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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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 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우리 생각에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뭘까요? 밀란 쿤데라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아틀라스가 그의 어깨에 하늘의 천정을 메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 올리는 역도 선수라고 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다면 베토벤은 무거운 것은 긍정적이라고 간주했습니다. 베토벤은 4중주의 마지막 악장을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으로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마지막 악장 첫 부분에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라고 써넣었습니다. 그것은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토벤의 음악을 신념으로 했던 외과의사 토마시는 어떤 결정을 신중하게 내릴 때마다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된 것처럼 ‘그래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테레사가 그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은 여섯 우연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녀가 술집 여종업원이라는 것, 그 술집에 그가 있었다는 것, 그가 테이블에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였던 책을 펼친 것, 저쪽 세계의 이미지였던 베토벤 음악이 흘러나온 것 등등 그녀는 그가 미래의 운명임을 알아챘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과 이 년 남짓 살고 이혼한 그는 사랑의 부적격자라는 생각에 여자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과 갈망 사이에서 ‘에로틱한 우정’이라는 타협점을 찾았는데 누구도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는, 감상이 배제된 관계만이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을 깨트리면서 그녀를 돌봐주었습니다. 그에게 동정은 ‘고통’(passio)이 아니라 ‘감정’(sentiment) 때문에 무거웠습니다. 즉 타인의 고통을 차가운 감정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동정(sentiment)에 굴복한 그는 화가였던 그의 애인 사비나에게 부탁해 그녀를 출판사의 사진부에서 일하게 해줬고 결국에는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삶에 열정적이었던 그녀는 그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진기사가 되어 소련군의 침공 이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사진을 수백 통 찍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에 끌려갔던 툽체크가 돌아와 정복자의 타협안을 낭독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그녀는 소련군에 대한 증오의 축제가 이제 끝났다는 모욕감으로 그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했습니다.

 

스위스에서 그녀는 자신의 사진에는 관심도 없는 것에 놀랐습니다. 더구나 선인장이나 장미 같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허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사진을 포기하고 집에 있는 것에 만족하려고 하자 누군가 그녀에게 그것은 시대착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극복할 수 없는 추락 욕구라는 현기증을 느꼈으며 자신의 허약에 도취되어 그것에 저항하기 보다는 투항하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프라하로 떠나자 그녀와 칠년 동안의 사랑이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했던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마술적 공간 속에 들어가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동정에 굴복하여 이번에는 반대로 그가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병원 일을 하면서도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공산주의는 범죄자들의 창조물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그는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어째든 나라의 불행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도 몰랐다고? 그래서 결백하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알고 그랬는가? 아니면 모르고 그랬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그는 ‘오이디푸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쳤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자기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그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의 눈을 뽑아야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토마시는 오래전부터 공격적이고 엄격한 ‘그래야만 한다!’에 회의를 느껴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따라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무거운 의무였던 그래야만 한다!라는 것이 너무 강렬하여 그래서 더욱 강하게 반항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래야만 한다!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까요?

 

한편 그의 애인 사비나는 공산주의를 미학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사비나에게 여자로 사는 것은 부조리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녀의 삶을 유혹한 것은 정조가 아니라 배신이었습니다. 정조가 청교도적 이었다면 배신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미술대학 당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사회적 리얼리즘을 의무적으로 그려야했지만 피카소처럼 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낭만적 향기가 빠져버린 추한 단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에게 공산주의 세계의 추함은 공산주의가 뒤집어쓰고 있는 아름다움의 가면, 달리 말하자면 공산주의라는 키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격분해서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라고 했습니다.

 

사비나가 토마시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토마시는 모든 점에서 키치와 정반대였습니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토마시는 괴물이며 미국 영화나 소련 영화에서 그와 같은 사람은 파렴치한 역할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비나는 자신을 좋아하는 프란츠 교수에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프란츠는 소련의 탄압을 받았던 모든 나라에 대해 이상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리에서 공부한 프란츠는 재능이 뛰어나 스무 살 때부터 과학자의 출셋길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는 대학 연구실, 공공 도서관 같은 벽 안에서 일생을 보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책에 파묻힌 그의 삶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현실적인 삶, 다른 남자들, 혹은 다른 여자들과 나란히 걸으며 느끼는 접촉, 그들의 환호 소리를 희구했습니다.

