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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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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고종석

'자유주의자 고종석'. 이것이야 말로 고종석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될 것이다. 사람들도,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자유주의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는 그 화자의 정치적 성향 혹은 오리엔테이션이 된 배경을 추측해 볼 수 있다.

Liberalist 자유주의자를 '보이지 않은 손'에 대한 예찬을 퍼붓는 사람, 즉 국가의 개입의 최소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화자를 '자유주의자 - 우파'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반면 Liberalist 자유주의자를 '진보주의자'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데, 이럴 경우 개인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다수'의 폭력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소수'에 대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입론과 비슷한 입장이 된다.

고종석은 어떤 포지션에 있는 걸까? 예전의 서평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http://blog.aladin.co.kr/hendrix/1715157) 그는 정치적 자유주의자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자유주의에 대해서 들어보자.

   
 

 말하자면 복거일이 내게 가르친 것은 반공주의도 아니었고, 자유주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개인주의도 아니었다. 그가 내게 가르친 것은 보편주의였고, 나는 그 보편주의를 통해서 내 반공주의, 내 자유주의, 내 개인주의를 짓누르고 있던 수치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본래의 나를 찾았다(p.107).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때때로 반민주주의자다(p.110).

 
   

이런 고종석에 대해서 예전부터 갖고 있던 느낌은 '파리지앵' 같은 도회적이면서도 어쩔 때는 '풍류랑'같은 품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종석이 한국어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에 대해서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내가 아는 한에서는 기껏해야 '한국어'에 관한 책들이라는 것이 비분강개하여 외래어가 범람하는 세태에 대한 비난조의 것들이었기 때문에 "왜???"라는 물음을 갖고 이 책을 집어봤다. 혹여, 기자준비에 도움이 되는 '글쓰기'나 혹은 '한글 용법'이라도 나올까봐서 말이다.

신화에서 벗어나야 하는 한국어

이 책에 있는 글들은 주로 계간지에 썼던 소논문들이다. 신문의 시평보다는 깊지만, 전문 학술지에 올라오는 글들보다는 대중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글들은 모두 한국어와 관련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어에 관한 논의들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도 관련이 된다.

그의 주된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우리는 흔히 한국어를 '국어'라 말하고, 또한 '한글'과 '한국어'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이 용법들은 모두 틀렸다. 공평성을 위해서는 '국어'라는 표현보다 '한국어'라는 표현으로 바꿔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테고, '한글'이 없던 시절에도 '한국어'는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명확히 구분해서 써야한다(다만 이것들을 강제할 수는 없는 데, '용법'이라는 것은 언제나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는 7세기의 신라의 말과 글이나, 15세기의 초창기 한글로 쓰여진 말과 글, 그리고 현대의 말과 글 쓰임새를 같은 선상에 놓고 모두 '한국어'라고 묶지만, 기실 언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인데 과연 세가지의 '한국어'가 섞였을 때 우리는 같다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민족주의'로 해석하는 역사를 읽음으로써 '한국어'의 동형성만을 강조하지만, 사실 '한국어'는 역사를 살펴볼 때, 여러 족속들의 이질적 요소들이 섞여서 구성되어온 '감염된 언어'였고, 지금도 감염되고 있고, '감염'은 정당한 것이 된다. 따라서 순수한 '한국어'를 찾는 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신화추적의 행위에 불과하다. 만약 찾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유아적 표현 이상이 안된다.

3.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한국어는 언제나 열려있어야 할테고, 완고한 '순수한 한국어'로의 지킴은 오히려 한국어 자체의 진화를 방해하고, 어쩌면 한국어 자체를 약화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영어 공용화론, 복거일

매번 고종석의 글들을 읽을 때, 부딪히는 난점이었지만, 그의 '복거일'에 대한 예찬은 이해하기 어렵웠다. '순수한 시장주의자'이자, 모든 것을 시장으로 환원한 나머지 '장기거래'마저 시장메커니즘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복거일에 대해서 왜 그리도 고종석이 예찬하는 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변이다.

