위의 압박이 너무 강하면 새로운 안정 상태로 옮겨가는 데 가이아의 심리상태도 다르지 않다. 이것이 곧 우리에게 비극적인 운명으로 다가올 새로운 현상인데 제임스 러브록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가이아의 복수’라고 진단하고 있다. 한마디로 가이아와 인간의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가이아의 복수의 원인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원인을 통찰력있게 분석하면서 인간의 지속 가능한 발전 때문이라고 한다. 아울러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3C를 적게 쓰라고 한다. 3C는 연소(Combustion), 소(Cattle), 전기톱(Chainsaw)이다. 이 3C의 비례하는 정도에 따라 그만큼 가이아의 복수가 공포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는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가령, 육식을 자제하는 것처럼 인간의 ‘지속 가능한 퇴보’를 주장한다.

이렇듯 이 책을 읽어보면 환경오염 즉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놀라만한 주장은 다른 데 있다.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환경오염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가령 레이첼 카슨이『침묵의 봄』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사라진 것을 두고 DDT의 남용이라고 했다. 반면에 그는 새들의 숲을 경작지로 개간할 때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원자력같은 핵에너지가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이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산화탄소, 메탄 같은 화석에너지가 비효율적이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핵에너지의 효율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밖에도 재생에너지 및 유기농에 대한 달갑지 의견은 기존의 통념에 반대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지구온난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로 인해 우리를 삽시간에 집어삼킬 엄청난 태풍이나 지진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지구온난화에 중독되어 있다. 더 늦기 전에 이 책『가이아의 복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에게 닥친 위기를 기회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할 때이다. 당신은 뜨거운 지구에서 살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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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 리라이팅 클래식 5
이혜경 지음 / 그린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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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낯설은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순임금의 아버지가 살인을 했다면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맹자의 주장은 평범한 일상을 반대합니다. 즉 “ 몰래 아버지를 업고 도망쳐 바닷가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즐거워하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진심 상」25)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어떤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데 오늘날 법치국가라는 것을 고려해볼 때 법(法)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맹자는 법보다는 부자(父子) 간의 인륜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맹자를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라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맹자, 진정한 보수주의 길』을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주의자들은 경제적 인간입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도덕적 인간입니다. 경제적 인간이 이익을 우선시한다면 도덕적 인간은 바로 인(仁)과 의(義)를 중요시 합니다. 결국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곧 도덕적 인간의 최상인 군자(君子)입니다.

맹자가 보수주의자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전국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로 되돌아가라고 합니다. 전국시대에는 부국강병이 목표인 전쟁의 시대였으며 종법질서에서 횡법질서로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기반이 와해되어 개인의 가치가 발달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상하관계에서 평등한 사회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맹자가 이를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인륜(人倫)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말한 인륜은 성선설(性善說)입니다. 성선설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착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맹자가 말한 성선설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고난 바탕을 따른다면 누구나 선하게 될 수 있느니 이것이 내가 말하는 본성이 선하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선하지 않게 되는 것은 타고난 바탕의 잘못이 아니다.”(「고자 상」6)고 합니다. 덧붙이면 우리가 현실에서 사람에 대해 선하다 혹은 악하다 하는 것은 타고난 본성(善)이 아니라 도덕적 본성(德)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타고난 본성을 양성(養性)해야 합니다.

이러한 맹자의 윤리철학이 정치철학으로 실현되면 ‘왕도’(王道)가 되는 것입니다. 왕도는 도덕적인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패도(覇道)는 힘으로써 백성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맹자는 패도정치를 행사하는 군주를 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사내(夫)라고 하면서 누구라도 왕도정치를 하면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해 맹자의 사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뜻밖이었는데 진정한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저자의 획기적인 견해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에 비교하면 시대에 역행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회가 나날이 진보하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의 삶이 예전만큼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맹자는 “입이 좋은 맛을 추구하고 코가 좋은 냄새를 추구하는 것은 본성에 속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명(命)이므로 군자는 그것을 본성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자간에 인(仁)이 있는 명에 속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본성에 있으므로 군자는 그것을 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진심 하」24)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외부적인 노력에 의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명입니다. 반면에 내 자신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본성인 것입니다.

이렇듯 맹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이 게을러진 것을 꾸짖고 있습니다. 맹자를 통해 우리는 위대한 전통에서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서구의 가치가 갈수록 팽창하고 있는 현실에서 맹자의 사상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우선적으로 도덕적 인간에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보수주의 예언자 버크가『성찰』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후대를 전망하지 않는다.”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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