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났음의 불편함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란 옮김 / 현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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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밀 시오랑은 1911년에 태어나서 1995년에 사망한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다. 대충 살펴보니 20대에는 베를린에서 칸트, 헤겔,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독일 철학을 탐구했고 30대부터는 파리에 살면서 프랑스어로 쓴 책들을 발표하며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으로 나온다. 



이 작가의 글은 대부분 아포리즘에 기반을 둔 스타일로 쓰여지는 특징이 있는데 아포리즘(Aphorism)은 격언, 잠언, 경구 등으로 해석되는 짧은 글귀를 뜻한다.



본작 '태어났음의 불편함'은 1973년에 발표되었고 역시나 아포리즘으로 채워진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막연하고 추상적인 글귀는 취향이 아니라서 심지어 시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본의 아니게 이런 스타일의 글을 접하게 되니 첫대면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주 오래전 우리나라에 칼릴 지브란의 책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 책을 처음 펼치면서 문득 지브란이나 혹은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작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이라는 뉘앙스로 시작하는 이 책은 가면 갈수록 작가의 특이한 사고방식에 도무지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어떤 통찰에 압도당하는 듯한 특별한 느낌도 있었다.


일단 이 작가는 독일 철학은 물론 바흐의 음악과 도스토옙스키와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 그리고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의 각종 종교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축적된 자신의 가치관이나 일상적 상념들을 다소 현란한 스킬의 함축적인 언어로 담아내기 때문에, 한번은 고사하고 두번 세번 읽어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난해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지만 신중하고도 오랜 담금질 끝에 뽑아낸 언어 조합의 결과물이란 점 또한 충분히 느껴진다.



책 초반에 나오는 글귀 중 하나로 언뜻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현학적인 말장난인가 싶기도 한데 천천히 반복해서 읽다보면 그 '진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만큼 이 작가는 태어났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음 그 자체를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심지어 사산아를 부러워하기까지 하는 작가의 성향을 마주하다보면 그 극단적인 염세주의적 또는 회의주의적 또는 허무주의적 사고방식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솔직히 이 정도면 작가가 일찌감치 자살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신기한데 자살은 너무 늦은 선택이기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라는 알쏭달쏭한 견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하며 이 책에서도 잠과 밤에 대한 언급이 많은 편이다. 깨어있을 때 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차라리 잠들어 있는게 훨씬 낫다고 여기는 작가에게 밤에 잠이 오지 않는 증상 또한 정말 치명적인 고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살면 살수록 살아있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것 보다 낫다... 나는 모든 것이 덧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고, 그래서 나의 장점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만일 내게 아이들이 있다면 당장 목 졸라 죽일 것이다... 태어남이 실패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삶은 견딜 만해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나를 견딘다...



아뭏든 이 시오랑의 염세주의는 거의 인간혐오 수준으로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정말이지 쇼펜하우어도 울고 갈 듯 하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이 책에서 얼핏얼핏 감지되는 작가의 정치적 성향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보가 정치를 넘어 훨씬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했을 것이라 애써 부정해봐도 히틀러에 대해 다소 후한 평가를 내리는 견해를 보노라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이문열 작가가 꼴보기 싫은 극우 인사라 해도 그의 찬란했던 문학적 성취까지 폄하하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비록 동의할 순 없어도 그냥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 성향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보다는 오히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언급된 부분 등에 더 눈길이 사로잡혔는데, 이렇게 극단적이고 까다로운 시오랑을 매료시킨 포인트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음에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말은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보는 진부한 명제가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진 것이 많고 매일매일이 행복해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삶이 고달파서 죽지 못해 살거나 천국같은 다음 생을 기약하며 매일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이라는 나훈아의 노래가사도 있듯이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조금씩 비워내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거다.


