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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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대설주의보>를 읽는 봄이다. 몇일 전 아프다는 핑계로 휴가를 내고 서점에 들렀다. 여느 때와 다르게 윤대녕의 소설이 꽂혀있는 언저리에서 소변이 마려운 것 처럼 초조해졌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책을 집었다. 어떤 이유로 저자의 서명이 들어간 책이 서가에 꽂혀있는지 모르겠지만. 2010, 봄, 윤대녕, 붉은 인영印影이 책장, 거기에 있었다. 툭툭 털면 철 지난 봄이 소리없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지나칠 수 없었다. 만나야 할 것들은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오래 막막해야 한다.       그런데 정녕 우리가 언제, 우리가 정말, 결이 다른 공기를 알아차리고 그 어쩔 수 없음에 불안하고 주춤했던가. 대답할 수 없는 나는 얼마의 돈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대설주의보>를 읽는다.

일곱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녀가 수연으로 불리건 수경으로 불리건, 그가 윤수로 불리건 연수로 불리건, 어떤 추억을 지니고 있건 상관없이 동일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상황도 다르고 인물도 다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뭐랄까 결핍이라면 결핍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고, 절름발이라면 절름발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고, 죄의식이라면 또 죄의식이라고 불릴 수 있을 그것들이 모두 다 한 곳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빠르지 않게 가끔 쉬어가면서 한 곳으로. 그 흐름에 올라타 말문이 막히게 하는 것들을 우연이라 해야 하는지, 흉터가 흉터를 알아보는 순간이라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녕 우리가 언제, 우리가 정말, 찰나이지만 말문이 막혔던 순간들을 인정하고 속임수일지도 모르는 무엇을 믿어보기는 했을까. 대답할 수 없는 나는 네 번째 단편으로 실린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의 한 대목을 그저 옮겨 적는다. 이어 카페에 딸려 있는 다락방에서 그녀와 나는 도둑질하듯 사랑을 나눴다.(p.133)  

책의 처음을 여는 단편<보리>의 주인공 수경은 어리석기 때문이에요, 가난하기 때문이에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무섭기 때문에(p.25) 가끔이라도 매달려 울 수 있는 태산 같은 남자가 필요해요(p.25) 라고 말한다. 가끔이라도. 그래, 다른 건 모르겠는데, 가끔이라도,라는 말, 그말은 절박하다는 말을 에돌아가기도 한다. 성미정시인은 가끔 불어온다는 모자를 벗기는 바람,이라는 것이 있다고 그녀의 시에 썼는데, 그 바람은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라 모자를 벗고 싶은 날에 꼭 불어와야만 했던 바람이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럼에도 살다보니 덤으로 알아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렇게 매달려 운다고 무엇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가끔이 공활한 날들을 내처 걸어가게 할 수는 있다. 모두 다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녕 우리가 언제, 우리가 정말, 서로에게 가끔이라도 매달려 울 수 있는 태산이 되어 주었던가. 대답할 수 없는 나는 <보리>의 한 대목을 그저 옮겨 적는다. 그게 누구든 과일과 칼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리라. (p.18)      

어떤 기억들은 아득할 때가 있다. 그리 오래 된 기억도 아닌데 말이다. 바람을 맞아, 비에 젖어, 눈에 쌓여 그렇게 아득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둘러 희미해지는 것들을 부러 붙들 필요는 없다.       그런데 정녕 우리가 언제, 우리가 정말 하염없이 눈 내리던 그 밤들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쁘고 아프게 상춘곡을 불러주기는 했었던가. 대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저 이 모든 헛생각들을 아무 죄의식 없이 쓰고 있는 까닭은, 봄밤이고, 윤대녕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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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4-0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광의 1빠 추천.
저도 갑자기 소변 마려운 것처럼 초조해졌잖아요! 이 지름신 굿바이 님 같으니라고. ^-^

