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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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의 단편소설집 '혼모노'는 올해 3월 출간된 이후 서서히 베스트셀러 순위권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약 3달이 지난 지금 현재 4주 연속 종합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화제작이다. 


당연히 처음 듣는 이름인 작가 성해나는 1994년생으로 이제 30대로 접어드는 나이이며, 2019년 등단 이후 약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문학상 수상 경력과 함께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활약을 해오다가 드디어 시쳇말로 떡상의 순간을 맞이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책을 고를 때 보통 정보수집과 더불어 경험에 의한 직관이나 본능에 의존하는 편이라 베스트셀러 1위라고 무작정 따라 사는 행위를 극도로 꺼리는데, 때로는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무념무상의 낚시꾼처럼 여기저기 아무데나 던져보다가 뜻밖의 월척을 낚는 재미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본작 '혼모노'는 실로 오랜만에 낚아보는 혼마구로급 초대형 월척이었다.



처음 두어 페이지를 넘어가는 시점부터 이미 작가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잡게 되었는데 이후에는 계속 들뜬 흥분감을 느끼며 읽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김초엽이나 최은영 같은 작가들의 글을 접했을 때는 평단의 찬사와 화제성에 비해 솔직히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이었나 하는 실망감도 없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호들갑을 떠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보다 지명도도 낮은 이 성해나 작가의 글이 오히려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야말로 '진짜' 작가를 발견한 것 같은 짜릿한 도파민에 취하는 경험을 했다.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5906992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5710942


적어도 글로 먹고 사는 프로작가라면 응당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들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 보는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어휘력'이다.


비슷한 뜻의 대체 용어들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읍', '이욕', '주견', '속신' 같이 일일이 사전으로 확인해야 할 정도로 평소 흔하게 쓰지 않는 단어를 굳이 골라 쓴다든지, 심지어 처음에는 '감탄'이 오타난 것이라 무심코 넘어갈 뻔 했던 '가탄'이나, 흔히 '심상치 않다'로 부정어와 관용적으로 붙여 쓰던 '심상'이란 단어를 단독으로 쓰는 등, 다양한 어휘를 습관과 타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발상으로 활용하는 모습에서 그동안 한글이라는 언어 탐구에 진심을 쏟아왔을 작가의 학구열이 느껴지기도 하고...  



거기에 젊은 세대답게 짜친다는 표현이나 모임에서 문자로 은밀한 소통을 하는 장면 등, 요즘 감성의 거침없고 감각적인 언어 활용은 물론, '두벌자식이 더 곱다'는 속담 같은 나보다 훨씬 윗세대나 겨우 알아들을 법한 예스러운 언어까지도 캐릭터에 맞춰서 두루두루 조화롭게 구사하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 정도면 내가 어휘력에서 늘 높게 평가하는 정유정 작가와 견주어도 별 손색이 없는 느낌이다.



내가 단편집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이유 중에는 보통 한두 편에 힘을 주고 나머지는 거의 구색 맞추기용으로 느껴질 정도로 편차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다는 점도 포함되는데, 이 작품은 각각 50페이지 정도의 비슷한 분량으로 수록된 총 7편의 단편이 저마다 독립적이고 개성 넘치는 소재와 내용임은 물론 그 퀄리티와 재미마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일정하다는 점에서도 놀랍고...


영화, 현대미술, 무속, 건축, 스타트업 회사원, 부자들의 일상, 음악 등 다양한 소재 속에서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나 포인트들을 꽉꽉 눌러담은 것도 대단하지만, 이러한 소재들을 정말 리얼하고 깊이감 있게 다루는 솜씨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가 영화에 관심이 많다보니 첫번째 편인 '길티 클럽'에서 영화와 관련한 썰을 푸는 것만 보고도 일찌감치 감을 잡았지만, 작품별로 다루고 있는 각 분야에 대해 이 작가가 거침없이 펼쳐보이는 디테일들은 전문적인 지식과 고증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내용들이다. 


타르코프스키 같이 영화학도들이나 겨우 알 듯한 작품들은 그렇다치고 정말 매니아가 아닌 이상 쉽게 떠올리기 힘든 '스크리너' 같은 용어를 자연스럽게 녹여넣는걸 보면 작가가 보유한 영화 관련 지식이 어느 정도로 높은지 대충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고, '구의 집'에서도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이름이 굳이 나오지 않더라도 건축 설계 과정의 초기 현장답사 장면을 간략하면서도 현실감있게 묘사한 부분만으로도 작가가 갖추었을 치밀한 자료조사와 전문성은 능히 짐작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특수분야의 전문용어 따위로 확연히 드러나는 장면보다 '우호적 감정'이나 '잉태기'에서 스타트업 회사원들의 현장감 있는 대화라든지 부유층들의 일상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는 부분에서 오히려 더 감탄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 작가가 실제로 그런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거나 부유층 자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니까... 