사실 나도 어지간히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좀 있는 편이었는데 마치 비관주의의 끝판왕 같은 이 시오랑 작가 덕분에 거울치료를 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으로 시야가 넓어지면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등 잘 살았냐 못 살았냐 따위를 구분짓는 온갖 기준들은 어차피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허상일 뿐이라는 위안과 함께 뭔가 치유를 받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생각과는 대척점일 수 있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이란 말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는데, 편견없이 마음을 비우고 읽다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 각자 여러 방향으로 활발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제공하는 책이란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작가가 특히 프랑스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정제된 언어로 글을 쓰는 스타일로 알려져있는 만큼 이 책의 번역도 그 뉘앙스가 온전히 전달되는 명징한 문장으로 다듬어져 가독성이 높고 이해를 돕는 꼼꼼한 주석 등 대단히 훌륭한 완성도로 처리된 느낌이다.


나는 그가 생전에 한번이라도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생겨서 구글 검색으로 웃는 모습이라도 한번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 정도가 가장 밝은 표정이더라...



아무리 염세주의를 연구하고 그런 사상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영역일 뿐 시오랑의 실제 삶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희로애락을 골고루 겪으며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본 경험도 많았으리라 믿고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R7mvl9IPKg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80605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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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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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역사 추리소설 '흑뢰성'은 2021년 발간 직후 그 해 일본의 모든 미스터리 관련 상을 석권했던 화제작으로 소개되고 있다.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는 1978년생으로 현재 40대 후반의 중견작가이며 우리나라에서 '빙과'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져있고, '빙과'의 성공에 이어 주로 고교생 주인공들을 내세운 학원 미스터리물을 계속 발표하면서 수많은 수상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화 등 인기작가로서의 명성을 다져온 인물이다.



본작 '흑뢰성'은 흔히 센코쿠시대라고 부르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탐정물로 대표되는 고전 추리 작법을 접목시킨 팩션 미스터리 장르이다. 작가가 그동안 발표해왔던 청소년 성향의 작품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소재와 내용이어서 자신의 창작 스펙트럼을 넓혀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이기도 하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현지에서는 평단과 대중의 호평 속에 전례없는 성과를 거둔 것 같다. 


제목 '黒牢城'의 '牢'는 우리 뢰 즉, 소 같은 짐승을 가두는 우리 또는 감옥을 뜻하니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검은 감옥의 성' 정도가 되겠다. 무협지에서 최종 보스의 은신처 같은 곳이 떠오르는 뭔가 있어보이고 느낌있는 제목인데 의외로 작품 속에서 이 '흑뢰성'이라는 명칭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유일한 배경이자 무대가 아리오카성이라는 곳이고, 그 성의 성주이자 주인공이 매번 컴컴한 지하 감옥에 내려가서 실마리를 찾는 구성이라 책을 읽다보면 왜 이런 제목이 지어졌는지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이 작품은 팩션이기 때문에 대부분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아라키 무라시게는 당시 패권을 장악하던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다이묘 즉, 지금의 오사카 근처인 셋쓰라는 지역의 영주 위치까지 올라선 장수인데, 갑자기 주군인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혼자 도피했다가 은둔생활 중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까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 책에서는 무라시게가 모반을 일으킨 이후 셋쓰의 아리오카성에 칩거했던 기간 중에서 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전의 약 1년간 벌어진 사건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겨울부터 이듬해 봄, 여름, 가을까지 총 4편의 에피소드가 연작으로 이어지는 구성이고 한 계절당 하나씩 독립적인 사건이 벌어졌다가 해결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책 말미를 보면 월간지에 단편 형식으로 실었던 에피소드를 묶어서 펴낸 것으로 나온다.



작가는 무라시게가 모반을 감행한 이유 등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의 공백 부분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교묘하게 메워가면서 밀실 살인 트릭을 활용한 첫번째 에피소드를 비롯하여 각각의 에피소드 모두 탐정과 독자가 두뇌게임을 하며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 주력하는 정통 고전 추리소설의 대표적 트릭과 작법을 기본 골격으로 해서 스토리를 펼쳐간다.