굿바이 2011-04-01 16:03   좋아요 0 | URL
감사의 1빠 댓글.
읽어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추천씩이나요~! 그것도 1빠로!
물론, 제 글에 1빠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늘 누구나 1빠를 할 수 있는 글이에요ㅜㅜ 그렇지만, 치니님의 경쾌한 외침! 그것은 말이죠, 제게 매우 다른 의미에요. 그러니까, 뭐랄까, 그러니까, 각별한 애정! 뭐 그런! ㅋㅋㅋ :)

2011-04-04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4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칭>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대칭 - 자연의 패턴 속으로 떠나는 여행 승산의 대칭 시리즈 4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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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부터 내가 얼마나 심한 편두통과 싸웠는지, 그리고 지금도 악전고투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나는 지금도 오른쪽 목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두통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다. 대칭적이지 못한 나의 편두통은, 환자와 대칭관계라고 믿었던, 그래서 내 통증을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의사에게 느낀 짜증과 거의 비슷하게 어마어마한 짜증을 일으킨다. 비대칭적인 통증이 엄습한 순간 삶은 저질이 된다. 그럼 대칭적 통증에는 어떻게 될까? 아마 흥분상태로 죽지 않을까?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나는 '마커스 드 사토이'가 쓴 <대칭>이라는 책을 읽는다. 패턴을 탐색하는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더 나아가 패턴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자연을 설명하는 놀라운 책, 미친게 틀림없다.

이 책은 순서와 관계없이 읽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순서를 따라간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선 관심이 있었던 음악과 수학의 관계를 엮은 부분부터 먼저 읽는다. 음악에서 수학적 상상력을 찾아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32개의 악장 속 대'에서 잘 소개된 바흐의 곡들이 그렇다. 바흐의 곡을 들으면 느낄 수 있는 긴장과 이완, 우아한 멜로디와 변주, 시작과 만나는 끝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음악을 따라 오르고 내리는 부드러운 미끄럼틀을 탄 듯한 효과를 준다. 특히 카논(돌림 노래라고 생각하면 쉽다)의 경우 대칭이 주는 재미를 독특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카논은 '병진 대칭'의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형태를 미끌어뜨리면서 만들어지는 대칭의 종류다. 항아리 입구 둘레의 띠모양 장식을 연상하라고 책은 말하지만 그게 쉽지 않을 수 도 있다. 좀 더 쉽게 생각하면 '상승하는 나선형 연결고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다음에 시작하는 카논의 경우 한 음씩 높게 시작하여 곡조와 곡조의 사이를 띄우고 음감을 더욱 확장시키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물론, 바흐는 그런 음악의 구조 속에서 정확한 지점을 찾아 대칭을 깨뜨리고 이는 클라이막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주 역시 대칭으로 이루어진 음악 구조를 더 잘 인식하게 하는 장치로서 이해될 수 있겠다.
물론 바흐가 사용한 '대칭'은 단순히 음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리듬에도 적용되고 심지어 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도 적용된다. 그의 음악이 내게 주는 감동의 절 반 이상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수학'의 영역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놀랍다. 그것에 반응하는 내 자신이 말이다.  

음악의 이야기를 먼저 들여다 본 이유는 '대칭'이 갖는 의미를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소수 대칭' 소개된'갈루아의 연구'에서처럼 대칭이 갖는 의미를 좀 더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적어도 음악은 전체와 부분이 능동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장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상 하나가 지닌 '하나의' 대칭은 어떤 작용을 가하기 전과 후 그 대상의 형태를 본질적으로 똑같이 만드는 작용을 말한다" (p.274) 즉, 대칭은 그 대칭들을 모아 놓은 집합인 '군'으로, 다시 말해 개별적 특성보다는 전체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우주가 100만년 전의 폭발을 경험하고 팽창하는 과정도 '대칭'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우주가 지금도 팽창하는 이유 역시 그러할 것이고. 우주 안에 초록별 지구와 같은 고립되고 외로운 별이 또 있을 것 같으니, 알 수 없는 위로가 음악처럼 밀려온다. 물론, 이렇게 나는 또 '갈루아의 정의'를 오독하는 즐거움과 미련함을 경험하게 되지만 말이다.   

