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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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때문이었을까? 먹는 것을 볼 때마다 당장에라도 먹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알려진 맛집을 굳이 찾아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꿀맛’도 부족해 ‘핵꿀맛’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는 배고픔을 참을 만한 용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만큼 먹는 것은 삶의 시작이기 때문다. 어디 그뿐인가. 음식을 먹었던 그 시간만큼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먹방의 시대에서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꿀맛나는 음식을 먹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그렇다.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이 먹는 게 비슷비슷하다. 먹방은 살아갈 방법이 아니다. 단지, 그냥 먹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황석영이 담아 낸 음식이야기『황석영의 밥도둑』은 요새 유행하는 먹방이 아니었다. 먹방의 관심사는 앞서 말했듯 꿀맛에 있다. 꿀맛이 아니면 ‘노맛’. 지금의 입맛으로 따지면 이 책은 분명 노맛에 가깝다. 하지만 노맛은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영영 식지 않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돌이켜보면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음식을 만든 사람들은 요리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음식의 낭만성을 찾고자하는 것은 궁핍한 삶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한지 모른다. 그러니 궁핍하고 절박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음식은 ‘밥맛’을 소박하게 채워주었을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특별한 밥맛을 가지고 있다. 특별함은 곧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이 생각날 때마다 맨 먼저 우리 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추억이 앞선다. 혹 떠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떠나갈 사람에 대한 추억이다. 바로 추억의 존재는 어머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어 그때를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어보아도 그 밥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눈물을 감출 수 없어 결국에는 ‘눈물맛’을 먹고야 만다. 그렇게 눈물맛을 먹고 나서도 또 무슨 그리움을 만들어줄 것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맛을 만들고 만다.

 

 

한편, 눈물맛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준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면, 외로울 때, 힘들 때, 아플 때, 슬플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정든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음식들은 저자가 견뎌온 아픈 시간을 위로해주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삶의 한 소절씩 간절한 입맛을 내는 음식을 더욱 감사해한다. 비록 지금은 먹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음식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먹지 않는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이 책이 밥도둑이야기라고 해서 단순히 먹거리에 대한 여행에서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애틋한 음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까. 저자의 굴곡진 인생에 비한다면 나의 생활은 얼마가 될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런 만큼 저자의 음식에 대한 감정은 특별하다. 더구나 이런 음식에 대한 감정들이 장소 그리고 사람으로 이어지는 정서적인 유대감을 생각하면 내가 모르는 아득한 또 따른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홍어, 돼지 삼겹살, 김치 세 가지를 합쳐 별미가 되는 ‘홍탁삼합(洪濁三合)’처럼 음식, 장소, 사람의 절묘한 조합이 곧 ‘음식삼합(飮食三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황석영의 산문은 딱히 목적을 정하지 않고 발길이 이끌리는 대로 걷다가 문득 발견하게 되는 음식의 흔적들이다. 평범함 음식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향해 발휘하는 감정선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골똘히 짚어보게 한다. 작가는 음식으로 세상과 교감하고 이해하면서 ‘무엇보다도 음식은 사람끼리의 관계이며, 시간에 얹힌 기억들의 촉매’라고 말한다. 그래서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자꾸만 새로워지는 느낌은 음식과 사람의 공통점은 ‘밥도둑’이라는 것이다. 음식과 사람이 밥도둑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는 사랑할 수 없지 않을까?

 

 

인상파 거장 폴 세잔은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에 있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위해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고 한다. 우리 문학의 거장 황석영도 음식이 썩을 때까지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음식을 먹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생생하여 먹방으로 굳어버린 꿀맛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음식의 가치를 ‘밥도둑’즉, 밥을 함께 나눠 먹는 것에서 찾는다. 이유인즉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음식적이면서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밥도둑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더할 수 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밥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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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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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니 때때로 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날이 있지요.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을 정도이면 외로움을 탓할 수만 없게 됩니다. 어느 순간 지친 어깨 위로 내려앉은 단단해진 무력감을 싹둑싹둑 잘라내고 싶어도 오히려 절망감을 키우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궁핍한 삶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우리 자신의 참 좋은 감정입니다. 참 좋은 감정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이 행복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못 견딥니다. 그래서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법륜 스님의 행복』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행복하려고 야단법석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왜 행복 때문에 몹쓸 병을 앓는 건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무섭기도 합니다. 그만큼 행복해야만 하는 조급함 때문입니다. 행복하길 원하면서 생겨나는 또다른 문제는 행복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깊이가 없는 행복, 즉 단순한 행복은 욕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스님의 즉문즉설(卽問卽說)에 따르면 단순한 행복이라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더라도 행복이 단순해지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자리(自利)’에서 비롯됩니다. 자기에게만 좋다는 이기심 때문에 행복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면에서 행복을 보면 자리와 이타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진실로 행복할 수 없으며, ‘자리리타(自利利他)’여야 비로소 온전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돕는 것이 나한테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행복은 남을 자기처럼 여길 때 가슴이 뿌듯하며 감동을 안겨줍니다.


