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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속물들
오현종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일단 이름에 대한 편견부터 시작하자... '오현종'이란 이름을 봤을 때, 남성이라 생각했다. 아무런 이유없이 남자라고 생각했던 저자는 어여쁜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위악적일 수 밖에 없는 20대 여성의 속물적(?)인 기록이다. 물론 속물적일 수 밖에 없는 배경은 맘몬이 다스리는 이 사회이고 그 속에서 바둥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그렇기에 속물들 앞에 "거룩한"이란 단어를 사용했을게다.
88만원세대라는 새로운 세대론이 사회에 퍼지면서 20대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많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소설을 통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88만원 세대'에 대해 많은 검토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20대가 사회를 뚫고 나오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들에 대한 고민이 늘어난 것도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김예슬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가 20대가 선택한 이 사회에 대한 선전포고 였다면, 엄기호의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보다 20대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사회를 포용하고 거꾸로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20대에 대한 시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기성세대나 20대나 속물로 살아가고 있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이 사회의 구조 속에서 속물로 살아가지 않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소설속에서 나타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간 속물성의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이다.
구조적 총체성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각 개인들의 인물과 상황을 보면, 계급적 분화에 따른 연대의 상실이 가장 눈에 보이는 듯하다. 더불어 과거에는 계급적 격차가 사회현실에 대한 개선과 타파로 이데올로기적인 동질감으로 승화되던가 확고하게 나뉘어져 버렸다면, 이 소설 속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흐물흐물 녹아들어간다. 그곳에는 계급적 적대감이 아닌 그저 고단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어가기 위한 욕망과 허영의 간극만이 맴돌고 있다. 거대한 사회에 대한 구원은 꿈도 꾸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주관마저도 갖기 힘든 상황의 연속이다.
이렇게 말하면 엄기호씨가 비판한 486의 시선 그대로인 듯하다. 엘리트 의식도 없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는 20대의 상황을 위악적으로 그리면서도 밉지가 않은 것은 그들 자신도 그것을 탈출해야 할 어떤 것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점일테다. 그럼에도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건 청춘이 가진 특권이라 생각해야 할 듯하다. 그런 방황 속에서 자신을 찾는다면 어쩌면 기성세대부터 내려오는 속물성을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그 방황의 결과물이 개인의 자기 인식으로만 고착되어버린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진행될 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세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간접경험으론 힘들다. 초반에 작가의 이름부터 선입관을 가지고 봤듯이 아직도 이 세대에 대한 이해는 선입관 투성인듯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