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권정생 선생을 처음 으로 알게 된 것은 '강아지 똥'이란 그림책을 통해서였다.
평범한 똥이야기로 자연의 순환과 자기 희생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이야기 했던 그림 동화가 어떤 철학책보다 심오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었고 다른 동화책은 별로 읽어주지 않았어도 이 책 만큼은 애들에게 몇번씩 읽어 주곤 했다.  

그럼에도 그 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 책은 그러한 권정생선생의 내면을 알게 해 준 책이다. 평생을 쓸모없은 욕심을 줄이고 살았던 선생의 생활과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책이다. 내가 읽은 책은 구판이고 신판이 더 있다. 어쩌면 신판에는 더 많은 글들이 실려 있을 지 모르겠다. 확인되는대로 신판까지 구입해야 겠다.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신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들어앉을 집이 있어야 하고 적어도 한달치 살아갈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하루를 살아갈 돈이 얼마면 될까요?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맞게 살아갈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일입니다. 내 몫의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서문 4쪽]

 선생의 가진 신앙에는 굳건한 중심이 있다. 기독교인으로 선생은 예수의 실천적 삶을 모범으로 삼은 듯하다. 예수가 가진 혁명성은 낮은 데로 내려가는 것이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생태적인 사랑에서 부터 인류애까지 선생에게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 역시 예수를 따르는 삶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하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볼 수 있다. 평생 남 앞에 서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글 조차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선생은 온전한 삶 자체로 모범을 보이셨다.  

이 땅에서 예수는 철저하게 왜곡되어 왔다.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왜곡의 선봉장이었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선교를 한답시고 온 세계에 떠돌고 다니며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온갖 공해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도 하나의 공해물로 인식된다면 빛과 소금은커녕 쓰레기만 배출해내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한번 반성할 틈도 없이 그냥 발가 벗은 임금님처럼 앞으로 앞으로 가고만 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서 예수님은 많이도 시달려 왔다. 한때는 십자군 군대의 앞장에 서서 전쟁과 학살에 이용당하기도 하고, 천국 가는 입장료를 어마어마하게 받아내는 그야말로 뚜쟁이 노릇도 했고, 대한민국 기독교 백년사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선봉장이 되어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쳤고, 더러는 땅투기꾼에게 더러는 출세주의자에게, 얼마나 이용당하면 살아왔던가?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회개를 부르짖고, 정의를 부르짖고,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해도, 수십만명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어도, 인간에게 따뜻한 정(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닐 것이다. 어쩌면 추악한 욕심을 가리기 위해 우리는 다른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일게다. 아니면 편리함에 중독되어버려 조금의 불편을 감수할 용기가 전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불편함에 대해 소유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교회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생존의 조건이 개별화되고 파편화되면서 근대 초에 나타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나타나고 있다. 교인들만 욕할 필요도 없다. 교회도 이 사회구성원의 하나일 텐데 그들만이 이러한 흐름을 거스리지 못한다고 욕한다면 그것도 불합리한 일인 듯하다. 어쩌면 지금의 교회도 이 시대의 자식들이 뿐이다. 이 시대가 그렇다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위선이 역겨운 것일테다.  

말로야 무엇인들 못할까. 글을 읽으면서도 계속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은 선생이 비판이 따까운 만큼 그렇게 실천하고 사는 것이 어려울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평범하지 않는 사람을 따라가기에는 난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질서을 빠져나와서 외치는 광야의 예언자같은 사람이 선생이 아닐까?  예수가 광야에서 돌아왔을때 그를 진심으로 따른 것은 제자들 뿐이었다. 그 제자들 마저도 죽음앞에서는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희망을 잃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지금 이모양 요꼴이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석가나 예수는 하느님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본래의 하느님의 모습을 찾으려 애쓴 분들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인간 모두에게 하느님늬 모습을 발견했고 각자의 가려진 눈을 뜨게 하여 자기 모습을 보게 했다.


인간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쩌면 우리안에 숨죽여 살고 있는 신성을 찾는 것과 다름아닐 것이다. 물질과 욕망에 눌려 있는 본연의 모습에 대한 신뢰없이 어떻게 아름다운 동화를 지어낼 수 있었을까? 매서운 채찍질의 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깃들여 있다 더불어 사람과 같이 지내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있었던 것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니다.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자연을 자연답게 보호하는 길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는 개의 모습대로 닭은 닭의 모습대로 모든 동물과 식물이 그들대로의 섭생에 따라 보호 되어야 한다.


요즘같이 거짓이 판을 치는 시대에 가슴에 새겨두고 음미해야 할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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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01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겠는 책이 있는데...제겐 이 책이 그랬었습니다.
오늘은,
"인간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쩌면 우리안에 숨죽여 살고 있는 신성을 찾는 것과 다름아닐 것이다."
이 문장 되뇌고 갑니다~^^

같은하늘 2010-11-02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바빴던 일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서재 나들이 중에 인사남깁니다.
이제는 좀더 자주 뵐 수 있겠지요? ㅎㅎ

2010-11-04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8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0-11-0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날씨가 많이 춥다고 하던데 감기조심하세요.^^
권정생 작가님의 작품 중에서 제가 읽은 건 <몽실 언니>밖에 없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