이 작가의 필력은 깔끔한 대사 처리와 흡인력있는 전개 등 흠잡을 데가 별로 없을 정도로 탄탄하면서도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굳이 중간에 한번씩 상황을 요약해주는 일본 작가 특유의 쿠세는 보이지만, 작품의 특성상 잠재적 용의자에 해당하는 서브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읽다보면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어서 여기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극에 걸맞는 예스러운 어투와 철저한 고증을 반영한 듯한 디테일한 상황묘사 역시 전력을 다한 작가의 노력에 비례해서 진중한 무게감으로 고스란히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또한 이 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적절한 주석을 비롯하여 분위기에 어울리는 대사톤과 반말과 존댓말의 미묘한 변화까지 맛깔스럽게 살려내는 뛰어난 완성도의 번역도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어 만족감을 더해준다.



다만 탐정 역할을 겸하는 무라시게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최후의 방편으로 자신이 직접 지하감옥에 가둔 간베에를 찾아가서 사건 해결의 힌트를 얻는다는 설정은 마치 '양들의 침묵'에서 스탈링이 한니발 렉터에게 자문을 구하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작가와 독자 간의 페어플레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사건 현장을 보지도 않고 오로지 무라시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수수께끼를 간파하는 간베에의 전지전능함은 애초에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수준이다. 게다가 각 에피소드 초중반까지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하면서 이런저런 추리를 해봐도 막상 진범과 범행수법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 황당할 정도의 우연적 상황과 의외성에 기댄 결과를 마주하기 때문에 그동안 주어진 단서들은 별 의미없는 연막에 불과했다는 허무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같은 경우 두번째 에피소드의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에 이를 때 쯤에는 나머지 에피소드들의 전개 스타일과 해결 방식 또한 비슷하게 반복될 것이라 훤히 예상되면서, 이런 식이면 굳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써 추리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사건 해결을 위한 적극적 참여자가 아닌 그냥 구경꾼으로서 관망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본작 '흑뢰성'은 장르소설에서 보기 힘든 책 말미의 수많은 참고문헌이 증명하듯이 작가가 공들인 역사 고증을 바탕으로 정통 고전 추리물의 추억을 되살려낸 솜씨로 오랜만에 일본 추리소설의 저력과 자존심까지 다시 한번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기발한 트릭이나 반전 같은 미스터리의 임팩트가 기대에 비해 다소 약하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시대극이라는 측면에서 보여주는 재미가 그 이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사실 그동안 일본 평단은 호들갑이 너무 심해서 신뢰감이 거의 바닥인 상태였는데 이번 만큼은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cBNiVpCIagA&t=35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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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이은주 옮김 / 푸른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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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은 애플 TV+를 통해 올해 5월부터 방영 중인 드라마의 원작소설이고 미국에서는 2016년에 발표되었으니까 생각보다 조금 오래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22년에 번역 소개되었고 처음 나왔을 때는 표지 디자인이 이렇지 않았는데 최근에 드라마 방영이 확정되면서 배우 얼굴이 들어간 포스터를 그대로 활용한 지금의 새로운 표지로 변경된 것 같다.


그런데 포스터 자체도 그렇지만 솔직히 이 표지 디자인은 좀 문제가 있다. 누가 봐도 복제인간을 다룬 SF물이 연상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 작품의 중반부에 드러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반전 장치이기도 해서 책을 읽기도 전에 미리 스포를 당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굉장히 작은 사이즈의 특이한 판형으로 제작되었다. 외형은 서양의 '페이퍼백' 스타일인데 가격은 16,800원으로 전혀 페이퍼백 답지 않다. 페이퍼백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서양에서 오로지 싼 값에 책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제본방식이고 질낮은 재생종이에 떡제본이라 읽다보면 책등이 휘어지고 꺽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소장용이 아니라 가볍게 한번 읽고 버릴 생각으로 구매하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 같은 경우는 이도저도 아닌 참 이상한 컨셉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품질 낮은 문고판 사이즈에 가격은 또 페이지수로 적용해서 제값을 다 받고 있으니까... 아뭏든 요즘 국내 출판사들의 일관성 없는 제본과 가격정책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1978년생으로 현재 40대 중반이고 소설가이면서 TV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 겸 제작자로도 활동 중인 것 같다. 특히 자신이 원작자이면서 각색에도 참여한 '웨이워드 파인즈' 시리즈가 유명한 모양이다. 프로필을 보면 본업이 소설가인지 드라마 작가인지 살짝 헷갈리는 측면이 있는데 내가 볼 때 이 작가는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미리 영상 제작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스타일인 듯 하다. 책을 읽다보면 플롯의 진행이나 인물들의 대사, 컷 전환 방식 등에서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차피 출판계와 영화계가 긴밀하게 맞물려서 돌아가는 시대라 그다지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작가가 작품의 영상화에 비중을 많이 두는 경우에는 소설 자체의 완성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가 보여주는 필력은 예상외로 뛰어나서 한편의 소설로서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만족감을 충분히 선사한다. 작가가 글도 잘 쓰지만 대단히 똑똑하고 노련한 사람이란게 몇페이지만 읽어봐도 바로 느껴진다.