 

프란츠는 사비나의 조국을 좋아했습니다. 더구나 삶이 위험, 용기, 죽음의 위협 같은 웅장한 규모로 판가름 나는 그런 나라에서 온 사비나는 그에게 인간 운명의 위대성에 대한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녀 모습에서 그녀 나라의 고통스러운 드라마가 투명하게 드러났기에 그녀는 한결 아름다웠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육체보다도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시위 행렬에 참여했습니다. 뭔가를 기념하고, 뭔가를 욕구하고, 뭔가에 대한 항의하고, 혼자 있지 않고 밖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군중은 유럽과 그 역사의 이미지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으로, 전투에서 전투로 이어지며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대장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며 그것을 포기하는 자도 괴물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했던 이런 까닭에 그녀는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주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공허를 느꼈습니다. 이렇듯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습니다.

 

토마시는 히틀러나 아인슈타인 사이나, 브레즈네프와 솔제니친 사이에서는 차이성 보다는 유사성이 훨씬 많았다고 하면서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했는데 그들 간에는 100만분의 1의 차이성과 99만 9999의 유사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100만분의 1의 차이성은 뭘까요? 니체는『권력에의 의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어느 사람보다 더 차갑고, 더 거칠고, 주저하는 일이 더 적고, 남들의 생각에 겁내지 않는다. 그는 존경과 체통을 따지는 미덕, 곧 떼거리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앞장설 수 없으며 혼자 간다. (…)그는 남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길든다는 것의 비속함을 안다. (…)자신에게 말할 때가 아니면 가면을 쓴다. 그의 내면에는 칭찬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토마시는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번은 중요하지 않으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고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비록 인간의 존재가 깃털처럼 가볍다고 하더라도 가벼움을 참을 수 없을 때 우리가 위대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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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잘쓰시는군요..오래전에 읽어서 가물한데..환기가..고맙게 읽고 가요 ^^

오우아 2012-01-09 09:48   좋아요 0 | URL
손님님..감사합니다^^
 
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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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저런 인간이 되는 건 다 우리한테 달렸어요. 우리 몸은 정원이고 우리 의지는 정원사와 같은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쐐기풀을 심거나 상추씨를 뿌리거나, 한 가지 약초로 정원을 채우거나 여러 가지를 마구 심어놓거나, 또는 태만을 부려서 불모로 만들거나 부지런히 비료를 주거나 간에 글쎄, 그렇게 할 힘과 바로잡을 권한은 우리의 의지에 있다 이겁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저울에서 한쪽의 이성이 다른 쪽의 욕정과 균형을 맞춰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급한 본능 때문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하게 될 거란 말씀이죠. 하지만 우리에겐 이성이란 게 있어서 발광하는 충동, 색욕의 자극, 무절제한 욕망 따위를 식혀주는 거라고요.

『오셀로』중에서

 



당신은 푸른 눈의 괴물을 알고 있나요? 셰익스피어의『오셀로』에서 이야고는 그것은 희생물을 비웃으면서 잡아먹는 ‘질투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고는 베니스의 장군 오셀로에게 오쟁이 진 자가 운명을 확신하고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더없는 행복 속에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의심하고 수상히 여기지만 강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저주받는 시간을 헤아리겠습니까? 라고 반문했습니다. 또한 가난하나 만족하면 넉넉한 부자지만 가난해질까봐 항상 두려운 사람에게 끝없는 재산은 겨울처럼 가난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고는 전장에서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오셀로의 기수밖에 못 되었습니다. 반면에 전술은 직녀만큼도 모르는 카시오는 오셀로의 부관이 되었습니다. 오래된 연공제가 아니라 추천과 정실로 승진되는 군복무의 저주라고 하더라도 이야고는 무어인 오셀로를 질투를 했습니다. 겉으로는 사랑과 복종을 하면서도 속마음은 자신의 실속을 두둑하게 챙기려고 자기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고는 로데리고와 함께 그의 기쁨에 독약을 뿌리기 위해 한밤중에 브라반시오를 깨웠습니다. 이유인즉 당신 딸(데스데모나)이 무어인(오셀로)에게 도둑을 맞아 당신은 영혼의 반쪽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몰래 결혼을 했다는 것은 브라반시오에게 나쁜 짓이었습니다.

