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되는가?? 6월 10일이다. 각계에서 성명서와 시국선언문이 발표되고, 민중들은 광장으로 집결하려고 하고 있다. 20년 전에도 민주주의와 독재타도를 외쳐야 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주의와 독재타도를 외쳐야 할 판이니 우리의 민주화의 성과들은 어디로 다 날아간 것인지.....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바닥에서의 외침은 20년 전과 같이 꼭대기까지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MB는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것 같고, 정권의 개들은 오늘도 시청광장을 사수하기 위해 별별짓을 다 할 것으로 보인다. 오늘 하루가 아니라 항복할 때까지 끝까지 끝까지 갔으면 한다.   

‘6·10 민주항쟁’ 22돌을 하루 앞둔 9일,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전면적인 국정 쇄신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이 전국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날에만 부산대와 이화여대, 강원대, 전북대 등 전국 54개 대학의 교수 1967명이 시국선언을 발표했으며, 종교계와 의료계, 청년·대학생 등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 행렬에 참여했다.

이날 서울에서는 경희대·동국대·숭실대·이화여대 등 6개 대학에서 412명의 교수가 시국선언을 냈다.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대 교수들은 시국선언에서 언론·집회의 자유와 ‘화합과 포용의 정치’ 등을 요구하면서 “한국의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총체적 위기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침묵하거나 장로 대통령에 대한 일방적 옹호로 일관함으로써 일반 사회로부터 점차 유리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지역에서는 전남대·조선대 등 광주·전남 지역 23개 대학의 725명을 비롯해 대전·충남 지역 11개 대학 216명, 충북 지역 7개 대학 129명, 부산대 114명, 전주대 105명 등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지난 3일 서울대에서 시작된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은 전국에서 3200명을 넘어섰다.

또 진관 스님 등 스님 108명은 이날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현 시국을 염려하는 108인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이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사과하고, 당국자 문책과 내각 개편으로 민심을 수습할 것 △미디어 관련법과 비정규직법 같은 악법을 강제적으로 처리하지 말 것 △악화일로에 놓인 대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을 요구했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22개 기독교단체들도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이 대통령이 난국을 불러일으킨 데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용산 참사 책임자와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불러온 표적수사 기획자들을 문책하라”고 요구했다.  


대전에서는 의사·한의사·치과의사 등 보건의료인 73명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현 시국이 매우 엄중한 위기에 처해 있고 국민 건강과 민주주의도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며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공안통치를 즉각 중단하고 신자유주의적 보건정책과 입법안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청년·대학생들의 시국선언도 이날 절정을 이뤘다. 서울에서는 이날 오후 대한불교청년회, 원불교청년회와 청년누리꾼 모임인 대한민국청년연합, 50여개 시민·사회단체의 청년활동가 등 청년 505명이 모여 ‘6월항쟁 계승,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청년 시국선언’을 내놓았다. 부산에서는 부산청년회, 새물결청년회 등 청년단체와 부경대 민주동문회, 인제대 민주동문회 등 7개 대학 민주동문회가 연합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17개 대학 학생이 모인 ‘광주전남대학생연합’이 광주시 옛 전남도청 앞에서 정부의 국정 쇄신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했다.

박수진 기자, 전국종합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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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6-1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쟈~

머큐리 2009-06-11 02:26   좋아요 0 | URL
결국 아프님은 못뵙네요...ㅎㅎ 그래도 나오셨다고 하니..수고하셨습니다..
 

 들끓던 애도가 잦아든 거리, 강경 진압에 저항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슬픔은 켜켜이 쌓이고 쌓이네

지난해 촛불은 아무리 거리에서 외쳐도 이명박 정부가 듣지 않는단 사실을 알려줬다. 그렇게 촛불은 두 번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다. 의회에 맡겨서 안 되니까 거리로 나왔는데, 거리로 나와도 안 되니 다시 의회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촛불은 똑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5111.html 

