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예찬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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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그리고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 최근에 읽은 사랑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책들이다.  

   

고미숙의 책은 쉬우면서 현실적인 어찌보면 노골적이었으며, 루만의 책은 너무 어려웠다. 프롬의 책은 읽으며 연신 '왜 좀 더 어릴때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내 마음속에 지나간 과거의 '사랑'에 대한 못다한 아쉬움이 많나보다) 어찌보면 말 그대로 이 책에는 사랑에 관한 '기술'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디우의 책은 나에게 다시 한번 사랑에 관해 성찰하게 만들었다. 

난 예전부터 서로 죽고 못사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가 되는 듯한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싫어했다.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우리는 하나야, 니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니가 기쁘면 나도 기뻐!"하는 꼬라지를 믿지도 않거니와 납득이 가지 않았으며 싫었다. 즉흥적이고 오히여 이런 사랑이 난 사려깊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디우의 이 책이 맘에 든다. 사랑을 '둘의 무대'로 말하는 이 책이. 사랑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의 문제와 어려움은 필연적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다른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에서의 '불협화음'도 필연적이다. 사랑은 두 남녀(때론 두 남남, 두 여여)의 만남에 의한 '둘의 무대'의 생성, 시작 즉, 사랑의 '선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무대가 형성되고 난 후 갖은 난관을 극복해가며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당연히 그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성찰과 사유는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며 생각하며 그  뜻한 바를 현실로 실천해야 사랑도 가능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2011.1.11 

ps : 다음은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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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햇빛눈물 2011-01-13 12:28   좋아요 1 | URL
'양철나무꾼'님 감사합니다. 님의 블로그에도 좋은 내용이 많으시네요. 종종뵙으면 좋겠네요.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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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책이다. 리영희 선생의 평소 독서 습관이 책을 다 읽은 다음 책의 뒷 표지에다 간단히 느낌을 메모한다는 것이다. 나도 앞으로 그러려 한다. 책에 메모한 내용이다. 

2010.12.23 10:05  

드디어 다 읽었다. 나같이 어수선하게 책을 읽는 이에게 이 책은 예외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책의 부제처럼 이 책에서 난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리영희 선생에게서 느낄 수 있는 배워야할 면은 '투철한 의식'과 '열정'이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식이 없으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 애기하는 선생의 말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답아 본다. 

책 속에서 리영희 선생의 습관이 책을 읽으면 뒷장에 간단히 책을 읽은 느낌에 대한 메모를 한다기에 나도 한번 따라해 본다. 앞으로 계속... 

ps : 이 메모를 10년 후에 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사고를 하며 읽고 있을까? 불연듯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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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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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알라딘 리뷰 대회에 응모할 작정으로 쓴 글인데 기간을 혼동한 덕에 응모는 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ㅋㅋ

 

소설보다 재미있는 서평

2010.12.20

최근 서평 모음집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알라딘 블로그의 유명 블로거인 로쟈 이현우씨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 그리고 같은 저자의 얼마 전 나온 <책을 읽을 자유>가 있으며, 소설가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도 출간되었다.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 사용법>도 있다. 새로운 내용도 아닌 '책의 내용에 대한 평'인 서평(書評)에 관련된 책들이 왜 유행처럼 나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서평 책들을 읽어야 할까?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는 그 수많은 서평 관련 책들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그 이유는 그가 언급한 수 십권의 책들이 단순히 그가 '읽은' 책에 관한 에세이와 같은 책을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가 책을 통해 느끼고 배워온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은이의 독서 편력은 "나는 단지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글자는 늘 내 마음과 머릿속을 세차게 휘젓곤 했다. 때론 놀라움으로, 때론 숙연한 감동으로 책은 나를 뒤흔들었다. 책은 피로에 지친 나를 덮어주는 따뜻한 담요였고, 세찬 바람을 막아주는 천막이었고, 아주 가끔은 모닥불이었고, 때로는 등불이기도 했으며, 언제나 의지할 기둥이었으며, 책 속에 빠져 있던 시간은 혼자만의 잔치판이기도 했다."라는 지은이의 머리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의 차례는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쓸쓸한 젊은 날 책으로 겨우 버텼다’, 2부 ‘시대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3부 ‘우리에겐 바로잡을 시간밖에 없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가장 맘에 드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책의 구성과 제목이다. 특히나 ‘쓸쓸한 젊은 날, 책으로 겨우 버텼다’는 어쩐지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시기 중 하나가 대학 시기이다. 뒤늦게 후회를 하며 열심히 재수생활을 했지만 또다시 실수로 수학시험 문제를 밀려써 점수가 많이 떨어졌다. 당연히, 목표로 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 그리고 애써 외면하고 대학생활에 적응하던 시기, 군대 제대 후 적응 시기, 여자친구와의 힘든(?) 이별의 적응 시기. 이렇게 쓰고 보니 대학 4년 생활이 모두 그 어떤 '적응 시기'인 것만 같다. 문제는 '적응'을 해야만 했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응'을 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느냐가 문제이다. 나에rps 그 시절 적어도 적응의 수단이 책은 아니었다. 술과 친구만이 있었을뿐(물론 나에겐 그 존재들은 소중하다) 그 시기 나에게는 니체도 리영희도 마르크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늦은 나이에 대학때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가는 것 같다.  