   
 

 복거일은 내 스승이다. 나는 그에게서 반공주의가 부끄럽지 않은 신념이라는 것을 배웠고, 소수의 옹호가 힘들지만 값진 실천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 나는 그에게서 집단의 이름으로 추구되는 '선'이 그 집단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에게 흔히 파멸적이 된다는 것도 배웠다(p.106)

 앞으로 내가 어떤 글을 쓰든, 그 글들에는 스승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것이고, 스승의 목소리가 메아리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내 자랑으로 남을 것이다. 카뮈가 그르니에에 대해 그랬다던가, 아무튼 나는 과거에도, 무슨 말을 하다보면 어느 새 스승의 말투로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카뮈가 자기 목소리에 담긴 그르니에의 목소리를 자랑스러워했듯, 나 역시 내 목소리에 섞인 스승의 목소리가 자랑스럽다(p.108).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복거일에 대한 고종석의 예찬을 찬성할 수가 없다. 이러한 복거일은 언제나 '자유주의'의 간판을 들고 나타나지만, 대체로 보면 언제나 노조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있었으나, 재벌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없었고, 재벌을 키워준 '자유주의적 독재정권'에 대한 예찬은 있었으나, 제도적으로 자유주의를 완성시켜 시스템으로 '자유화'를 완수한 '개혁진보'에게 그는 과감하게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대는 편향되고 부당한 발언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감염된 언어>가 1999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아마 지금쯤은 고종석의 생각이 변했으리라고 가정해본다.

또 하나 논쟁적인 포인트는 '영어공용화'론에 관한 것인데, 영어공용화를 복거일이 주창하자 한동안 '지식사회'에는 난리가 났었는데, 고종석은 기실 논쟁의 포인트를 모르고 '반대론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이야기한다. 사실 복거일이 바라는 논쟁의 구도는 '민족주의 vs 세계화주의'였고 자신의 대답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으로서의 '영어공용화'론이었는데, 그와 상관없이 복거일은 '공용화론자'들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방법으로의 민족주의자로 불리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민족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고, 아니 이제는 '퇴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한켠에는 '민족주의'에 물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공용화론'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책을 덮고서 좀 생각을 해보고서야 내 입장이랄 것에 대해서 떠오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한국어'에 대해서 처음으로 딴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는 것에서 내 무지를 잠시 탓했고, 또 한편으로 굳이 '번역투'나 '외래어 사용'에 자꾸만 마뜩찮아 하면서 불편해 할 필요가 없다는 해방감을 갖게된 것에 만족한다. '순수한 한국어'가 없는 이상, 중요한 것은 '윤문'일 뿐, 순수한 '순우리말'일 필요는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사족.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내 반론

치사하지만 영어는 생존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동적이고 '영어' 위주의 지배체제가 지속성을 가지고 얼마나 갈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고종석의 말마따나 그 중국인들이 쉬이 그들의 문자체계를 포기할 지가 의심이 되고, '미국'의 패권이 얼마를 갈지 난 장담을 못하겠다. 요즘 '서브프라임'사태를 봐서도 그렇고... 미국 중심의 '영어'의 잔영은 물론 오래가겠지만, 그것이 영구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의 필요성이란 것은 그 자체가 '생존'이 되는 이에게 최대치, '교양'으로 여기는 이에게 최소치로 다가갈 뿐이다.

게다가 '번역'의 수준이라는 것이 점차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도 쉽사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보화시대'의 '컨텐츠 경쟁'사회에 있어서 '정보 조직력' 혹은 '정보 이용능력' 등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요즘이기에 난 공용화론의 '실효성'을 잘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영어'를 알아야 하는가?? 난 유보적이다.