 2008년 촛불, 2009년 정치적 탄압에 따른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결코 잊지 못한다. 그 한계와 과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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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주미힌님 서재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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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었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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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주인은 누구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부터 경찰이 서울광장을 전경 버스로 폐쇄하고 시민들의 출입을 통제하면서 광장의 ‘소유권’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이 문을 열었던 2004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문화행사와 축제를 열기 위한 장소로 광장을 조성했다. 2002년 시청 앞에서 월드컵 거리응원전을 치른 이후 광장을 만들자는 시민사회의 요구가 드높았던 때였다. 발빠르게 여론을 수렴해 일사천리로 완공한 서울광장은 서울시의 치적을 자랑하는 전시행정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서울시가 정해 놓은 규범 내부에 머물지 않았다. 일단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장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됐다. 시민들은 서울시가 조성한 광장에서 서울시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특히 2008년 촛불집회는 서울광장의 성격을 권력의 공간에서 저항의 공간으로 변모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촛불집회를 경험하며 서울광장은 정치적 상징을 부여받았다. 민주 시민들이 모여 공론을 형성하는 공간이 ‘광장’이라면 우리는 드디어 진정한 의미의 광장, 오프라인의 ‘아고라’를 갖게 된 것이다. 서울광장은 ‘거리응원의 메카’에서 ‘거리정치 1번지’로 도약했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불거진 서울광장 논란은 이 같은 서울광장의 상징을 놓고 정치권력과 시민사회가 벌이는 싸움이기도 하다. 정부는 광장을 순응의 장소로 묶어두려 하고 시민들은 민주정치의 성지로 끌어올리려 한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라는 대형 사건을 계기로 서울광장은 이명박 정권과 시민들의 불화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 되고 있다.

잔디를 위한, 잔디에 의한 광장

30여개 시민단체와 4대 종단이 모여 만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추모위원회’는 지난달 26일 “노 전 대통령 시민추모제를 27일 서울광장에서 열겠다”며 서울광장 사용허가 신청서를 서울시에 냈다. 추모위원회 대표단은 이튿날인 27일 오전 11시 오세훈 서울시장, 오후 5시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을 면담했으나 정부는 광장 사용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용 신청서를 제출했던 오광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팀장은 “오 시장과 이 장관에게 추모제 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평화적으로 행사를 치르겠다고 거듭 약속했는데도 허가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시민추모제는 많은 추모객들을 수용하기엔 협소한 덕수궁 돌담길에서 열렸다.

민주당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 추모행사를 열기 위해 추모위원회보다 먼저 서울시에 광장 사용 신청서를 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다. “광장 조성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게 불허 이유였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수많은 국민들이 놀라고 슬퍼한 사건이다. 이처럼 전 국민적인 중대사에조차 쓸 수 없는 광장이라면, 이 광장은 대체 언제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정답은 ‘서울시가 빌려주고 싶을 때’다. 서울광장은 서울시민의 광장이 아니라 사실상 서울시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였다. 월드컵 기간 동안 붉은 티셔츠의 물결은 자동차가 질주하던 도심 한복판을 축제의 난장으로 변화시켰다. 광장에 모여 서로 뜨겁게 소통했던 경험은 쉽게 잊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해 서울광장 조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2004년 5월1일,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시장 취임 1년10개월 만에 서울광장을 개장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서울광장은 시민사회가 꿈꾸던 자유로운 ‘아고라’가 아니었다. 서울시는 개장과 함께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광장 사용을 통제했다 

 

조례에 따르면 광장을 사용하려는 사람은 적어도 7일 전까지 사용허가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서울시는 신청서를 심사해 ‘시민의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활동 등을 지원한다’는 조성 목적에 위배되면 광장 사용을 불허할 수 있다. 사용 허가를 얻어도 바늘방석이 따로 없다. 잔디를 훼손할 경우 서울시가 손해배상을 청구해 올 수 있어서다.

당초 공모제를 거쳐 선정된 ‘빛의 광장’ 설계안을 보면 서울광장 바닥에는 잔디가 아니라 돌을 깔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울시가 설계 공모안을 폐기하고 잔디광장을 만들었다. 서울시는 잔디 보호를 이유로 광장 통행을 수시로 금지했는데 개장 후 첫 1년 동안은 무려 210일간 출입을 막았다. 시청 앞을 시민들이 아니라 잔디에 내준 꼴이다. 서울광장은 그 출발부터 사람의 보행을 언제든지 차단할 수 있는 반쪽짜리 광장이었던 셈이다.