우리의 플라톤은 <향연>에서 대칭이 물질의 구조에 관한 비밀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의 기원에 대해서도 설명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놀라운 말발의 소유자들이 모여 사랑의 기원에 대해 입심을 겨루는데,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은 본래 다리가 네 개이고, 두 얼굴이 머리 양쪽에 달린 구형의 괴물이었다. 어느 날, 인간의 오만함에 화가 난 제우스 신은 그들의 높은 콧대를 꺾을 방법을 생각해냈다. '인간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나, 나는 그들을 반으로 나누어 그 힘을 줄이고 수를 증가시키겠다. 이렇게 하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좀 더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인간을 반으로 나누었다"(p.86) 고 한다. 결과적으로 제우스에게 인간이 유용한 존재가 되었는지, 몇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만 유용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맛있는 정사면체와 유독한 피라미드' 소개된 것처럼, 대칭은 자연에게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배열을 알려준다,라고 가정했을 때,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 부터 그 반쪽을 찾기 위해 최대한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인간이 폭력적으로 변한 것은 다 '대칭'이 깨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주사위 놀이가 주는 신비로움에 빠지곤 한다. 학교에서 배운 수학적 지식을 이용하면 주사위를 던져서 나올 숫자들의 확률을 계산할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나는 그 주사위라는 형태에 놀라곤 한다. 8개의 꼭지점으로 이루어진 정육면체의 구조는 어떻게 보아도 완전하고 안전해 보인다. 대칭이 갖는 아름다움이다. 구를 보았을 때 느끼는 역동감이나 원뿔을 보았을 때 느끼는 에너지와는 분명 다르다. 그것은 완전하고 안전해 보이지만 또 한 편 온전히 부서질 수 있는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사위를 던질 때 마다, 하나의 주사위가 6개의 주사위로 분할하여 떨어질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한다. 따라서 '대칭'은 완벽한 아름다움이자 파괴를 부르는 혹은 죽음을 부르는 암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자연의 패턴, 대칭 속에 삶과 죽음이 다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이런 모든 쓸데없는 생각은 다 편두통에서 시작되었다. 책에 대한 내 리뷰가 한심해서 그렇지 이 책은 편두통을 잠시 잊고 집중하게 할 만큼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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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3-29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두통에서 비대칭을 발견하시고 대칭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셨다니..ㅎㅎㅎ
아주 지대로~ 아파주겠는데요?... 그러고 보면 대칭은 균형이자 조화일진대...따따블로 아프면 어쩔려고 그러는건지.... 에휴~ 잘 판단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굿바이님도 오늘로 리뷰 마무리 되셨네요. 홀가분 하시죠?.

굿바이 2011-04-01 13:31   좋아요 0 | URL
매우, 홀가분한 기분이랍니다 :)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좋은 책과 좋은 분들을 알게 되서 참 좋았습니다.

편두통은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꽃도둑님도 건강관리 잘 하세요~

에디 2011-03-3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지르려 했으나 가격 때문에 1년을 기다리고 있는 책이군요.....

GEB(괴델, 에셔, 바흐)를 보셔도 바흐 음악의 수학적/논리학적 해석의 안드로메다 관광열차를 타실 수 있습니다. '상승하는 나선형 연결고리' 라는 단어를 여기에서도 보는군요. 어려운 책은 아닌가요? 어려운 내용을 받아들일 만한 형편이 아니라ㅠㅠ

굿바이 2011-04-01 14:23   좋아요 0 | URL
GEB는 어렵다는 분들이 많아서 아직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뭔가 좀 여유가 생기면 꼭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디님에게 이 책 <균형>은 전혀 무리가 없을 듯 한데, 음....그렇게 깨끗한 건 아니지만 혹여 괜찮으시면 비밀글로 주소를 남겨주세요. 저야 다 읽었으니 보내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여튼, 불편하지 않으시면 언제든 비밀글 남겨주세요 :)

cyrus 2011-03-3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 상황 속에서도 머리 아픈 책을 읽으셨다니,, 대단하세요, 지금은 두통은
나으셨는지요?

