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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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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 순간, '한국인'의 민족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한큐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구원받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아들로 절대적인 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수십년 동안, 종교를 연구한, 기독교의 섭리에 대해서 인정하고 믿는 종교학자가 낸 결론이다. 그가 본 한국의 '기독교'의 신앙은 간단하다.

어린아이가 말하는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야"라는 식의 유아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듣는 엄마는 "맞아,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야!"라고 대답해 줄테지만, 그 아이가 20살이 되어서도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유아적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성장이 되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문제라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가 기실 "우리 아빠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활에서 밀접하게 발견하고도, 우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 아빠가 최고"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다니면 이 것은 곧바로 사회적 문제까지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다른 아빠들도 그들 나름에게는 최고 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고, 내가 자라서 어떤 아빠가 되어야할 지, 어떤 엄마가 되어야할 지도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이 많지만, 그것이 예화로 쉽게 풀어져 있기 때문에 다가가기 쉬운, 우리의 예수에 대한 편견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한번 깨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편견을 깨려는 이들에게 '빨갱이', 혹은 '신신학'의 굴레를 씌우고 있지만, 기실 이런 배타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만 절대적일 뿐,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큰 경향이 아닌 '근본주의적 이해'일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유일신'이라 생각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말하지만, 기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허구이다. 왜냐면, 김경재 목사등도 비판하고 있지만, 진정 유일신을 믿는다면, 다른 이신과 대적하는 신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들도 하나님의 '속성'임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갖는 다는 것은, 기독교의 관점을 '놓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단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를 기독교 인이 읽어야 함도 당연하다는 결론을 저자는 도출한다.

또 하나 그의 공박이 강한 부분은,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축자무오설' 하도 많이 쓰는 말이지만, 성경에 쓰여진 기록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그 영감대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인데, 우리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예수의 계보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다르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며, 또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구현해 보려는 데에서도 불가능 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실 성서는 그 당대의 '고백적' 언어였거나, 당시의 민족의 세계관의 투영이다.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읽고, 그대로 따르려면, 우리는 우선 노예제도를 살려내야 하고, 다시금 이민족을 정벌해야하며, 여성들을 강단에서 내려야 하고, '처녀'가 아닌 여자를 그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하게 된다. 결국,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그 해석.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책은, '종교'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환기시키고, '종교를 믿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들은 개인에게 있어서의 영성의 의미와, 종교가 사회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자꾸 그것들에 대해서는 피해가고, 교조적인 신앙들이 '신학'없이 논의 없이 우리들에게 흘러가고 있기에 '기독교' 자체가 황폐해지는 것이다.

많은 참고문헌들과 읽을 꺼리들을 던져주는 점이 유익하고, 생각할 바를 남겨준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난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나아가 천도교나 원불교 등 이른바 민족종교까지 합심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 속에 이런 근본적 '의식 변화'가 일어나게 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이런 대화야말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내가 사랑하는 조국 하늘 아래에서 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p.291).

 
   

하지만 몇 가지 부분은 모호한데,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그는 규정하기를 피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는 것에 좀 문제가 있다. 그는 예수를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졌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리고 '역사적 예수' 논의들을 볼 때, 예수는 단순한 보편자로서의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억압받은 자들'로 분명히 그 범주를 축소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벗어난 다면, '예수'에 대한 논의는 다시금 구름위로 떠오르고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의 종교는 맑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 밖에 안된다. 처절한 환경에서의 위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는 관점의 차이겠지만, 그의 말속에 들어있는 민족주의적 입장들이라는 것들이 가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냥 쉽게 쓰인다는 점이다. 차라리 정교하게 '민족'과 '겨레'에 대해서 구체적인 메시지를 준다면 모를까, 그냥 통상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랑합니다'하듯, 사용된다는 점은 엄밀성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게 하며, 김진홍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이 시점에는 다시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먹물들의' 이야기를 떠나서도, 이 책은 기존의 근본주의적인 '철부지' 기독교를 극복하는 데 해독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반가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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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1406 2008-03-0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기독교 도서에서 빼 주시고, 반기독교 도서로 넣어주세요...

헨드릭스 2008-03-04 18:15   좋아요 0 | URL
아뇨. 그렇게 하기는 곤란한데요? 님이 '기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평에서 생각하시는 지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만나는 예수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충분히 주었고, 그런 고민들을 가지고 다시금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기독교' 딱지를 붙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요. 이 책을 아마 안 읽어보셨겠죠? 일독을 권합니다.