권력과 시민이 대립하는 저항의 공간

명분은 시민을 위한 광장이었지만 수도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광장은 기실 정치권력과 자본이 지배하는 곳이다. 서울시청과 서울시의회가 코앞에 있고 청와대도 멀지 않다. 조례에서 드러나듯이 서울시는 광장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시민들이 광장을 점유할 때만큼은 광장은 시민의 것이 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점유의 성격이다. 누가 어떻게 광장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따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민들은 서울광장에서 잔디를 감상하고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정부 정책에 항의하고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규범에서 일탈하는 언어와 행동이 터져나오는 순간, 권력의 공간이었던 서울광장은 저항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광장 터는 유구한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19년 3월 독립 만세의 함성이 거리를 메웠고, 87년 6월엔 독재 타도를 외치는 민주시민 140여만명이 이 자리에 운집했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2명의 1주기를 추모하는 집회도 2003년 시청 앞에서 열렸다. 무엇보다 2008년 촛불집회는 서울광장이 정치적 상징을 오롯이 획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100일이 넘도록 촛불을 밝히며 서울광장을 민주정치의 공론장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면 권력의 견제도 함께 시작된다.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일은 경찰의 보호를 받지만 촛불을 켜면 경찰의 물대포를 맞는 식이다. 시민과 권력 간의 힘겨루기 양상은 특히 ‘누가 공간을 점유할 것인가’의 문제로 가시화된다. 시민들은 광장을 장악하려 하고 정부는 이를 막아선다.

일례로 개장 초기 서울광장을 둘러싼 비판 여론 중 한 가지는 서울시가 보수단체에만 사용 허가를 내준다는 것이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들의 출입은 금하고, 입맛에 맞는 단체들에만 광장 사용을 허가한다는 지적이었다. 개장 첫 해인 2004년 6월 민주화기념사업회가 광장에서 전시회를 열겠다고 했을 때 서울시는 잔디가 상한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불허 통지가 반복되면서 진보단체들은 광장 사용을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물색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반면 보수단체들은 집회 허가를 쉽게 받아냈다. 같은해 10월 서울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던 우익단체의 경우, 참가자가 10만여명에 달하고 인공기를 불태우는 등 폭력 시위를 했는데도 서울시는 잔디 피해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이서울 페스티벌’처럼 서울시가 주최하는 행사도 잔디가 많이 훼손되지만 이와 관계없이 매년 개최된다. 광장 사용의 허가 여부를 심사할 때 잔디 보호는 핑계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광화문 광장도 전경 버스로 막을까

지난해 촛불집회를 겪으면서 정부는 서울광장을 시민들한테 섣불리 내줬을 때 어떤 ‘봉변’을 당할 수 있는지 배웠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난달 23일 경찰은 전경 버스를 동원해 서울광장 둘레에 ‘차벽’부터 세웠다. 시민 분향소가 마련된 덕수궁 대한문 앞도 버스로 에워쌌다. 명색이 경찰력을 보유한 정부가 시민들을 겁낸다는 게 다소 ‘스타일 구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추모객들이 서울광장을 점거하고 정부에 저항할 여지를 차단하는 일이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는 이 정부엔 더욱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상의 지리학> 저자인 박승규 춘천교육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서울광장의 용도를 ‘전경 전용 주차장’으로 변경해도 좋을 듯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며 “광장은 본래 열려 있는 곳이지만 이명박 정권에서의 광장은 ‘닫힌 공간’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닫힌 광장이 ‘광장’일 수 있을까. 그리스의 아고라, 로마의 포럼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광장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시설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광장은 시민들이 모여 공론을 형성하고 이를 정치에 반영하는 공간으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였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광장은 국가의 것도 개인의 것도 아닌, 공민적 권리를 가지고 더불어 사는 주체인 ‘시민’의 것”이라며 “민주주의를 위해 정치의 민주화가 필요하듯이 광장과 같은 ‘공간의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선행돼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또 “정부나 서울시가 서울광장을 제도권력의 공간으로 착각하고 독점·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현 집권세력이 그만큼 반민주적이라는 사실을 공간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서울광장 폐쇄는 현 정부의 부도덕성과 정치적 비겁함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시민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속좁은’ 정부를 비판하든 말든, 정부는 노제가 열린 지난달 29일을 제외하고는 장례기간 내내 서울광장을 성공리에 사수했다. 시민사회는 현재 공사 중인 광화문 광장도 서울광장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도 정부에 위협이 되지 않는 축제만 허가하고 집회·시위는 불허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광화문 광장이 진정한 광장으로 조성되려면 시작부터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난해 촛불집회 때 광화문 네거리에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만들었던 ‘명박산성’의 재림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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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5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대의 사회참여가 다른 세대에 비해서 많이 부족해 보여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는데, 10대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부터 현재까지 여학생들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다. 이제 우리는 20대를 건너뛰어 10대에게 그것도 여성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걸까? 