굿바이 2011-04-01 13:36   좋아요 0 | URL
걱정해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CYRUS님은 복학하셨으니 한참 바쁘시겠군요. 지나가면 오지 않는 계절입니다.뭐든 즐겁게 뭐든 뜨겁게 그리고 건강하게 생활하셨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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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도 나름의 '궁합' 혹은 만나야 할 '때'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다수의 독자에게 지지를 받지만 내게는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책들도 있었고, 나는 좋았는데 주위의 반응이 썰렁했던 경험도 있었다. 또한 그 책을 읽은 시기에 따라 이해나 감동이 달랐던 적도 있었다. 특히 외국 작가의 작품들이 종종 그랬던 것 같다. 아마, 작가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가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는 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번역이 주는 문제도 있을 것이고. 여튼 도스또예프스키가 그런 작가였던 것 같다. 그의 위상을 어느 대목에서 느껴야 하는 지 잘 모르겠는, 어느 대목에서 박수 쳐야 하는 지 잘 모르겠는, 계속 어리둥절하게 만들거나 혹은 불편하게 만드는 작가. 그런 작가의 평전을 읽는 일은 그의 소설을 읽는 일보다 좀 더 힘들었다. 물론 어느 부분은 그에게 씌운 선입견을 걷어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혹자는 작가 도스또예프스키와 인간 도스또예프스끼를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 문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철저히 고민하고 대답해야 할 대목이겠지만, 개인적인 선호를 넘어 사회적으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는 경우 그 둘을 분리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물론, 나의 이런 잣대는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친일의 흔적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내가 좋으니까, 그런 것들을 슬쩍 무시하고 '작품'을 좋아하는 건데 뭐 어떠냐는 식으로 자기 변명을 하기도 했다. 화가의 경우는 더 많고. 그런데 유독 도스또예프스키에게 왜 이런 촘촘한 자를 들이댔었는가. 그것은 작품에서 작가와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인 성향을, 혹은 그의 좀 덜 떨어진 행동들을 부러 끄집어내서 내 비판을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못났다.

여튼 E.H.카의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중 19장 '시사평론가로서의 도스또예프스키' 는 그의 정치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어 특별한 부분이었다. 그의 <작가 일기>를 읽어 본 적은 없지만, 러시아 문학을 부분적으로 소개한 박노자의 글이나 다른 평론가들의 인용구를 통해 짐작만 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이 부분에서 좀 더 보충할 수 있어서 유용했다. 1877년 4월 <작가 일기>에 도스또예프스키가 쓴 글의 일부 구절들을 옮겨보면 이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 우리는 터키인들에게 억압받고 있는 우리의 형제 슬라브족들을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어나고 있다. 전쟁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무력한 부패와 정신적 질식 속으로 몰아는 공기를 말갛게 씻을 것이다.
사회가 불건전하고 병들었다면 지속적인 평화라는 훌륭한 것도 사회에 혜택이긴커녕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유럽의 역사에서 한 세대라도 전쟁을 겪지 않고 지나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전쟁은 분명히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며 건강을 주는 것이고 인간성을 키워주는 것이다. (p.326)

정보를 장악하는 사람이 권력도 장악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러시아 문학을 특히 도스또예프스키의 문학을 소개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작가 일기>와 같은 저널의 소개는 왜 슬쩍 뒤로 미루어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밥벌이는 늘 고달프기 때문에,라고 이해하자니 입이 쓰다. 여튼 카의 말대로 러시아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작가의 이런 정치적 성향은 고스란히 그의 종교적인 성향과 같은 스탠스를 유지할 것이다. 여기서 그의 종교관이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의 모든 소설에 종교적 수난과 회심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튼 주전론을 말할 수 있는 작가라면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도 정통주의에 가까웠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다. 유독 수난과 회심을 강조하는 그 마음도 좀 알겠고.