이 작품의 원제는 'Dark Matter'이다. '암흑물질'이라고 불리는 천체물리학 관련용어인데 책에서도 간단히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최근 마블 시리즈 덕분에 너무나 익숙해진 용어인 멀티버스 즉, 다중우주를 소재로 한 SF스릴러다. 그래서 책 내용 중에 양자역학이니 초끈이론, 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일반인들은 말해줘도 잘 모르는 고차원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작가 후기에 현역 물리학 교수의 자문도 받았다고 나올 정도로 나름 자료조사를 충분히 해서 과학 이론상 허술한 구성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 모습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어려운 학문적 이론은 스토리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베이스로만 활용하고 독자들은 그런거 자세히 몰라도 아무 문제없이 스토리를 따라가며 즐길 수 있도록 헐리우드의 시나리오가 여지껏 잘 해왔던 방식으로 아주 능숙하게 처리를 해놓았다.


약간 호흡이 느리다는 단점은 있지만 드라마 시나리오 경험이 많아서인지 대사도 좋고 기승전결의 깔끔한 구성 안에서 중반부 이후 몰아치는 전개는 몰입도가 굉장하다. 다만 지금 현재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말하고 싶어하는 작품의 메세지는 알겠으나, 사랑하는 여자를 얻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는 복잡한 이론과 거창한 스케일에 비해 뭔가 모르게 좀 궁색한 느낌을 주는 면이 있다.



애플 TV+의 드라마는 '조엘 에저튼'과 '제니퍼 코넬리'가 주연을 맡았다. 조엘 에저튼은 '제로 다크 서티'라는 영화에서 후반부 특수부대원 역할로 '크리스 프랫'과 함께 단역으로 나왔을 때 개인적으로 인상깊어서 눈여겨 봤던 배우인데 감독, 각본, 제작 등 다방면으로 재능도 많고 또 진중한 이미지라 상당히 믿음직스럽다. 제니퍼 코넬리야 내 나이 또래면 누구나 다 아는 배우니까... 그런데 얼마전 '탑건 매버릭' 때보다는 덜 예쁘게 나오는 것 같아서 좀 아쉽다. 어쨌든 예고편을 보니 소설의 내용이 영상으로 잘 구현된 느낌이 든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모르게 재미 면에서는 드라마가 소설을 못 따라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제인 'Dark Matter'와 아무 연관성이 없는 '30일의 밤'이란 국내제목은 약 30번에 걸쳐 다중우주를 돌아다니는 주인공의 행적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은 것 같은데 '암흑물질'과 같은 딱딱한 직역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인 것 같다. 만약 '30일의 밤'이라는 드라마에 관심은 있는데 나처럼 애플TV를 볼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면 이 원작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LbGbfUyuB68&t=1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624287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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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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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은 1993년생으로 이제 막 30대로 접어든 젊은 여류작가이다. 20대 중반에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하면서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은 이후 단숨에 한국SF문학계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스타작가로까지 올라선 것 같다.



