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 노래 잘하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권도 차별이 되나요? - ‘나는 괜찮다’고 여겼던 당신을 위한 인권사회학
구정우 지음 / 북스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권리로서 인권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근대사회에 진입하면서 인권은 사람이라면 태어나서 당연히 가지는 보편적 권리로 배워왔다. 이러한 보편성으로 부터 형식적으로는 모두가 누려야 할 가치로 인정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사안으로 가면 인권의 가치에 대한 첨예(?)한 대립을 느끼게 된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논쟁을 보면 과연 인권이란 자연적으로 부여된 것이라고 상상되지 않는다. 인권을 보장하는 근거는 결국 사회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인권 역시 사회 구성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회적 합의는 대립하는 권리들에 대한 논거와 이해를 요구한다. 그것이 피곤하더라도 결국 이 사회를 조화롭게(?) 하는데 꼭 필요한 절차이기도 하다. 그 논의의 과정에서 길러야 하는 것이 '인권감수성'일테다.

 

사회는 다양한 차이들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성장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일방이 소수자나 약자를 탄압하거나 배제하는 경우 그 사회는 온전하게 성립하는게 힘들다. 결국 인권감수성은 주류의 시각이 아닌 사회에 배제되거나 소외되어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 사회에서 자신이 누리는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소수자와 약자들의 권리증진을 갈등하는 다른 권리들로 제약하면서 인권으로 포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이란 추상적 가치를 제도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법으로 제정하는 것인데, 혐오표현도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처럼 권리 주장을 통해 약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을 인권의 가치로 포장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인권이 강자들이 전유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공격하는 수단처럼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인권에 대한 논쟁을 하나씩 살펴보는데 그 장점이 있다. 설명은 자세하고 친절하며 대립되는 관점에 대해서도 논거와 쟁점을 놓치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학자라서 그런지 최근 쟁점에 대한 통계자료 등을 이용하여 최대한 객관화하고 그 이면에 놓여있는 상황에 대한 해석과 다른 나라의 예시까지 들어가며 논점에 대한 결론에 저자 스스로의 객관성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점도 미덕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젱점은 다음과 같다. 난민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범죄자에게도 인권을 보장해야 하는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해야 할까? 어성차별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동성결혼을 허용할 수 있을까? 혐오표현도 표현의 자유일까? 장애인을 사회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공정한 채용에서의 차별이란 허용되는가? 우리는 노동권을 행사하고 있을까? 일터 괴롭힘을 누가 해결해야 하는가?

 

제기되는 문제들은 모두 논란이 되는 문제들이지만 사실 어느정도 가닥이 잡혀가는 문제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대부분 정답은 정해져 있다. 다만, 현실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정답은 시기상조이거나 이상적인 사고일 뿐이고, 아직 우리 사회는 준비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권팔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보편적 인권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우리는 가끔 너무 공포에 질려 사람들은 대상화하고 있는게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코로나19의 문제도 너무 공포마케팅으로 범벅되어 사람들을 옥죄고 있는 건 아닌지... 현재 대한민국은 어느 선진국보다 방역대책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잘하고 있다는 것은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면서도 방역에 실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확진자 동선공개 등에서 보여지는 인권침해 사실이 있지만 시민들의 항의에 따라 조율하고 보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 신경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 생각인데 사실 방역에 대한 서구인들의 상찬은 일종의 제제경쟁적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중국식 폐쇄를 단행하지 않고 시민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방역을 성공적으로 구축하는 모습에서 모범적 답안을 찾는 서구의 시각은 결국 중국식 모델보다 자유민주주의적 모델이 전염병을 예방하는데 더 실효적이라는 후한 평가를 받는 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보다 대만이나 홍콩이 방역이나 사망자에서 월등함에도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구인들의 체제 경쟁에 대한 자부심이 은연중 작동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 주변에서 띄워주니 너무 나간다는 염려도 된다. 집단격리를 획일화하고 고용 불안정에 대한 대처나 고려도 부족하고, 국가 방역의 허점에 대한 부분을 일부 종교집단의 무책임한 행태로 낙인찍고, 권력이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압적이나 권력이 강한 기독교세력에 대해서는 유화적이고, 자가격리 이탈자에 대한 과도한 처벌(행정벌에 추가하여 형사와 민사까지 거론하는 지자체 장들의 행태)의 시행과 심지어 전자팔찌 사용검토까지 고려하는 등 시민의 안전을 볼모 삼아 지금껏 지켜온 인권의 가치를 너무 쉽게 저버리는 것은 아닌지 ...

