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꽃다지
이영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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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지금.

대학 내내 내가 기타를 가지고 놀던 곳은 학부에 속해있던 노래패의 방이었다. 언젠가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있지만,, "민중가요의 가사가 내 머리에 진동을 주었고, 그 끊임없는 주5일 음주제가 장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신기한 그 음악들을 하는 민중가요패라는 집단은 하나의 다이애스포라(diaspora)로 다른 통상적인 동아리와 달리 느껴졌고, 우리의 공연은 우리의 잔치였고, 우리를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소라고는 축제 때의 공연정도였다. (물론 친구라는 녀석들은 항상 끌려서 오곤했다.)

순진했던 1학년 때는, 김광석의 '나의 노래'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나의 노래는 나의 힘"이기에 내가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면, 누군가 들어주는 이가, 그리고 노래를 함께 불러줄 이가 더 늘어나리라 생각했었고,

직접 노래패를 끌고 가던 2학년 때에는, 고립된 동아리로서의 노래패의 현실 때문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고,

4학년이 되자, 민중가요의 '운동성'은 냉소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잔재처럼 느껴졌고, 이제는 점차 동아리 방의 추억으로만 민중가요가 남게되었다.

내가 되뇌이던 노래는 어느새 민중가요가 아닌, 예전부터 듣던 락음악으로, 그리고 새로 접하기 시작한 힙합음악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왠지 죄 짓는 기분으로 피우던 양담배도 굉장히 우습게 편한 마음으로 피우기 시작했고,

스타일도 점차 진화했다. 그냥 아무 옷에서, 나름의 댄디함을 추구함으로....

그냥 아련한 추억. 그 자체로 끝난 거 아닌가?

문화예술운동가의 절규

이영미의 글은, 90년대에 절규하듯이 쓰여진 글들이다. 절규하면서 쓰는 이에게 그의 과격함을 탓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대안적인 민중예술을 세우고 싶었고, 그 안에서 사고하려 애썼다.

그 기록들의 모음이 어쩌면 "서태지와 꽃다지"이다.

사실 "서태지와 꽃다지"는 그녀가 택한 제목은 아닐 듯하다. 아마 그녀가 제목을 택했다면 "90년대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 이 정도가 아니였을까? 실제 서태지에 대한 글은 겨우 세토막에 그치고, 꽃다지에 관한 글 또한 한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선정적'(?) 제목을 입힌 출판사의 상술 덕에 이런 책이 한동안(최소 6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살아있었다. (물론 지금은 절판되었다.)
 

자본주의시대의 대중예술 

그녀의 글은 처음 서문부터 '이를 악물고' 쓴 흔적이 강하다. 자신의 고집스러움 덕택에 청산주의를 면할 수 있었다는 다행스럽다는 자조의 말은 이미 시작부터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다.

그녀는 왜 대중예술에 주목하는가? 

"그런데 이러한 대중예술이 하층의 대중층이라는 예술 불모지대에서 자기 세력을 장악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고급예술의 아성까지 침식하는 이 현성은, 단순히 우연적이고 일시적이라고 볼 수 없다. 자본주의라는 우리의 물적 토대와 너무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 대중예술의 출현과 팽창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것이 아닌, 역사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예술적 외현이라는 것이다. ... 새로운 사회, 새로운 예술로의 발전의 싹은, 가장 발전한 사회인 현재의 사회, 현재의 예술로부터 찾기 시작해야 한다."(pp.13-14)

즉 단순한 인식으로 대중문화를 욕하거나 칭찬하기 전에, 그러한 것의 자본주의와의 맥락을 살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중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대중예술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예술이다. 대중예술의 궁극적인 생산 결정권이 예술가가 아닌 자본가에게 있으며, 그와 이해를 함께하는 정치적 지배집단의 부당한 간섭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이므로, 그 속에는 정치적, 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속속들이 배어있다. 그러나 또한 자본주의시대의 하층예술로서의 대중예술은 자본주의사회를 사는 다종의 노동자, 다종의 대중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p.21)

그녀는 '대중조작'이라는 측면으로 대중예술을 바라보는 것을 극복하기 바라면, 그 대안점이라는 것도, 이러한 '대중예술'이 판치는 현재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민족예술운동은 ... 민주적이고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를 만듦으로써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 구조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곧 자본주의하 대중문화 구조의 재조정이다."(p.85)

따라서 이 책에 나와있다는 글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바라본 대중예술과 그 대안문화운동으로서의 '민족예술운동'인 것이다.