다시 책으로 돌아와 E.H.카의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은 일방적인 상찬도 아니고, 일방적인 비아냥도 찾기 힘든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책이다. 또한 책의 구성 중 3,4부가 인상적이었는데, 많은 부분 작가의 작품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사고의 틀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가를 갑자기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 곡해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죄와 벌>의 경우 나는 도통 그 결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논리적이고 치밀한 주인공이 범죄 행위를 저지른 후 갑자기 벼락맞듯이 회심하는 과정은, 아주 버릇없고 거칠게 표현하면 작가의 정신세계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카는 이렇게 적고 있다.

라스꼴리니프로부터, 그를 둘러싼 후광과 그의 무모성과 그의 일관성 없음과, 그의 애타적 충동을 떼어 보라. 그러면 거기에 개인주의적 자기만족을 궁극의 선으로 설교하는 완벽한 쾌락주의가 드러난다. (P.236)

인간에게 일관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냐고, 늘 주절거리면서도 막상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 앞에서 신경질을 내는 꼴이니, 나야 말로 내가 주장하는 일관성 없는 인간을 대표하는 격이다. 본인이 믿는 것을 실천까지 하는 놀라운 재주다.
그럼에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분명 놀라운 구석이 있다. 아마 그를 위대한 작가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이 지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비슷한 맥락의 글을 이문열에게서도 읽은 적이 있다.(물론 이문열씨가 도스또예프스키를 높이 평가하는 맥락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한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예언자적인 그의 통찰은 당연히 신의 존재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현대 세계는 도스또예프스키의 전제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의 결론은 거부한다. 그의 종교에 따르면 그는 구질서에 속해 있고, 그의 심리학을 따르자면 그는 새로운 질서에 속해 있다.....그는, 그의 신관과 떨어진 그의 인간관이 불가피하게도 오늘날 함몰되고 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불모성.비관주의로 인간을 몰고 가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역사적 책임은 남는다. 도스또예프스키는 대중을 벼랑 끄트머리로 안내하고는 그들이 가파른 파탄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쯤 썩은 낡은 재목으로 엉성한 울타리를 친 사람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p.383)

카는 작가의 신학이 낡은 것이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의 진정한 비중이 드러날 것이라고 썼는데, 이 알쏭달쏭한 말에서 오히려 나는 도스또예프스키의 문학을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하는지 감을 잡은 셈이다. 작가와 그의 작품에 애정을 가질 수 있을 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작품을 읽어 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꽂이에서 맥없이 잠자고 있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다시 쳐다보며 '죄와 고통'에 관한 그의 '신학'을 잘근잘근 음미하는 한 주가 될 것이다. 이 또한 내게는 찬란한 수난이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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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그늘 2011-03-27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외수씨 책을 읽던 오래전.. 유독.. '들개' 라는 책만은 늘 기억에서 좋았었다.. 란 말을 못하였었듯.. 그런가 봐요..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을 읽던 날들엔.. '죄와 벌' 만큼은 이상하게.. 괜찮았었다란 말이.. 잘 나오질 않더라구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악령' 이라는 책에 그 내용이 나오잖아요..
복음서에 보면 돼지뗴들 속으로 들어간 군대귀신에 의해서 바다로 치달려가듯 몰사하는 내용을 사상에 비유했었던 그런내용이었는데..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 신념 또한 정말.. 무서울 수도 있겠다 싶었죠..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여인이 사지를 부러뜨렸네
그래서 두배나 더 관심을 끌게 되었네,
그래서 두배나 더 홀딱 반하게 생겼네,
이미 홀딱 빠져버린 사나이는.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는 악령에서의 문장중 그 나날들에.. 참 많이 읋었었던 글귀가
요즘에는 그렇게 와닿지 않네요.. 아마.. 그 시절이 푸릇푸릇 했을 때였나 봐요^^



굿바이 2011-03-29 10:44   좋아요 0 | URL
저도요, 이외수의 초기작은 참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나온 작품들까지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요 ㅜㅜ

