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당신의 추천도서는?
교회에 정착하다. 그것도 내가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놀라곤 한다. 요즘 내가 교회에 정착했고, 그곳의 모임에 한 주도 빼놓지 않고 나가고 있으며, '신앙'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으리라 생각하는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고, 여러가지 핑계로서 삶의 자세를 바꾸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습관이라는 타성을 이기고 교회에 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 "너 왜그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떠올려 볼 수가 있다. 그 중 큰 축은 이 두가지일 것이다.
먼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생각 때문일 터다. 예를 들면, 교회란 곳은 항상 경건할 것이라 예측되는 곳이고,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란 '신앙심'이 두텁고, 나름대로 우리가 묵시적으로 합의하는 '도덕적 인간' 혹은 '윤리적 인간'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교회가 주는 '구속복'을 입을 까 하는 생각에서일 테다. 이런 류의 주장은 주로 나와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하는, 혹은 군대에서 맞딱 드리고 있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또, 교회의 '사회적 이념좌표'와 내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있다. 사실 위의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인데, 조금 다른 층위의 문제기도 하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에 물들 지 않기'를 주장하는 것의 효과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강한 주장을 하는 것을 꺼리고(사실은 방조하고), 반대로 온건한 가치들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기성 질서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언제나 비판적이다. 쉽게 말해, 교회라는 곳이 생각되기는 온건한 우파인데, 나는 아무리 떠올려봐도 레디컬한 좌파로 분류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금 재차 이야기하지만, 놀라고 또 놀란다. 이제 사람들의 전망은 두가지가 다시금 되는데, 먼저 내가 교회를 금방 떠날 것이라는 생각과, 혹은 그 교회에 젖어 들어가서 바뀔 것이라는 전망. 전자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이고, 후자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나와 그나마 이야기해본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은 이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 모두, 굉장한 믿음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규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규정'일 테고, 또 하나는 교회는 '변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사고이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 판단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즉, 실천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사회적 실천의 층위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반대하고, 동시에 이론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온당한 진리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항상, 회고와 반추만을 행하는 것의 근저에 내가 무력하다는 것의 반증이 함께하는데, 사실 2006년 이후, 그리고 앞으로 제대하기 전까지의 내 모습은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듯하다. 군인이라는 신분이 주는 제약이 생각보다 막강하고, 그것은 단순히 '안된'다는 소극적 통제가 아니라, 어느 층위에서 항상 수위를 고민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통제의, 훈육의 차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권력은 항상 생산적이기에 그렇다.
잠깐 돌아왔지만, 여튼 내가 지금 지닐 수 있는 사유의 양식이라는 것이 '회고와 반추'에만 있다 하더라도 난 그것에 대해서 '회의'먹고 멈출 수는 없다. 그나마라도 하는 것이 내 '반성적 사유'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명제들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내가 대학생활 동안에 느꼈던 사회과학이 주었던 사유덕택일 것이다. 지난 번, 우석훈의 칼럼집에 대한 서평에서도 이야기 했었지만(http://blog.aladin.co.kr/hendrix/1744566) 내가 접했던 사회에서 나는 싸울 수밖에 없었고, 사회과학서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전에 다니던 나의 모(母)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접했던 세상의 모습과 교회가 모사하는 세상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할 내 자세에 대한 교회의 인도와 내 판단이 언제나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길이 있었는 지, 내 청소년기에 함께 했던 전도사가 주었던 길을 통해서 경동교회를 찾게 되었고, 그 후 '교회'라는 것 자체가 모사하는 사회의 상이라는 것도 교회에 따라서 다를 수 있고, '기독교'를 내 종교로 삼고, 주를 섬긴다는 것도 여러가지의 방법으로 가능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마찬가지로 내 삶의 자세 또한 그 전의 교회에서 제시했던 방법 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한 번도 정립된 뚜렷한 사고를 해본 적이 없었고, 동시에 외삽적인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은 갖고 있으되, 그 안으로 들어가서 '내재적'으로 파고 들고, 그 안에서 어떤 내 나름의 해석을 뽑아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얼치기였고, 대학생 기독교 단체의 사람들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으며,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름의 문제의식은 발전되지 않은 채로 '맹아' 수준으로만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한국 교계에 대한 실망과, 신학이 나아가야할 길,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들에 대해서 밑그림만 그려놓고, 그 디테일을 추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교회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건 어떤 신의 계시도 아니었고, 대단한 실존적 결단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에 끼어서 일원이 되고자 했던 알량한 자리 욕심도 없다할 수 없고, 동시에 '죄론'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못한 나머지, 교회에 다니기는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군생활 2년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 누리기 시작한 주5일제의 혜택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집에서는 언제나 교회에 가라고 달달 볶아 댔고, 또 "너 가고 싶어하는 교회에 다니니깐, 거기는 열심히 가라. 주일마다 뭐하는 거냐?"라는 질문에 대해 못이긴척하면서 교회로 향한 것이다.
