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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학교 - 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닉 데이비스 지음, 이병곤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내 학교 생활 - 면돌이 라이프?
그냥 저냥 겨우 겨우 하루 하루 풀칠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집의 경제적 여건이라는 것은 '서민'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한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생활동안, 내 친구들은 우리집을 잘 사는 집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집'(정확히는 내 부모의 집)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뭇 면목동의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패턴을 가진 평범한 면목동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이 정확하리라고 본다.
왜 '면목동'을 계속 이야기하냐고? 내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위기의 학교>에 나오는 '실패한 공교육'과 가장 흡사한 상황이 펼쳐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이 흡사하냐고?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모두를 포함해서, 나의 관심사, 또는 약간 몸이 약한 아이들의 관심사라는 것은 언제나 '맞지 않고, 뺏기지 않고,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학교 폭력이 심각한 수준라고 말이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표본적 사례는 내가 살던 동네와 일치했다.
대부분의 '공부'에서 약간 이탈해있는 녀석들은 담배를 피울 줄 알았고, 고등학교에 진입하자 흡연률은 절반을 상회했고, '왕따'의 표본적 모델은 내 중학교 1학년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학교 나오기 싫어서 그냥 집에 틀어박히고 롯데리아에서 알바하거나 피자집에서 택트를 몰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술마시고 담배피우고, 여자와 관계를 맺는 녀석들은 즐비했다.
어른들의 기준에서 보면, 불한당 같은 양아치들의 소굴이었고, 우리가 매일 하릴없이 모여있던 '사가정역'은 우범지역이었으며, 진학률은 바닥을 쳤고, 실업계 진학비중이 40%에 가까운 서울의 지역은 아마 중랑구 특히 면목동이 전형적이었으리라고 본다.
내가 지금 깨나 먹물행세를 하게 된 건,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고, 그나마 20살에 각성되어서 재수라도 해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가는 녀석들이나 있을까? 내 또래의 상당수는 고졸에 하릴없이 알바나 하고, PC방에서 '레벨업'에 몰두하며, 온전한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88만원 세대가 말하는 타겟이 어쩌면 그래도 '대학'은 나오고, '토플 책은 들어본'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가 주되다면,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은 '대학' 언저리에 못가본 경우가 태반이고 '토플'과 '토익'의 구분마저도 명확하게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사교육비 증가가 가계에 압박을 주고 있어서, 물가상승의 원흉으로 일컬어지지만,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과외 한번 못 받고, 학원도 잘 안다니고 졸업하여 그냥 '고졸'로 끝내는 인생도 굉장히 많다. 의외로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시간은 많다.
덕택에 내 동생 역시 '먹물'로 살 수밖에 없는 마인드와 조건들을 갖추었으면서도, 공부의 길라잡이를 12년 교육동안 만나지 못했고(유일하게 만난 사람은 고3때 다닌 학원의 수학선생이었다고 한다), 미달난 지방의 사립대를 다니다가, 군대갔다와서 그나마 정신차리고 몰두하여 이제 편입을 준비하고 있는 처지다. 그에게 중고교의 기억은 끔찍하고, 그는 '의대친구' 하나를 찾을 수 없음에 동네가 '막장'이라며 욕을 하곤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이 너무 속물적인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로지 사회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에서 너무나 멀리 내 주위의 사람들이 떨어져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Trainspotting>, 그리고 영국의 교육
<Trainspotting>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마약에 쩔어서 사는 녀석들, 결국에 한탕을 노리지만, 그들이 살게되는 하루 하루가 심히 '환상적'이긴 해도, 행복하다고 말하기에는 한계를 모두다 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보기에 '꼰대들'이 제시하는 사회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이란 건 너무나 갈길이 멀게 느껴진다.
그들은 그냥 '불평 많은' '구제 불능의 낙오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인데, 내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 자체는 하나의 '실존적 문제'일 따름이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방치를 야기하며, 사회에서의 배제를 약속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난 이게 영화적 상황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닉 데이비스의 <위기의 학교>를 보면서 이게 영국의 현실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잠시 우울했다. 그 우울증은 점차 증폭되고 잇는데, 왜냐면 이게 곧 우리가 직면할 교육의 현실일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위기의 학교>의 시작은 아이들과 실랑이하는 교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수라장인 교실, 반항하는 아이들, 잠시의 수습, 곧바로 이어지는 혼란의 소용돌이. 그게 지금의 영국의 교육의 현 주소다. 공교육은 확실하게 붕괴하고 있고,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재규정을 해야할 만큼 가치관의 혼돈이 자리하고 있다.
쉽게 말하는 이들은, 이게 다 대처리즘Thatcherism의 탓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꼬여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오히려 블레어 정부부터였다.