<악령>도 그렇고 <죄와 벌>도 그렇고 저는 과정도 결말도 영 시원하지가 않았어요. 흰그늘길님이 <죄와 벌>을 읽으며 받은 느낌과 제가 받은 느낌이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요. 뭐든 극단적인 것들은 좀 무섭습니다 :)

cyrus 2011-03-27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평전 덕분에 곧 읽어야 할 <죄와 벌><백치><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독서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이 유명한 세 작품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평전을 읽는데 힘드릭도 했지만요,, ^^;;

굿바이 2011-03-29 10:39   좋아요 0 | URL
만반의 준비가 잘 되셨겠네요. 모쪼록 즐거운 독서 되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어제 병원에서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읽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잤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 성당의 주임신부님은 멕시코에서 오셨다. 한국에 오신 지 약 7년 정도 지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기간에 비하면 참으로 한국어가 자연스럽다. 물론 가끔 단어 선택이 부적절하여 큰 기쁨(^^) 주시기도 하지만, 그런 소소한 재미를 제외하고는 의사전달에 전혀 무리가 없다. 특히 신부님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쓰시는데, 그 억양이나 속도에서 느껴지는 명랑함과 경쾌함이 나는 참 좋더라. 여하간, 그래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신부님처럼 발랄하게 쓰고 싶다는, 좀 더 나아가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 부러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것도 명랑하게! 

그런 나에게, 한 번의 시련 닥쳤으니, 다름아닌 [000 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노?]라는 회장님의 물음이시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혹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에 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였는데, 그렇게 말했다가는 하루 종일 시달릴 것 같기도 하고, 어디 구해놓은 일자리도 없는데 갑자기 짤리면 대출금은 어찌 갚나,하는 생계형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또한, 매사에 감사하기로 작정한 결심에 실금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 [일단 상황을 잘 모르니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로 타협을 보고,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기사는 찾기 쉬었다. 클릭만 하면 되니까. 이것만으로도 일단 감사합니다~!, 여하간 상황을 쭉 보았는데 웃기도 그렇고, 화를 내기도 그렇고, 그러니까 매우 거시기한 상황인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분노할 사건이 아님에 또 한 번 감사합니다~!,였지만, 그러나, 사건의 본질이 뭣이건, 이 여인은 뭐하라 요맘때 책을 출간해서 나를 수고스럽게 하는 것인가, 뭐 이런 맥락없는 짜증이 3초에 다섯 번 얻어맞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속도로 몰려왔다. 역시나 매사에 감사하기는 참으로 피나는 연습이 필요한 일인가 보다.   

회장님은 점심시간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밥도 마음 편하게 먹지 못하는 나는야 노예,라는 신분을 잊은 건 아니지만, 먹을 때 건드리면 우리 강아지도 싫어했었는데, 어디 한 군데 확 물어버릴까 하는 빙의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밥을 사먹을 수 있도록 급여를 지급하시는 회장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선선히 답변을 하였다.     

나 : 저는 그것의 사실관계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회장 : 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뭔가 느낌이 있을 것 아닌가?

나 : 다들 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회장 : 누가? 그사람?

나 : 그분과 그분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 그리고 이런 일은 꼭 보도하고 말겠다는 굳은 각오를 한 언론과 언론사에 기생하는 기자들이 아니겠습니까?

회장 : 음모陰謀가 아닐까? 

나 : 음모陰毛가 있겠죠. 그분이나, 그분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나, 이런 일은 꼭 보도하고 말겠다는 굳은 각오를 한 언론과, 그런 언론사에 기생하는 기자들의 신체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음모陰毛가 있을 것입니다.

회장 : ....................

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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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3-2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하, 감사합니다 ~ ! 굿바이 님, 오늘 울적한 저를 웃게 해주셨어요.