'스무드'에서처럼 제프 쿤스 같은 실존 인물을 과감하고 능청스럽게 활용하는 발상도 기발하고, 내가 오토바이에 관심이 많다보니 '메탈' 편에서 너무나 익숙한 용어인 '밤바리'가 나올 때는 슬며시 웃음도 나왔으며, '혼모노'에서는 무당이 자신의 신체를 칼로 그을 때 피가 나지 않아야 접신이 되었음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어 그제서야 영화 '파묘'에서 김고은이 허벅지와 뺨을 그었음에도 왜 피가 안 난 것이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 점도 덤으로 얻은 흥미로운 정보였다. 



코맥 매카시의 영향을 받았는 지는 모르겠으나 따옴표 없는 대사들도 느낌있게 잘 어울리고, 단문과 장문이 적절히 섞이며 물 흐르듯 이어지는 서술 문장들 또한 가독성이 어마어마하다. 이 작가는 기본적으로 글을 참 맛있게 쓰는데다가 흥미로운 스토리를 긴장감있게 끌어가는 필력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보니 문장 자체를 읽는 재미도 남다르고... 하여튼 전체적으로 거의 흠잡을 데가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에게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작가가 문화 예술 방면으로 얼마나 지식이 깊고 풍부한지는 이미 충분히 잘 알겠는데 약간 과도하다 싶은 지점까지 아슬아슬하게 티를 내는 것 같다... 정도가 있겠다. 


이를테면 부유층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루이스 부뉴엘'을 좋아한다는 접점 같은 것인데, 부르주아를 조롱했던 루이스 부뉴엘이니 당연히 모순과 풍자의 의미로 넣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감독 이름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현실성이 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들뢰즈-가타리 읽기' 역시 우리나라 고학력자 귀농인들이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를 공부하는 사례가 있으니 썼겠지만 아무래도 살짝 고차원적이고 현학적인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밖에는 문장의 기교 면에서 감탄을 자아낼 만한 현란함이나 노련미가 보이지는 않는다... 정도를 쥐어짜듯 겨우 꼽을 수 있겠는데, 이건 작가 취향에 관한 부분일 수 있어서 다소 억지스럽긴 하다. '부도체 같은 그들에게 열정이 흐름을 알 수 있게 해준 음악' 같은 문장을 보면 현란한 기교 없이 간결한 구성으로도 작가만의 내공이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혼모노'라는 제목부터가 일베 사이트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도 상당히 신경쓰이지만, 본문 속에서 디시 인사이드와 일베를 언급하고 태극기 부대를 주요 소재로 사용한 점, 그리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보수 성향으로 동질감을 얻는다는 구절이 혹시 작가의 정치적 성향이 반영된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던 것인데... 이문열 작가의 언행이 어떻든 그의 찬란했던 문학적 성취는 늘 인정해왔듯이 이 작가 또한 설사 나와 반대 성향이라 하더라도 작가적 역량 만큼은 계속 응원할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스무드'의 태극기 부대 장면은 한번 더 곱씹어보게 되는데, 내가 경상도 지역에서 다양한 나이대의 고객을 상대하는 1인 자영업자다보니 어르신들은 대부분 무지성 극보수 성향임을 피부로 알게 된다. 대화중 어쩌다 정치적 발언이 나올 때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때로는 별 것 아닌 간단한 서비스 정도라 그냥 가셔도 된다고 손사래를 쳐도 밥값이나 해라... 담배값이나 해라... 마수걸인데 그러면 안된다며 기어이 만원 짜리 한두장을 손에 쥐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어르신들이다. 나는 '한국인의 정'이란 말이 아직 의미를 가진다면 그 지분의 상당 부분은 구세대 어르신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양가적 감정에 마음이 아팠다. 


한편 '메탈'에서 '람슈타인'이 등장했을 때는 자동적으로 정유정의 최근작 '영원한 천국'이 떠오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물론 노래 가사 때문에 선택한 그룹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선배 작가에 대한 오마주의 의미도 함께 담은 것이 아닐까 하는 오지랖성 추측도 해봤다.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5824346


'길티 클럽'의 클라이막스는 주인공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펑 하고 터지는 장면이었다. 처음에 나는 뭐가 터졌다는 건지 즉각적으로 와닿지 않아서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곰곰히 생각하니 대단한 것 같았던 나의 우상이 결국 나와 다를 바 없는 별볼 일 없는 존재였다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맹목적이고 일그러진 팬심이 무너지며 현타가 온 순간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젊은 트로트 스타를 향한 시니어 팬들의 과도한 집착에 대해 약간 풍자하는 느낌도 받았는데...



