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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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알라딘 리뷰 대회에 응모할 작정으로 쓴 글인데 기간을 혼동한 덕에 응모는 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ㅋㅋ

 

소설보다 재미있는 서평

2010.12.20

최근 서평 모음집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알라딘 블로그의 유명 블로거인 로쟈 이현우씨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 그리고 같은 저자의 얼마 전 나온 <책을 읽을 자유>가 있으며, 소설가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도 출간되었다.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 사용법>도 있다. 새로운 내용도 아닌 '책의 내용에 대한 평'인 서평(書評)에 관련된 책들이 왜 유행처럼 나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서평 책들을 읽어야 할까?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는 그 수많은 서평 관련 책들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그 이유는 그가 언급한 수 십권의 책들이 단순히 그가 '읽은' 책에 관한 에세이와 같은 책을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가 책을 통해 느끼고 배워온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은이의 독서 편력은 "나는 단지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글자는 늘 내 마음과 머릿속을 세차게 휘젓곤 했다. 때론 놀라움으로, 때론 숙연한 감동으로 책은 나를 뒤흔들었다. 책은 피로에 지친 나를 덮어주는 따뜻한 담요였고, 세찬 바람을 막아주는 천막이었고, 아주 가끔은 모닥불이었고, 때로는 등불이기도 했으며, 언제나 의지할 기둥이었으며, 책 속에 빠져 있던 시간은 혼자만의 잔치판이기도 했다."라는 지은이의 머리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의 차례는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쓸쓸한 젊은 날 책으로 겨우 버텼다’, 2부 ‘시대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3부 ‘우리에겐 바로잡을 시간밖에 없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가장 맘에 드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책의 구성과 제목이다. 특히나 ‘쓸쓸한 젊은 날, 책으로 겨우 버텼다’는 어쩐지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시기 중 하나가 대학 시기이다. 뒤늦게 후회를 하며 열심히 재수생활을 했지만 또다시 실수로 수학시험 문제를 밀려써 점수가 많이 떨어졌다. 당연히, 목표로 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 그리고 애써 외면하고 대학생활에 적응하던 시기, 군대 제대 후 적응 시기, 여자친구와의 힘든(?) 이별의 적응 시기. 이렇게 쓰고 보니 대학 4년 생활이 모두 그 어떤 '적응 시기'인 것만 같다. 문제는 '적응'을 해야만 했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응'을 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느냐가 문제이다. 나에rps 그 시절 적어도 적응의 수단이 책은 아니었다. 술과 친구만이 있었을뿐(물론 나에겐 그 존재들은 소중하다) 그 시기 나에게는 니체도 리영희도 마르크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늦은 나이에 대학때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가는 것 같다.  

      사랑의 기술

이 책에 읽으며 가장 반가운 것 중 하나가 소개된 책 중에 내가 가지고 있거나 읽은 책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이다. 또한 읽지 않았고 미처 몰랐던 책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고 읽고 싶어진 책들과의 만남이다. 특히 전자에 해당하는 책으로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가 있다. <인간실격>은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었다. 내 성격이 조금은 비관적인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니힐리즘으로 빠질만큼은 아니건만 왜, '인간실격'이라는 단어에 알지 못한 ‘끌림’을 느꼈을까?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로인해 다자이 오사무란 작가를 알게 되고 그 책을 통해 한 인간의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부유한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자기 집안의 부의 내력에 대해 괴로워하고 혐오하는 감수성을 지녔던 인물. 몇 번의 자살시도 끝에 종국에는 야마사키 도미에라는 윤락녀와 강물에 빠져 동반자살한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진다. 저자는 "인간실격을 20대 이후에 봐도 공감을 자아낼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공감의 원인이 그의 광기와 퇴폐와 자살과 같은 측면보다는 자신의 존재적 부정의함 느낄 수 있는 '감수성'에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책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나는 창피(?)하게도 이 책을 불과 세달 전에 읽었다. 읽으며 계속 한숨이 나왔다. "왜 난 이 책을 좀 더 일찍, 젊었을 때 읽지 않았을까?" 솔직히 예전에는 정말 이 책이 사랑에 관련된 '테크닉'과 관련된 책인 줄 알았다. 정말 창피한 일이다. 그럼 이 책에서 애기하는 사랑의 '기술'이란 무엇일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은 궁극적으로 '기술'이라는 것이다. 어떤 기술인가. 섬세하고 정교한 지식과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랑과 관련된 논의 중 '기술'을 애기하면 흔히들 섹슈얼리티적인 기술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남자들은. 그러나, 그 어떤 인간의 일 중 사랑만큼 '기술'이 필요한 것이 있을까? 그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 '독서'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왜 그 어린 시절 연애를 못했을까? 왜 그렇게 찌질했을까?(그렇다고 현재 연애를 잘할 수 있지도 않다. 난 결혼을 해버렸다.ㅋ) 세번째 책은 콜린윌슨의 <아웃사이더>이다. 이 책은 나에게 ‘결정적’인 책이다. 특히나 서평집에서 언급된 수많은 책중에 더 중요하고 심각한 책도 많지만 이 책이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느낀 저자와의 동일감정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 이 책을 읽은 시기의 동일성과 "이 한 권의 책으로 인해, 그 후 내 보잘것 없는 기나긴 독서편력이 시작"된 독서 습관의 동일성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이 책을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읽은 때가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이라는 사실만이 확실하다. 아마도 서점(천안역 앞에 있는 양지문고이다. 지금은 사려져버린...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양지문고가 학생들의 만남의 장소 지식의 보고였었다)에서 우연히(이것도 역시 제목에 끌렸을 것이다) 집어 들어 읽었을 것이다. 읽은 곳은 천안 중앙도서관이었던 것 같다. 연습장에 중요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을 메모해가며 읽은 기억이 난다. 당시 이 책은 나에게 일종의 큰 충격이었다. 이 알 수 없는 지식의 깊이와 범위 그런 이 책을 쓴 지은이의 나이가 불과 25살이라는 사실. 최성각씨는 이 충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피상적이나마 세계의 어둠에 접근했다. 그리고 콜린 윌슨이 다룬 무시무시한 인물들과 그들이 생과 작품으로 봐버린 세계의 심연에 빠져 들었다. 더러는 이해했고, 더러는 몰이해 상태에서도 왠지 책을 통해 새로 깨달은 사실들에 겨워했다. 내 방황의 근거가 이 책 속에 다 담겨 있다고 곡해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매혹당한 것은 책 속의 인물들만큼이나 한 권의 책으로 'outsider'라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로 바꾼 콜린 윌슨이라는 작가였다." <아웃사이더>를 다시 꺼내어 읽어보고 싶다. 