굿바이 2011-03-23 18: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사하신 회장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경험이 치니님을 웃게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인 일로 울적하셨나요? 울적한 사람들 어디 모여 감사합니다~! 합창대회라도 열어야 겠습니다. 치니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저 역시 울적합니다. 그래서 또 감사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3-23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랑과 저도 이 책 출간 뉴스를 보고 얘기를 했어요.
저는 무신 예술책 내는 출판사 같던데 이런 걸 내냐.. 우습다 이리 말했더니,
신랑은 신작가님이 약자(?)라면서 약자들이 책을 많이 내야한다고 문자로 일단 떡하니 박아놓으면 절대 없앨 수 없는 법이라며 기뻐하더라구요.
신작가님이 약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구경거리기는 한듯 합니다.
룸싸롱에 대해 쓴 강준만선생 책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강준만선생도 신작가처럼 쓰셨으면 잘 나갔을텐데...

여하간 굿바이님이 오래오래 회사에 다녔으면 좋겠어요.

굿바이 2011-03-24 09:33   좋아요 0 | URL
아~ 약자! :)
정글의 법칙을 잘 아는 분들이 가끔 부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강준만교수의 부지런하고 용기있는 글쓰기에 합당한 대가가 있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네요, 얼마나 책이 팔리는지....

저는 오래오래 회사를 다닐 수 없을 것 같지만ㅜㅜ,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써 주셔서 무한 감사합니다~!

흰그늘 2011-03-2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굿바이님.. 성당 다니시는가 보군요..?( 아닌가?)..
저는 성당을 다녀 본적은 없는데... 신부님 하시니.. 돌아가신.. '예수원' 의
대천덕 신부님 생각이 나네요.. 한 번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가보질 못했었거던요..

회장님.. 하시니 '욕망의 불꽃의' 그 회장님이 떠오르네요.. '뭐라카노~~'
음모에 대한 말들에 조금 웃었습니다..^^

굿바이 2011-03-24 09:40   좋아요 0 | URL
네, 성당을 다니기만 한답니다^^! 아주 날라리 신자라고 할 수 있죠~
'예수원'은 저도 듣기만 했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또 들키네요. 날라리 신자~ ㅋㅋ

'욕망의 불꽃'을 검색해봤더니 드라마군요. 음....내용을 몰라서 뭐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여튼 우리 회장님은 세상사에 관심이 많으시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 뭐 그런! ㅋㅋ 좋은 분인데, 그저 절 조금 귀찮게 할 뿐이죠 ㅜㅜ

어찌되었건, 제 글을 읽고 흰그늘길님이 조금이라도 웃으셨다니 역시나 감사합니다~!



風流男兒 2011-03-2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감사하며 살아야죠 ㅋㅋㅋㅋ 센스 역시 돋으시는 우리 누나!! ㅎㅎ

굿바이 2011-03-24 15:02   좋아요 0 | URL
풍류 따블로 돋아주시는 남아님,
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누나라고 불러주신 불망지은 감사합니다~!

에디 2011-03-2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모> 말씀을 하실 때 분명히, 꼭, 외국인처럼 두손으로 귀엽게 쿼테이션 마크를 그려주셨겠죠?

저도 아주 큰 범주에선 날라리 신자인데요. 어머니는 저를 냉담자 - 제가 너무 재밌어하는 단어입니다 - 로 생각하시고 저는 스스로를 불신자로 생각하지만 가끔 성당에 갈 때가 있어요. 멕시코 신부님이 계시다면 좀 더 자주 갈 것 같은데...

굿바이 2011-03-29 10:46   좋아요 0 | URL
넵! 그런 즐거운 동작으로 회장님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답니다 ㅜㅜ

봄이 오면, 진짜 봄이 오면, 멕시코 신부님의 '스페인어 강좌'를 수강할까 생각 중입니다. 짱! 재미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
 