드팀전 2008-03-2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드릭스의 사진이 멋집니다..처음 인사드리네요...우연히 정말 우연히 들어왔어요^^
'그런 예수는 없다'가 이 책에 가장 적합한 제목이 아니었을까 해요...그러면에서 이 책이 '반기독교적'이라는데는 생각을 같이 하지 않습니다.(전 반-한국기독교이자 비기독교인입니다만.) 오히려 맹신과 비난이라는 이중의 덫에 빠진 한국 기독교를 살릴 수 있는 인식론적 단초들을 제공하지 않나싶습니다.예전에 저희 아버지께도 선물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좋았다고 하시더군요..^^

옆에 리스트를 보니까 언론고시(?)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저도 예전에..

헨드릭스 2008-03-25 18:42   좋아요 0 | URL
원래, 그런 제목이었다더라구요.. '그런 예수는 없다' .. ^^;
헨드릭스를 워낙 좋아해서 말이죠 ㅋㅋ
언론고시에 관심이 있고, 한두해는 아마 그것에 매진할 듯합니다. '매진' 하지는 않고 있는 지금이긴 하지만요.. ;;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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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착각의 늪에서 발 빼기

이 책의 저자는 목사였다. 그것도 예장 통합쪽의 목사로 활동했었고, 대광고등학교의 교목이었으며, 숱한 고등학생에게 종교과목을 가르쳤던, 그냥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사회의 목회자였다. 하지만, 강의석 사태를 분기점으로 하여서 그 틀에서 벗어난 '이단아'가 되었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는 교목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다. 그냥 한 사람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갖는 이가 되었다.

보통, 평신도들에 있어서 교회에 지쳐 나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고, 주위에 수두룩하다. 교회에 가서 누리고 싶었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평안' 등의 정신적 안위였다면, 교회에 가서 그걸 도대체 찾을 수 없는 요즘이기에 그들은 교회를 나오고야 만다. 보통 이런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부딪히는 현실과 괴리된 교회의 '몰상식'에 놀라거나 정서적 '황폐함'에 자괴감을 느끼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인 것이다.

다만, 이 책의 저자 류상태의 경우에 놀라운 것은, 그는 주류기독교가 주는 관념에 대해서 타협이든 동의이든 간에 그 신학과 신앙의 방향성에 발을 맞춰가던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들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주위 사람에게 '선생'으로써 가르치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보수적 한국 기독교 신학의 'Zealot' 역할 만을 했던 것은 아니고, 나름의 고민에 비추어 가면서 그것들을 바라봤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의 요소에는, 그가 언급했던 '예수 세미나' 그룹의 '역사적 예수' 논의가 있을 것이고, 한국의 민중신학 등의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내가 알게 된 김강기명도 약간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 관점이 제공하는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왔고, '불거토피아'(http://cafe.daum.net/bgtopia) 등에서 지속적인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에 읽었던 그의 책(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당신들의 예수"에서 가장 센세이션했던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부분에 흠뻑 빠지고, 한국 기독교에 대한 가치관 하나를 잡을 수 있었는데, 먼저 쓰여진 이 책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같은 경우 그런 관점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어떤 점에서 예수를 배반했는가?

도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이제는 더이상 한국의 기독교가 확장하지도 않는 형국이다. 오히려 천주교 같은 경우 신도의 수의 확장이 있지만, 더 이상 기독교(개신교)는 수의 확장도 오히려 (-)로 전환된 상태고, 사회 병리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다 그렇게 된건가?

이 책에는 그 병리적 현상들과 그 현상들에서 나타나는 뿌리 깊은 병패가 나타나있다.

근데, 자꾸 저자가 쉽게도 '기독교' 신앙, 신학 그 자체를 공격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기독교의 특정 부문에 대해서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성장한 것이 아니라 살찐 것이었다. ... 체계적인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빼고 건강을 회복하지 않으면 심각한 질병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건강을 되찾아 우리 사회로부터 존경을 회복하는 길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너무도 멀고 험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며 뼈를 깎는 자성의 노력이 없이는 한국 교회가 살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반성과 개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며, 정통 교리로 인정하고 따라온 모든 신학적인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보고 예수가 전한 복음의 원형, 즉 예수의 삶과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pp.80-81)
 
   

즉, 한국 교회의 병패의 이면에는 한국에서의 특수한 '신학적 문제'들의 근본적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배타성, 세속화 및 물신화, 역사성 결여, 가부장적 권위주의, 성서 문자주의(축자무오설), 종말론적 환상주의 등의 병패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 병패의 중심에 기실은 평신도들보다 목회자들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데올로그화 된 목회자 집단.. 그들은 '예수의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고 선포하며, 대속신앙에 의거 지속적인 인간의 '죄'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모든 승리를 얻는 다는 식의 협박을 지속한다. 그들의 정화를 바랬기에, 그 권력 구조에서 류상태는 갖고 있던 지위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을 읽던 도중, 강의석 사건에 대한 일지가 나온다. 상식적인 선에서의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 학교라는 '억압 기제'에서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해서 배운다.