'지구 끝의 온실'은 그동안 중단편만 써왔던 작가가 처음으로 내놓은 장편소설인데, 21년 8월에 출간된 즉시 베스트셀러를 기록함과 동시에 수많은 나라와 출판계약을 맺고 영화판권까지 팔렸다는 소개란만 봐도 현재 그녀가 가진 위상과 인기를 실감하게 만든다.



SF문학은 과학적 근거와 오류 등을 디테일하게 따지는 골수매니아과 덕후들이 워낙 많아서 그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마저 과학적 고증 측면에서는 사정없이 비판받을 정도로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는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데 심지어 SF장르의 불모지라고도 불리는 한국에서 젊은 여성작가가 이렇게 두각을 보이는 현상이 신기하기도 하다.


일단 김초엽 작가는 무엇보다 포항공대 출신이라는 과학 기반의 강력한 스펙과 함께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예술가적 자질, 그리고 청각장애라는 핸디캡까지 독자의 입장에선 인간적 호감을 가질만한 능력과 스토리를 고루 가지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나같은 경우 이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단편들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첫 장편인 이 작품으로만 그녀의 실력과 특징을 가늠한다는게 그리 적절치 않은 느낌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취향이라 굳이 이 작품을 골라봤는데 그래도 문학계에서 이렇게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정도는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이 작품은 영화에서도 흔하게 차용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세계 종말이나 인류 멸망의 원인은 핵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여러가지 선택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더스트'라는 이름의 먼지처럼 자가증식하는 화학 유기체로 설정을 했다. 2064년부터 2070년까지 약 5년간의 더스트 시대를 거치면서 지구는 초토화되었고 주인공 아영이 활약하는 작품속 시점은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흐른 2129년이니까 이 작품의 시대적 설정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뒤의 미래가 되겠다.



앞으로 40년 정도가 지나면 책에서처럼 '호버카'로 불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라든지 마치 에이리언 시리즈의 비숍이나 데이빗 같은 수준의 인조인간이 만들어질 지는 모르겠으나 아뭏든 이 책에서는 더스트 시대에 이미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설정이다. 냉정하게 본다면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영화적 허용처럼 소설적 허용으로 넘어가도 되리라...


'돔 시티'의 경우는 불과 5년이 안되는 더스트 시대를 격는 와중에 한 도시를 커버할 정도의 거대한 돔을 설치한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정찰과 전투 목적의 드론이나 음식 대용으로 섭취하는 영양 캡슐, 동물 로봇 등 작품 속의 다양한 장치들은 근미래에 충분히 등장 가능할 법한 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더스트의 모태가 되는 나노 테크놀로지라는 것도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분야겠지만 화학 및 생화학을 전공했던 작가의 이력이 뒷바침하는 만큼 충분한 검토를 거쳐서 나온 설정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아바타'라는 영화를 위해 나비족의 언어인 나비어를 비롯하여 판도라 행성에 관한 세계관을 규정하는 설정집을 따로 만들었는데 그 분량이 어머어마해서 거의 백과사전 수준으로 두껍다더라는 과장섞인 일화까지 전해질 정도로 SF장르는 세계관과 설정 구축이 빈틈없이 탄탄하게 마련되어야 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물론 김초엽 작가가 그 정도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미래의 모습은 본인의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굉장히 고심해서 구상하고 또 디테일하게 설계한 결과물임이 충분히 느껴진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했던 부분은 작가가 이러한 배경 설정에 관해 설명충을 등장시키거나 해서 굳이 주입식으로 브리핑하듯이 설명을 하는 구차하고 촌스러운 수법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세계관인지 감을 잡기 힘들어도 읽다보면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인물들의 대사나 상황묘사를 통해 적절한 타이밍에 하나씩 자연스럽게 파악이 되도록 정교한 수순처리를 해놓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경력이 짧은 신인작가의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다만 글쓰기 측면의 작가적 역량에 한정해서 본다면 이 작가의 필력은 그다지 인상적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물론 순수문학이 아닌 장르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사와 서술 문장들 모두 딱히 흠잡을데가 없을 정도로 준수한건 분명하지만 프로 글쟁이다운 기교나 문학적 감성이 거의 보이지 않고 문장들이 대체로 모범생의 답안처럼 너무 정직하고 딱딱한 편이긴 하다. 그리고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딱히 불필요하다거나 군더더기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전체적으로 루즈한 느낌이 있어서 다소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는 편이다. 역시 이 작가도 장편이 처음이어서 그런지 긴 호흡을 효율적으로 컨트롤하는 능력이 아직은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쉽게 느낀 부분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비전이랄까... 아뭏든 그런 측면이었다.