어쨌든 나는 이 성해나 작가의 다음 작품이 나오면 고민없이 바로 사서 읽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로 이번에 정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만약에 작가가... 태극기 부대 그런 의미 아니고... 오마주 역시 아니고... 그냥 본인이 좋아하는 그룹이라 넣었고... 펑 터진 것도 그런 이유 아니고... 트로트 팬 풍자 아니다... 그래도 좋게 봐줘서 고맙다... 라고 한다면... 그 때는 나도 안에서 무언가가 펑 터질 것 같다. 


작년은 내게 김애란 작가를 알려준 해였다면 올해는 성해나 작가가 그 자리를 채워주는 것 같다. '역시 혼모노는 다르네'라는 작중 대사는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알고보니 혼모노는 바로 작가였기 때문에...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3GRf_814iJY&t=9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93513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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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든 사냥꾼
최이도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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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든 사냥꾼'은 현재 디즈니+ 등의 OTT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의 원작소설이다. 재작년인 23년 말에 발표되었고 작가는 최이도라는 생소한 이름이라, 이쪽 분야에서 계속 활약을 해왔던 작가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모출판사의 공모전에 '연쇄살인봇'이라는 단편소설을 하나 응모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이력이 나오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작가 프로필도 대학에서 경찰행정학을 전공했고 직관적이기보다는 추론적인 편이며 대체로 배운 것을 기반으로 글을 쓴다는 식의 별 알맹이가 없는 내용 밖에 없어서 언제나 그렇듯 작품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읽기도 전에 뭔가 모를 불안감이 스쳐간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이 작품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 장르이고 특이하게 사체를 부검하는 국과수의 법의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장르에 도전하는 요즘 작가들이 전문지식의 부족함을 커버하기 용이한 '도메스틱 스릴러'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설정이긴 하다.  


참고로 법의관이 주인공인 작품으로는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국내에도 시리즈 대부분이 번역되어 나왔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고, 나도 시리즈 첫번째 편인 '검시관'이 생각보다 만족스러워서 후속작들까지 꽤 사모으기도 했다.



어쨌든 법의관이라는 전문직을 선택했다면 그 분야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경찰행정학 전공에 배운 것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굳이 내세웠던 작가의 프로필 대로 우리나라 경찰기관과 국과수 등의 전문적인 수사과정을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제대로 묘사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작가만의 장점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도입부에 곧바로 법의관인 주인공 세현이 등장하여 피살자의 사체를 부검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액살이나 일혈점 같은 전문용어라든지 안구의 피맺힘을 살펴보는 장면을 포함한 부검순서 등은 분명 취재를 통한 자료조사 없이는 묘사하기 힘든 부분이라 작가가 고증을 위해 나름 노력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긴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일단은 부검 과정을 옆에서 함께 지켜보며 체험하는 듯한 현장감이 좀 부족한 듯 했다. 부검실에 놓여있는 사체의 외형이 먼저 한눈에 들어오도록 전체적인 묘사가 우선되어야 독자들도 현장의 모습을 그려가며 부검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을텐데, 피해자의 얼굴 생김새와 체형은 물론 사망시의 자세나 표정 등 기본적인 모습은 전혀 언급도 없이 심한 부패 상태와 열려있는 복부에 꿰맨 실 따위의 부분적인 정보만 툭툭 던지듯이 묘사하니 현장감은 물론 주인공의 부검 실력 조차도 그다지 설득력있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부검 장면은 가해자의 성격이나 능력치 등 캐릭터를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앞으로 주인공이 상대할 범인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점을 독자들이 미리 인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검을 통해 범인의 정신상태와 피지컬, 범행수법과 특징, 더 나아가 범행동기까지 유추해서 스릴과 공포감을 느끼며 주인공의 심리에 감정이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에도 이 책에서는 그저 범인이 주인공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임을 알려주는 용도 외에는 딱히 의미있는 장면으로 활용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초반부터 범인을 밝히면서 시작하는 스릴러 타입을 선택했으면 당연히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서사가 설득력있게 제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중간중간 주인공의 꿈이나 회상을 통해 살인마 조균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해도 거의 실체가 없는 허상을 마주하는 듯한 별 영양가 없는 내용들 뿐이라 스토리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인공들의 고군분투에도 그다지 공감과 몰입이 되지 않는다.