화가 난 브라반시오에 따르면 데스데모나는 절대로 대담하지 않았고 너무나 잠잠하고 조용하여 조금만 움직여도 얼굴을 붉히던 처녀였습니다. 브라반시오는 그녀가 본성과 연령과 나라의 차이와 평판과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숯검정의 가슴과 사랑에 빠져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셀로를 붙잡고는 완벽했던 그녀가 모든 본성의 법칙을 여기고 그렇게 빗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불완전한 판단이며 마법 없인 불가능하다고 하며 불쾌했습니다. 하지만 오셀로가 누군가요? 데스데모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자유를 속박하는 일 따위는 바닷속 보물을 다 준대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에게 간교한 지옥의 술책을 하지 않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만약 강한 욕정을 일으키는 모종의 합성 약물 또는 비슷한 효능을 가진 마법의 극약으로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빼앗아 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오셀로는 솔직하게 사랑의 가장 큰 마법을 말했습니다. 즉, 그녀가 제가 겪은 위험 때문에 절 사랑했고 전 그녀가 그 위험을 동정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데스데모나도 지금까지는 아버님의 딸이었지만 이제는 오셀로가 제 남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운명의 여신을 조롱했고 그의 용맹스런 자질에 제 영혼과 운명을 헌납하면서 오셀로에게 최대의 기쁨을 드릴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라의 당면 문제 때문에 공작과 원로원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터키 함대가 키프로스를 향해서 접근하고 있어 그들은 황급히 오셀로 장군을 급파하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비탄에 쌓인 브라반시오는 공작에게 도움을 얻어 오셀로를 감옥에 넣으려고 했으나 전쟁 때문에 오히려 상처 입은 속마음을 귀를 통해 치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작은 오셀로의 아름다움을 듣고는 브라반시오에게 당신의 사위는 검기보단 훨씬 희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데스데모나는 사랑의 부재를 뼈아프다며 자신도 남편과 함께 전장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오셀로도 공작이 그녀의 부탁을 찬성하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큐피드가 경박한 희롱으로 업무를 썩히고 망친다면 주부더러 제 투구를 냄비로 쓰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야고는 이번 일이 성사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오셀로는 운수가 대통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고는 오셀로에게 복수심을 채우기 위해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이중의 악행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카시오가 데스데모나와 지나치게 친하다는 것으로 오셀로의 귀를 속이려는 것입니다. 심한 태풍이 터기 함대를 무참히 강타하면서 공교롭게도 전쟁에서 승리하자 오셀로는 잔치를 벌었습니다. 그날 밤 이야고는 카시오에게 포도주 한 잔을 권했습니다. 술에 아주 약하고 마시면 실수를 하는 결함이 있어서 카시오는 자신의 약점을 더 이상 시험해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술잔은 모두 저주받은 것이고 그 내용물은 악마였습니다. 그러나 카시오는 악마에게 자리를 내주며 자제력을 잃은 나머지 난동을 부려 그만 자신의 불멸이었던 명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고는 카시오를 보면서 오셀로 사이에서 악덕으로 어긋난 관절을 맞춰달라고 그의 부인에게 간청해보라고 했습니다. 카시오에게는 이것이 좋은 충고였지만 이야고에게는 그녀 자신의 덕행으로 그들 모두를 얽어맬 그물이었습니다. 그물에 걸린 데스데모나는 카시오를 만나 남편과 이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진 카시오를 우연히 본 오셀로에게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몰래 도망가는 것 같아 이야고가 안 좋다고 말하자 혼돈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질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만약 엉터리없이 불어터진 억측을 내 영혼의 본분으로 삼는 일이 생긴다면 날 염소와 교환하라고 했습니다.