사회과학을 잠시 공부한 먹물들은 좀 알겠지만, 한동안 <제3의 길>이 엄청나게 히트를 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치 <제3의 길> '전도사'마냥,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새로운 길에 대해서 말을 했고, 자칭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 '새로운 진보'의 길을 예찬했으며 여전히 어떤 정당의 대표는 <제3의 길>이라는 신진보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제3의 길> 노선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장실패(우파의 실패)를 넘고, 국가의 실패-노동의 실패(좌파의 실패)를 넘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든다는 것인데, 사실상은 좌파의 실패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블레어는 노동당의 강령을 변경해야 했다. 여튼 그런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들이 핵심적으로 말하는 곳마다 꼭 빼먹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육'에 대한 강조였다. 예를 들어, 실직자에게 급여를 주는 것을 넘어서서(복지welfare), 실직자에게 재교육을 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평생교육시스템'과의 연계를 통해서 일하는 복지(workfare)를 만들어 냄으로써, 기업에게는 부가가치창출의 기회를 주고, 노동계급에게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을 획득하게 해 낸다는 전술이었다.
우파와 좌파가 공히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혁신적인 정책적 방향이라 할 수 있었고, 앤서니 기든스는 덕택에 '현자'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노동당의 정책의 중심에는 '교육'이 있다는 것인데, 평생교육(재교육)을 포함하여 교육을 통한 기회 구조의 제공은 제대로 형성되고 있는가? 사회적 자본을 획득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손을 그대로 들고, 제스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서 저자는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는 '막장학교', '배틀로얄'이 펼쳐지고 있는 학교 현장을 발견한다. 공교육에는 더 이상 희망이 발견되지 않는다. 내버려 두면 곧 망한다. 그것이 그의 논지가 될 수 없는 현실이 기다린다.
영국의 교육, 막장까지 가는 길.
영국의 교육은 대처시절 교육부 장관이었던 베이커에 의해서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이 추인되며, 절대적인 재정의 보조가 축소된다. 그 이후의 노동당 정권에서도 실제적이 재정의 보조는 늘어나지 않았다. 문제를 바라보는 지형자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가난은 변명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통해서 인데, 사실은 이러한 명제는 잘 살펴보고 실제적으로 그것이 전제가 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살펴봐야 하나, 영국의 정권들은 이 말자체를 신봉해야할 절대적 언명으로 여겼다. 그러한 전제에서 영국의 교육의 문제를 살펴본 그들이 내놓은 혁파과제는 '교사들의 잘못된 교육법'으로 설정되게 된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학교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는 방법으로, '열정'이 부족하거나 '학생들을 계도하지 못하는' 선생들을 해고하는 방향으로 학교는 '개혁'되어갔다. 점차 열악한 조건들의 공립학교들은 학생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지원금을 작게 받게 되었고, 교육 여건은 점차 열악하게 되었으며, '학교 선택권'을 받은 학부모들은 좀 더 '괜찮은 학교'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열정적인 선생들 몇몇도 지쳤으며, 나머지 선생들은 다른 학교로 옮기거나 교사직을 그만두거나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 학교들은 망해갔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학교 간의 성적격차는 언제나 '부의 격차'와 비례했고, 학습능력이라는 것 또한 가정에서의 '소득수준'에 따라서 편차를 대체적으로 보여왔다. 중요한 문제는 예산확보를 통해서 그러한 계급적 격차를 학교가 줄여나가고 교육적 여건을 열악한 지역에 더욱더 집중적으로 작동하게끔 제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 반대방향으로 '잘 나가는 학교'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고, 그들의 모범을 칭송하는 방향으로 정책방향을 잡았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빈민들이 다수 사는 구역의 학업 성취도라는 것은 마치 강남구와 중랑구를 비교하는 것과 같이 엄청난 차이를 수반하게 되었고, 그들의 학교는 제대로 된 기자재 하나 없이 학업 유인을 끌어내지 못하는 방향으로 미끄러져갔고, 학생들은 제대로 된 상담교사도 없이 폭력과 탈선의 길로 방치되기 시작했다.
교육은 '계급 격차'를 완화시키고 사회통합을 만들어내야했지만, 오히려 '계급 격차'를 벌려놓고, 사회적인 이반을 양산하는 기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교육은 그렇게 무너져 버린다.