부흥회에서 나오는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 지에 대한 그의 말들이 귓가에 맴돈다.


   
 
 사흘 동안의 집회가 끝나자 회원들의 얼굴은 천사같이 변했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천진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3일간의 체험'을 통해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했으며, 거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들이 교회에 가면 새로운 움직임이 일 것이다. 그들이 속한 교회 한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그들은 성령의 불덩이가 되어 다른 교인들의 심령에도 불을 지를 것이며,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소중한 이성과 분별력을 교회에 갖다 바쳤다(p.20).
 
   

개개인의 '의심하는 신학'에 대한 강조도 되새길만 하다.


   
 
한국 교회 목사여! 성도들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고 분별력 없는 바보가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목사와 장로들이여! 예수를 제대로 믿고 전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하느님 편에 서 있는지 하느님을 등지고 서 있는 지 의심하며 돌아보라. 그리고 성도에게 자유롭게 의심하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 교회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면, 당신들뿐 아니라 성도도 쉽게 중병에 전염될 것이다.
 바른 목회자, 바른 장로, 바른 신앙인이 되고 싶으면 의심하라. 한국 교회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pp.39-40).
 
   

 
그 외에도 성서에 대한 기존 해석들에 대한 비평등도 있는데, 기실 이 것들의 그의 강조따라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사실 신학자들은 대충 알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안팔릴 까봐 잘 '설교' 시간에 말하지 않고, 감추는 것들에 불과하다.
 
'생동감 있는 신학'을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깨어진 사고와 끝없는 의심 그를 통한 성장이 필요할 테고, 그것들이 해결되면서 참 '신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고, 그 때쯤에서야 한국사회에서도 '예수'에 대해서 툭터놓고 더 도그마 없는 열린 대화와 영성에 대한 교류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류상태의 글은 이런 '문제제기'로 훌륭하다.
 
다만, 대안적 공동체에 대해서 '새길교회' 같은 '예수 클럽' 형의 모델을 보여주지만, '안티테제'를 크게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좀 아쉽다.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온라인을 벗어나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도 연장되야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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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학의 미소 - 동시대인 총서 11
김진호 지음 / 삼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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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꼬뮤날레 1회로 기억이 된다, 들뢰즈와 관련된 논의들을 가지고 예수를 읽어내는, 신학을 읽어내는 일군의 학자들이 토론을 시작했고, 마지막에 김진호라는 목사가 한마디 한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아직도 목사의 직함을 달고 있는 걸까요?" 서로 너털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끝났지만, 어쨌거나 잠시 정적.

그리고 나서, 그들이 주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라는 곳에서 민중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동안 그 홈페이지를 기웃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에도 이야기했듯이(http://blog.aladin.co.kr/hendrix/1848274) 민중신학에 대해서 관심만 갖고 아무런 읽는 노력을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리도 만무했고(지금도 일천한 데 말이다.), 역시 열심히 게시물을 열람하지 않았다.

<반신학의 미소>를 산건, 2007년 8월 5일인데, 사게 된 것도 한동안 갖고 싶어했지만, 크게 우선순위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 망설이다가, 류상태의 <당신들의 예수>를 읽다보니 우선 순위가 앞으로 오게되었다(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06). 하지만 당시에 읽기에 너무 난해해서 덮고 있다가, 요즘에 벼른 김에 읽어버리자는 마음으로 한 번 주욱 읽었다.

이 책은 삼인의 '동시대인 총서'의 다른 책들 구성과 같이 논문들의 모음이고, 따라서 논문들의 주제도 다양하고, 한군데로 딱 모아진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도 인정하는 바다. 다만 저자의 말처럼 '반신학의 구상'을 하는 차원에서 그나마 이야기의 선이 모아진다고 주장한다.

1,2 장의 내용은 사실 별로 와닿지 않았고, 분석적인 사회과학 논문식으로 쓰여진 3장 "교회의 위기와 반신학" 부분이 나에게 가장 쓸모가 있었다.