민중신학을 만나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었지만, 어쩌다 보니 할 수없이 책벌레가 되어버렸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8148). 나에게 가장 훌륭한 소통수단은, 말보다는 사실 글이다. 말을 하다보면 흥분하고 감정낭비가 많은 편이기 때문에, 되도록 그 자리에서 논쟁은 준비하기 전에는 피하고, 준비되지 않은 자세에서는 구도만 만들고 빼는 편이다. 특히, 군대 입대 좀 전과 지금 군생활 동안은 더 피하는 편이다. 쓸데없는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 측면에서 나한테는 글이 더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 수록 읽는 것에도 더 몰입하게 되었다. 읽고 쓰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경동교회에 터를 잡고, 다니는 동안 몇명의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의 특징은(실상 경동교회에 나이를 먹고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존의 보수적인 신학과 그 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에 불만을 갖고, 회의에 빠져서 찾다가 경동에 정착했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서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김강기명(www.kimkang.net)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내 생각대로 읽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을 받기도 했다. "민중신학은 회춘해야 합니다"라는 그의 말에 놀랐고, 그의 사회과학적 해박함과, 철학적 입지가 비슷한 곳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공부에 대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또 경동교회의 공동체가 '다원주의'적이었고,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하고 그 논의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도그마가 없다는 점에서 내 공부는 자극이 되었고, 올해(2008)가 열리자, 내 마음을 부여잡는 기회이자, 또 내가 내 입장에서 가장 가까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민중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내가 읽은 기독교와 관련된 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였다. 건대 철학과 강영계 선생이 번역한 책이었는데, 읽다가 몇가지로 정리한 생각은, 신은 무한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떠한 척도로 잰다해도, 그 자체의 유한성으로 인해 '등가성'이 인정될 수 없을 것이며, 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의 '상대적' 진리임을 인정하고 시작한다면, 또한 부담없이 이야기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인 정통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4살 때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샀다가 대학교 2학년 때 선배에게 빌려준 후 한동안 읽지 못한 책이 있었는데, 하비콕스의 <세속도시>였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5149). 하비콕스를 통해서 난 사실 에큐메니컬 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 수가 있었다. 경동에서 에큐메니컬 신학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그 정수를 처음 느껴본 게 그 때였다. 이 때도 24살 때였다.
그리고 작년(2007년),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를 읽었는데(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그 사람이 강의석 사태 때 그 학교의 교목이었다는 점과, 그 사건 이후 목사 직을 그만 뒀다는 점 때문에 더 끌리기도 했지만, 그가 제시했던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의 자유로움이 나를 잡아 끌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읽은 성서에 관련된, 신학에 관련된 책은 이현주 목사의 책이었는데, 이 책도 경동교회에 나오게 된 어떤 여자 교우(경동에서는 형제, 자매의 표현을 쓰지 않는다.)가 추천해서 읽게 되었었다. 또 이 책을 잡은 이유는, 그 출판사가 '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온건해 보이지만, 단단한 진보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출판사라 평소에 생각해 왔기에, 더욱 믿음이 갔다.
예수의 삶과 길(http://blog.aladin.co.kr/hendrix/1801079),
그리스도의 몸, 교회(http://blog.aladin.co.kr/hendrix/1814042),
탈출의 하나님(http://blog.aladin.co.kr/hendrix/1825061)
이현주 목사의 글들은 개괄적으로 기독교를 종교로 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한 책들인데, 장점이라면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었고, 단점이라면 위험한 지점은 다 피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실존주의에 경도된 경향도 보였다. 나에겐 사회의 구조에 대한 엄밀함이 떨어지는 '마음가짐'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신앙은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요 몇 달 전, 교회를 갔다가 "경동교회의 역사"를 알자면서, 읽게 된 사람이 장공 김재준이었는데, 그의 평전을 교회 도서실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몇 달 지나, 학교 도서관에서 마저 읽을 수가 있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812879)
그리고 최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저작이었던, <무례한 복음>을 읽으면서 한국 교회가 미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병리적 현상의 하나인 '선교'에 대해서 다시금 인지하게 되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836958)
요즘 그리고 놀랍게 읽은 책들은 미국의 '예수 세미나' 그룹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이다. 예수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 짚음으로써, 기존의 '신' 예수가 아니라 '민중운동가' 예수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 다시금 나에게 충격적이었고, 한동안 공부할 주제로 정해지고 있다.
일단 존 도미닉과 호슬리의 책들을 읽었는 데, 도미닉의 <역사적 예수>를 짧게 쓴 <예수>(http://blog.aladin.co.kr/hendrix/1834711), 그리고 <예수와 제국>(http://blog.aladin.co.kr/hendrix/1842633)를 읽었었는데,
다음엔 로버트 펑크의 글과 존 쉘 비 스퐁의 책들을 읽어볼 계획이다.
한동안, 민중신학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과학과 역사학과 신학의 접점을 탐구해 볼 계획이다.
한 동안, 내가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복이 없다고 믿었었는데, 요즘엔 대부분의 기독교 인들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고, 오히려 내가 복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사유의 폭과 깊이를 다시금 재 점검할 기회를 갖는 끊임없이 '차이와 반복' 속에서 고뇌하면서 그런 고뇌의 반복, 그리고 새로운 활력을 북돋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운데 지적 충동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점이 굉장한 나에게 주어진 은혜가 되는 하루 하루다.
언제나 말하듯, 공부할 것은 미어터지지만, 요즘은 그 미어터짐에 묻혀 있는 내 자신의 생활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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