이 작품이 19년에 발생한 '코로나' 사태에서 어느 정도 영감을 받았다는 것도 알겠고... 거대한 재앙을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과 그 와중에 위기를 전화위복 삼아 세상을 리셋하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 하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 군상들에 의해 충돌하고 반목하는 이해관계들... 윌리엄 골딩의 위대한 고전 '파리대왕'이 떠오르는 부분도 더러 보이는데... 아뭏든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제법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브 플롯들이 마치 작품 속의 '모스바나' 덩굴처럼 뒤엉켜있어 그 속에서 뿌리와 줄기를 형성하는 핵심주제를 찾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놀랍게도 이 책에서는 남성 캐릭터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금방 죽는 용도 등의 별 의미없는 엑스트라를 제외하면 정말로 아예 없다. 심지어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윤재'라든지 '대니' 같은 누가 봐도 남자로 생각되는 이름도 알고보면 모두 여성 캐릭터다. 그래서 주인공들을 비롯한 '프림 빌리지'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활동을 보노라면 작가가 혹시 '아마조네스 왕국'을 꿈꾸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후반부 등장하는 동성애 코드도 회심의 반전장치라고 하기엔 작가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 성향만 드러낼 뿐인 장면이라 너무 뜬금없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들은 대충 어떤건지 알겠는데 내게는 이것들이 페미니즘적 시각과 묘하게 엮여있는 모습으로 보여서 전체적으로 나와는 코드가 좀 안맞는 느낌이었고 하여튼 여러모로 아쉬웠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얘기하다보니 또 단점들만 수두룩하게 지적한 것 같은데 현재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핫한 작가 중의 한명인 김초엽은 나이에 비해 그 명성에 걸맞는 깊이감을 보여주는 실력자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이고 또한 앞으로의 발전가능성도 대단히 높아보인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자신의 단점도 알아서 스스로 보완해 나가리라 믿는다. 다만 자신의 주타겟층을 계속해서 여성 독자들로 한정짓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너무 노골적인 페미니니즘적 성향은 조금씩 줄여나가는게 어떨까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T-hOs_4iVt0&t=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61046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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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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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에 나왔던 '완전한 행복' 이후 3년만에 발표된 신작 장편소설이고 예약구매 특전은 작가의 사인이 들어간 하드커버 양장본이다. 처음에는 이 책도 김애란처럼 당연히 인쇄된 사인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넘겼었는데 나중에 혹시나해서 손끝으로 만져보니까 표면에 미세한 굴곡이 느껴지더라... 아무래도 작가가 한권 한권 일일이 직접 사인한 진짜 친필사인본이 맞는 것 같고... 이러면 좀... 대박인 듯... 양장본도 한정수량으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하니까 차별성도 확실하고... 이전 사인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귀여운 새 그림을 추가로 넣었는데 아마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달'이라는 이름의 앵무새를 표현한 것 같다.



심지어 그림실력도 예사롭지가 않다. 아뭏든 나는 이 책에 작가의 손길이 직접 닿았다고 생각하니까 읽기도 전에 살짝 감동부터 먼저 받았다.


이 책은 신국판보다는 약간 작지만 그래도 요즘 나오는 책 치고는 비교적 큰 사이즈의 판형에 활자와 여백을 키우는 식의 꼼수 같은거 없이 정석적인 인쇄방식으로 약 520페이지를 꽉 채운 분량이라 간만에 장편다운 장편을 대하는 느낌을 준다. 자고로 이 정도는 돼야 장편소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작가 정유정은 1966년생으로 어느덧 5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강했었는데 이제는 여류작가들 중에 최고참 언니로서 관록을 보여주는 위치에 서 있는 것 같다. 세월이 이렇게나 빨리 흐르는가 싶어 새삼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참...


