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의 나라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남명수 옮김 / 지식노마드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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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국화와 칼』에서 일본인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컸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나 또한(but also)'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일본인들은 누가 참으로 용감하다고 하면서도 겁쟁이다, 라며 덧붙여 말하게 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일본인들에 대해 싸움(칼)을 좋아하면서도 아름다움(국화)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싸움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하여『사무라이의 나라』는 일본 정신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저자의 견해를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상상 속에 있던 사무라이(さむらい)의 뜻이 명확해진다. 좀 더 말하면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하나는 종자(從者)라는 개념으로 귀족을 시중드는 남자들을 말한다. 또 하나는 무사(武士)라는 개념으로 전투가 직업인 성격이 거친 자들을 말한다.

사무라이의 역사를 보면 헤이안 시대의 우아한 귀족 문화 속에서 낮은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 일본 정치의 주역이 된 것은 그들이 ‘무장한 영주(토지 소유자)’로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 12세기 후반 사무라이에 의한 최초의 준 중앙 정부가 성립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 도쿠가와 막부까지 사무라이는 신분이 상승하면서 엘리트 계층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때 대도(帶刀: 폭력을 행사하는 군사신분을 상징)를 금지당했고 집단의 특권도 부정되었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사무라이의 권력 구조를 보면 주군에 대한 무사의 강렬한 충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경제와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의 ‘보호자- 피보호자’ 관계에서 일본은 ‘가신 봉건제’라고 말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사무라이 집단은 하나의 이에(家)아레 결합되었는데 이는 군신기능과 경제기능을 함께 가지는 혈족 관계의 조직체였다. 이에의 핵심인 혈족과 가신이라는 부하들이 주종관계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도쿠가와 시대에는 주종관계가 재설정되는데 폭력보다는 자기 수양을, 군신 관계에서 조직으로, 능력에서 신분으로 바뀌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무라이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현실적인 고난들과 싸워나갔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무라이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무사에 깃든 살인과 파괴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야만이라는 심리적인 보복으로 증오해왔다. 하지만 사무라이의 심연을 들여다볼수록 일본 정신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사무라이의 실체는 명예형 개인주의에 있다. 사무라이 문화는 명예로운 무사가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통제해야 했다. 그 뒤 일본 역사에서 사무라이를 길들이는 사회 정치적 과정은 개인적인 자기의식을 공공의 사회 목표와 책임에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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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과 서 - 동양인과 서양인은 왜 사고방식이 다를까 - EBS 다큐멘터리
EBS 동과서 제작팀.김명진 지음 / 예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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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영어 시간에 부정의문문을 배웠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헷갈렸다. 가령, ‘키위를 안 좋아하니? (Don't you like kiwis?)'라는 질문에 만약 키위를 좋아한다면 우리말로 대답할 때는 ‘아니오’가 된다. 상대가 ‘안 좋아하니?’하고 부정형으로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로 대답할 때는 ‘예’라고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의 질문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관없이 대답하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동양인과 서양인에 나타난 생각의 구조를 알 수 있는 책이 바로『동과 서』이다. 일찍이 인도 시인 타고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산과 양옥(洋屋)이라고 비유했다. 그가 동양의 문화를 산으로 본 것은 멀리서 보면 산은 아주 무질서해보이지만 산에 올라가면 송이버섯, 산삼, 옹달샘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양의 문화를 양옥으로 본 것은 양옥은 평수만 정해지면 건축 자재의 양을 숫자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전자를 직관적 방법이라고 하고 후자를 분석적 방법이라고 비교한다. 직관적 방법은 전체의 연결성 속에서 개체를 보는 반면에 분석적 방법은 각 부분들을 통해 전체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관찰자와 대상이라는 시점에서 본다면 전자는 2인칭시점이 되고 후자는 1인칭 시점이 된다. 즉 전자는 대상이 중심이 되어 관찰자를 바라본다면 후자는 관찰자가 중심이 되어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판단의 기준에 있어 서양인은 스스로를 평가할 때 사회의 평가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같은 외재적 기준보다는 자기 자신의 성취감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내재적 기준을 적용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미드에 따르면 주체로서의 나(I)와 객체, 혹은 대상으로서의 나(Me)라는 두 가지 자아가 있다. 전자는 개인적 신념과 충동에 의해서 행동하는 자아이다. 반면 후자는 사회에 적응하고 사회의 요구를 대표하는 자아로 일명 ‘일반화된 타자’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이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된다. 저자는 두 문화에 표현되는 차이의 생성을 밝히면서 이를 바탕으로 두 문화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만큼 서로 다른 두 문화를 탐색하는데 아주 유용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요즘같이 두 문화가 우열을 가리며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 책은 두 문화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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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이원기 옮김, 김동택 해제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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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이라크 전에서 실패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폭력의 시대』에서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잊어버렸거나 잊고 싶어 하는 일은 기억하는 데 있지 않다. 그 보다는 동시대의 기록에서 가능한 뒤로 물러서서 더 넓고 긴 안목으로 이 시대를 조망하고 있다.