 

감염되어 확진된 사람들은 바이러스 그 자체는 아니다. 사회는 이들을 응원하고 지원하고 치료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국가의 정책이 있고 그 정책을 지원하는 시민들의 신뢰가 있다. 그리고 양자는 상호작용하면서 인권을 보장하고 방역을 진행하는 과정에 있다. 사실 지금의 방역은 자발적 시민의 참여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의 행정력도 중요하지만 시민의 참여도 역시 중요하다. 시민들이 불안해 할 수록 행정력을 획일화하여 편의적으로 고민없이 처벌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이 아닌 시민들과 협조하고 이해를 구하면서 피해자가 없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행정편의주의와 획일주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안전외에 아무것도 필요없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 안전은 어디로부터 오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바이러스의 공습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인권에 대한 쟁점을 제기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이 개정되거나 증보된다면 이 상황에 대한 인권적 관점과 논쟁을 추가했으면 한다. 인권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의 합의된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인권감수성에 따른 상호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국가는 인권을 촉진하는 행정기구이지 시민들의 공포를 자양분 삼아 인권을 제약하는 기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딱히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니 마치 푸념을 늘어 놓은 것 같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은 어디로? - 민주화를 넘어 사회개혁으로
김동춘 지음 / 북인더갭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곧 국회의원 선거가 코 앞이다.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평화적 정권퇴진을 이루어내고 그 동력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과제가 주어졌고 그 과제를 이루겠다고 공약한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지 이제 햇수로 3년이 다 되어간다. 그 동안 이 사회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아니 나아지긴 했을까? 대표적인 사회학자인 김동춘이 쓴 칼럼을 모아서 낸 이 책을 읽어보면 별반 나아지진 않은 듯 하다. 이 책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시절부터 문제인 정권 성립기까지 저자가 이 사회를 보며 기고한 칼럼들을 모아서 출간한 것이다. 만일 이 사회가 많은 변화를 수용하였다면 이 책을 읽을때 과거의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어야 할텐데, 지금 당장의 과제를 제기하는 느낌이다. 즉, 이 사화는 아직 적폐가 누적되고 청산되지 않고 있으며 제도적인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김동춘교수라면 이 사회를 어떻게 진단 했을까 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칼럼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이 책을 현재의 총선과 연계하여 생각하며 읽으니 답답함은 점점 더 심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대통령과 여당의 인기는 회복 중이다.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 대처도 정부의 행정력도 행정력이지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헌신이 방역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더불어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의 어이없는 방역대책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의 방역을 우수하게 느끼게 해 준것 같고, 중국에 대해 민주적이라는 대한민국의 체제 시스템을 선전하고자 하는 서방의 우호적인 시선도 한 몫한 듯 하다. )


아래 인용한 글은 난장판 국회가 되어버린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에두고 쓴 글이다. 그런데 지금 시행하는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인용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문장이다. 물론 비례대표를 늘리고 이에 대해 소수당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연동형비례대표제도의 선거안은 '준연동형'의 기형적 구조로 변경되었고 그 기형적 구조는 위성정당이라는 유래없는 비례대표 전문(?)정당을 만들어냈다. 촛불혁명으로 집권하고 다수당이 된 민주당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걔혁의 길에 서겠다고 약속하고 그 길을 벗어났고 스스로가 기득권이 되어 사실상 걔혁을 저지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적폐세력과 같이  적대적 공존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쉬운 개혁은 없었다. 단순하게 정치만이 아니라 IMF이후 경제 사회적으로 발생한 양극화와 노동의 천시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 경쟁적인 교육, 복지시스템의 미비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고, 이 과제를 적극적으로 돌파해 나갈 정치세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정치세력의 단초를 이룰 소수정당의 약진을 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다수정당의 꼼수로 오히려 이전보다 불리해진 상태로 또 다시 총선을 맞이해야 한다. 