2007년에 바라본 "서태지와 꽃다지"

이 책을 읽다보면, 유난히 많이 나오는 말은 "변증법"이다. 맑스와 헤겔의 논리구조에 기대어서 글을 썼던 시대였던 만큼, "변증법"은 그 말없이는 결론을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과 지금의 괴리만큼이나 그녀가 말했던 대안과 지금 문화적 장에서 생성될 수 있는 대안의 거리는 멀다.

이러한 전제에서 시작한 문화운동은 왜 실패했을까? 자본의 공세 때문에? 혹은 거대담론의 실패때문만일까?

물론 이 책은 실제적인 자본주의의 대중문화가 형성되는 것의 사회적 관계와 전반적인 시스템을 다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실제적인 비평은 내용비평에 국한 될 때가 많고, 그 내용의 허무성 지적 정도가 저자의 가장 디테일에 충실한 비평이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락음악과 힙합음악으로 빠져나갔던 것에 후회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난 단연 "아니"라고 대답할 거다.

난 여전히 락음악을 들을 거고, 힙합음악을 들을 거고, 그 정신들에 대해서 모색을 추구할 거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했던 "민주적이고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에 대해서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것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는 있겠으나, 민족적이며 올바른 예술문화 구조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규하며 글을 쓰고 있지만, 마땅히 그가 넘어서고자 했던 '대중예술'은 변화되지 않았으며, 더 최첨단으로 나아가고야 말았다.

어디에서 대중예술의 힘은 추동되었는가?

....
 

물론 이러한 나의 비판이라는 것이 90년대의 시점에서 유효했었는 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유보적인 문제들이 많이 산적해 있다. 모든 글은 그 당대의 '행간'을 살펴봐야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대안적인 문화를 사유하기 위한 자양분으로 이 책을 읽게되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된다.

대안적 문화는 어디서 시작될 수 있을까??? 대안적 예술문화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p.s. 이러한 날이 살아있는 민중문예운동가였던 이영미는, 현재 한국의 대중가요사를 썼으며, 지속적으로 대중가요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서태지와 꽃다지'에서 어떤 관점으로 변화하였는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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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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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고종석???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진보'라는 '말' 만큼, '말많은' '말'이다. 왜 자꾸 '말'이냐고? 그건, 이런 것들이 다 '말'의 '상찬'에서 비롯되는 허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유주의자에 대해서 합의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자기를 자유주의자라고 하든, 남이 지칭하든, 일치되는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고종석도, 기실 그 '말많은'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대충 열거해 보기로 하자.

복거일, 고종석, 공병호, 강준만 등이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과연 그들을 같은 카테고리 안에 엮을 수 있는가?

그걸 엮을 수 있다고 하는 자와 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면, 복거일과 공병호는 어느 수준에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리버러테리언(Liberatarian) 자유 지상주의자 수준에서... 장기를 매매하는 것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하이에크를 사랑하는 복거일 수준이라면,

조셈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에 몰두하신 나머지, 창조적으로 한달에 2권의 책과, 2권의 번역을 뱉어내는 분이 공병호다. ( 그 수준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하자. 서로 비참해 질 따름이다. )

하지만 고종석, 강준만과 이 둘을 '자유주의자'라는 카테고리로 과연 묶어 낼 수 있는가?

그러기에는 그들의 '자유주의'는 너무나 좌익적일 따름이다.

게다가 어느날 부터인가, '강준만'은 너무나 강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고종석은 더더욱 포지션을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자유주의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어떤 측면에서의 자유주의인가?? 정치적 리버럴인가? 아니면, 경제적 리버럴인가? 아무래도 전자인 듯하다. 로크적 자유주의라기 보다는, 스튜어트 밀 식의 타인에 대한 배려를 포함한, 연대적 개념의 자유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포지션을 갈피잡기에 그의 행적이나 언행은 이따금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예를 들면, 어떤 면에서는 굉장한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 발언하면서도, 동시에 복거일을 강하게 추천한다는 점이 그럴 것이다.