'민중신학'을 도대체 왜 하는가? 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회라는 제도적 실재를 반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규범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과,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교회의 유의미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 사이에 모순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리적인 규범성과 그것의 현실적인 실행은 종종 상보적인 실천의 패러독스를 담고 있다(p.235).

 
   

그리고 그가 민족주의라는 것의 황폐함을 알고 있고, 젠더의 문제가 단순한 차이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푸코식의 미시권력-훈육질서 와 관련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실은 내가 바라보는 신학자에 대한 편견일 수 있겠다. 또한 민중의 구상에 있어서 '민족'처럼 '상상속의 공동체'가 아닌 그것을 다시금 어떻게 구성해 낼 것인가의 문제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7년이 지난 저작이지만 굉장히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의 구상에서 역동적인 '니체적' 활력이 느껴지는 것이었고, '생동' '생명' 그 자체의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또한 요즘 한참 읽었던 '예수 세미나'(역사적 예수 연구) 동향에 대한 논평도 굉장히 세련되고 그것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서 짚어내는 부분들이 내 공부의 '지도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줬다.

그의 <예수 르네상스>와 <예수 역사학>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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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제국 - 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리차드 A. 호슬리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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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예수를 떠올리는 까닭에 대해서

<<예수>>에 대한 서평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분해해서 예수를 읽는 것은, 기실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결과를 산출해 내기 일쑤다.

이를 테면, 예수를 '사도신경'에 나오는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이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절의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니, 이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나,

그 말씀의 맥락(Context)에 따라서 읽는 것에 대한 예수의 이해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 신자들에게 '맥락'에 따른 성경 읽기는 불경한 것이라 판단 될 것이며, 이런 책을 교회에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눈총을 받을 수 있고, 운이 없으면 눈에 나는 수도 있다. 유일한 예외는 신학생 정도가 되겠지.

예수를 '역사적 맥락'으로 읽어야 되는 이유를, 그러한 까닭게 말해야만 한다. 예수를 '역사적 맥락'으로 읽는 이유는, 지금 현재에서 '내세에 대한' 천국 티켓 처럼 팔아대는 재벌 교회들과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멀고 먼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필요할 테고,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 '억눌리'고 '피폐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교회가 그것에 대해서 강력한 '선포'와 '심판'의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문제가 있는 지 없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도 이 과정은 꼭 필요한 것이다.

도대체 예수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말을 했는가??

이 전에 그가 최근의 '탈정치화'되고 '탈역사화된' 예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은 굉장히 인상깊다.

   
 

 1) 가장 결정적인 것은 현대 서양의 생각, 즉 종교는 정치 및 경제와 분리된다는 생각이다. ...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종교가 정치경제와 분리된다는 현대 서양의 생각을 고대 사회에 투영시킨다. 즉 예수를 종교적 인물로 개념화함으로써, 예수의 설교와 행적의 정치경제적 측면과 의미를 무시한다.

 2) 현대 서양의 개인주의이다. ... 특히 미국사회에서 매우 강한 특성이다. 이런 현대 서양의 생각도 고대 사회에 투영시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주로 다른 개인들과 관계했지, 사회 집단이나 정치 제도와는 관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3) 예수 해석자들의 과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다. ... 복음서들의 "자료들"(data)은 역사적 재구성을 위해 반드시 따로 떼어내어 분석하고 세밀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4) 최근의 일부 해석자들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의 자료들에서 사람들 귀에 거슬리는, 심판과 관계된 말씀들을 제거시킴으로써, 예수를 더욱 탈정치화시켰다.

(pp.25-26)

 
   

(방법론적으로는,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고대에 '민족국가'를 투영해서 삼국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생각나기도 한다. )

예수는 히피 운동가도 아니고, 잠언록이나 읊어대던 노인도 아니었으며, 꿈꾼대로 떠들던 몽상가도 아니었다. 예수는 언제나 폭탄같은 발언을 하던 사람이었고, 민중과 함께 했고, 억압받는 자와 함께 하곤 했다는 건데, 그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해봐야 하는가?

역사적 배경을 살피며 예수 읽기

사실 읽다보면, 졸거나  침대를 찾게 될 확률이 높은데, 이 책의 문체가 어렵다기보다, 번역투라기 보다, 저자의 저술이 계속 늘어지는 투로 했던 말 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훨씬 더 compact하게 전개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런 것이다. 제목과 같이 로마 '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예수를 봐야 한다는 거다. "예수와 제국"이니까.