'양들의 침묵'에서 똑같이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압도할 정도로 엄청난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발산했던 한니발 렉터를 떠올려 본다면 캐릭터 소개나 활용법에서 너무나 비교되는 부분이 있다.



작가는 모든 사연과 비밀을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몰아서 한방에 터트리는 전략을 짠 것 같은데 황당한 건 후반부 반전과 결말을 다 보고나서도 여전히 살인마에 대해 알게된 게 없다는 점이다. 조균은 어떤 이유로 살인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왜 그런 살해방식을 사용하는 것인지, 살인 과정에 어린 딸은 왜 끌어들이는 것인지, 어떤 정신질환이나 트라우마가 있는 것인지, 피해자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지 등등... 끝까지 뭐 하나 제대로 설명되는 게 없다. 


솔직히 다 읽고나면 이 책이 정말로 범죄스릴러 장르가 맞긴 한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정작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각자 어릴적 트라우마가 있는 두 남녀의 치유와 러브스토리인데 여기에 자극적인 요소로 사이코패스 살인마 설정을 가져다 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얼마 전 리뷰했던 '급류'와도 상당히 비슷한 구석이 있다.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6371187


어쨌든 이 책은 살인마 조균과의 대결보다는 오히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는 세현이 하필이면 어릴 적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정현과 동종 직업군에서 운명적으로 우연히 만나서 서로를 치유해가며 서서히 호감을 가지는 과정에 스토리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조균에 대해서는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고 마치 편집이 튀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급하게 건너뛰며 전개되는 느낌이라면, 세현과 정현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커피 마셔라, 물 마셔라 따위의 세상 한가하게 꽁냥꽁냥하며 별 쓰잘데기 없는 대사와 장면들로 느릿느릿하게 진행된다. 이 책을 스릴러로 생각하고 읽는다면 선택과 집중이 완전히 반대로 되어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경찰대학 출신의 정현이 동료 일반 형사들과 겪는 미묘한 갈등이라든지 엉뚱한 범인 쫓는 헛발질 출동 씬 등, 범죄 수사물의 전형적인 클리셰도 적당히 챙겨넣었지만, 어차피 러브스토리가 중심이고 범죄스릴러는 양념에 불과한 수준이라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이런거 저런거 다 떠나서 주인공들의 수사 과정이나 러브스토리 자체도 그냥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두 남녀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계기가 되는 여러가지 자잘한 상황과 대화들이 대부분 작위적으로 느껴지거나 그다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가 이야기꾼으로서의 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당연히 외모이고 독자의 감정이입에도 큰 영향을 주는데 이 작가는 왜 주요 캐릭터들의 이목구비조차 묘사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세현은 찢어진 눈에 마른 얼굴, 정현은 젊고 건장한 체형... 이 정도가 전부이고, 나머지 석우, 혁근, 창진 같은 경찰 동료들은 그냥 이름 정도만 부여되어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캐릭터들의 생명력이 약하니 대사에 힘이 실리지도 않고 갈등에 공감하기도 어렵다. 책 속에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아픔을 이해하고 호감도 느끼는데 독자는 강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인 것이다.



박스 테이프에서 지문 채취하고 CCTV에서 큰 차 뒤져보라고 조언하는 정도 외에 법의관으로서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장면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정현이 계속해서 그녀를 대단한 실력자라고 찬양하는 등의 말로만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도 역시나 필력 부족의 결과물이다.



게다가 세현은 어릴 적 고아가 된 상황에서 어떻게 먹고 살며 의대 6년까지 보낼 수 있었는지, 성형은 무슨 돈으로 한 것인지, 겨우 10살 정도의 나이에 옆에서 시체처리 몇번 거들었다고 의대 동기들이 놀랄 정도로 해부의 달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인지, 그녀도 따지고 보면 분명 범죄자인데 촉법소년이라 용서하고 무시해야 하는 것인지, 조균은 또 20년 동안 어떻게 먹고 살며 새로운 가족을 꾸린 것인지 등등... 납득하기 어려운 수많은 의문점들은 애초에 아빠와 미성년자인 딸이 한 팀이 되어 연쇄살인을 저지른다는 황당한 설정에서부터 이미 개연성은 개나 줘버린 듯한 모양새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 



본문 속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받아들이면 돼요'라는 문장은 마치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 책이 드라마화가 된 것은 아무래도 연쇄살인마 부녀가 20년 만에 다시 대결을 펼친다는 흥미로운 설정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볼 땐 개연성 엉망에 대사도 너무 별로라 많은 부분에서 각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 당연히 조균 캐릭터만이라도 존재감을 살려내는데 주력을 하겠지만 드라마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하긴 하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3JF1inMtXuA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926619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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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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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급류'는 22년 말에 출간되어 약 2년이 지난 올해 초부터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10위권 내에 꾸준히 오르며 주목을 받고있는 작품이다. 최근 한국소설 분야는 여성작가들이 시장을 거의 주도하는 느낌이라 모처럼 눈에 띄는 젊은 남성작가의 활약이 반갑기도 하다.