     

읽지도 않고 가진 책도 아니지만 서평집을 통해 관심이 간 책으로는 이태준의 단편 <밤길>과 게일 옴베트의 <암베드카르 평전>이다. 사실 이태준이라는 작가를 잘 알지도 못한다. 아마도 내 기억 속에 있다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속에서 봤거나, 또는 '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소설'같은 류의 책을 통해서 일 것이다. <밤길>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소설의 내용보다 최성각씨가 이 책과 만남 그 특별한 기억 때문 일 것이다. 지금도 내 책꽂이에는 여러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있지만 5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사 후 고등학교로 발령받았을 당시에는 자본론같은 정치경제학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그런 책을 읽는 내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으며,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때로는 "아직도 그런 책 읽는 사람도 있나", "그런 책은 대학때 읽는 거야"같은 반응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이런 책을 본다고 해서 나를 '불온'시하는 그 어떤 이들의 눈길이었다. 처음엔 난 당당하게 행동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니네 맘대로 생각해”하며 당당하게 읽고 또 일부러 표지가 보이게 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로 책상위에 올려 놓기도 했다. 그런데 최성각씨의 글을 읽은 후 어쩌면 그 시설 나의 생각과 행동에 반성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면서 주변을 살피는 그런 몸짓은 당시 청년들, 누구에게나 몸에 밴 지나친 자기검열, 혹은 과잉된 방어의 몸짓이었다. 독재정권이 무섭고도 가증스러운 것은 공포를 보통사람의 일상에 생필품처럼 조성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매우 우울한 일이었지만, 한편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떠들 것이야’라는 반권력적 쾌감도 수반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애기하는 '불온'한 책들을 읽은 이유가 학교의 현실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허황된 지식욕과 ‘겉멋’ 때문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 진중성 없는 '반권력적 쾌감'이 멋있어 보였을까? 하여튼 나 스스로 뒤돌아 보고 반성해 볼 만한 일이다. 두번째 책은 '내가 치른 국장'에 나온 게일 옴베트의 <암베드카르 평전>이다. 내가 모르던 암베드카르를 알게 되었으며, 인도의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간디의 부적절한 면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암베드카르가 위대한 이유는 중 하나, 카스트 제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만 때문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우선이었으며, 카스트는 단지 인도의 오래된 직업상의 관습이고 전통일 뿐"이라고 주장한 간디에게는 오랫동안 밑바닥에서 천대받고 멸시받은 불촉천민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독립 인도의 헌법에는 카스트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죽었다. 죽기 전에는 스스로 불교도로 개종함으로써 수백만 명의 불촉천민들이 암베드카르를 따라서 개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암베드카르가 한 유명한 명언이 "나는 비록 힌두로 태어났지만 불자로 죽겠다."이다. 그의 인간에 대한 약자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다.

최성각씨가 읽은 많은 책들에는 눈물이 배어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읽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읽고 "책상 위에 머리를 파묻고 큭큭 흐느꼈다"고 했으며,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에는 지금도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 난 어떤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아 봤으며 앞으로 어떤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라고, 그러나 눈물 보다는 웃으며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시대가 그런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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