      사랑의 기술

이 책에 읽으며 가장 반가운 것 중 하나가 소개된 책 중에 내가 가지고 있거나 읽은 책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이다. 또한 읽지 않았고 미처 몰랐던 책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고 읽고 싶어진 책들과의 만남이다. 특히 전자에 해당하는 책으로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가 있다. <인간실격>은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었다. 내 성격이 조금은 비관적인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니힐리즘으로 빠질만큼은 아니건만 왜, '인간실격'이라는 단어에 알지 못한 ‘끌림’을 느꼈을까?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로인해 다자이 오사무란 작가를 알게 되고 그 책을 통해 한 인간의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부유한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자기 집안의 부의 내력에 대해 괴로워하고 혐오하는 감수성을 지녔던 인물. 몇 번의 자살시도 끝에 종국에는 야마사키 도미에라는 윤락녀와 강물에 빠져 동반자살한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진다. 저자는 "인간실격을 20대 이후에 봐도 공감을 자아낼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공감의 원인이 그의 광기와 퇴폐와 자살과 같은 측면보다는 자신의 존재적 부정의함 느낄 수 있는 '감수성'에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책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나는 창피(?)하게도 이 책을 불과 세달 전에 읽었다. 읽으며 계속 한숨이 나왔다. "왜 난 이 책을 좀 더 일찍, 젊었을 때 읽지 않았을까?" 솔직히 예전에는 정말 이 책이 사랑에 관련된 '테크닉'과 관련된 책인 줄 알았다. 정말 창피한 일이다. 그럼 이 책에서 애기하는 사랑의 '기술'이란 무엇일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은 궁극적으로 '기술'이라는 것이다. 어떤 기술인가. 섬세하고 정교한 지식과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랑과 관련된 논의 중 '기술'을 애기하면 흔히들 섹슈얼리티적인 기술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남자들은. 그러나, 그 어떤 인간의 일 중 사랑만큼 '기술'이 필요한 것이 있을까? 그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 '독서'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왜 그 어린 시절 연애를 못했을까? 왜 그렇게 찌질했을까?(그렇다고 현재 연애를 잘할 수 있지도 않다. 난 결혼을 해버렸다.ㅋ) 세번째 책은 콜린윌슨의 <아웃사이더>이다. 이 책은 나에게 ‘결정적’인 책이다. 특히나 서평집에서 언급된 수많은 책중에 더 중요하고 심각한 책도 많지만 이 책이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느낀 저자와의 동일감정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 이 책을 읽은 시기의 동일성과 "이 한 권의 책으로 인해, 그 후 내 보잘것 없는 기나긴 독서편력이 시작"된 독서 습관의 동일성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이 책을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읽은 때가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이라는 사실만이 확실하다. 아마도 서점(천안역 앞에 있는 양지문고이다. 지금은 사려져버린...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양지문고가 학생들의 만남의 장소 지식의 보고였었다)에서 우연히(이것도 역시 제목에 끌렸을 것이다) 집어 들어 읽었을 것이다. 읽은 곳은 천안 중앙도서관이었던 것 같다. 연습장에 중요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을 메모해가며 읽은 기억이 난다. 당시 이 책은 나에게 일종의 큰 충격이었다. 이 알 수 없는 지식의 깊이와 범위 그런 이 책을 쓴 지은이의 나이가 불과 25살이라는 사실. 최성각씨는 이 충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피상적이나마 세계의 어둠에 접근했다. 그리고 콜린 윌슨이 다룬 무시무시한 인물들과 그들이 생과 작품으로 봐버린 세계의 심연에 빠져 들었다. 더러는 이해했고, 더러는 몰이해 상태에서도 왠지 책을 통해 새로 깨달은 사실들에 겨워했다. 내 방황의 근거가 이 책 속에 다 담겨 있다고 곡해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매혹당한 것은 책 속의 인물들만큼이나 한 권의 책으로 'outsider'라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로 바꾼 콜린 윌슨이라는 작가였다." <아웃사이더>를 다시 꺼내어 읽어보고 싶다. 