요즘 문학계의 새로운 트렌드인지 이 작품도 역주행이라는 표현을 내세워 홍보하고 있는데 나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인 점도 고려하여 오롯이 작품 자체만으로 판단하기 위해 일부러 작가와 내용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를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어보기로 했다.


일단 초반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먼저 받았던 인상은 아쉽게도 작가의 필력이 내심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는 그리 높지 않구나...였다. 상황과 배경, 인물 등을 묘사하는 모든 문장들은 거의 두줄을 넘지 않을 정도로 길이가 짧으며 비교적 직선적이고 단순한 표현법으로 구성되어 단조로운 느낌을 받았는데, 물론 이것은 스피디한 가독성이라는 무시 못할 장점도 있겠지만 반면에 웹소설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약 300페이지에 근접하지만 작은 판형에 활자의 크기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200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정도의 중편에 가까운 컴팩트한 분량에다가 간결하고 쉬운 문장에 시원시원하고 빠른 전개로 요즘 시대의 입맛에는 잘 맞는 것 같은데 작가가 어떻게든 장편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 애를 쓴 것인지 군더더기 문장들도 제법 보인다. 



'해솔이 도담의 팔을 잡고 떼어 내며 밀어냈다. 거부의 몸짓이었다...' 라는 구절에서 이 '거부의 몸짓이었다' 같은 문장은 사실 없어도 아무 지장 없고 오히려 빼는게 더 깔끔하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또다시 '네가 나한테 이런다는 거지...' 라는 대사를 해놓고 '연인들이 다툴 때 흔히 하는 말이었다' 라고 친철한 해설 같은 문장을 덧붙여 놓았는데 작가가 너무 불친절해도 문제지만 너무 친절한 것도 문제가 있다. 무슨 다큐멘터리 나레이션도 아니고 없어도 다 알아듣는 장면에서 굳이 군더더기 같은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와의 화투씬에서 '아이구, 시원하다. 도담이 손이 약손이다' 같은 대사들을 비롯하여 뭔가 모르게 영화적 클리셰의 느낌이 나는 시퀀스들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꼭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이쯤에서는 이런 장면이 한번쯤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전형적이지만 무난한 대사로 이루어진 상황을 적당히 만들어 넣은 듯한 느낌인 거다.



초반부에 나온 중성부력에 관한 아빠의 대사나 첫 키스의 추억을 상징하는 귀신 새가 중후반부에 다시 나오는 방식도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떡밥회수 스타일의 클리셰 중 하나다. 



혹시 작가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전체적인 시퀀스의 구성과 연결, 그리고 대사들이 영화적 또는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문맥의 흐름상 '엄마'라는 명칭이 훨씬 자연스러움에도 굳이 '미영'과 '정미'라는 이름을 쓰는 모습에서 나는 이 작가가 각본을 쓰던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작품의 내용도 역시나 그동안 영화나 소설에서 숱하게 다루어 왔던 치유를 통한 내면의 성장...이라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식상한 코드를 내세우고 있다. 이런 경우 독자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눈에 띄는 확실한 차별점이 필요한데 이 작품은 그 차별점을 치유 과정으로 넘어가기 위한 트리거 역할의 어떤 '사건'으로 선택했고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나 나올 법한 초강력 설정을 집어넣었다.


어떻게 보면 무리수에 가까운 초반의 이런 충격적 설정은 시선끌기용으로는 상당히 괜찮은 작전이고 또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론 아무리 봐도 너무 작위적이고 편의적으로 가져다 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라든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오히려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함과 동시에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오로지 해솔과 도담이라는 두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만 집중할 뿐 주변인물들의 존재는 그저 주인공 서사 구축을 위한 들러리 정도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두 주인공의 심리에만 감정이입한 독자라면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라며 극찬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상황이든 일단 중립기어 넣고 지켜보는 습관이 있는 나에게는 감정이입이 그리 쉽지 않았다.