이에 대해서 고종석은 '계급적 함의'를 들면서 공용화론을 옹호한다. 영어가 공용화되지 않는 것이 주는 계급적 함의를 말이다. 하지만 영어가 공용화된다해도 그것의 파급을 동시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그 동안 벌어진 '계급적 균열'에 대한 대안 없이 사실 '계급'을 들먹거리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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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표정훈 지음 / 궁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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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서주의자 표정훈

예전에 그의 <탐서주의자의 책>(마음산책, http://blog.aladin.co.kr/hendrix/1780997) 을 읽었었던 기억으로, 이 책을 집었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서점에 갔지만, 이래저래 방황하고 있었기에 선택의 시간을 재촉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집었다. 보통 내가 책을 사려할 때 고민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먼저, 그 내용이겠고, 둘째로 저자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하는 건 출판사인데, 이 책의 경우는 내용에 압도되었다기 보다는 저자에 대한 믿음에서 집은 책에 속한다. 번역서의 경우에는 출판사가 두번째에 이르게 되는데, 보통 단단한 번역을 허락하는 몇몇 출판사가 아니면, 한참을 읽어보고야 책을 사게 된다. 정말 그 책의 번역이 오로지 한 출판사에서 나온 한 판본에만 있을 경우가 아니라면야, 쉽게 책을 고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번역자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경우는 물론 제외겠지?

표정훈은 확실히 탐서주의자이다. 그의 장서량에서도 그렇고(대략 5000여권?), 책에 대한 그의 집착이 그렇고, 책을 만날 때의 접근 법이 그렇다.

   
 

 엽기적이라고 받아들일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새로 나온 책을 구입하거나 증정받았을 때, 제일 먼저 책을 펼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책마다 그 나름의 냄새가 있기 마련이다(p.17).

 
   

사실 누구나 그 냄새를 맡고서, 즉각적인 반응을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을 정돈하여 하나의 양상으로 인지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책의 냄새를 맡는데, 난 좀 오래된 책의 '삭은 냄새'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 그리 고전적이지는 않아서 역시 가장 좋은 건 약간의 '향'을 첨가한 책의 냄새이다.

   
 

 책사냥꾼들이 있다.
 책사냥꾼이 보통의 사냥꾼들과 다른 점은, 사실상 일상 생활의 모든 장면들 속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는 안테나를 접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오랫만에 방문한 친구집 서가라든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서점이라든가,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라든가, 버리지 않고 쌓아둔 몇 년 전 신문더미라든가....(p.36).

 문자 금단 현상,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문도 들어오지 않고 변변한 책이나 책방 하나 없는 산골에서 사흘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 일종의 문명병이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사실상 치유 불능에 가까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 아닌 처방은 아마도,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포기한 시한부 말기 암환자 가족에게 의사가 건네는 이런 말밖에 없을 것 같다. "집에 모시고 가서 드시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게 하십시오."(p.40)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많이 책을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의 충고는 굉장히 실용적인 도움이 된다. 그의 서가 정리에 대한 기억들이 우리-책벌레에게는 추억담이 될 것이고, 그의 책 소비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카드명세서에서 '서점'으로 채워진 부분을 볼 때느끼는 약간의 '지름신'에 대한 망연자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서점 러시'에 대한 '습벽'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책벌레' 계보로 들어오려면 뻔뻔해야 한다. 할 말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사실 책장은 한약방의 약장과 비슷하다. 이 경우 책은 약장의 약이 된다. 체질과 증세에 따라 어떤 약을 얼마만큼 써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 비록 당장은 필요 없다 해도, 언젠가는 그 약효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약 말이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우수한 품질의 약재를 고르고 갖추어놓는 감식안이라 하겠다.

 물론 책에 대해서 약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하다'는 식의 표현을 쓸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필요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고 각자의 처지와 취향에 따라서 그 필요한 정도가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가에서 먼지의 무게를 견디며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책이라 할지라도, 그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나는 버릴 수 없다(p.65).

 
   

이런 그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고, 뒷부분의 이야기들(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의 출판계 이야기, 출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도, 마지막 장의, 현대의 디지털 사회에서 '책'이 어떤 가능성으로 '독서'가 어떤 자원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의 문제는 시점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결론이 뻔해서였을까?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정보화' 되기 위한 자질이라는 것이 '기기 사용능력'이 아니라, 그 컨텐츠를 통해서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창조'하는 능력이라는 것. 하지만 5년전이라는 시점을 감안해서 그냥 쉬이 읽고 넘어간다.