     

읽지도 않고 가진 책도 아니지만 서평집을 통해 관심이 간 책으로는 이태준의 단편 <밤길>과 게일 옴베트의 <암베드카르 평전>이다. 사실 이태준이라는 작가를 잘 알지도 못한다. 아마도 내 기억 속에 있다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속에서 봤거나, 또는 '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소설'같은 류의 책을 통해서 일 것이다. <밤길>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소설의 내용보다 최성각씨가 이 책과 만남 그 특별한 기억 때문 일 것이다. 지금도 내 책꽂이에는 여러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있지만 5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사 후 고등학교로 발령받았을 당시에는 자본론같은 정치경제학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그런 책을 읽는 내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으며,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때로는 "아직도 그런 책 읽는 사람도 있나", "그런 책은 대학때 읽는 거야"같은 반응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이런 책을 본다고 해서 나를 '불온'시하는 그 어떤 이들의 눈길이었다. 처음엔 난 당당하게 행동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니네 맘대로 생각해”하며 당당하게 읽고 또 일부러 표지가 보이게 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로 책상위에 올려 놓기도 했다. 그런데 최성각씨의 글을 읽은 후 어쩌면 그 시설 나의 생각과 행동에 반성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면서 주변을 살피는 그런 몸짓은 당시 청년들, 누구에게나 몸에 밴 지나친 자기검열, 혹은 과잉된 방어의 몸짓이었다. 독재정권이 무섭고도 가증스러운 것은 공포를 보통사람의 일상에 생필품처럼 조성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매우 우울한 일이었지만, 한편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떠들 것이야’라는 반권력적 쾌감도 수반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애기하는 '불온'한 책들을 읽은 이유가 학교의 현실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허황된 지식욕과 ‘겉멋’ 때문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 진중성 없는 '반권력적 쾌감'이 멋있어 보였을까? 하여튼 나 스스로 뒤돌아 보고 반성해 볼 만한 일이다. 두번째 책은 '내가 치른 국장'에 나온 게일 옴베트의 <암베드카르 평전>이다. 내가 모르던 암베드카르를 알게 되었으며, 인도의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간디의 부적절한 면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암베드카르가 위대한 이유는 중 하나, 카스트 제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만 때문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우선이었으며, 카스트는 단지 인도의 오래된 직업상의 관습이고 전통일 뿐"이라고 주장한 간디에게는 오랫동안 밑바닥에서 천대받고 멸시받은 불촉천민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독립 인도의 헌법에는 카스트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죽었다. 죽기 전에는 스스로 불교도로 개종함으로써 수백만 명의 불촉천민들이 암베드카르를 따라서 개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암베드카르가 한 유명한 명언이 "나는 비록 힌두로 태어났지만 불자로 죽겠다."이다. 그의 인간에 대한 약자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다.

최성각씨가 읽은 많은 책들에는 눈물이 배어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읽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읽고 "책상 위에 머리를 파묻고 큭큭 흐느꼈다"고 했으며,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에는 지금도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 난 어떤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아 봤으며 앞으로 어떤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라고, 그러나 눈물 보다는 웃으며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시대가 그런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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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으로서의 사랑 - 친밀성의 코드화
니클라스 루만 지음, 권기돈 외 옮김 / 새물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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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열정 _ 과도함의 수사학과 불안정성의 경험 

 p.95 변덕은 이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요즘도 그렇게들 말하듯이, 비록 언제나 동일한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언제나 사랑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개별적인 경우에도 연인들은 지속성이라는 허구를 상정하고 행위해야 한다. 그것이 허구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사랑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행위할 것. ... "사랑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약속 안에만 존재한다." 

p.96 '열정'이란 본래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겪고 있는 정신 상태를 뜻햇다. ... 열정이 일종의 제도로 인정받고 사회적 체계들의 형성을 위한 조건으로 기대되면 상황이 바뀌게 된다. 즉, 누구나 긴밀한 연애 관계에 들어서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열정에 빠지게 된다는 기대가 형성되고 심지어 요구되면 상황이 바뀌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열정의 의미론은 제도화된 자유를 숨겨두기 위해, 즉 그러한 자유를 가리는 동시에 덮어두기 위해 사용된다. 열정은 그 자체로도 또 그 결과에서도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행위의 자유가 된다. 능동성은 수동성으로, 자유는 강제로 위장된다.

 p.97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는 능동자인 동시에 수동자이다."