고종석이 바라본 21세기의 화두 - "코드 훔치기"

이 책은 고종석이 신문에 기고했던 특집기사를 묶어낸 책이다. 마지막 꼭지의 40장 "자유의 한계"의 마리화나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모든 기사는 기고를 묶은 것이고, 또한 기고 뒤에는 거기에 나왔던 인물이나, 개념에 대한 설명들을 친절하게 다시금 설명해 준다.

그냥 간단하게 묶어냈다는 느낌을 지우고, 다시금 더 정리했구나라는 생각을 들게끔 해주는 충실함이다.

사실 이 책을 산 건 2001년이다. 하지만 가지고만 있다가, 조금 읽다가 재미 없어서 놨던 것 같다. 역시 책이라는 건 사고서 뒀다가 묵혔다가 문제의식이 변한 어느 정도 시점에 읽었을 때 또 다른 맛이 있고, 색다른 감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고종석은 일관되게 양극단을 피하고자 하는 입장을 전개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양극단을 피하는 입장이라는 거와 한국사회에서의 중도는, 정치적 중간자적인 말로의 '자유주의자'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의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되는 '정치적 올바름'에 가까운 말일 테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고종석은,

"사회주의 '체제'의 부활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재해석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轉化)'와 같은 이론적 덧칠을 통해서 그런 불가능한 과업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존재해본 적 없었던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얘기하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이론적으로 구출하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 살아남는 사회민주주의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조스팽식 사회주의에 가까울 것이다. 제3의 길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자유주의와의 차이를 거의 잃었으니까."(pp. 22-23)

라고 말을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정치/경제적 체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사회주의자가 된다. 다만 그의 사회주의 '안'에서 포지션은 중도적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근거는 없는 게 되어버린다. 이러한 관점은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민주노동당 정도'의 입장인 '프랑스식 사회주의자'의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서 살펴볼 때마다 나타난다. 각 이슈에 대한 양극단의 입장을 정확하게 살피고 한발씩 뒤로 물러보면서 그 한계를 보이고 있지만, 사실 그가 기계적 중립을 취하는 건 아니다. 그는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으로 한발 더 나아간 상태에서 중립을 취하는 거다.

진보가 1이고 보수가 4라면, 그는 2.5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중도'가 아니라, 2의 관점에서 1과 3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점으로 놓고, 2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말이다. 아예 4는 배제하는 것이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 3.5의 관점에서 1과 4를 싸잡아 욕하면서, 4에 있는 극우파에서 반보밖에 못나가면서도 끝끝내 자신이 '수구'는 아니라고 하는 거라면, 이러한 고종석의 관점은 오히려 균형이 잡혀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이런 '균형'을 잡아보려는 생각 덕택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도그마들을 쉽게 깨어버릴 수 있는 거다. 그는 '진보'에 대해서 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도 진보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있는 '민족주의'등을 쉽게 한발 뒤에서 물러보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거고, 그건 입체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조건에 기인하는 거다.

그러한 균형감각 덕택에 그는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칭함을 당하는 자 중에서 '보석'으로 받아들여지는 거다.

다만, 아직 배움이 짧아 그런줄은 모르나, 고종석이 프래그머티즘에 대해서 논하는 논지는 파악이 좀 어렵다.

"로티에 따르면 미국 사회는 프래그머티즘의 '실험적이고 희망에 찬 심성'을 정치로 만들었다."(p.318)

"중요한 것은 우리들을 더 잘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변형시키는 것, 그래서 우리들에게 더 낫게 보이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p.318)

그의 생각대로라면, 프래그머티즘의 미국의 경향은 지속적인 진보를 담지해야 하나, 아직 그 부분은 장담을 할 수 없는 부분이고, 고전적인 비판들이 아직도 여지없이 드러맞는 미국인데,, 어떻게 '실험적이고 희망에 찬 심성'의 '정치'인지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거다.

프래그머티즘의 이론적 결함인가, 미국사회가 '프래그머티즘'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건가?

그 부분은 따로 논해야 겠지만, 후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곤란할 것 같다. 하지만 그 부분은 더 공부해볼 '숙제'로 남겨둔다.

