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제국 - 하느님 나라와 신세계 무질서
리차드 A. 호슬리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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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예수를 떠올리는 까닭에 대해서

<<예수>>에 대한 서평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분해해서 예수를 읽는 것은, 기실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결과를 산출해 내기 일쑤다.

이를 테면, 예수를 '사도신경'에 나오는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이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절의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니, 이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나,

그 말씀의 맥락(Context)에 따라서 읽는 것에 대한 예수의 이해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의 한국 기독교 신자들에게 '맥락'에 따른 성경 읽기는 불경한 것이라 판단 될 것이며, 이런 책을 교회에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눈총을 받을 수 있고, 운이 없으면 눈에 나는 수도 있다. 유일한 예외는 신학생 정도가 되겠지.

예수를 '역사적 맥락'으로 읽어야 되는 이유를, 그러한 까닭게 말해야만 한다. 예수를 '역사적 맥락'으로 읽는 이유는, 지금 현재에서 '내세에 대한' 천국 티켓 처럼 팔아대는 재벌 교회들과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멀고 먼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필요할 테고,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 '억눌리'고 '피폐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교회가 그것에 대해서 강력한 '선포'와 '심판'의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문제가 있는 지 없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도 이 과정은 꼭 필요한 것이다.

도대체 예수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말을 했는가??

이 전에 그가 최근의 '탈정치화'되고 '탈역사화된' 예수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은 굉장히 인상깊다.

   
 

 1) 가장 결정적인 것은 현대 서양의 생각, 즉 종교는 정치 및 경제와 분리된다는 생각이다. ...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종교가 정치경제와 분리된다는 현대 서양의 생각을 고대 사회에 투영시킨다. 즉 예수를 종교적 인물로 개념화함으로써, 예수의 설교와 행적의 정치경제적 측면과 의미를 무시한다.

 2) 현대 서양의 개인주의이다. ... 특히 미국사회에서 매우 강한 특성이다. 이런 현대 서양의 생각도 고대 사회에 투영시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주로 다른 개인들과 관계했지, 사회 집단이나 정치 제도와는 관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3) 예수 해석자들의 과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다. ... 복음서들의 "자료들"(data)은 역사적 재구성을 위해 반드시 따로 떼어내어 분석하고 세밀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4) 최근의 일부 해석자들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의 자료들에서 사람들 귀에 거슬리는, 심판과 관계된 말씀들을 제거시킴으로써, 예수를 더욱 탈정치화시켰다.

(pp.25-26)

 
   

(방법론적으로는,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고대에 '민족국가'를 투영해서 삼국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생각나기도 한다. )

예수는 히피 운동가도 아니고, 잠언록이나 읊어대던 노인도 아니었으며, 꿈꾼대로 떠들던 몽상가도 아니었다. 예수는 언제나 폭탄같은 발언을 하던 사람이었고, 민중과 함께 했고, 억압받는 자와 함께 하곤 했다는 건데, 그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해봐야 하는가?

역사적 배경을 살피며 예수 읽기

사실 읽다보면, 졸거나  침대를 찾게 될 확률이 높은데, 이 책의 문체가 어렵다기보다, 번역투라기 보다, 저자의 저술이 계속 늘어지는 투로 했던 말 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훨씬 더 compact하게 전개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런 것이다. 제목과 같이 로마 '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예수를 봐야 한다는 거다. "예수와 제국"이니까.

예수가 태어나던 시절, 갈릴레아와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신정국가(temple-state)로서, 식민지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제국 팽창을 유지하기 위한 수탈의 대상이 된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그에 대해서 저항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어느 식민지 국가에나 지배층은 있는 마련인데, 제사장 계급들은 로마에 의해 임명되는 호의를 받으면서 나름 공범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며, 식견있는 지식인 계급들도 나름의 불만을 갖거나 혹은 나름대로 타협하는 관계로 권력을 분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류 신분들의 생활과 달리,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민중들에게 로마제국의 지배는 기존의 '성직자'들에게 제공했던 세금에 과중되는 착취로 이어지게 되었고, 민중들의 불만이라는 것은 봉기와 시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서 예수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 되겠고, 그와 더불어 예수가 말했던 아름다운 말씀이라는 것들도, 단순한 도덕률의 문제나, 혹은 현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 '폭탄'과 같은 언사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하며, 동시에 굉장한 '반어법'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 그가 '반제국주의 민중운동가' 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지리하지만, 꼼꼼히 저자는 하나하나 챙기고 있다. 또 로마 제국과 미국 제국의 동형성, 특히 예수의 운동 같은, 저항에 대한 전망을 말미에서 보여주고 있는 데, 여기선 한 번쯤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수탈구조와, 만성화된 테러와 정치적 후견자 관계를 통한 정치적 억압구조하에서 민중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속된 민족의 예언자적인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복음서의 진술을 새롭게 듣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의 권력관계에 안테나를 맞추고, 의심쩍은 표준적 탈정치화된 가정들과 접근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수운동들에서는 로마가 강요한 신세계무질서라는 조건 아래에서, 일부 예속된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취했다.

 또한 제국주의의 권력관계에 안테나를 맞추고, 미국의 정치적 힘과 지구 자본주의의 힘이 결합해서 확립한 현재의 신세계 무질서 속에서 우리의 역할과 상황을 보다 비판적으로 분별하는 작업도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와 복음서들이 미국인들, 즉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의 이런 그리스도교적 측면과 동일시하는 미국인들에게 줄 수 있는 영향은 현재 새로운 제국적 무질서의 정상에 있는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동체들의 집단적 토론과 행동을 통해서만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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