p.98 사랑은 이제 다른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무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초열정으로, 혹은 단적으로 말해 열정의 정수로 묘사될 수 있게 된다. 

p.99 열정에 대한 강조가 우선 말해주는 바는 사랑이 합리적 통제 영역의 외부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두 인격이 서로에게 동시에 빠져드는 일을 비개연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열정의 비합리성이기 때문이다. ... 자신의 열정에 대한 무방비 상태와 타인의 열정에 대한 정련된 태도는 서로를 상승시키는 관계로 나아간다. ... 이중의 우연성을 갖는 하나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투사는 대립적인 것들을 조합할 수 있게 해주며, 심지어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사랑이라는 소통매체가 준거하는 체계는 심리적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 체계이다. 그래서 사랑의 기술이라는 전통이 계속 이어진다.

p.101 사랑은 정체성 획득이 아니라 정체성 상실에서 정점에 이른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서 사랑하는 자도 애인의 사랑을 요구하며, 심지어는 그것이 무슨 의무라도 되는 듯 몰아붙이는 일도 정당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삶을 '유지하는 것', 노빌리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양식"이다. ... 그래서 17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사랑은 자기소외로 정의될수 있었다. 따라서 사랑은 대립적으로 보이는 것, 즉 정복과 자발적 복종을 조합한다. 그런 조합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성의 저항에는 복종하지 않는다는 추가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p.102 사랑은 눈을 지배하고, 눈빛 언어를 이용하며, 심지어 부정적인 것을 지각할 수 있게 해주지만 이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든다고들 말한다. 이와 비슷한 역설적인 말들이 이어질 수 있으며, 이런 역설들은 모순을 이용해 사랑할 때가 아니면 불가능한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라는 인상을 한층 강화할 수 있다. ...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든 선보다 고뇌를 더 좋아한다."  

p.104 '사랑받고 싶은 완전한 의지' 

p.106 이해관심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을 이용해 먹는 일은 가능하지만 이해관심을 사랑으로 옮겨놓는 일은 불가능하다. 

p.108 사랑은 사랑이라는 특수한 시야 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평가한다. 애인의 모든 체험과 행위는 사랑/무관심 혹은 정직한 사랑/부정직한 사랑과 같은 도식 아래서 끊임없이 관찰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p.110 과도함에 특히 들어맞는 일은 사랑에 대한 모든 정당화(근거지음)가 실패한다는 것이다.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규정된 것을 말하는 것은 사랑하기라는 양식과 모순될 테니 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 자체가 정당화이다. 

p.111 "사랑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더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거의 없다." 

p.112 "열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주고 신중하게 자신을 되찾을 것."

p.114 사랑받는 자가 처음 보여주는 호감 또는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런 호감의 표시가 요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를 디딤돌로 삼아 더 기어오를 수 있다. 일단 진행이 되면, 과정은 그 특수한 코드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그 코드가 약화될 때에야 비로소 다시 정상적이고 신중한 행동방식이 시작된다.

 p.116-117 시간적 구조는 무엇보다 사랑과 결혼의 분리 -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 를 강제한다. 사랑과 결혼의 대조가 어찌나 부각되어 이야기되어왔던지, 사회적 제도를 통해 가족으로 묶어내는 일인 결혼에 대해 열정이 갖는 이러한 차이가 다른 무엇보다 연애관계의 독립분화를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추정해보지 않을 수 없다. ... 뷔시 라뷔탱은 결혼에 골인하는 것이 애인과 헤어지는 명예로운 방법이라고 말한다. 결혼의 온갖 장점들과는 무관하게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도 타당한 것이었다. 애인과 결혼하려고 하는 자는 그녀를 증오하려고 하는것이라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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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으로서의 사랑 - 친밀성의 코드화
니클라스 루만 지음, 권기돈 외 옮김 / 새물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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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사랑의 의미론의 진화 

p.71 각주. 코드의 통일성(단위)은 역설을 함축한다. 진리라는 코드 자체를 비진리라고 지칭할 가능성, 사랑이라는 코드 자체를 증오라고 지칭할 가능성을 봉쇄할 수 없기 때문에, 진리가 진리인지 허위인지, 사랑이 사랑인지 증오인지를 확정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질 수밖에 없다. 코드화는 역설적인 코드화인 것이다. 사회의 주요한 기능체계들은 두 개의 값을 할당하는 프로그램들과 이를 운영하는 제도들을 통해 이러한 역설을 탈역설화한다. 반면에 사랑의 역설은 이런 제도들에 의지할 수 없다.

