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사실 질문 자체가 단순한 건 아니다. 우선 '이지경'에 동의를 할 지 안할 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동의를,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동의하지 않기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래도 굳이 '이지경' 상태를 끌고 들어가는 이유는 '이지경'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어디선 가 나오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 실제로 총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에게 '사유'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히 사치가 되었고, 3초 이상을 생각하길 권장하는 것도 굉장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다. TV에서 채널 돌리는 데 걸리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직접민주주의의 산파'로 한동안 불림당하던 인터넷 상에서도 통상 3초 이상의 인내심을 요구할 경우, 쉽게 'Home' 키를 누르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런 이들에게 책을 권한다는 건 이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행위처럼 보인다. 물론 '자기계발'서는 잘 팔린다. 하지만 박스 친 핵심 서머리가 없는 책은 팔리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는 박스로 친절하게 솔루션을 준다. 사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매뉴얼이기 때문에 따라하는 것만을 강요한다. 물론 독자의 비판적 사고가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재사유하는 기반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단 일반'독자'들이 '비판적'씩으로나 책을 읽지 않을 뿐더러, 요즘의 자기계발서는 종교서적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라'라고 협박하는 게 일쑤다.
이러다보니 사회과학서가 안팔리는 게 당연하다. 대한민국엔 현재 인문/사회과학을 읽는 0.1% 정도의 인구와 인문/사회과학을 읽지 않는 99.9%의 인구로 대별되게 되었다. 1% 정도가 사회과학을 읽었던 70~80년대의 사회과학서적 붐은 90년대를 마지막으로 끝을 보았고, 이제 아무도 세상의 구조를 말하려 하지 않고, 한국사회는 정해진 상수(constant variable)로서의 구조 안에서 자신의 생존만을 위한 기법 계발에 몰입하는 스테이지에 돌입하고 있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는 다이나믹하게 변해가는 '구조'와 그에 대해 무기력하게 '개개인의 전술'만으로 돌파하는 쪼개진 세대인 20대의 적나라한 묘사다.)
어떤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논의가 안 일어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쟁점은 더 이상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사실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것을 한 꺼풀 벗겨볼 여력도, 의지도 없는 거다. '행간' 혹은 '맥락'을 읽어내려는 노력도 기력도 없는 거다.
게다가 한 번씩 망치로 대중을 때려대는 지식인들은 다 어디 가버렸는 지 보이지 않고, 세상엔 테크니션과 폴리페서들이 점령해 버린 듯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시점에서의 다시금 망치를 들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인 거다. '이지경'인 세상에 대해서 한 마디쯤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을 어떻게 생산해 낼꺼냐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