그리고 책의 논의와는 상관없지만, 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의 복거일에 대한 예찬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한바탕 21세기 현안에 대한 브레인 스토밍을 하기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한권의 책이다.! 지식을 얻기에 나쁘지 않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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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
사이먼 프리스.윌 스트로.존 스트리트 엮음, 장호연 옮김 / 한나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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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중 음악에 대한 포괄적 이해

TV를 보면서 우리는 음악을 보기도 하고, MP3를 들고 다니면서 이어폰으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걷기도 하고, 이따금은 라디오에 나오는 선곡된 곡들을 들을 뿐더러, 인터넷의 자신의 블로그에 정체성을 드러내는 음악들을 배경음악으로 걸어놓기도 한다.

음악은 어디에도 정확한 위치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서도 우리는 음악을 배제하고서 살 수는 없다. 이런 '음악이 범람'하는 시대에 도대체 그 '음악'이란 놈은 무엇일까? 더 좁혀서 들어가보자,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고 있는 '대중 음악'이라는 놈은 뭐하는 놈인가??

동시에 나에게 특별한 문제의식 하나더,

'사회적 저항 혹은 변화'를 추동하는 '음악'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음악'의 형태인건가? 내용은 어때야 하는가??

그 때문에 이 책을 잡기 시작했다.

이 책만을 읽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쉬이 가기 위해서 신현준의 "빽판 키드의 추억"을 읽었고, 책 장 한켠에서 쳐박혀 있던 이영미의 "서태지와 꽃다지"를 읽었고, 그 사이에 신현준의 "록 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도 오늘은 읽었다.

어떤 책 한권을 읽고서 그 책을 장악하고,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내 관점에서 소화하고 나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사실 나름대로 음악 좀 안다고 까불었고,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눈도 나름대로 키우고 있었다고 생각했었으나, 이 책은 나의 자세에 일침을 가했다. 그냥 제대로 한방 먹었다.

이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어렵다기보다는, 차분히 공부하는 자세로 하나 하나 생각해가면서 읽고, 또 정리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살펴야 하는 '교과서'로서의 책이었으나, 난 그냥 에세이 수준으로 생각하고, 주욱 읽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덕택에 일을 핑계로 진도는 점차 밀려갔다.

열흘 이상을 끙끙대고 있었고, 일독을 한 지금에도 계속해서 차근 차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주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는 말 그대로 포괄적인 대중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들의 종합적인 서적이다.

우리는 흔히 대중 음악에 대해서 단순히 그 장르와 상업성 정도로 포착하는 수준 정도에서 식자로서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의 관점을 바라보자면,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중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구도를 알아야하고, 대중 음악 산업의 구도를 알아야 하며, 대중의 소비 패턴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음악 테크놀로지가 악기, 레코딩 장비, 재생 장비를 임의로 모아둔 것 이상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음악에 관해 경험하고 생각하는 환경이기도 하다. 우리가 음악적 소리를 만들고 들을 때 관여하는 실제의 집합이며,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평가하며 그 과정에서 음악잉란 무엇인지, 또 무엇일 수 있는지 규정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담론의 한 요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음악 제작, 유통, 경험에 사용되는 전자 장비의 집합은 그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음악을 경험하는 기술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음악 생산과 소비의 '양태'가 되었다. 다시 말해, 테크놀로지는 음악 만들기의 전제 조건이자, 음악적 소리와 스타일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음악 변화의 촉매가 된 것이다."(pp.33~34)

일전에 이영미의 "서태지와 꽃다지"의 입장에 대해서 이 책의 입장으로 비판하자면, 이영미는, 그 테크놀로지의 구도에서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펼쳐지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비판'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풍의 비판은 할 수 있었지만, 구도를 다차원화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약한 비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특정 장르를 (나 같은 경우에는 싸이키델리록과, 히피즘, 그리고 최근의 RATM 같은 민중지향적 음악) '대안'으로 쉽게 설정하기 어려운 이유 등도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3부의 논쟁들은 그런 축들을 명확히 보여준다. 팝과 록을 바라보는 관점, 대중 음악과 성차, 섹슈얼리티, 록의 정치, 인종 문제, 로컬/글로벌 에 대한 논쟁들을 펼쳐 놓고 있으며, 순전한 '인상 비평'의 수준이 아닌, 텍스트에 치밀히 기어들어가서, 또한 그 형식을 조목조목 뜯어보면서, 게다가 그 산업적 함의까지 '악착같이' 논의하는 저자들의 성실함이 보인다.