p.73 '궁정연예'와 '세련된 사랑'의 맥락에서 (문제들을) 체계화하고 집중화하는 하나의 과정이 도입되었다. 재생산은 집안에서, 연애는 집 밖에서 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차이는 제거되지 않았지만 한 여인, 오직 한 여인에게만 바치는 위대한 사랑이라는 관념을 통해 변형되었다. 남자는 오직 한 여인의 호의를 얻어야 했지만 그것을 쟁취할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강요할 수 없었다. 에로티시즘의 지향점은 (많건 적건 여러 여성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특정한 한 여인게게만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 이성과 감각적 관능의 차이가 이제까지의 관례와 달리 첨예하지 않은 영역 .... 이 성립한다. 

사랑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러한 최초의 집중화를 넘어선 것은 17세기이다. ... 사랑의 코드란 '단지 하나의 코드'일 뿐이며 사랑은 문학적으로 먼저 형성된, 즉 미리 규정되어 있는 감정이지 더이상 가족이나 종교와 같은 사회의 힘들의 지휘를 받는 것이 아니라느 점이 의식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자유 속에서 사랑은 자유로운 만큼 더 사랑에 고유한 의미론과 성적 향유라는 은밀한 목표에 구속된다... 

p. 74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관여하는가라는 물음 ... 사랑의 코드의 역설화는 열정과 쾌락을 높게 평가하고 그것들이 갖는 차이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인간학을 향한 길을 열었다. 18세기는 이러한 의미론을 넘겨 받았으며, 감정의 자립성을 강조하면서 진짜 감정을 - 이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성적 실혐으로의 접근을 위한 - 최소한의 전제조건인 애정, 마음, 섬세함 등과 구별하는 이해방식 속에서 이런 의미론을 보충해나갔다. 

p. 75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역설적인 코드화에는 도덕 감정에 대한 강조가 뒤따르며 ... 

05. 사랑에의 자유 - 이상에서 역설로

p.79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기는 대상의 완전함에서 사랑 고유의 정당서을 발견한다. 따라서 사랑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념, 즉 그 이념이 (사랑하는) 대상의 완벽함에서 도출되는 이념이며, 그러한 대상의 완벽함 때문에 거의 어찌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 한에서 '수난'이었다. 

p.80 성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에 의해 자신을 넘어서는 형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초세속적 대상들을 통해 고양되어야 한다는 속박을 받게 된다. 

p.81 프랑스에서는 여성에게 보다 자유로운 사회적 지위가 주어졌고, 여성이 자기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마련되었다. 이로부터 '요조숙녀'와 '요부'의 구별이 나오게 된다. 전자는 언제나 '아니오'라고, 후자는 언제나 '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조숙녀(값비싼 것)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된다. 어쨌거나 결정의 자유가 전제되어 있다 "자유가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p.82 자기의 욕망 자체 말고 다른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필요가 없게 된다. 사랑받는 인격에 내재한다고 여겨졌던 완벽함은 떨어져 나가고, 완벽함에 대한 숭배는 퇴보하며 ... 사랑을 선택할 자유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에 힘입어 관철되며 ... 사랑의 관계에 뛰어들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양측이 가진 자유인 *'이중의 우연성'의 독립분화는 하나의 특별한 의미론의 발전을 자극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한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이중적으로 우연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각각의 관여자가 가진 우연성이란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소통 체계는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으로부터 어떤 기대 구조가 창발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 

p.83 사랑은 더이상 청혼할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는 인격들의 일이 되었다. 

p.84 참을 수 없는 현학성이 생겨나 그에 대한 조롱이 일어난다. 

p.86 요조숙녀와 요부라는 유형 대립에서 이미 간파할 수 있듯이, 자유는 주로 사랑을 얻으려는 노력과 그에 대한 저항에 국한되어 관심을 끌었다. ... 사랑의 처방전은 마치 유혹을 위한 확실한 수단이 있는 듯 쓰고 있지만, '네' 혹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도 전제하고 있다. 

p.88-89 역설들은 체계화하는 힘을 가진 기법임이 증명된다. 그리고 체계화된 행동에 대한 비개연적인 요구도 안정성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형식이다. ... 연인들은 이를테면 '강요된 선택' 모델이나 타협할 수 없는 양자택일에 직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역설은 친밀관계에서 파트너를 향할 수밖에 없는 기대의 층위와 관련을 맺는다. 그리고 사랑은 이 모든 기대가 그럼에도 충족될 수 있다는 점을 상징한다. ... 합리성을 높이 평가하고 논리를 건전한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에서 역설적인 동기유발은 병리적 관점에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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