나같은 경우 작중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50대 유부남의 입장에서 글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부모들이 어떤 계기와 과정으로 서로에게 끌렸는가 하는 점 등, 불륜이라는 파멸적이고 그릇된 선택에 대한 어른들의 뒷이야기가 무척 궁금했으나 이 책에서는 그저 불륜부모의 자식이라는 설정만 필요했는지 부모의 서사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도담의 아빠 창석은 도담에게 그저 수영을 가르쳐준 적 있었던 성실한 소방관이었을 뿐 엄마와는 실제로 어떤 부부관계였는지 또 불륜녀인 미영과는 어떤 감정의 교감이 있었는지 따위의 보충적인 심리상태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가족을 배신한 아빠라는 평면적 캐릭터로만 남는다. 심지어 배신당한 당사자인 엄마 정미의 심리상태마저도 완전히 제거되어 존재감이 없다. 


이것은 향후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담의 정신적 상처 역시 평면적으로 그려지는 원인이 되어 안그래도 비현실적인 사건이라 그 상처의 실체나 강도가 별로 설득력있게 와닿지도 않는데 자기들끼리만 아파하고 달래주는 모양새니 이럴거면 굳이 그런 설정의 사건이 왜 필요한가 싶은 거다.  


만약 작중 인물들이 불륜에 의해 이혼을 하고 원하는 대로 새로운 가족을 결성했다고 가정한다면 부부이자 사돈이고, 새엄마이자 시어머니이고, 새아버지이자 장인어른이 되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콩가루집안 탄생이라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설정이라 기본적으로 이들의 복잡미묘한 심리와 이해관계 등 다뤄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작가는 애초부터 젊은 남녀의 기구한 인연에 얽힌 러브스토리를 만들 목적으로 말도 안되는 기괴한 설정을 가져와서 스토리 진행에 방해되는 요소는 미리 사고사로 없애버린다는 너무나 작가 편의적인 간단한 방법으로 안일하게 처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가는 확실히 젊은이들의 감정과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어른들의 농익고 숙성된 사랑 쪽은 취향이 아닌 것 같다.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는데 있어 작가가 사용한 최고 수위가 겨우 '안았다' 정도인 걸 보면 언제나 청소년 관람가 수준을 넘지 않는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닌가 싶다. 



본작 '급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반부를 거쳐 후반으로 갈수록 어설픈 허세를 부리기 보다는 자신의 페이스로 일관된 톤을 유지하는 작가의 진정성이 호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문맥과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의 선택 등에서 문학적 기교나 깊이감 등, 별다른 내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을 뿐 그렇다고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초반의 실망감은 어느새 잊고 그럭저럭 내용을 즐길 수 있었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정대건은 1986년생으로 현재 40대로 접어드는 나이이며, 찾아보니 놀랍게도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영화감독이었다. 



작가의 커리어를 확인하니 비로소 내가 품었던 의혹들이 일거에 해소되며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이 정도면 돗자리 깔아야 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정식으로 개봉한 장편 극영화는 2017년작인 '메이트'가 현재로서는 유일하고 그 이후로는 소설들을 계속 발표하며 작가로 전향한 듯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전에 리뷰했던 '곰탕'의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김영탁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책이 계속 잘 팔린다면 머지않아 본인이 직접 감독한 영화제작 소식을 듣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84tOD4mFhEk&t=326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82889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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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음의 불편함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란 옮김 / 현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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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밀 시오랑은 1911년에 태어나서 1995년에 사망한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다. 대충 살펴보니 20대에는 베를린에서 칸트, 헤겔,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독일 철학을 탐구했고 30대부터는 파리에 살면서 프랑스어로 쓴 책들을 발표하며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으로 나온다. 



이 작가의 글은 대부분 아포리즘에 기반을 둔 스타일로 쓰여지는 특징이 있는데 아포리즘(Aphorism)은 격언, 잠언, 경구 등으로 해석되는 짧은 글귀를 뜻한다.



본작 '태어났음의 불편함'은 1973년에 발표되었고 역시나 아포리즘으로 채워진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막연하고 추상적인 글귀는 취향이 아니라서 심지어 시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본의 아니게 이런 스타일의 글을 접하게 되니 첫대면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주 오래전 우리나라에 칼릴 지브란의 책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 책을 처음 펼치면서 문득 지브란이나 혹은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작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이라는 뉘앙스로 시작하는 이 책은 가면 갈수록 작가의 특이한 사고방식에 도무지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어떤 통찰에 압도당하는 듯한 특별한 느낌도 있었다.