어쩌면 다음 생에 - 개정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선집 3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작가의 고충을 몰라서라기 보다, 실은 모르지만, 여튼 아무렇게나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작가는 그저 볕이 잘 드는 공원, 오래된 의자에 무심하게 앉아 술술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이 농축된 그러나 일관적이지 않은 어떤 감정들이 이미 존재하고, 그런 감정 덩어리를 만든 부조리한 사건들을 이미 경험했을 것이고, 그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나약함에 상응하는 괴물을 만났을 것이다. 그다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쓰고, 스스로 혹은 타인을 통해 절망하고, 그럼에도 잠시 의기양양해져서 거듭 쓰기를 반복하지 않았을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책을 읽으며 나는 잠시 그런 공상에 젖었다. 물론 맥락은 없지만 그런 공상에는 작가의 작품을 영화로 한 <태양은 가득히_Plein Soleil,1960>가 있었고, 거의 동시에 알랭드롱의 눈빛과 푸른 지중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으로 돌아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어쩌면 다음생에_Not in this Life, Maybe the Next>는 열한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들을 읽다보면 그녀의 작품에는 사르트르나 까뮈 또는 포크너의 그림자들이 아지랭이처럼 어른거린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선함에 대한, 합리성에 대한 조롱들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독자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부조리한 그리고 앞으로도 쭉- 부조리할 가능성이 농후한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일일까. 어이없고 분노하지만 견디고, 미화하고, 이해시키고, 희망하는 일로 일관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아니면 조롱하고, 대들고, 버티고, 때로는 펀치를 날리는 것이 최소한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받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니다. 선택을 하라면 후자로 하겠다. 물론 내 경우에는 말이다.   

열한 편의 단편 중<단추>,<우연한 특종>,<애완동물 공동묘지>,<어쩌면 다음생에>,<나는 남들만큼 유능하지 못해>등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단추>라는 작품은 행복했던 부부에게 다운증후군인 아들이 태어나고, 그 후 아내는 온전히 아들에게 헌신적인 삶을 살지만 남편은 자신의 불합리한 운명에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느 밤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과 신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의 한 사내를 살해하고, 사내의 옷을 여미던 단추 하나를 전리품처럼 뜯어온다. 이후 주인공은 아들을 힐끔거리고 수근대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 그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불편한 현실을 견딘다. 이러한 주인공의 어처구니없는 행동, 살인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현실이라면 마땅히 댓가를 치뤄야 할 행동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분노와 절망에 대해서라면 나는 오히려 부인의 행동보다 남편의 행동이 훨씬 쉽게 이해되었다.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죽은 애완동물을 박제로 만들어 정원에 두는 아내, 그 으스스한 취향을 강요당하던 남편이 어느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취향이었던 사랑했던 옛 애인의 모습을 한 마네킹을 정원에 들여놓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 행동으로 부부는 파국을 맞지만 취향을 강제하는 아내에게 고스란히 자신의 취향을 돌려주는 발랄한(?) 복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의 얄밉지만 정당한 비아냥이 잘 들어난다.     <나는 남들만큼 유능하지 못해>는 현대인의 공포와 불안 그리고 강박적인 집착을 매우 건조하게 그러나 재치있게 풀어낸 단편이었다. 읽는 내내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머쓱하고 서글펐다. 끊임없이 비교당하거나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그렇기에 덤으로 우울하고 불행해지는 삶을 한 남자의 소소한 일상을 통해 잘 조명하고 있다. 시작은 마이다스의 손을 가진 이웃남자의 행동들을 관찰한 주인공이 자신은 창틀의 페인트칠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참으로 서늘하다. 

책은 시작과 끝을 고민한 흔적이 없다. 그것은 작가가 정녕 고민없이 꾸역꾸역 밀어넣었던 무엇인가를 배설함으로써 혼자만의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모습들을 가감없이 드러냄으로써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굉장한 용기이자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교훈이나 감동을 의도하지 않는 자세, 인위적으로 지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해피앤드를 끌어내지 않는 진중함, 이것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요 통감이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시작과 끝을 고민한 흔적이 없는 작가의 글이 더 아프고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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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3-16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나겠습니다. 읽어야짐.

굿바이 2011-03-17 11:04   좋아요 0 | URL
치니님,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저도 어느 부분은 매우 합리적이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이 그닥....
여튼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