이번 신작의 소개란을 보면 무슨 '욕망 3부작' 두번째 이야기 같은 문구가 보이는데 '악의 3부작'도 그렇지만 솔직히 나는 이런 타이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가가 실제로 처음부터 의도했다기 보다는 출판사 측에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밀고 있는 느낌이 강한데, 자의든 타의든 이런 것들은 작가가 차기작을 구상하는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는 악의 3부작이 이미 끝났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무시무시한 악에 관한 또다른 이야기는 더 이상 볼 수 없는건가 싶은 생각도 들기 때문에 어쨌든 이런 타이틀로 인해서 작가의 자유의지가 구속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온 정유정의 작품들은 각각의 개성이 다 다르고 소재와 주제 역시 독립적이고 독창적이라 무슨 무슨 3부작 이런 식으로 묶는다는 것 자체가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전작인 '완전한 행복'만 하더라도 욕망 3부작의 첫번째로 분류하고 있는데 난 이걸 악의 3부작에 포함시켜 4부작의 네번째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유정 작품들은 3부작이니 뭐니 하는 계보 따위는 하등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욕망 두번째 작품이니까 첫번째를 먼저 읽고 읽어야 하나 하는 바보같은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본작 '영원한 천국'도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열심히 소개하고는 있지만 내가 직접 읽어본 바로는 정작 이 작품은 욕망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정유정의 작품들에는 대부분 판타지적인 요소가 들어간다는 특징이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자유롭고 또 뛰어나서 그럴 수도 있겠는데 희한하게도 읽다보면 이게 판타지 소설이라는 생각이 잘 안든다. 인물들의 캐릭터 구축력이나 대사, 상황묘사들에서 워낙 리얼리티가 강하기 때문에 판타지 설정이 분명히 있음에도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거기에 치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한 디테일도 뛰어난 편인데 만약 자료조사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은 압도적인 필력으로 뻔뻔하게 밀어붙여서 아예 다른 생각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정유정 작가의 글에서는 섬세함도 물론 있지만 전체적으로 남성 작가에게서도 쉽게 보기 힘들 정도의 강한 힘이 느껴진다. 만약 작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글만 읽는다면 남자가 썼다고 착각할 확률이 높다. 나같은 경우는 '7년의 밤'으로 이 작가를 처음 접했는데 당시 나는 그 책 읽으면서 진짜로 여류작가가 쓴게 맞는지 중간에 작가의 사진을 몇번이나 다시 확인하고 그랬었다. 이 작품도 처음 사랑에 빠지는 남녀의 섬세한 감정과 함께 정말 아름답고 격정적인 사랑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지만, 말랑말랑하면서도 섬세한 여성스러운 시각보다는 묵직하고 속깊은 남성적 시각에서 그려내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다. 


이 작품은 그동안 정유정 작가가 보여준 여러가지 특징들이 총집약된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판타지 설정을 통한 기발한 상상력은 이제는 아예 가상현실이라는 SF적인 요소로까지 확장되었고 거기에 특유의 어둡고 기구한 운명을 살아가는 개성있는 캐릭터들...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서술 테크닉과 실감나는 생활밀착형 대사들에 드라마틱한 상황설정들... 기교와 함께 절제미도 놓치지 않는 고급스런 문장들에 뭔가 엄청난 대작을 읽고있는 듯한 큰 스케일 등... 지금껏 작가로서 다져온 온갖 스킬들을 아낌없이 담아 화려하고 성대하게 내놓은 느낌이다.



