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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순간, '한국인'의 민족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한큐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구원받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아들로 절대적인 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수십년 동안, 종교를 연구한, 기독교의 섭리에 대해서 인정하고 믿는 종교학자가 낸 결론이다. 그가 본 한국의 '기독교'의 신앙은 간단하다.
어린아이가 말하는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야"라는 식의 유아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듣는 엄마는 "맞아,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야!"라고 대답해 줄테지만, 그 아이가 20살이 되어서도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유아적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성장이 되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문제라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가 기실 "우리 아빠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활에서 밀접하게 발견하고도, 우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 아빠가 최고"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다니면 이 것은 곧바로 사회적 문제까지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다른 아빠들도 그들 나름에게는 최고 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고, 내가 자라서 어떤 아빠가 되어야할 지, 어떤 엄마가 되어야할 지도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이 많지만, 그것이 예화로 쉽게 풀어져 있기 때문에 다가가기 쉬운, 우리의 예수에 대한 편견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한번 깨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편견을 깨려는 이들에게 '빨갱이', 혹은 '신신학'의 굴레를 씌우고 있지만, 기실 이런 배타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만 절대적일 뿐,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큰 경향이 아닌 '근본주의적 이해'일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유일신'이라 생각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말하지만, 기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허구이다. 왜냐면, 김경재 목사등도 비판하고 있지만, 진정 유일신을 믿는다면, 다른 이신과 대적하는 신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들도 하나님의 '속성'임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갖는 다는 것은, 기독교의 관점을 '놓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단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를 기독교 인이 읽어야 함도 당연하다는 결론을 저자는 도출한다.
또 하나 그의 공박이 강한 부분은,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축자무오설' 하도 많이 쓰는 말이지만, 성경에 쓰여진 기록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그 영감대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인데, 우리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예수의 계보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다르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며, 또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구현해 보려는 데에서도 불가능 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실 성서는 그 당대의 '고백적' 언어였거나, 당시의 민족의 세계관의 투영이다.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읽고, 그대로 따르려면, 우리는 우선 노예제도를 살려내야 하고, 다시금 이민족을 정벌해야하며, 여성들을 강단에서 내려야 하고, '처녀'가 아닌 여자를 그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하게 된다. 결국,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그 해석.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책은, '종교'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환기시키고, '종교를 믿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들은 개인에게 있어서의 영성의 의미와, 종교가 사회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자꾸 그것들에 대해서는 피해가고, 교조적인 신앙들이 '신학'없이 논의 없이 우리들에게 흘러가고 있기에 '기독교' 자체가 황폐해지는 것이다.
많은 참고문헌들과 읽을 꺼리들을 던져주는 점이 유익하고, 생각할 바를 남겨준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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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나아가 천도교나 원불교 등 이른바 민족종교까지 합심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 속에 이런 근본적 '의식 변화'가 일어나게 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이런 대화야말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내가 사랑하는 조국 하늘 아래에서 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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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가지 부분은 모호한데,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그는 규정하기를 피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는 것에 좀 문제가 있다. 그는 예수를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졌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리고 '역사적 예수' 논의들을 볼 때, 예수는 단순한 보편자로서의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억압받은 자들'로 분명히 그 범주를 축소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벗어난 다면, '예수'에 대한 논의는 다시금 구름위로 떠오르고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의 종교는 맑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 밖에 안된다. 처절한 환경에서의 위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는 관점의 차이겠지만, 그의 말속에 들어있는 민족주의적 입장들이라는 것들이 가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냥 쉽게 쓰인다는 점이다. 차라리 정교하게 '민족'과 '겨레'에 대해서 구체적인 메시지를 준다면 모를까, 그냥 통상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랑합니다'하듯, 사용된다는 점은 엄밀성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게 하며, 김진홍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이 시점에는 다시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먹물들의' 이야기를 떠나서도, 이 책은 기존의 근본주의적인 '철부지' 기독교를 극복하는 데 해독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반가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