정치생활에서 우리가 고려하고 유념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앞으로 이 사회는 어느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동북아와 세계에서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서 있는가, 기업국가가 아닌 사회국가로의 진로는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인가?


학술서가 아닌 칼럼이라 세부적인 방안보다 거칠고 원칙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의 계절 우리가 서있는 현 위치에 대해 고민해 본다면 많은 지침을 주는 책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컬럼도 고전이 되는구나......  

거대 정당의 정치독점, 지역의 일상 정치활동 부재, 51%득표한 1등만 의원이 되고 49%의 표는 사표가되는 소선거구제, 300석 중 50석도 안되는 비례대표 의석, 하향식 공천 그리고 노동자나 영세자영업자 등 경제적 약자의 세력화 등의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선거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잔치‘에 머물 것이다 - P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좋은 죽음 안내서 시체 시리즈
케이틀린 도티 지음, 임희근 옮김 / 반비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사회는 죽음을 감추는 사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무수하게 등장하는 죽음은 꾸며진 것이고 죽음의 민낯은 아니다. 그건 그냥 장치다.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 시체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멀리 해야 하며 우리의 시선에서 죽음을 가려야 한다. 젊음이 최상의 선이고 의학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죽음이 필연적으로 닥친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가 현재의 사회다. 


이 책은 저자는 중세사를 전공하고 죽음에 대한 관심으로 20대 초반 장의업에 종사한 경험을 통하여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 책은 더 이상 죽음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고 죽음 그 자체를 인정하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죽음을 외면 함으로 인하여 살아 있는 과정에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면서 죽음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토론하면서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고 의미없는 생존을 유지하거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주변의 지인들과 의미있는 작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직면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는 죽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 어럽지 않은 사회였다. 그리고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러나 현재  사회는 죽음에 대해 외면하거나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을 그 근간으로 하며 죽음은 거론하지 않거나 숨겨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으로 부터 나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게 당연한 존재이며 이는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영원한 생명을 욕망하다. '호모 데우스'에서는 영원한 삶을 이루려는 현대 인간의 욕망에 대한 내용이 가득하며 그것은 막연한 꿈이 아닌 실제 진행되는 프로젝트임을 알려주고 있다. 


죽음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까?

시체를 다루면서 저자가 느낀 것은 인위적으로 죽음을 시신을 꾸미고 태우는 것보다 자연으로 자연으럽게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죽음을 숨기거나 가려서는 안되고 있는 그대로 순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선진국 이야기겠지만 인류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인간은 서서히 죽어간다. 죽음은 필연이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인정할 때 더 창의적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리고 죽음을 전면에 내세울 때 우리는 여러가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고 살아가는 이 사회에 다른 가치들을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엄사에 대한 문제 즉 자신의 처지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무분별한 육식의 문제 역시 죽음이 보이지 않으므로 제한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해본다. 동물을 도살하는 과정이 투명하게 보이고 동물에게 인위적인 고통과 죽음으로 육식이 유지된다고 생각한다면 육식문화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과 해결점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죽음을 가리는 사회가 아닌 보여주는 사회가 되었을 때 지금과는 다른 문화적 실천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경험하지 못해서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해도 그것을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존재하는 것은 소멸하며 그  소멸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결코 의식하지 않는 것이 인간 존재이고 그것을 의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 존재이다. 그러니 덧 없는 불멸을 희망하며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종교인들을 보면 초월적 생에 대한 집착보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건강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인간 존재는 잘 해봐야 시체가 되는 존재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동화된 불평등 - 첨단 기술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분석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가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홍기빈 / 북트리거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된 논의이고 어쩌면 결론에 다다른 논의가 과학과 기술은 모든이에게 중립적이고 평등한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편견없는 인공지능이 모든 사실(?)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검토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기대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법파동이 터지거나 어떤 사건의 경중에 따른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질 때마다 판사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 기대치는 상당한 듯 하다.