그리고 본인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칼럼리스트로써 '글을 팔면서' 그 컨텐츠들에 대한 '재발견'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22세기에도 책이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종이의 냄새를 기억하는 책벌레들이 살아있는 한, 아날로그 방식의 종이책도 여전할 듯 보인다. 촌스러운 게 고풍스러운 것으로 전환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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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과 오른손 - 좌우 상징, 억압과 금기의 문화사
주강현 지음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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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면 아무런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보리라 선택한 책이었다. 주강현은 언젠가 TV에서 보았었는데,, 도올에는 못 미쳐도 상소리 잘 쓰면서 강의하는 민속학자다. 그의 강의는 차분하면서 씨니컬하고, 갑자기 격정적이 될 때가 있다.

이 책은 문화사적인 좌우 대칭, 그리고 지리의 배치 등을 보여준다. 그를 위해서 엄청난 자료를 동원해 이를 입증한다.

공간이라는 것의 정치경제학~ 그것에 대한 문화사적 분석이다..

사실 이 책은 단순한 이론 사회학을 뛰어넘어서 문화인류학이나 복식학의 범주를 질주하고 있기에,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같은 책 처럼.. 한번 눈에서 감을 일으면,, 쭈욱 그냥 지나치게 된다. 따라서 어느정도의 '문화인류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일반 교양서는 아닌 셈이다. 다만 오랫동안 천천히 따져가면서 읽고 '옳거니' 하면서 읽으면 음미할만한 책이다.

따라서 나에게 남는 것은 '다량의 정보가 홍수처럼 왔다가 갔다가 한' 기억이고.. 몇가지 문구가 기억 남는다.

왼손과 오른속은 선천적으로 '우열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했듯,, '특정한 관계'(사회적 관계)한에서만 차별받거나 배제될 따름이다.

또한 현대에 있어 왼손에 대한 붐이라는 것도 사실은,, 왼손에 대한 '배제'의 논리가 깔려 있으며, 그 왼손의 유용성의 척도를 강조하는 사람들 조차 사실은 '경제성'에만 주안점을 둘 뿐 왼손과 오른손의 대등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대칭을 추구하나 사실은 비대칭 적이며, 자연은 비대칭적이나 오히려 그러한 대칭에 대해서 비차별적이다..


난 왼손잡이야... 나나난나난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

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내 유치원 선생이 말한 것 처럼 왼손이 저주받은 손으로 거듭나지 않는 것은,, 결국 '유전자'를 갖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달려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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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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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실제로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서 다 읽은 것 처럼 지껄이는 책들이 있다. 예를 들면, 칼 맑스의 "자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존 스튜어트밀의 "자유론" 등등.... 사회과학에 대해서 소이연 쯤 하는 작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만, 사실 그러한 책들을 읽은 사람은 5% 안짝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 5%도 후할지 모르지...

이 책도 정말 그러한 책 중에 하나다. 우리는 국정교과서 6차 과정부터 랑케와 이책의 저자 E. H. 카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역사란 무엇인지를 탐구하지만, 내가 볼 때, 국정교과서를 집필한 작자들도 카의 입장을 열심히 본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흔히 우리가 그의 입장이라고 하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는 데, 그 말뜻을 단순하게 자신의 주관이 살아있는 역사관으로 국정교과서는 "해석" 수준의 차원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경우, 에피쿠로스의 상대주의나, 니체의 상대주의와 카의 '해석'의 차원에서의 역사 인식은 어떤 차이를 갖게되는 가?

카는 국제 정치학의 패러다임으로 볼 때, 고전적 "현실주의자"로 분류한다. 현실주의자와 상대주의자....... 어폐가 있지 않는가?

그러한 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더욱 이 책을 탐독해야 한다.

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개인, 그리고 역사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에서의 "끊임없는 대화"는 변동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꿈틀대는 역사가, 그리고 그 둘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단순한 차원의 자의적 해석이 아니라, 해석들의 충돌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의 반영. 그것들의 상호작용의 앙상블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의 프랑스철학과도 쉽게 닿을 수 있다(물론 이 책에서 내내 프랑스 철학자들은 그의 이빨에 희생당한다.)