『법륜 스님의 행복』을 읽으면 읽을수록 몸에 좋다는 것을 느낍니다. 스님의 맑고 담백한 목소리는 '온전한 행복'을 지니고 있어 까맣게 타 들어간 마음이 회복됩니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입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도 입맛이 좋다는 것만 먹은 사람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작 입맛이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입맛이 없을 때 스님은 말합니다. 행복은 입맛이 아니라 몸이 중심이라는 것을. 좀 더 말하자면 우리는 성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어제 행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마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무한반복 됩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으며 오늘은 내일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행복을 저버릴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행복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는 행복해야만 합니다. 삶은 영원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겸손함으로 오늘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해맑은 미소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두 가지 감정을 깨달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내 마음이 더 잘 보였습니다. 바로 ‘내려놓음’과 ‘20%’입니다. 부끄럽게도 내려놓음을 마치 현실회피인양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은 마음의 집착을 비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현실회피는 마음의 집착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착의 질량은 가볍고 무겁습니다. 질량의 가벼움은 곧 ‘원(願)’이며, 질량의 무거움은 곧 ‘욕심(慾心)’입니다. 그리고 하루의 20%는 자기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비록 80%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더라도 20%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람되고 재밌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버트런드 러셀은 “객관적으로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만 행복하다고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때 그것은 치유의 시간인 동시에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스님의 말씀처럼 행복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스님은 행복을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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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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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라는 말이 연금술사처럼 쓰일 데가 있다. 공부벌레, 일벌레 등등 어떤 일에 미쳐야만 벌레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벌레’라는 말은 반가우면서도 눈물겹다. 책과 동고동락한 세월은 곧 삶의 나침반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청나라 소설가 포송령(蒲松齡)은 ‘어떤 눈먼 승려가 종이 위의 글자 냄새만 맡으면 바로 그 글에 담긴 내용의 좋고 나쁨과 수준의 높고 낮음을 알 수 있었다.’ 고 했다. 책벌레가 말 그대로 동물일 경우는 책에 기생하면서 글자를 마구 헤치며 눅눅한 냄새를 풍기는 곰팡이를 먹는다. 하지만 책벌레가 사람일 경우는 다르다. 글자 냄새, 곧 서향(書香)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서향이 궁금하다면 정민의『책벌레와 메모광』은 좋은 길라잡이다. 지금까지 책벌레를 다룬 책들은 넘쳐났다. 삶에서 책을 빼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러나 단순히 책벌레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무색무취할 뿐이다. 좁게는 글자 향기, 넓게는 책 향기를 제대로 음미해야만 우리는 책에 담긴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게 된다. 저자가 지금 사람이 아닌 옛사람을 만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사람들이 남긴 고서(古書)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과 더불어 책벌레들의 사연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행간을 더듬다가『유양잡조 酉陽雜俎』에 나오는 진짜 책벌레 두어(蠹魚)에 대한 내용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즉, “두어, 즉 책벌레가 책 속에 있는 신선(神仙)이란 글자를 세 차례 이상 갉아먹으면 변화해서 맥망(脉望)이란 벌레가 된다네. 밤중에 하늘 별에다 이것을 꿰어 비추면 별이 그 즉시 내려와 환단약(還丹藥)을 구할 수 있게 되지. 이것을 물에 타서 먹으면 그 자리에서 환골탈태하여 하늘로 날아오르게 된다네.”는 것이다. 무릇 책을 열심히 읽으면 생각이 밝아진다는 것을 셀 수 없이 들었는데 이것이 아닌 몸을 바꿀 수 있는 명약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음에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책을 눈으로만 읽는다고 해서 책벌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책만 보는 바보로 불리는 이덕무는 자신의 서재를 ‘구서재’(九書齋)라고 말했다. 구서재는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바로 독서(讀書), 간서(看書), 초서(鈔書), 교서(校書), 평서(評書), 저서(著書), 장서(藏書), 차서(借書), 포서(曝書)다. 온갖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된 세상에서 책을 읽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럼에도 뭔가 살아갈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저서(著書)의 가치를 대면하게 된다. 저서는 글쓰기다.