 

이 책은 빈곤의 구체를 위한 자동화된 알고리즘에 따른 행정적 처리가 사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세가지 자동화된 시스템이 있는데 인디에나 주의 '빈곤가정일시지원 푸드스탬프, 메디케이드의 적격정 판단과정'을 자동화 하는 시스템과 LA의 '노숙인 통합 등록 시스템'엘러게니 카운티의 '가정선별도구'시스템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선의 적합한 도움을 주고자 적용한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한하거나 삭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 광범위한 개인 정보의 수집과 비공개된 알고리즘에 따른 운영으로 인하여 사실상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것. 이러한 상항은 근대에 잉여노동력을 통제하고 수탈하는 역할을 수행했던'구빈원'과 같은 역할을 이 시스템이 수행하고 있으며 이를 '디지털 구빈원'이라 명명한다.  

 

우리나라도 4차 기술혁명을 외치며, 마치 4차 기술혁명이 도래하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올 것처럼 사회 각계의 지도자들이나 정부는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도입하고 시험했던 시스템들은 조만간 우리사회에서도 구현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미국보다 더 잘 구현될 것으로 보인다.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차 있는 자동화된 시스템이 이 사회에 구현된다면 그것은 또다른 헬조선의 한 축을 구성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동화된 시스템이 가난을 심화시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존 사회의 인식에서 가난은 구조적이라기 보다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미국식 성공모델에서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즉 개인의 나태와 게으름이 가난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지 다른 이유는 부차적이다. 따라서 가난한 개인이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자 사회적 부적격자임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이러다보니 시스템은 개인의 성과에 대한 가혹할 정도로 평가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시스템은 여러가지 이유로 가난에 처한 사람들이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을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작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구글인지 아미존인지 회사에서 AI로 면접을 보고 신입사원을 선발했더니 선발자 전부가 남자로 구성되었다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회사에서 성과를 이루는 직원의 특성들을 종합하여 AI에 입력한 후 면접을 진행하니 그 동안의 남성문화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반영되었을 것이고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졌을 것이다. 그 결과는 신입사원 전체가 남성으로 구성되어 버리는 것.

 

재판에서 판사의 판결기능도 AI가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도 일종의 오해일 것이다. 우리나라 법원은 성범죄에 매우 관대한 경향이 있다. 과거의 판례를 AI에 반영하여 판결을 내리도록 알고리즘을 구성할터인데 그 경향성은 향후 판결에도 심각하게 반영될 것이다. 이번에 터지 텔레그램 성착취 영상 사건을 현재의 사법적 판결에 기반하여 인공지능이 판결한다면 분노한 시민들이 원하는 처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인지 능력이 부족한 판사에게 사건이 배당되자 반발하던 시민들의 청원에 의해 재판부가 변경되는 일련의 과정은 사람들에게는 인공지능과 다른 판단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이 판단하는 과정의 일정영역은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본다.

 

인공지능은 판만만이 아닌 예측까지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예측은 과거를 기반으로 하기에 과거의 편견이 자료가 되어 이루어지는 예측도 그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흑인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 듯이 인공지능 역시 그럴 확율이 높다.

 

기술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가? 이 문제는 어떤 사회의 기술인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 사회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며 사람들간의 유대가 긴밀하고 차이를 포용하는 능력이 많을 수록 그 사회에 적용되는기술들은 평등해 질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기술은 그 사회를 반영하여 가난한 자에게 소수자에게 더 엄혹하고 잔인해질 것이다. 그래서 위정자들이 기술발전만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고 좋아질 것이라며 선동하는 것을 보면 두려워진다. 사회의 평등을 되돌아 보지 않으며 그저 자본의 이익을 위해 과장하는 것은 아닌지... 기술도 역시 시민이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 시민을 묶을 쇠사슬로 변할지 모른다는 것. 그럼에도 정보기술에 대한 찬양은 계속되고  빅데이터 산업발전이란 미영하에 우리의 개인 신상은 끊이없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