이야고는 카시오와 데스데모나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고 하면서 오셀로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사랑의 증표인 손수건이 카시오에게 있는 것을 보자 오셀로의 위험한 상상은 유황불처럼 타 올랐습니다. 오셀로는 검은 복수여, 텅 빈 동굴에서 나오너라! 고 말하면서 피를 보고야 말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하와 사악한 행동을 한 그녀 때문에 오셀로는 정신을 잃어버려 그녀를 창녀, 악마라고 불렀고 그녀의 눈물방울은 악어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죽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안 그러면 더 많은 남자를 배신할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오셀로는 그녀의 목을 졸랐습니다.

오셀로는 그녀가 물처럼 지조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셀로는 불처럼 급하지 않았을까요? 루소는『신(新)엘로이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만큼 우리에게 강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열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격렬할수록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너무도 부드러운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 채 현재의 감정을 미래로 투사하는 것이죠. 이처럼 지속적인 사랑에는 끝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지요. 사랑을 파괴하는 것은 사랑의 격렬함 그 자체입니다.

데스데모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는 죽음은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슬픔에 대하여 오셀로는 진정 사랑하기 때문이며 미움이 아니라 명예로 모든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질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랑의 격렬함 그 자체는 스스로 생기고 스스로 태어나는 한 마리 괴물입니다. 마치 질투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질투를 격렬하게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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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음에 드는군요. 전 이거 오페라보면서 울었었는데. 읽은지 오래되서..다시 한번 읽고 싶군요. 책이 있나 모르겠네요.

오우아 2011-12-12 09:10   좋아요 0 | URL
kingfisher님...감사합니다^^
질투심을 다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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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러한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그 비밀은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것일까? 그리고 연 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달과 6펜스』중에서

 



살다보면 삶을 바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습니다. 서머싯 몸의『달과 6펜스』에 서 찰스 스트릭랜드는 갑자기 삶을 전환했습니다. 증권 거래소에 다니는 마흔 살의 스트릭랜드는 문학 방면에 전혀 교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술계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그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훌륭한 시민,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정직한 중개인일 수는 있겠지만 사교에는 재능이 없어 그에게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범하게 살면서 흐릿한 그림자 같았던 그가 결혼한 지 17년이 지난 평균적인 가정을 버리고 파리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만한 나이에 어떤 여자와 연애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었습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지금 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그가 돌아오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작중화자)에게 그를 만나서 그의 동정심에 호소하여 돌아오게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작가였던 나는 이번 여행이 걱정되기 보다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한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파리에서 만난 그는 명예와 의무를 저버리고 이름 모를 소녀와 죄스러운 호사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싸구려 호텔에서 가난하게 혼자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당황함과 달리 그가 말할 때의 냉당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설득도 하고 충고도 하고 필요하다면 화를 낼 작정이었는데 그는 자기 죄를 순순히 고백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대답이 더할 나위 없이 경멸스럽고 태연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다고 하여 지극히 당연한 내 질문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소.’라는 그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내가 잘해야 삼류 이상이 되지 못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지 질문하자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무심한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의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권태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화가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단조로운 삶에 한 번도 초조감을 내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어떤 창조 본능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창조 본능이 그동안 삶의 여러 정황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치 암이 생체 조직 속에서 자라듯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마침내 존재를 모두 정복하여 급기야는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 몰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를 상대로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들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봤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며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 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입니다. 문명인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敵)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입니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가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고 맙니다.