예수가 태어나던 시절, 갈릴레아와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신정국가(temple-state)로서, 식민지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제국 팽창을 유지하기 위한 수탈의 대상이 된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그에 대해서 저항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어느 식민지 국가에나 지배층은 있는 마련인데, 제사장 계급들은 로마에 의해 임명되는 호의를 받으면서 나름 공범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며, 식견있는 지식인 계급들도 나름의 불만을 갖거나 혹은 나름대로 타협하는 관계로 권력을 분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류 신분들의 생활과 달리,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민중들에게 로마제국의 지배는 기존의 '성직자'들에게 제공했던 세금에 과중되는 착취로 이어지게 되었고, 민중들의 불만이라는 것은 봉기와 시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서 예수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 되겠고, 그와 더불어 예수가 말했던 아름다운 말씀이라는 것들도, 단순한 도덕률의 문제나, 혹은 현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 '폭탄'과 같은 언사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하며, 동시에 굉장한 '반어법'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 그가 '반제국주의 민중운동가' 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지리하지만, 꼼꼼히 저자는 하나하나 챙기고 있다. 또 로마 제국과 미국 제국의 동형성, 특히 예수의 운동 같은, 저항에 대한 전망을 말미에서 보여주고 있는 데, 여기선 한 번쯤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수탈구조와, 만성화된 테러와 정치적 후견자 관계를 통한 정치적 억압구조하에서 민중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속된 민족의 예언자적인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복음서의 진술을 새롭게 듣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의 권력관계에 안테나를 맞추고, 의심쩍은 표준적 탈정치화된 가정들과 접근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수운동들에서는 로마가 강요한 신세계무질서라는 조건 아래에서, 일부 예속된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취했다.

 또한 제국주의의 권력관계에 안테나를 맞추고, 미국의 정치적 힘과 지구 자본주의의 힘이 결합해서 확립한 현재의 신세계 무질서 속에서 우리의 역할과 상황을 보다 비판적으로 분별하는 작업도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와 복음서들이 미국인들, 즉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의 이런 그리스도교적 측면과 동일시하는 미국인들에게 줄 수 있는 영향은 현재 새로운 제국적 무질서의 정상에 있는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동체들의 집단적 토론과 행동을 통해서만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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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 개정판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김기철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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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밑그림, 과연 올바른가?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여)를 믿는 이들은 왜 예수를 그리스도, 주로 모시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하나님과 우리를 매개해 주기 때문에? 아니면, 그의 기적 때문인가?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서가 그것을 증언하고 또 예수의 나타남과 그 행위들로서 그의 선포(케리그마)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 믿는 것 같다.

아니면, 그렇게 말하면서 그 '주'를 믿지 않으면, 지옥불로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태어남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그리 고귀한 신분에서 태어났으리라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어느날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여러가지 이적을 선보이고 또, 삶의 자세에 대해서 강변하며,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메시아라 칭하기도 하며, 왕이라 말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정통적인 기독교 인들의 해석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고 '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존 도미닉 크로산은 그런 입장을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고 이것에 도전한다. 도대체 크로산이 이야기하는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역사적 예수, 그를 찾아보기

저자는 역사에 나타난 예수의 기록들을 찾아봄으로써 예수의 밑그림을 그린다.
 
그는 철저히 기록을 찾는데, 여기서 몇가지 선행적으로 알아야할 사실 들이 있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순서대로 마태-마가-누가-요한의 순서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 성서의 자료의 출처를 토대로 생각을 해본다면, 기록의 순서는 Q 복음(Q 문서)가 제일 먼저가 되고, 마가복음이 먼저 출현하며, Q 복음과 마가복음을 가지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만들어졌으며, 그 후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서들은 각자의 공동체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마가복음에서는 그대로 쓰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마음이) 가난한 자'로 변모하는 것은, 당시의 마태의 공동체(교회)에 적실한 표현을 찾다가 그러한 표현을 완성했다는 것이 옳다.
 
이책은 철저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기록들을 점검한다.
 
1. 예수에 대해서 우리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그의 십자가 못박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것들은 구약성서의 알리바이에 의해서 다시금 연속선상의 것이 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중 몇가지는 당시 영웅의 설화, 즉 세례 요한, 모세의 이야기 같은 설화들과 연속선상에서 같은 플롯에 맞춰졌다고 봐야 하는 측면들이 있으며(예를 들면, 출생에 대한 이야기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온 이야기들을 그대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순박한 것이 된다.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다면, 복음서 그 자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분석적 자세로, 문헌 비평적 자세로 다가가야 '진실'이 보이는 것이다.
 
