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 평전 -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김경재 지음 / 삼인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경동교회 그리고 장공

난 경동교회에 다닌다. 경동교회에 다니게 된 이유는 몇 차례 밝힌 적이 있었지만(http://blog.aladin.co.kr/hendrix/1801079) 사회에서 유리되지 않은, 그리고 복음주의에서 가장 멀게 떨어져 있는 그런 교회를 찾고 싶어서였다. 난 하나님(하느님)에 관심이 있었지, 성서의 말과 혼합된 보수적 인식을 강요하는 그런 신앙을 갖고 싶지 않았고, 경동교회는 그나마 나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강원용 목사님의 설교가 나에게 그런 메시지를 주곤 했다.

점차 교회 안의 모임들에 참여하게 되면서, 교회 안에 '장공 채플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난 '장공'이라는 말이, 무슨 장로회의 공동체 공간 뭐 이쯤 되는 말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 알게 된 사실로는 '장공 김재준'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김재준 목사가 경동교회를 창립한 사람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또 지나고 나서, 교회 도서실에서 <김재준 평전>을 발견하게 되었고, 2부 예배에 지각하여 들어가기 애매한, 좀 시간이 뜨는 그 때에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기엔 힘에 부쳤고, 그냥 다시 서가에 꽂아두고 나중을 기약했다.

최근 신학에, 내 신앙에, 또 성서에 관심을 갖게 된 후, 이현주 목사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민중신학에, 다른 접근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경동교회, 내가 다니는 교회가 갖고 있는 신학적 뿌리에 대해서도 궁금하게 되었고, 다시금 <김재준 평전>을 집게 되었다.

이 책을 쓴 김경재 목사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김재준을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장공 김재준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거나, 다소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다소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김재준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면서 일생을 살았는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집필했다.(p.4)  
   

 

장공 김재준 그의 삶과 신학

유교적 가풍에서 자라나 한학을 공부하고, 민족의 독립이라는 것에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 김재준에게 하나님이 영접한다.

   
 

 청년 김재준이 겪은 거듭남의 체험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도 아니었고, 단순히 전통 권위에 대한 수용도 아니었다. 단순한 종교적 감정의 과잉 흥분도 아니었으며, 도덕적 양심의 지상 명령에 대한 윤리적 숙명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들 이상의 사건이었다. 진리의 영이시요 사랑의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성령으로 청년 김재준의 마음을 직접 방문해 주신 사건이었다.(pp.27-28)

 
   


평생 벗이었던 송창근과의 만남과 김익두 목사 설교의 감화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p.26).

나같은 모태 신앙을 갖고 있는 이에게 기독교는 일상이었지만, 식민지 하에서 신음하며 하루 하루가 고되었던 청년에게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특별한 것이었으리라.

20대에 교회에 빠지게 되는 대다수의 젊은이가 그렇듯, 그에게도 '감상적이요, 낭만적이며 타계적 신앙의 흔적마저도'(p.31) 보였겠지만, 김재준은 이를 실존적 문제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고민을 김재준은 흔히 보이는 뜨거운 '성령의 감화감동 충만'만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학문 탐구를 통해서 해결하기로 결심했고 유학을 가게 된다.

그의 공부과정이 특이한 것은, 그가 처음 접했던 신학이 마침 유럽에서 불어오던 '신(新)신학'의 조류였다는 것일 테고, 그 다음에 접한 신학이 극단적인 보수신학이었던 프린스턴 신학원의 그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접한 것이 그 것의 중간지점의 신학이었다는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여서, 정치적으로는 군국주의 식민통치가 강행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일본 지성인 사회에 자유주의 사상 기풍이 팽배하기도 하던 때였다. 아오야마학원 신학부 교수들 중에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나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학문적으로는 자유로운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p.33)

청년 김재준은 아오야마학원의 학문적 자유 풍토를 감사히 여겼다. 인간의 창조적인 작업은 자유로운 정신 풍토에서만 창출되는 것이요, 그러므로 모든 학원, 특히 대학의 학풍은 '자유'여야 한다는 것을 그의 평생 신조로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p.33)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요즘의 신학 학풍과는 전혀 다른 보수 신학의 총 본산으로, 전투적 근본주의신학의 총사 그레샴 매첸 박사가 가르치고 있었다.(p.39)

 
   