그는 먼저 미국의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소련의 붕괴로 국제적인 세력 균형이 무너지면서 힘의 균형이 미국으로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국가의 기본적인 기능도 못 하고 있는 주권 국가의 위기가 발생하여 미국의 무력이 거침없이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정치적 폭력에 있다. 그는 전쟁이라면 전술을 사용하는 정치적인 세력을 상대로만 치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전술로서의 테러는 비공식적인 단체가 사용하든 국가가 활용하든 간에 무차별적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한다. 덧붙이면 테러는 치안을 위협하는 문제이지 전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인데 미국이 오히려 테러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데 발생한 야만화를 지적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일으킨 주요 원인은 민주주의를 확산을 통해 세계 질서를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실현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강압적으로 전파하려는 행동은 보편적 가치를 손상시키며 비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국,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제국은 대영제국처럼 침략과 전쟁으로 세워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는 것도 전쟁이라고 한다. 미국은 민주주의 전파와 인권 수호를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는 과대망상에 빠지면서 오히려 패권을 상실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정치적 이념의 기반이 무너졌으며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책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꾸는 미국 제국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 사유가 담겨져 있다. 에릭 홉스봄은 “나는 제국주의를 혐오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것이 담고 있는 사유는 비판적이며 절대적이다. 

지난날 영국은 ‘영광의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표현했다. 국제적인 세력 체제에 자신이 일부분일 뿐 그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았다. 이번 책을 통해 미국을 성찰하게 되었다. 오늘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미국의 탐욕이 ‘폭력의 고립’을 파악하는 중요한 열쇠임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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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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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철학하면 소크라테스를 떠올립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너무나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소크라테스의 정신은 하나의 분수령이 됩니다.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거인입니다. 그 거인의 어께위로 플라톤이 오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플라톤의 어께에 오릅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위상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중요한 철학자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사에 있어 최초의 철학자는 놀랍게도 탈레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탈레스는 최초의 자연철학자입니다. 만약 철학이라는 것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봤을 때 자신을 ‘철학자’로 불렀던 피타고라스가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우리가『철학의 탄생』에 주목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탈레스, 피타고라스 같은 철학의 비주류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들 자연철학자들 즉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동안 우리와 함께 호흡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의 주장이 비합리적이라는 한계에 부딪치면서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고 맙니다. 보다 실천적인 해결책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가령, 플라톤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물질을 불, 흙, 공기, 물, 우주로 보았습니다. 이를 기하학상의 정다면체로 했는데 이들을 각각 정4면체, 정6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피타고라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피라미드에서 불이, 주사위로부터 흙이, 정8면체에서는 공기가, 정 12면체에서는 우주가, 정20면체에서는 물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또한 칼 포퍼가 인간 사상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대담하고 가장 혁명적이며 가장 인상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던 것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관입니다. 그는 지구가 떨어져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물 위에 떠 있어야 한다는 탈레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리고는 등방적(等方的) 대칭이라는 원리를 비판적으로 적용하여 “지구는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우주에 떠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자연철학자들에 대한 탐구는 고대 그리스 정신이 탄생하는 비밀을 밝혀줍니다. 그들을 자연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까지 신화의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으로 사유하면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날처럼 실험으로 증명될 수 없었으나 그들의 사유는 합리적인 사고와 직관을 결합하여 보편적 법칙성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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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과 육식 -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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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의 일곱 계명 중에 나온다. 하지만 예외적인 동물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지구의 절대적인 주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을 사육하고 동시에 육식을 한다.

그러나 시시각각 육식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몇 가지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 광우병(狂牛病)이 그렇고 조류 인플루엔자(AI)가 그렇다. 육식에 대한 두려움이 지구를 숨 막히게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후대책이라는 것이 놀랍게도 잔인하다. 발생농장은 물론 반경 몇 미터이내의 동물들이 매장을 당한다.

수많은 동물들의 떼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철저한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더 이상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보았듯 인간은 생존을 위협하는 동물에 대해 비윤리적으로 처벌하고 있다. 더구나 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동물을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과연 인간에게 무엇이 문제일까? 좀 더 부연하자면 인간이 동물에게서 멀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사육과 육식』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불리엣은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관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다름 아닌 사육이다. 그는 사육을 중심으로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그리고 후기사육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전기사육시대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선이 불분명하여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나들 수 있는 샤면을 숭배했다. 동물을 숭배하고 상상 속에서 동물과 함께 했다. 그러나 사육시대에 들어오면서 ‘동물의 왕국’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물의 왕국이라는 표현은 사회적으로 복잡한 인간 사회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 이해관계에 따라 동물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후기사육시대에는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풍부하게 소비하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사육화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에는 사육동물이 유용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동물의 유용성을 물질적 용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물질적 용도 중에서도 1차적 용도인 고기(meat)를 중요시하고 있다. 예전에는 2차적 용도 즉 양털이나 노동을 얻기 위해 사육화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고기 때문에 사육화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저자는 사육화에 따른 인간과 동물의 심리적 거리감으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사육시대에는 동물과 접촉하면서 죽음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후기사육시대에는 동물과 분리되면서 죽음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차이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시각과 행동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이었다. 결국 사육화가 산업적으로 소비되면서 동물에 대한 양심은 그만큼 멀어져버렸다. 그리고 종(種) 차별주의를 내세우며 공격한다.

가령, 저자는 당나귀를 예를 들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사육화가 되는 과정에서 당나귀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제시하고 있다. 전기사육시대에는 당나귀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러나 사육시대에는 정력의 상징으로 바뀐다. 더 나아가 후기사육시대에는 가장 멍청한 동물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토대로 예전의 멀쩡한 소를 오늘날 광우(狂牛)라고 말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 미친 소(牛)라니!

일찍이 피터 싱어는『동물 해방』에서 ‘유인원 계획’(Great Ape Project)을 말한바 있다. 이 계획을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과 다른 동물간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기본적인 권리를 보다 많은 존재(인간이 아닌 동물)에게 부여하려는 것이다.

후기사육시대에 인간의 고통은 곧 동물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동물이 진정으로 해방된다고 한다면 인간 또한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이 책을 통해 동물에 대한 윤리적인 느낌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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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31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