정유정은 프로다운 현란한 기교도 돋보이지만 동급 작가들에 비해 어휘를 구사하는 폭도 월등히 넓다. 특히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를 빠르게 요약 기술하면서 캐릭터를 동시에 설명해주는 부분은 이게 영화로 치면 흔히 몽타주씬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될텐데,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에 리듬감과 완급조절까지 완벽해서 감정이입과 동시에 이야기 속으로 깊숙하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라 늘 그렇지만 정말 경이롭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정유정의 작품들은 대부분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있어서 유머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와중에 가끔씩 튀어나오는 정유정식 유머감각도 매력이 넘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며 줄기차게 도전은 했지만 문제는 어머니가 너무 많았다는 식의 표현을 보노라면 노련한 작가의 관록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가 있다. 나중에 어머니를 만드는 일에 휘말린 건 아닐까 하면서 다시 한번 써먹는 센스도 기가 막힌다.



다만 그동안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았던 리얼 그 자체의 찰진 대사들이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어색한 문어체가 더러 보인다는 점은 좀 의외였는데 이를테면 '한기준일세', '오느라 고생했네' 같은 팀장의 대사는 실생활에서는 거의 접하기 힘든 화법이다.



아마도 이 부분은 가상세계를 다루고있는 작품의 설정상 현실에 비해 살짝 이질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작가가 일부러 이런 화법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전작들 중에 '진이, 지니'와 은근히 결이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소재와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분리한 초현실적 또는 과학적 접근법을 통해 그 속에서 삶과 사랑에 대한 가슴뭉클한 스토리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유독 생각이 많이 나더라. 


그리고 굉장히 복잡한 플롯과 구성으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있다는 면에서는 또 다른 작품도 떠올랐는데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이란 영화다. '꿈 속의 꿈'이라는 다중 플롯을 구사한 작품인데, 정유정도 이 작품에서 '가상세계 속의 가상세계'라는 다층구조로 복잡한 구성을 꾀하면서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겨두고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대부분 명료한 서사를 보여주었던 그녀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뭔가 앞뒤가 안맞는 부분도 군데군데 보이면서 혼란스럽다는 인상도 받게 만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가상세계인지... 도입부에 공달의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의뢰건은 뒤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그냥 해상을 불러들이기 위한 핑계였는지... 경주와 동생, 그리고 해상과 제이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재회의 에피소드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건만) 초반부에 비중있게 다룬 것에 비해 너무 흐지부지 처리된 것은 아닌지...  후반부 경주는 이미 롤라에 접속해있는 상태라 유심이 필요없을텐데 칼잡이와 유심을 둘러싼 공방전을 왜 하는 것인지... 등등 다 읽고나서도 이해가 안되는 사소한 부분들 때문에 영 개운하지가 않은데, 어쩌면 작가 자신도 때때로 본인이 펼쳐놓은 복잡한 다중 플롯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부 해상과 제이, 그리고 후반부 경주와 지은의 러브스토리는 가상현실을 둘러싼 설정상의 오류 같은 자잘한 단점들을 모조리 덮고도 남을 만큼 위력적으로 아름다워서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했던 것 같다. 



매번 그랬듯이 정유정 특유의 절절한 문장들은 가슴에 날아와서 사정없이 꽂힌다. 물론 살짝 오글거리는 부분도 있었다. 남녀가 서로의 공통분모를 발견하면서 사랑에 빠지는거야 현실에서도 흔한 일이겠지만 '람슈타인'은 아무래도 좀 너무 나간 듯... 



각자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한국인 남녀가 이집트에서 우연히 만나 람슈타인으로 동질감을 느낀다? 이건 마치 내가 멕시코에 놀러갔다가 '루이스 미겔'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한국 여성과 만날 확률보다 더 희박할 것 같은데... 아뭏든 정유정 작가는 알고봤더니 락 음악 매니아였던 걸로...


이번 작품 '영원한 천국'은 제목처럼 죽지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싶어하는 인간들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거창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풀어놓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져볼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경험은 결국 '사랑'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상대를 위해 목숨까지 버려도 아깝지않은 사랑... 비록 곧 꺼질 불꽃과 같은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냥 그렇게 느꼈다.


정유정은 역시 믿고 읽는 작가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 시간이었고, 행복했고... 이변이 없는 한 다음 작품도 당연히 예약구매할 생각이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z39wNCFtbpg&t=6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571195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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