10대 여학생, 정치에 눈뜨다 

노 전대통령 분향소 찾아 자원봉사
정부 정책 토론도 남학생보다 많아
“촛불 경험공유가 정치 성숙도 높여”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의 초반을 이끌었던 10대 여학생들이,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와 영결식 뒤 집회에도 대거 나타났다. 이들은 교복을 입고 분향소를 찾기도 했고, 조문을 마친 뒤 촛불을 들고 가려는 걸 막는 경찰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영결식이 열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양초를 나눠주는 등 자원봉사 활동도 했다. 남학생에 견줘 여학생의 모습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박찬욱 영화감독도 “분향소에 갔을 때 새벽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등굣길 여고생들이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왔다. 우리나라는 여고생들이 짊어지고 갈 나라가 아닌가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 청소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진 지난달 29일 밤 서울광장에 있던 송상현(18·고3)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단순히 불쌍하다는 얘기보다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얘기를 친구들과 많이 한다”고 했다. 김하나(15·중3)양은 “중3도 사회 시간에 민주주의를 배우는데, 정치가들이 여기에 나와서 민주주의가 뭔지, 여론이 어떤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양은 영결식 뒤 떨어진 쓰레기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시간째 줍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단지 슬퍼서가 아니라, 뭔가 구체적인 이유를 지니고 나온 셈이다. 지난해 촛불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을 연구한 이창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학생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며 “지난해 촛불 집회 때만 해도 먹거리라는 이슈의 특성 때문에 나오지 않았나 할 수 있었는데, 올해도 나오는 것을 보니 이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해 가는 거 아닌가 생각된다”고 진단했다.

여학생들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는 <한겨레>에 보낸 전자우편에서 “한국은 아직도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사회인데, 아들, 특히 장자에게는 ‘좋은 학벌’을 따고 사회에서 ‘성공’하라는 가족의 압력은 훨씬 더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기에 남학생에게는 심적인 여유가 대단히 부족한 데 비해, 여학생들은 ‘학습기계’가 되라는 강요에 반기를 들 만한 여지가 더 크다”고 했다. 남녀 공학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윤은진 교사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과 얘기를 해 보면 성별 차이가 조금 있다”며 “남학생들은 ‘정치는 뻔하다’며 자신을 더 경쟁력있게 만들려는 면이 강한 데 반해, 여학생들은 비판의식을 더 발전시키는 편”이라고 말했다. 영결식 뒤 서울광장에서 열린 추모제에 나온 이윤경(18·고3)양은 “남자애들은 노무현 대통령 얘기를 해도 반응이 없다. 스포츠나 게임 얘기를 더 좋아한다. 여학생들은 점심시간 때 텔레비전을 켜 놓고 영결식 보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10대 여학생들이 정치적으로 급진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배은경 서울대 교수(여성학 협동과정)는 “10대와 20대 초반 여성들은 ‘미선이 효순이 촛불 집회’ 때부터 집합적 경험을 나눠 가졌다. 또 이미 사무직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의 현실을 보고 있기 때문에 정치의식이 더 급진화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지난해 청소년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역사적 경험’을 묻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가장 많이 꼽은 것은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는 “이들이 이번에 ‘평생 투표하겠다’는 실천을 얘기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의식의 급진화보다 몸의 생활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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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6-0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은 수욜날 못오세요??ㅋ

머큐리 2009-06-05 09:44   좋아요 0 | URL
수욜날 무슨 모임있나요? 업무 끝나고 잔디밟으러 가긴 갈건데요...ㅎㅎ

쟈니 2009-06-0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대 여학생들을 보면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