2. 예수가 살던 시절의 시대적 상황을 점검해 봐야한다. 당시엔, 예수가 아니고도, 무장봉기 세력(자칭 메시아들)도 있었고, '묵시종말론'에 근거한 세력(세례요한을 비롯)도 있었다. 예수도 한 때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그의 입장에 다가가기도 했으나, 세례 요한의 죽음의 시점을 즈음하여 '종말론'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묵시종말론'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한 세계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즉 모세, 다윗,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유대적 전통이다), '종말론'은 문화와 문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며, 세상의 가치와 소망들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뜻한다(p.101). '자칭 메시아들'과 '묵시종말론자'들이 정치적 변혁을 꿈꾸는 것이라면, 예수는 오히려 더 깊은 층위에서 '사회적 변혁'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것은 바야흐로 '하나님나라의 선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만일 하나님이 즉시로 직접 다스리게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한다(p.105).
 
   

먼저, 예수는 절대적 평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가정 마저 공격한다.

   
 
 가정은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과 미워하고 미움을 받는 법,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법, 학대하고 학대당하는 법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배우는 장소이다. 가정에도 필연적으로 권력이 개입되고 나아가 권력이 남용되기 때문에, 가정은 결코 안락한 평온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가 가정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집단은, ...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진 집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데, 하나님 나라는 권력 남용, 곧 권력을 좇아 나는 검은 망령이요 죽음의 그림자인 저 끔찍한 권력 남용을 부정한다(pp.112-113).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의 '가족경영'을 떠올린다면 이런 의미는 곧바로 사회적 의미를 지닐 수 있었을 거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파괴적었던 것 만큼, 지금에 와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는 말이되며 급진적인 실천의 명제가 된다.

또한,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마태는 그것을 '마음'이라는 말로 환원하기까지 하나, 기실 예수가 지칭한 것은 '상대적 가난'이 아닌 '극빈'이 되며, 그것은 구조적인 '불의'에 대한 발언이었다. 당대의 식민지 치하의 죽어가는 농민들을 생각해 볼 때, 혁명론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 계급이 그를 좋아했을리가 만무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항상 떡과 생선, 혹은 떡과 포도주를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잔치'같이 치뤄냈던 예수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이땅에 나타나, 우리의 죄때문에 십자가에 박힌" 이야기 따위의 '비장한' 예수가 아니라, 현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게 다가오는 부분은, 그가 그의 제자됨을 청하는 이들에게 말하는 운동, 혹은 선교의 자세이다. 예수는 전대나 지팡이 없이, 다니면서 '치유와 식사'를 행하고 다니라 말했다. 언제나 공동체적 의존을 하고, 어떤 곳에 터를 잡고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무한회귀'를 하면서 유목하는 것이었다. 노마디즘의 주장처럼 유목의 목적은 그가 발닿는 곳의 파괴가 아니라 그곳에 '치유'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었다.

그외에도 이 책은, 기존까지 내가 기억하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라는 고민을 준다.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더이상 내게 예수는 공허한 '하늘나라'의 초상에 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내게 현재적인 실천과 내가 발딛고 사는 사회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구축하기를, 그리고 그를 따라 낮은 자와 연대하기를, 함께 유목하기를 원하는 분이 되는 것이다.


민중과 밀접한 예수, 그를 따라가기

21세기,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적인 '이윤의 축적'이 그나마 남아있던 '가식'조차 다 드러내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 88만원 세대가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난 자꾸만 존재론 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인식론으로, 사회과학으로 숨어들어갔지만, 기실 존재론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있었기에 언제나 찜찜함이 있었다.

기독교는 언제나 내게 도그마로 찍어누르는 '권력장치'였으나, 그것 자체에 대해서 고민한 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고민은 했으되, '탈주로'를 찾아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겁냈던 것이다.

이제 그런 고민을 극한까지 밀어붙여보기로 결심했다. 경동교회에서 만났던 공동체는 나에게 그런 고민을 '실천'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주었고, 이제 그 도정에 있다.

난 어디로 갈것인가? 난 무엇을 할 것인가? 다만, 그 자세에 대해서, 출발점에 대해서 확신을 내리게는 한다. 난 낮은 자, 구조적으로 억압된 자들에게 '치유'를 선사했던 그 예수를 믿는다고.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예수를 따라하는 것에 지쳐 쉬어가더라도, 그 길 가기를 접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비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쾌한 발걸음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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