따라서 그러한 인식에서 포퍼, 랑케 같은 실증주의자들은 기껏해야 '사료를 모으는 수집가' 정도로 보일 따름이고, 못하면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책의 모든 부분에서 포퍼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가 거침없이 지껄이는 '사회주의'...

그런 맥락 상관없이 읽히는 국정교과서의 '역사란 무엇인가?'...

그 차이를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더더욱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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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시공 로고스 총서 5 시공 로고스 총서 5
J. G. 메르키오르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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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는 참 많은 입문서들이 있다.

우리는 흔히 원전은 읽지 않은 체, 입문서들만 읽고, 그 저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일쑤이다.

예를 들면, 경제학자들 중의 10% 이내의 사람들 만이 애덤스미스의 '국부론'과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읽었다.

정치학자들이 그리도 떠들면서 '자유론'을 읽지 않고, '자본'을 읽지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한 태도에 대해서 스트라우스같은 정치철학자는 '공상에 빠져있는 짓거리'라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원전을 읽는 다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는 필요에 따라서 입문서와 접촉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그쪽 방면에 대한 이해가 전무할 때 입문서는 나름대로의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시공사의 로고스 총서들은 입문서로서 나름대로 기능하기도 해왔다. 그 중에 헤겔이나 아이슈타인에 대한 입문서들은 정말 호기심을 자극하는 입문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푸코에 대한 입문서로 메르키오르의 저작을 택하는 것은 아무리봐도 시공사의 '삑사리'로 밖에 생각이 안된다.

메르키오르는 푸코를 칸트식 구성철학의 잣대로 재단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푸코는 인식론적 학습이 덜 된 '구조주의자'에 불과하며, 그가 아무리 구조주의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려할 지라도, 그가 보기에 푸코는 '구조주의자'일 따름이다.

물론 어떠한 비평도 그 나름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나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문제는 메르키오르가 푸코를 비판하는 근거인 '역사적 연구의 빈약' 만큼이나 메르키오르의 비판역시 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메르키오르는 '푸코는 x를 주장하면서 역사적 근거 y를 들고 있다. 하지만 y에 대해서 역사학자 a는 좆까라 했다. 따라서 푸코는 역사적 근거에 있어서 박약하며 그는 구조주의자이다.' 뭐 이런식이다.

메르키오르의 구조적(!) 멍청함은, 후기 구조주의와 구조주의의 차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구조주의는 惡, 후기 구조주의는 善 정도의 유아적 인식에 그치고 있는 것에서 그의 위험한 발상은 더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메르키오르는 푸코를 '강단 허무주의자'라 명명한다. 하지만 푸코의 감옥 인권 운동등의 사회적 활동등이나, 끊임없이 매스미디어와 학계를 종횡무진하면서 전개했던 그의 '실천적 모습' 따위는 염두하지 않고 그냥 허수아비를 끊임없이 버려대고 있다.

이는 마치 한국에서 후기구조주의의 모든 사상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 딱지를 붙이면서 매도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근본적인 그의 논점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그에 따르는 비판따위는 볼 수없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의 저작의 이름이 뭔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야 일독을 말리지야 않겠지만, 푸코에 대해서 심층적인 이해를 하고 싶은 사람은 정말 뜯어말리고 싶은 심정의 책이다.

푸코에 대한 개론서를 보려한다면, 이런 책보다

이정우 교수가 번역한 마크 포스터의 "푸코, 마르크시즘, 역사", 인간사랑을 읽거나,

푸코 자신의 저작인 "담론의 질서"가 훨씬 더 나을 듯 싶다.

조금 깊게 보자면, 들뢰즈의 저작 "푸코" 라던가(번역판으로는 2가지가 있는 데 아무래도 새길에서 나온 것이 더 충실한 번역으로 보인다.), 알랭 르노와 뤽 페리의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이 더 낫을 듯 싶다..

그리고 이정우 선생의 저작들이 참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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