이 책은 '용감한' 비평가들에 대해서 일갈을 가하며, 더 나은 논의를 위해서 바라봐야 할 것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읽고나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책의 편집자 중 한명인, "사이먼 프리스"라는 사람은 굉장한 영미권에서의 '대중음악학'의 대가다. 2차원적인 형식/내용의 분류법에서 벗어나서, 그 기저에 깔린 대중음악의 사회적 의미를 발굴하기 시작한, 세대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대중음악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읽어봤어야 할 책이었고, 찬찬히 한 번 더 뜯어봐야 할 책으로 보인다.

가능하면, 이 책에 대해서 완벽하게 '장악'하고 '자근자근' 비평하고 싶으나, 그 이상으로 지금 나아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지금은 그냥 마냥 이 책의 저자들이 대단해 보이니 말이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공부할 건 참 미어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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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 - 문화마당 6 (구) 문지 스펙트럼 6
신현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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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역시 대중음악에 대한 이해를 위한 연속 선상에서 읽었으며, 나를 한참 대중음악이라는 것에서 허덕거리게 만들어버린 신현준의 작품이다.

뭔가를 안다는 것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몸으로 부대껴 가면서, 근육으로 기억하는 방법이 있을테고, 

한편으로는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가면서 숙지하는 방법이 있을텐데,

신현준은, 음악을 듣다가, 잠깐 아마추어로 하다가, 나중에 (사회적)'입장'이라는 걸 갖추면서 다시금 자신이 듣던 그 음악들을 '재해석'하기 시작했고, 평론가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게 '음악만'을 한 사람이 아니기에, 한 발 떨어져서 대중음악에 대해서 평론하는 데 약간의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평론'이라는 것이 오로지 '양'에서 승부가 판가름 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나름의 '음악계에서의 도제'훈련 보다는, 사회에서 부대껴가면서 만들어진 '아웃사이더'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표준화되지 않은 '근육'의 감으로 느낀 '음악'의 질감이었을 테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에서의 활동으로 해석된 것이기 때문에 '사회학적 관점'으로 해석된 '음악'의 파장이었으리라.

그렇다고 이 책이 뭐 굉장한 평론을 싣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된 논의는 각 9가지로 분류된 록 음악의 가닥가닥의 정의와 그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신현준은 이 책에서 어떤 '논의'를 하고 싶어하기보다는, 자신이 록음악을 들으면서 기록해두었던 '써머리'를 풀어해치는 감이 더 크다.

블루스부터 시작해서 책을 쓰는 시점에서의 최신 조류였던 얼터너티브-그런지 계열의 음악들과 흑인 음악에서 치고 올라오던 (지금은 정착한 감이 있지만) 소울/훵크/힙합/트립합 류의 음악에 대한 이해까지 망라하고 있다. 어렵지 않게 쓰여있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무협지 읽듯이 읽어도 무리가 없고, 조금 관심을 가지고 차분히 읽다보면 종종 들을 만한 올드락 넘버정도는 건져올릴 수 있다.

그런 개괄적 이해로 이야기를 마치나 했더니 마지막에는 역시 슬며시 그의 록 음악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더라.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한편에는 팝음악이라는 거대한 포획장치, 다른 한편에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사운드의 전투 기계가 있고, 양자 사이에 록 음악이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립구도가 도덕적 대립 구도는 아닐지 몰라도, 그리 깊은 통찰의 산물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이 낡은 틀을 허물어 뜨리고 변이의 운동이 발생할 때에만 새로운 사운드의 생성이 가능할 것이다."(p.249)

결국 그의 의지가 슬몃 나온다. 그는 "새로운 사운드"를 바라는 것일 테고, 그것은 결국 다른 저작에서도 말하지만 그의 사회적 견해와도 밀접한 것들이다. 난 아직 그의 견해가 '탐구'의 단계에 머물러있다고 생각하고, 한 발 더 나아간 '사회이론으로의 대중음악'을 발견하는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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