그는 인습 따위에 붙잡혀 있지 않아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렸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되든 정말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뻐꾸기 같은 그의 이기적인 행동은 나의 친구 더크 스트로브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단한 화가는 아니지만 미술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지닌 스트로브는 그를 위대한 화가라고 하며 적지 않은 희열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그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병이 난 그를 자신의 집에서 간호하려고 하자 스토로브 부인이 반드시 끝이 좋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이었습니다. 그녀가 정성스럽게 돌봐준 덕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와 함께 집에 나간다고 하자 스트로브는 자기가 대신 집에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나버리자 그녀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공기만 마시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고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직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으려는 일념에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쏟아 붓고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열정을 소진시키고 나면 그는 그것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그들이 사랑에 빠졌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의 감정에는 다정함이 있으며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마는데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병’이었습니다. 그의 진짜 생활은 꿈과 그리고 잠시도 않는 그림 작업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희생시켰습니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타히티에서 자신의 꿈을 완벽하게 실현시켰습니다. 마치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머무를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타히티에서 육체의 옷을 거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고의 삶이 그대로였던 타히티는 그가 찾고자 했던 고향이며 에덴동산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그를 사로잡은 열정은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이었으며 그게 그를 신령한 향수(鄕愁)에 사로잡힌 영원한 순례자로 만들었습니다. 가령, 과일들이 수북하게 담겨 있는 그의 정물화에는 열대의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마법에 걸린 과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맛을 보면 신만이 아는 영혼의 비밀과 상상의 신비로운 궁전으로 통하는 문이 열릴 것 같았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선악과(善惡果)처럼 미지의 것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그림은 가장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기이하고 복잡하고 고뇌에 찬 개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야성적인 관능성은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고 할까요? 바슐라르는『꿈꿀 권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반 고흐의 황색은 연금술적인 황금이며,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과 같이 만들어진 황금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밀이나 불꽃이나 밀짚 의자의 황금빛이 아니다. 천재의 한없는 꿈에 의해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재산, 한 인간의 마음, 전 생애를 통한 응시(凝視)속에서 발견된 근원적인 진실이다.

그는 예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술가의 가장 힘겨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회의에 부딪혀도 완고하도 끈질긴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위대성은 진짜였습니다. 나 자신의 즐거운 어떤 것을 위해 산다는 것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개성화된 황금빛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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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중학교때 읽고 감동받았던. 그래서 나도 그래야지 했는데..어느덧..근데 그런 결심이 쉽지가 않군요.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고 산다는 결심을 하는 것 말이죠.

오우아 2011-12-05 09:10   좋아요 0 | URL
네..쉽지 않죠~~
그래도 그 마음은 소중히 간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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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諸子百家)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학자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 강신주다. 일찍이 그는 인간의 본성을 ‘벌너러빌리티(vulnerability)’, 즉 ‘상처받기 쉬움’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다운 인문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처가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생겨난다고 하면 우리는 참다운 인문정신을 통해 현실의 맨얼굴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제자백가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일까? 제자백가라고 한다면 춘추전국시대(春秋全國時代)의 사상가들이거나 서양철학에 맞서는 동양 인문정신쯤 간과하는 현실에서 오히려 저자는 <제자백가의 귀환>을 총 12권으로 기획하면서 강한 지적 희열을 역설하고 있다. 제자백가는 패권을 다투는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전쟁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하면서 찬란한 사유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즉 ‘제자백가의 사상이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결과’이며 그들의 생생한 통찰력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되지 않았던가?

이번에 나온『철학의 시대』는 시리즈 1권이다. 간단하게 보면 제자백가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자의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기존의 방식이 한 갈래의 직선의 논리였다면 저자의 방식은 여러 갈래의 곡선의 논리다. 전자가 단편적이고 구조적인 사실을 전달한다면 후자는 사상적이고 문화적 맥락으로 역사와 소통하는 것이다. 곡선의 논리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 그런 사실이 생겨났는지? 주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해야 한다.