이런 양자의 극단적 학풍의 신학을 통해서 장공 김재준이 갖게 된 입장이라는 것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것은 크게 한국기독교의 상황에서 실천으로 펼쳐지게 된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왔을 때, 한국 기독교는 현재도 갖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은 교권주의, 율법주의, 사이비 신비주의라 칭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1)관료화된 교회사회는 평안함을 교회에서 점차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고, 2)율법주의는 도덕적 도그마들로 민중의 일상에 더 강한 억압을 가하고 있었고, 그 근본에 '문자적 무오영감설'(성서의 문자하나 하나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영감 그대로를 표현한다는 것)가 있었다. 그것은 지성과의 절단을 유발했다. 3)사이비 신비주의는 복음의 예언자적 사명과 정의와 사랑을 핵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잃어버리고, 자아 망실의 황홀감과 신접 현상을 능사로 하여 몰역사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종교로 기독교를 변질시켜 버린거다.(p.48)

지금의 교회가 "성령부흥회"를 통해서 계속 뜨겁게 교인들을 불러내고, 또 한편으로 성경의 권위와 목사의 권위가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고, 교회 안에서의 계파 싸움과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씨앗이 이미 1930년대 장공이 다녀올 때부터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맞서서 여러가지 대안들 또한 탄생했다. 감리교의 이용도의 '교회부흥운동', 김교신과 함석헌의 '성서조선' 발행, 최태용의 '주체적 민족 기독교복음교회운동' 등의 종교자정운동이 시작되었다.(p.49)

이러한 상황에서 성서를 보던 시각도, 기존의 미국 선교사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근본주의적 교리적 이해' 뿐만 아니라, 김재준을 필두로 하는 '진보주의적 역사 이해', 정경옥의 '자유주의적 실존적 이해' 또한 가능해 지기 시작했다(p.49).

지금을 돌아보건데, 오히려 이 때가 더 탄력적인 기독교의 이해가 발달했다고 느껴질 정도다. 근본주의가 더 판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과거로의 퇴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김재준의 이러한 이해는 한신대학의 모태인 조선신학교를 통해서 발흥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 장로회도 탄생되었고, 여러가지 우여곡절들이 있었지만 진보적 신학이 펼쳐질 수 있는 배경으로 힘을 제공하였다. 또 '실천적 신앙' 즉 야고보적 전통의 경동교회의 초석도 김재준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또한 김재준은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써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앞장서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재준의 삶을 만들어 낸 것은 앞서 언급한 그의 신학적 이해에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건 김경재의 말을 빌면 크게 '성육신신앙'과 '대승적 기독교론'이라고 구분할 수 있겠다.

우선 성육신신앙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성적 분별력, 진선미를 증대시키고 추구하려는 선한 의지, 사랑과 정의와 자유가 숨쉬는 대동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한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품성 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본성은 단순한 동물적 충동만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남용하여 타인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면서 쾌감을 느끼려는 오만과 죄성이 동시에 공존한다(pp.140~141).

그러나 집단과 집단관계, 예를 들면 노사관계, 정당 관계, 사회계층 관계, 국가 관계, 이익단체들간의 관계는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도덕적, 종교적 설교로 그 갈등이나 대립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p.141)

 
   

그리고 이러한 집단 이기심은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통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라인홀트 니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생각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크리스찬은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 역사로 변질시켜 진정한 자유와 정의와 화평으로 성격화한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가 아니라 성육신으로 부활한 예수가 말했던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선포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은 세속 역사를 하나님 나라 역사로 변질시키는 운동"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세속'에서 '하나님 나라'에의 전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p.143)

둘째, 대승적 기독교라 할 수 있다.

   
 

 대승적 기독교는 몸으로서의 전인적 구원이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분리할 수 없다고 본다. 소승적 기독교는 구원을 '역사로부터의 구원'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대승적 기독교는 '역사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추구한다.(p.204)

 
   

이는 기본적으로 타 종교에 대한 포용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인데, 적대적 바탕에서 '전인적' 구원은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포용'의 인식은 '역사'에 대한 이해 그 섭리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에큐메니컬 교회의 지평이 그런 축에 있으리라.

마치 이는 '똘레랑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입장은 강고히 지키되, 인정해야 할 부분은 이해할 수 있는 것. 다만 참을 수 없는 것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적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참여도 이러한 토대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니버의 생각과 같은 사회윤리적 견해가 더해졌을 때, 그에게 독재체제와 '반민주적' 해악은 도전해야 할 실천적 문제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난해한 숙제같은 지점들이 좀 있는데, 예를 들면 장공은 적극적으로 '억압받는 자' 혹은 '눌린자' 민중의 이야기를 뽑아내지 않고, 윤리적 차원의 문제에서 접근을 멈추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민중신학에 있어서 안병무의 작업들이 한발 더 나아간 전개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더 살펴봐야 겠다는 생각이다.

기실 이러한 김재준의 생각을 정리는 해봤으되, 사실 정확히 이해했다 말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것들을 생활에서 어떻게 펼쳐낼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 장담할 수는 없다. 아직 나에게는 더 많은 성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 생활에서 최소한의 실천을 지금보다는 많이 만들어 내야한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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