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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무려 85편의 리뷰가 올라와있다. 귀에 익고 눈에 익은 작가.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 제목은 다 알고 있음에도 그 중 제대로 읽은 것은 한권도 없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아마도 일단 이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개인적인 호, 불호가 분명해질 것 같은 예감때문에 섣불리 손을 대지 않고 있었나 싶다. 2년 만에 들고 나온 그녀의 이번 장편 소설은 출간과 함께 눈소문, 입소문을 많이 타고 있어서 또 눈여겨 보고만 있던 참에 마침 몇 사람들과 이 책을 함께 읽어보기로 의기투합이 되어 더 이상 이 작가의 작품 읽기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500쪽이 넘는 분량. 원고지로 2,000 매가 좀 넘는다고 한다. 이 정도 분량의 책이라면 재미있지 않으면 끝까지 가기가 참 고역일텐데, 지루한 이야기를 끌고 나갈 사람은 아니라고, 나 혼자 맘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책의 띠지에 있는 선전 문구 중 '역동적 서사'라는 말 그대로였다.
등장 인물들이 꽤 많기 때문에 그 중 주요 인물들이라도 정리해보아야 할 것 같다.
주인공 최 서원. 열 아홉 살. 7년 전인 열 두 살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사형수로 복역 중이다.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한때 룸메이트이자 서원을 보살펴주던 소설가 아저씨와 함께 바닷가 마을에서 함께 기거한다. 어릴 때부터 나름 야무지면서 외롭고 불쌍해보이는 것들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
서원의 아버지 최 현수. 전직 야구 선수.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성공한 야구 선수로 풀리지 못하고 세령댐의 경비팀장으로 온다. 불운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아들 서원에게 각별한 보호의식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
서원의 엄마 강 은주. 홀어머니와 배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생활력과 적응력이 무기가 되다시피 했다. 남편이 기대만큼 성공의 탄탄대로를 걷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여 더욱 생활의 끈을 조이며 악착같이 산다.
안 승환. 서원 가족이 사는 사택에서 서원과 한 방을 쓰며 기거하게 된 경비원. 소설가로 등단한지 오래이나 변변한 책 한권 내보지 못하고 이런 저런 직업의 언저리를 돌고 있다. 나중에 서원이를 끝까지 옆에서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오 영제: 치과 의사이자 세령시 수목원 원장으로서 서원의 바로 옆집에 한다. 빈틈없어 보이고 말끔한 외모 속에 편집증적이고 포악한 내면을 감추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무서운 심성의 소유자.
문 하영: 오 영제의 부인. 남편에게 사육당하다시피 하는 생활에서 자신과 딸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오고 남편의 집요한 추적으로부터 사라진다.
오 세령: 서원과 동갑내기 여자 아이이자 오 영제의 딸. 아빠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당해오다가 변을 당한다.
작가도 이렇게 인물들을 정리해놓고 집필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계획된 인물들이 나를 비롯한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쉼없이 진행되는 사건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 작품을 위해 잠수 경비라는 일, 댐의 구조와 방식 등에 대해 책을 읽으며 공부를 많이 하였고 실제 그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 충분한 인터뷰 과정을 거쳤다는 작가의 말 아니더라도 단숨에 써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음은 치밀한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앞뒤 빈틈없이 맞물려 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위해 작가의 노트는 얼마나 복잡하였으며 퇴고의 과정은 또 어떠했을까. 그런 노고의 댓가가 분명히 헛되지 않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객관에 중점을 둔 소감이 그러하다면 주관적인 소감은, 숨가쁘게 재미있는 이야기만큼 마음에 여운도 크게 남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즉, 재미는 있으되 그 재미를 넘어선 감동은 크지 않다. 진지한 삶의 성찰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내용이 무겁고 어렵지만 읽고 나면 모르고 있던 삶의 어느 속내를 배우고 깨우치는 느낌을 주는, 마음 속에 오래 머물러 있을 소설들이 있다면 정 유정의 이 작품은 그런 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강렬한 복수심이 작품 전반에 깔려있기는 하지만 과연 그만큼 강렬한 메시지도 담겨있는가? 흥미진진한 복수극을 넘어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이걸 말하고 싶었구나 생각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은 더 생각해봐야할 문제이지 않을까.
서원의 아버지인 최 현수라는 인물이 초반엔 말이 없고 체구만큼이나 둔하고 무딘 사람으로 그려지다가 소설의 후반부에 오면 그 치밀하고 주도 면밀하기가 극단적으로 다른 인물인 오 영제에 뒤지지 않는 인물로 변신했다는 것도 눈에 좀 거슬렸다.
다음 작이 무엇이 되든, 그것 역시 조용히 묻힐 작품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