이런저런 글쓰기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공통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중에 이 책의 제목에 나와 있듯 ‘메모광’도 좋은 방법으로 추천할 만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필요한데 책속의 문장이나 인터넷의 검색으로 생각을 붙잡을 수 있다. 그러나 불현듯 떠오르다가 금방 사라지는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메모를 해야만 한다. 만약 그때 메모로 남기지 않으면 그때의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저서에 비해 메모는 단순한 열정인지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열정이 없다면 생각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러면 메모의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기억의 한계에 대한 방어기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깝다. 메모에 담겨 있는 온갖 경이로운 현상들은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다. 생각해보면 메모의 놀라운 진실들 하나하나 다시금 메모하게 한다. 스티븐 기즈는『습관의 재발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그 뭔가를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우선하게 만든다. 자신이 뭔가를 실행에 옮기는 걸 보는 것만큼 고무적이고 의욕을 유발하는 일은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책벌레와 메모광을 따라가다 보니 평소 같으면 메모가 생각보다 앞선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독서가 아무리 좋다고 권장하더라도 독서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듣기 싫으면서도 가장 당연하게도 독서가 습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서할 시간이 따로 없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저자는 “세끼 밥 먹듯 독서하는 습관"을 권한다. 세끼 밥 먹는 데 굳이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뭐든지 세끼 밥 먹듯 해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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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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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을 수학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려운 수학 문제라고 해도 숫자와 공식으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법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세상 문제라고 해도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곧 법의 올바른 정신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의문으로 넘쳐난다. 법이 있음에도 오히려 무법천지 같다. 이유인즉 법전의 법과 현실 속의 법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법전의 법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현실 속의 법은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이어야만 하는 법이 ‘편한 진실’만을 추구한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권석천의 칼럼을 담아낸『정의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편한 진실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알게 되었다. 저자 말대로 편한 진실이란 정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편한 진실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에 추상적, 관념적으로 의심하여 사건의 진실을 불투명하거나 왜곡한다. 이러한 편한 진실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 억울하다고 하며 법의 심판자에게 양심에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일 수밖에 상황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양심에 호소해야만 하는 걸까?

 

 

그래서『정의를 부탁해』는 불편하다. 우리 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한 진실의 이면에는 정의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보수와 진보의 양대 산맥으로 분열된 싸움이 피곤할 정도로 반복될 뿐이다. 지금 이 시각 국정교과서에 대한 찬반 논쟁도 마찬가지다.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면 무조건 종북(從北)이 되고 마는 불평등하고 불합리적인 사회. 이렇게 진실이 민주화에 역행하거나 은폐되거나 사상 통제에 갇혀 버린 것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도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을 더 이상 애기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누구도 정부의 공권력(公權力)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이든 국가 일을 하는 정부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권선천의 시각은 다르다. 즉,

 

 

나는 공권력이란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p75).

 

 

결코 공(公)이 민(民)을 아래에 두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 제1조 제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이런 시대에 정부의 공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또한 일상적으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발상은 삼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하여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을 만큼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한다. 세상이 지랄 같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길 수 없다. 그러면서 ‘정의를 부탁해’ 한다. 단지 우리가 바둑판의 미생(未生)처럼 아직 살아있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저자 말대로 ‘사춘기 불변의 법칙’ 때문이다. 정의를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나이만을 따져서 사춘기가 아니라고 말할 까닭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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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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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믐달, 그러니까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세계라고 할까? 달에 관한 우리의 생각의 단순하게도 해가 지고 나면 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믐은 정반대다.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역설. 잠깐 동안이라도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아마도 영혼을 온전히 탕진했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기 보다는 오히려 어둠을 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믐달을 보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너무나 순수하다 못해 불안하게 된다. 장강명의『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속도감 있게 읽다보면 이러한 불안함의 정체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바로 시간의 뒤틀림 때문이다.


사실 패턴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소설 속에서 남자.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에 시달린 나머지 동급생을 칼로 찌르고 평생을 전과자라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비록 정당방위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때 보통 가해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패턴을 단순하게 하거나 느슨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달이 천천히 기울면 강물 또한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치료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그렇게 패턴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패턴의 결과에 대한 흔적을 조금씩 아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이렇게 패턴으로 눈이 멀어 있을 때, 작가는 덧없이 흘러가는 패턴을 흔들면서 균열을 일으킨다. 가슴에 ‘우주 알’을 품고서 말이다. 우주 알은 정체가 모호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시간의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의 덩어리.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 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알게 된다. 지난 날 살인자에서 지금은 작가가 된 남자는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질긴 운명을 뚝뚝 끊어내지 못한다. 세상과 달리 어머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가 아님을 호소한다. 그럴수록 거짓말처럼 그것은 정당방위가 아니게 되는데…….


작가는 남자를 희생하면서 거짓말을 완성한다. 소설 곳곳에는 죄책감으로 인해 곧 폭발할 것 같지만 남자는 거짓말을 굳이 바꿀 마음도 없다.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어 생긴 상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처는 계속되고 결국에는 또 다른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만다. 거짓말은 시간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아니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자는 거짓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냥 마무리하려고 한다. 굳이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르면 시간은 뒤틀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잘라진 걸 붙이고, 끊어진 걸 잇게 되는 그래서 고통을 멈추게 해주는 그믐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믐이 없는 삶이란 이미 굳어져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믐이 있다고 해서 과거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만큼 되돌기보다는 새로운 모습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지금에야 밝혀지는 진실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148).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거짓말이 누군가에게는 정당방위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정당방위가 아닌 삶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제대로 순서’가 없이 페이지가 섞이면서 말이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그토록 남자가 거짓말이라는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사랑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잔인한 진실이 아니면 된다. 


도대체 이 무슨 사랑의 착시(錯視)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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