저자는 곡선의 논리, 즉 ‘우회로’를 선택하면서 제자백가를 둘러싼 임의적 해석에 대한 허(虛)를 파고든다. 만약 저자의 학문적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런 기회마저 없었을 것이다. 가령, 위민(爲民)의 실체다. 위민은 ‘백성(百姓)을 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백성은 성씨(姓氏)를 가진 지배계층이었다. 반면에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계층이었다. 결국 저자에 따르면 위민이란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옹호하는데 이용한 수사학에 불과했던 것’이며 민중의 삶 자체를 배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위민을 놓고 두 가지 정치체계가 있는데 ‘동’(同)과 ‘화’(和)다. 동이 군주 일인 지배체계라고 하면 화는 군신 상호 견제 체제를 말한다. 공자는 화의 논리를 토대로 자신의 사유를 펼쳤는데 화의 논리에 반대하고 동의 논리를 추종하는 사상가를 ‘소인’(小人)이라고 폄하하였다. 공자는 군주와 기득권 세력 사이의 분권 체계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 모델이었다. 그러니 관중(管仲)과 같은 동을 지향했던 현실주의적 사상가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제자백가라는 분류의 계보학이다. 흔히 유가, 묵가, 도가, 법가라는 학파 구분은 제자백가들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漢) 제국의 역사가들에 이루어졌다. 한 제국 초기에는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하여 태평성태를 이루었는데 공신 관료나 제후들은 자신들의 지방분권적 이념을 도가 사상으로 정당화했다. 당시의 도가사상은 ‘황로사상’(黃老思想)을 말하는데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인 황제(黃帝)와 도가 사상의 창시자 노자(老子)를 말한다. 특히 노자의 무위(无爲)는 최고 통치자가 관료나 제후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武帝)는 동중서의「천인삼책(天人三策)」이라는 상소문을 통해 중앙집권 정책을 정당화한다. 중앙집권 정책은 유위(有爲)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제는 유가들을 기용하였고 결과적으로 무제의 개혁 정책이 승리하면서 유가는 중국 역사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즉 진(秦)나라 여불위의『여씨춘추』에서는 노자의 사상이 제1의 철학으로 등장한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 즉 사마담이 제가백가를 논한 「태사공자서·논육가요지」에서는 유가가 ‘학설은 없지만 요점이 적고 수고스럽지만 효과는 적다.’고 한 반면에 도가는 ‘학설은 간단하여 적용하기 쉽고, 일은 적지만 효과는 크다.’고 했다.

사마담은「논육가요지」을 통해 유가보다는 도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은 달랐다. 표면적으로 사마담의 견해를 따르는 것 같지만『사기』의 편재를 보면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노자를「노자한비열전」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공자는「공자세가」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반고의 『한서』「예문지」에서 유가의 학설은 ‘다양한 학설들 중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사기』와『한서』의 제자백가를 분류하는 방법 ‘유가 학파’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문제는『회남자』와 달리 역사성이나 사상성이 배제된 ‘구조적인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철학의 시대』를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모든 것은 제대로 된 배경하에 두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법’을 새삼 확인했다. 공자는『시경』300여 편에 사악함이 없다고 했다. 낯 뜨거운 남녀 간의 애정사가 실린 것을 보고도 그랬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공자는 이것을 군주와 신하 사이의 메타포로 해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 제가백가의 사상을 유가, 묵가, 도가 등으로 압축하는 것은 단지 명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관중의 사상, 공자의 사상, 맹자의 사상’등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각각 ‘고유명사’로 이해하길 바란다. 이것이 제가백가가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으로 귀환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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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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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名醫)의 대명사인 편작(扁鵲)이었지만 정작 그의 집안에서는 하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편작은 병이 극심하게 진행된 환자들을 치료하여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편작보다 고수라고 한다면 불치병을 훨씬 더 많이 고쳤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정반대다. 편작의 작은 형은 병의 초기단계를 치료하는 아마추어 의사였다. 그리고 작은 형보다 더 고수인 큰 형은 병이 걸리기 전, 즉 미병(未病)단계에서 치료를 하여 굳이 의사라고 불리지 않았다.