반면 '자선사업'형태라는 초기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면세와 학생유치를 통한 지원금 확보를 같이 확보한 사립학교들은 풍부한 재력을 통해서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으며, 중산층의 넉넉한 학비 지출을 통해서 높은 학업성취도를 성취했고, 모두가 가고 싶은 선망의 학교가 되었으며, 한국에서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의 지위와 같이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드디어 막장에 이르게 되었다. 빈민층의 지역의 학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에서의 '부랑아'들의 집단적 은신처가 되었으며, 여론은 그것을 '선생들의 잘못'으로만 만들어서 비판하기 시작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치려는 선생들의 노력이라는 것은 수포로 가게 되고, 이제 더 이상 아무도 희망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게 되며, 그나마의 노력을 할 교사들의 유인도 점차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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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학교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원이 부족하여 유능한 전문 치료사들의 과로가 누적된다면, '부적응 학생을 학교에 정착시키는' 전략이 먹혀들지 않으면, 그리고 학교 간 성적 순위표나 교사 성과급 제도같이 이 목표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인해 그나마 흔들리던 출렁다리가 완전히 무너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무단결석하던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학교 중퇴자들이 교문 밖으로 쫓겨 나왔을 때 예전보다 더 열악한 사회 안전망밖에 없다면, 더욱 많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청소년 범죄가 증가하고, 매춘은 늘어날 것이며, 노상강도도 많아질 것이다. 빈민가 아파트촌에서 맥없이 빈둥거리며 목적도 없이 절망에 차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도 늘어날 것이다(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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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에 찬사를 보내면서, 다시금 묻는 질문 "희망은 어디에?"
한학수PD가 3년 전, 황우석 신화를 벗겨낼 때 드는 묘한 불안감과 허망함처럼, 닉 데이비스의 저작은 그의 '탐사보도'가 보여주는 엄밀함에 감탄하게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더 뭔가 안 좋은 것이 드러날 까 두려운 불안감과 희망 따위는 버려야할 것 같은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은 영국의 경우와 좀 다를까? 좀 다르긴 하다. 여전히 한국의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학구열' 하나는 끝내주게 갖고 있고, 그건 전쟁의 경험과 유교적 분위기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이 제공하는 폐허에서 싹을 틔웠던 '입지전적 경험'이라는 것은 경제적 규모의 성장과 함께 봉쇄되고 있고, 잠시 DJ의 '벤처기업' 붐을 타고서 창업 열풍이 불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 가능성이 많이 없어진 상태다. 사회는 규모의 성장만큼이나 고착화되기 시작했고, 계급이라는 것이 점차 '세습'되는 경향은 한국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명품소비에 열올리는 강남과 신도시의 '졸부'들의 부는 별 탈 없이 여러가지 '회계적 기법'을 통해서 상속되고 있고, 반대로 '가난'이라는 변명으로 인해서 교육의 기회에서 박탈되는 것은 '사교육 붐'의 이면에서 양산되고 있다.
한동안은, 학부모들의 열의와 희생을 통해서 '사교육' 기제는 작동할 테고, 서민층의 많은 수가 교육을 포기하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한세대 뒤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도 쉽게 기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미 '등록금 1000만원 세대'가 개막의 서장이 펼쳐졌고, 이제 학부모의 '쥐꼬리 월급'과 '불안정한 고용구조'는 그것을 충당시키기에 슬슬 힘이 부칠 테세다. 이미 교육에서의 '학비' 문제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교육계의 이해당사자들은 그 비용을 이미 '만만한' 학부모에게 전가시키기로 암묵적 동의가 형성된 상태다. '가난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언명은 우리사회에 뿌리깊게 만연해 있지만, 동시에 그 가난 덕택에 교육의 기회는 점차 포기되는 사례가 속출할 것이다.
더 문제는 그나마의 '4년제 대학' 티켓을 끊은 이들도 곧, '해외파'에게 잠식당할 것이며, 사회는 약육강식의 구도를 그대로 교육과 그에 이어지는 '구직'에서 펼쳐낼 것이다.
이제 희망을 말하자고 우석훈은 이야기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은, 도대체 이러한 사회적 안정성의 붕괴가 어디까지 진행되어야만 다시금 꿈꿀 수 있는 것인가? 이제 정말 꿈꾸고, 그것을 만들어야 할 만큼 위기가 온 것은 아닐까?? 파국을 막기 위해 우리 다시 꿈을 꿔야 하는 것 아닌가?
서기상의 '착한 사람들에게'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착한 사람들에게 - 서기상
1.왜 우린 우리 스스로 만든 권력이 필요하다는건
알면서도 왜 아직 망설일까요
똑같은 놈 똑같은 권력이 싫고 염증이 난다
하면서도 왜 아직 망설일까요
2.돌아봐요 아니 돌아볼 필요도 없지
지금 저들이 만든 저들만의 화려한 축제뒤에서
누가 직장을 잃고 거리를 떠돌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 나갈지 막막해 눈물 짓는지
3.지금은 우리가 스스로를 믿어야 할 때
부족하더라도 잡은손 놓치지 말아야 할 때
그러다 너무 힘들댄 같은 날에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로 욕이라도 실컷해봐요
#아직 부족해서라는 말은 말아요
아직 때가 아니라서라는말은 말아요
그건 완벽한 부모가 되기 전에
아기는 갖지도 낳지도 말란 말과 똑같잖아요 똑같잖아요.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