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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ㅣ 세미나리움 총서 12
에릭 홉스봄 지음, 김정한.정철수.김동택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원제는 "Uncommon people"(1998)이다. 평범하지 않은 민중 혹은 인민이 되겠다. 위로부터의 역사 기술에 익숙해져온 한국 사회의 역사관에 있어서, 이러한 시도는 흔히 아래로부터의 역사 기술에 해당하는 역사관에 입각해있다. 영국의 위대한 맑스주의 역사가인 E. P.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기술되었던 능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영국 노동계급의 생활상을 이해 한다면, 이 책도 그러한 입장에 서서 기술되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E. 홉스봄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자본주의 전체의 역사'를 써온 역사가이다. 좌파 역사관의(사실상은 근대적 관점의 좌파 역사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가로서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를 써오면서 엄청난 사료들을 토대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써왔다. 지금 그의 나이가 2004년 우리나이로 현재 88세라는 것을 감안할 때, 아직도 왕성한 강의와 저술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학자로서의 성실함과 또 한편으로는 자기 관리에 투철함을 느낄 수 있다. (사실 그에 대한 탈 근대적 맑스주의자들의 '너무 완고하다'라는 비판도 그러한 그의 생활상에 비추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의 거시적인 '~시대 시리즈'의 정치, 경제에 입각한 저술과는 조금 다르게, 기존의 영국 노동계급과, 미주 대륙의 농민 운동, 정치적 사건들, 재즈라는 독특한 관심사에 대해서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다. 좀 두꺼운 책들에 대한 공포가 늘상 어렵거나 쉽게 읽을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증폭시키지만, 이 책에 있는 다양한 주제들(나는 이책을 통해서 재즈 아티스트들을 재 발견했고, 그것들이 흑민들의 애환에서 출발한 '아래로 부터의 문화'라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재즈를 단순한 상층 계급의 엘리트 문화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았다.)은 머리 맡에 두고 읽어도 될만한 책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가 견지해온 뚜렷한 입장은 여기서도 일관되게 주장되는 데, 그것은 거칠게 이야기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민중의 역동성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석해온, 수동적이고 mob이라고 폄하될만큼 단순무지한 사람들로 느껴온 하층민들의 역사는 이 글의 서두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훨씬 더 역동적이며 다양하며 나름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에 돌출된 문화의 양상에도 상층계급의 엘리트 문화가 아닌 Uncommon people에 의해서 나타난 Jazz 같은 것을 볼 때 지금까지의 선입견은 정말로 오해였음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또한 농민들의 운동에 대해서 단순하게 봉기와 '여촌야도'식의 이미지로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에 대해서도 나름의 대응방식으로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농민운동'을 보여줌으로 반박한다.
2. 사회운동 혹은 정당의 몫이다.
그가 숱하게 비판하는 것들을 돌아본다면, 영국 노동당, 그리고 영국 좌파 정당의 나름의 능동적 대응 부재에 대한 것들이다. 항상 어떠한 도그마에 빠지고 그것을 확인하는 수준의 실천만을 강조해왔던 좌파 정당과 사회운동의 역사에 대해 홉스봄은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다만 그에게 조금더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은 어떠한 관계에서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 가를 조금 더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68혁명에 대한 평가는(그가 후에 평가가 온당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단순하게 공산당의 무능만을 이야기하는 측면이 있고, 그 폭발력을 간과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중요한 정당과 사회운동의 나름의 몫의 중요성은 어떤 조직에 도입하여도 온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책을 덮을 때, 한국의 좌파 역사학 책들을 생각해 보았다. 최근의 역동적인 아래로부터의 역사 구성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들(구해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는 대표적인 저작일 것이다.)이 어느 정도의 만회를 하고 있지만, 기실 입장을 제외한다면 실상 생활의 측면에서 보여지는 평범하지 않은 다양성을 가진 우리나라의 아래의 역사는 아직도 시작 단계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단순히 대중을 '변혁 주체'의 단일성에 엮거나, 전위에 의해서 이끌려 와야 하는 '대상'으로만 설정해왔던 것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는 단순히 좌파들의 책임이 아니라, 그 근저에 깔려있는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잔재가 아닐런지?
[인상깊은구절]
이로부터 나의 마지막 논점, 즉 계급의식에 이르게 된다. 나는-우리가 아는 한에서-노동자 대중의 감성과 견해를 활동가 및 투사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해 왔다. 왜냐하면 양자는 분명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 활동가들은..... 새로운 노동계급의 삶의 방식-특히 축구 문화-대부분을 극히 싫어했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의 우둔함과 나태함에 대한 증오, 조롱, 멸시를 표하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수많은 저서들도 있다. 투사들이 지닌 계급의식의 함의가 무엇이든, 대중들은 그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단순히 비정치적이고 금욕적인 하층민이나 국민 대부분을 이루는 빈민 혹은 기껏해야 자신들의 협소한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데에만 동원될 수 있는 잠재적 혹은 실제적 노동조합주의자들로 보는 것 또한 분명 잘못이다. 그들 역시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