고미숙의『동의보감』을 읽었다. 고미숙은 앎의 고수다. 앎의 고수가『동의보감』을 읽고 리라이팅을 했다는 것은 앎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비록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무관한 고전이라면 여전히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고미숙은 그 경계에서『동의보감』을 놀라운 텍스트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편작의 형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미병단계, 초기단계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게 살려고 한다. 쉽게 말하면 건강이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精神)은 어떤가? 마음은 건강해야지 하면서도 몸은 그대로다. 그런가하면 몸만 생각한 나머지 정신을 소홀히 한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다. 그러나 동양 사상에서 정신은 원래 하나였다. 정은 생명의 물질적 토대, 신은 물질을 움직이는 무형의 벡터였다. 정신 차려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은 생명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취지를 살펴보면 ‘사람의 질병은 모두 섭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최선이고 약은 그 다음이다.’라고 했다.『동의보감』은 단순히 질병과 처방을 다루는 임상서가 아니라 수양과 섭생을 우선으로 하는 양생서(養生書)였다. 그래서 저자는 내경(內徑)-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로 이어지는 5편 106문 목 차는 다른 어떤 의서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분류학의 결정판이라고 했다.

이러한 분류에서 인간의 몸은 우주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이 곧 우주이다. 「내경편」의 신형(身形)을 보면, 

하늘의 형은 건(乾)에서 나오니,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가 있다. 태역은 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고, 태초는 기가 시작하는 것이며 태시는 형이 시작하는 것이고, 태소는 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형은 몸의 형태라는 것인데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부터 시작하고 있다. 우주는 기-형-질의 순서에 따라 구체화된다. 그리고 사람의 몸 역시 기를 바탕으로 해서 생명의 원천인 정·기·신이 만들어진다.

한편으로 기·형·질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질병도 함께 탄생한다. 즉,

형기가 갖추어진 다음에 아(痾)가 생긴다. 아란 채(瘵)이고, 채란 병(病)을 말하는 것으로 병이 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태역으로부터 생기고 병은 태소로부터 생긴다.(「내경편」, 신형)

『동의보감』이 말하는 질병의 진행과정은 아-채-병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아는 원초적 불균형을, 채는 스트레스와 과로에 가까운 피곤한 상태를, 병은 피로함이 심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질병은 특수한 고통과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수반해야 할 필연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병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파야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양생을 할 수 있을까? 양생의 규칙을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태과불급 (太過不及)이 아니어야 한다. “기가 실하면 형도 실하고, 기가 허하면 형도 허한 것이 정상이다. 이것과 반대면 병이다.”(「잡병편」, 변증) 형과 기는 서로 어울러야 한다. 그런데 태과, 즉 넘치는 것인데 좋은 기운(정기)이 나쁜 기운(사기)가 된다. 불급, 즉 모자라는 것인데 정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통즉불통(通則不痛)이다. 통하면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통의 경계는 몸과 마음, 몸과 몸, 몸과 사회, 몸과 우주 등등 무궁무진하다.

수승화강(水昇火降)도 간과할 수 없다. 오장육부는 음양오행이자 사계이며 상생이자 상극이다. 오장육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심장과 신장이다. 심장은 군주지관이며 오행으로는 화(火)다. 신장은 정을 저장하며 오행으로는 수(水)다. 자연계에서는 불은 올라가고 물은 내려간다. 하지만 우리 몸은 대대(待對)의 원리에 따라 그 반대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곧 수승화강이다. 만약 수승화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음허화동(陰虛火動)이 된다. 심장의 불이 제멋대로 망동하게 된다.

이렇듯 저자는『동의보감』을 재해석하면서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았다. 몸과 우주는 앞서 말했듯 동양사상의 키워드다. 몸과 우주는 상생 혹은 상극으로 순환한다. 모든 것은 관계의 서사다. 그러면 삶의 비전은 뭘까? 그것은 바로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것, ‘내 안의 타자들을 긍정하는’ 것,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조율하는 자기수련’이다. 병이 있다고 해서 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새롭게 ‘호모 큐라스’가 되는 것이다. 한 번쯤 ‘자기 몸의 연구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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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1-01 18:19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