일단 이 작가는 독일 철학은 물론 바흐의 음악과 도스토옙스키와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 그리고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의 각종 종교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축적된 자신의 가치관이나 일상적 상념들을 다소 현란한 스킬의 함축적인 언어로 담아내기 때문에, 한번은 고사하고 두번 세번 읽어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난해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지만 신중하고도 오랜 담금질 끝에 뽑아낸 언어 조합의 결과물이란 점 또한 충분히 느껴진다.



책 초반에 나오는 글귀 중 하나로 언뜻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현학적인 말장난인가 싶기도 한데 천천히 반복해서 읽다보면 그 '진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만큼 이 작가는 태어났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음 그 자체를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심지어 사산아를 부러워하기까지 하는 작가의 성향을 마주하다보면 그 극단적인 염세주의적 또는 회의주의적 또는 허무주의적 사고방식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솔직히 이 정도면 작가가 일찌감치 자살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신기한데 자살은 너무 늦은 선택이기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라는 알쏭달쏭한 견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하며 이 책에서도 잠과 밤에 대한 언급이 많은 편이다. 깨어있을 때 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차라리 잠들어 있는게 훨씬 낫다고 여기는 작가에게 밤에 잠이 오지 않는 증상 또한 정말 치명적인 고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살면 살수록 살아있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것 보다 낫다... 나는 모든 것이 덧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고, 그래서 나의 장점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만일 내게 아이들이 있다면 당장 목 졸라 죽일 것이다... 태어남이 실패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삶은 견딜 만해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나를 견딘다...



아뭏든 이 시오랑의 염세주의는 거의 인간혐오 수준으로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정말이지 쇼펜하우어도 울고 갈 듯 하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이 책에서 얼핏얼핏 감지되는 작가의 정치적 성향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보가 정치를 넘어 훨씬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했을 것이라 애써 부정해봐도 히틀러에 대해 다소 후한 평가를 내리는 견해를 보노라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이문열 작가가 꼴보기 싫은 극우 인사라 해도 그의 찬란했던 문학적 성취까지 폄하하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비록 동의할 순 없어도 그냥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 성향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보다는 오히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언급된 부분 등에 더 눈길이 사로잡혔는데, 이렇게 극단적이고 까다로운 시오랑을 매료시킨 포인트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음에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말은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보는 진부한 명제가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진 것이 많고 매일매일이 행복해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삶이 고달파서 죽지 못해 살거나 천국같은 다음 생을 기약하며 매일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이라는 나훈아의 노래가사도 있듯이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조금씩 비워내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거다.


사실 나도 어지간히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좀 있는 편이었는데 마치 비관주의의 끝판왕 같은 이 시오랑 작가 덕분에 거울치료를 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으로 시야가 넓어지면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등 잘 살았냐 못 살았냐 따위를 구분짓는 온갖 기준들은 어차피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허상일 뿐이라는 위안과 함께 뭔가 치유를 받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생각과는 대척점일 수 있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이란 말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는데, 편견없이 마음을 비우고 읽다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 각자 여러 방향으로 활발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제공하는 책이란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작가가 특히 프랑스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정제된 언어로 글을 쓰는 스타일로 알려져있는 만큼 이 책의 번역도 그 뉘앙스가 온전히 전달되는 명징한 문장으로 다듬어져 가독성이 높고 이해를 돕는 꼼꼼한 주석 등 대단히 훌륭한 완성도로 처리된 느낌이다.


나는 그가 생전에 한번이라도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생겨서 구글 검색으로 웃는 모습이라도 한번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 정도가 가장 밝은 표정이더라...



아무리 염세주의를 연구하고 그런 사상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영역일 뿐 시오랑의 실제 삶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희로애락을 골고루 겪으며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본 경험도 많았으리라 믿고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R7mvl9IPKg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80605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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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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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역사 추리소설 '흑뢰성'은 2021년 발간 직후 그 해 일본의 모든 미스터리 관련 상을 석권했던 화제작으로 소개되고 있다.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는 1978년생으로 현재 40대 후반의 중견작가이며 우리나라에서 '빙과'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져있고, '빙과'의 성공에 이어 주로 고교생 주인공들을 내세운 학원 미스터리물을 계속 발표하면서 수많은 수상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화 등 인기작가로서의 명성을 다져온 인물이다.



본작 '흑뢰성'은 흔히 센코쿠시대라고 부르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탐정물로 대표되는 고전 추리 작법을 접목시킨 팩션 미스터리 장르이다. 작가가 그동안 발표해왔던 청소년 성향의 작품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소재와 내용이어서 자신의 창작 스펙트럼을 넓혀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이기도 하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현지에서는 평단과 대중의 호평 속에 전례없는 성과를 거둔 것 같다. 


제목 '黒牢城'의 '牢'는 우리 뢰 즉, 소 같은 짐승을 가두는 우리 또는 감옥을 뜻하니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검은 감옥의 성' 정도가 되겠다. 무협지에서 최종 보스의 은신처 같은 곳이 떠오르는 뭔가 있어보이고 느낌있는 제목인데 의외로 작품 속에서 이 '흑뢰성'이라는 명칭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유일한 배경이자 무대가 아리오카성이라는 곳이고, 그 성의 성주이자 주인공이 매번 컴컴한 지하 감옥에 내려가서 실마리를 찾는 구성이라 책을 읽다보면 왜 이런 제목이 지어졌는지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이 작품은 팩션이기 때문에 대부분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아라키 무라시게는 당시 패권을 장악하던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다이묘 즉, 지금의 오사카 근처인 셋쓰라는 지역의 영주 위치까지 올라선 장수인데, 갑자기 주군인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혼자 도피했다가 은둔생활 중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까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 책에서는 무라시게가 모반을 일으킨 이후 셋쓰의 아리오카성에 칩거했던 기간 중에서 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전의 약 1년간 벌어진 사건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겨울부터 이듬해 봄, 여름, 가을까지 총 4편의 에피소드가 연작으로 이어지는 구성이고 한 계절당 하나씩 독립적인 사건이 벌어졌다가 해결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책 말미를 보면 월간지에 단편 형식으로 실었던 에피소드를 묶어서 펴낸 것으로 나온다.



작가는 무라시게가 모반을 감행한 이유 등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의 공백 부분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교묘하게 메워가면서 밀실 살인 트릭을 활용한 첫번째 에피소드를 비롯하여 각각의 에피소드 모두 탐정과 독자가 두뇌게임을 하며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 주력하는 정통 고전 추리소설의 대표적 트릭과 작법을 기본 골격으로 해서 스토리를 펼쳐간다.


이 작가의 필력은 깔끔한 대사 처리와 흡인력있는 전개 등 흠잡을 데가 별로 없을 정도로 탄탄하면서도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굳이 중간에 한번씩 상황을 요약해주는 일본 작가 특유의 쿠세는 보이지만, 작품의 특성상 잠재적 용의자에 해당하는 서브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읽다보면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어서 여기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극에 걸맞는 예스러운 어투와 철저한 고증을 반영한 듯한 디테일한 상황묘사 역시 전력을 다한 작가의 노력에 비례해서 진중한 무게감으로 고스란히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또한 이 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적절한 주석을 비롯하여 분위기에 어울리는 대사톤과 반말과 존댓말의 미묘한 변화까지 맛깔스럽게 살려내는 뛰어난 완성도의 번역도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어 만족감을 더해준다.



다만 탐정 역할을 겸하는 무라시게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최후의 방편으로 자신이 직접 지하감옥에 가둔 간베에를 찾아가서 사건 해결의 힌트를 얻는다는 설정은 마치 '양들의 침묵'에서 스탈링이 한니발 렉터에게 자문을 구하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작가와 독자 간의 페어플레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사건 현장을 보지도 않고 오로지 무라시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수수께끼를 간파하는 간베에의 전지전능함은 애초에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수준이다. 게다가 각 에피소드 초중반까지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하면서 이런저런 추리를 해봐도 막상 진범과 범행수법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 황당할 정도의 우연적 상황과 의외성에 기댄 결과를 마주하기 때문에 그동안 주어진 단서들은 별 의미없는 연막에 불과했다는 허무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같은 경우 두번째 에피소드의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에 이를 때 쯤에는 나머지 에피소드들의 전개 스타일과 해결 방식 또한 비슷하게 반복될 것이라 훤히 예상되면서, 이런 식이면 굳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써 추리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사건 해결을 위한 적극적 참여자가 아닌 그냥 구경꾼으로서 관망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본작 '흑뢰성'은 장르소설에서 보기 힘든 책 말미의 수많은 참고문헌이 증명하듯이 작가가 공들인 역사 고증을 바탕으로 정통 고전 추리물의 추억을 되살려낸 솜씨로 오랜만에 일본 추리소설의 저력과 자존심까지 다시 한번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기발한 트릭이나 반전 같은 미스터리의 임팩트가 기대에 비해 다소 약하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시대극이라는 측면에서 보여주는 재미가 그 이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사실 그동안 일본 평단은 호들갑이 너무 심해서 신뢰감이 거의 바닥인 상태였는데 이번 만큼은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cBNiVpCIagA&t=359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769879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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