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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처럼 마지막도 아름다웠으면 싶은 것이 어찌 사랑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명확한 성과를 기대한적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흔들어 깨우고, 지금 이 시절을 이야기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그 시작이 국회라는 곳이었기에 충분히 뜻깊었다. 적지 않은 시간 그곳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있어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기대라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쩌냐. 저런 마무리를 기대했던 것은 아닌데.

 

 

세상이 달라졌다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차라리 다른 이유를 말했으면 조금은 편했으려나. 하기야 좀 편하다고 감동이 있었을리는 없다. 여하간 시인의 말처럼 이제 다시 벗들은 말수가 적어질테고 세상은 고요해질 것이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서 준비는 되어 있지만 여느 때보다 허황하다. 삼월은 봄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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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 외로운 오후다. 한강이 꽁꽁 얼었던 날도, 보름달이 덤벼들던 밤도, 무사히 살아냈는데 이건 또 뭔지. 겨울이 작정하고 버틴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바람은 아파트 담벼락에 부딪혀 더 거세게 윙윙거릴뿐인데 어쩐지 내 귀에는 '가기 싫다, 가기 싫다, 네 곁에서 너를 더 움츠리게 하고 싶었다, 벌벌 떨게 하고 싶었다'로 들린다. 택배를 받기 위해 열었던 현관문 틈으로 쏟아진 바람 한 줄기가 발목을 노린다. 귀도 멍멍한데 발목도 아프다. 이명인지 환청인지 그저 환상통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들뜬 혈통

 

허연

 

하늘에서 내리는 뭔가를 바라본다는 건

아주 먼 나라를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들뜬 혈통을 가진 자들은

노래 없이도 노래로 가득하고

울음 없이도 울음으로 가득하다

 

짧지 않은 폭설의 밤

제발 나를 용서하기를

 

심장에 천천히 쌓이는 눈에게

파문처럼 쌓이는 눈에게

피신처에까지 쏟아지는 눈에게

부디 나를 용서하기를

 

아주 작은 아기 무덤에 쌓인 눈에게

지친 직박구리의 잔등에 쌓인 눈에게

나를 벌하지 말기를

 

폭설에 들뜬 혈통은

밤에 잠들지 못하는 혈통이어서

 

오늘 밤 밤새 눈은 내리고

자든지 죽든지

용서는 가깝지 않았다

 

더는 나쁜 인간으로 살지 않겠노라고 아무리 손을 털어도 뱉어 놓은 말들과 함부러 저질러 놓은 일들이 한꺼번에 날선 바람이 되어 달려드는 날이 있다. '뻔뻔하다고, 이제와서 이러면 웃긴다고, 네게 줄 구원이 있다면 북극곰 한 마리를 살리는 것이 훨씬 가치있는 일이라고' 오늘이 그런 날이다. 어쩌면 매일이 그런 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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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찰리 문학동네 시인선 68
여성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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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너의 슬픔이구나 이 딱딱한 것이 가끔 너를 안으며 생각한다" 여성민시인의 「불가능한 슬픔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런, 꼼짝을 할 수가 없네. 붙들렸다. 시의 행간에. 시인의 호흡에. 그래 나는 이럴 때 그냥 울고 싶더라니. 그러니까 붙들릴 때.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저 짐작만 할 때, 그제야 비로소 사유라는 것을 하게 될 때. 나는 꼭 울고 싶더라니. 그리고 이 문장을 쓰다듬어 발과 발 사이에 가만히 놓고 싶었다. 손으로 만지지 않고 복사뼈로만 느끼고 싶었다.  

 

 

불가능한 슬픔

 

여성민

 

 

이것이 너의 슬픔이구나 이 딱딱한 것이 가끔 너를 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플라스틱이다

 

몸의 안쪽을 열 때마다 딱딱해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플라스틱

 

하지만 네가 부엉이라고 말해서 나는 운다

 

피와 부엉이 그런 것은 불가능한 슬픔 종이와 철사 인디언보다 부드러운 것

그런 것을 떠올리면 슬픔은 가능하다

 

지금은 따뜻한 저녁밥을 생각한다

손으로 밥그릇을 만져보는 일은 부엉이를 더듬는 일 불가능한 감각

 

상처에 빨간 머큐로크롬을 바르고 너를 안으면 철사와 부엉이가 태어난다

 

철사로 너를 사랑할 수 있다

 

종이에서 흰 것을 뽑아내는 투석 그러나 너를 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플라스틱이다

 

다른 몸을 만질 때 슬픔이 가능해지는

 

불가능한 플라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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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나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임순정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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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앙 비베스의 그림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3초의 망설임도 없이 집어왔다.

폴리나 울리노프. 이 그림책의 주인공인 여섯 살 소녀. 그림책은 보진스키 발레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치르러 가는 소녀의 뚱한 표정과 보진스키 선생의 더 뚱한 표정으로 시작한다.

 

 

 

 

소녀의 성장과 사랑, 예술에 대한 열정이 주된 이야기인 이 그림책은 군더더기 없고 유연한 데생이 압권이다. 그림책을 두고 그림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좀 우습지만 책장을 넘기는 동안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수백 번은 그림을 쓰다듬었다. 소녀의 춤이 보진스키 선생의 마음이 심지의 그의 얼굴을 반 이상 덮고 있는 수염이 손끝으로 전달될 것만 같아서였다.

 

 

 

보진스키 선생이 "유연성과 우아함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폴리나 보다 더 심술 난 얼굴로 그림책을 노려보았다. 인정은 하지만 뭐랄까 그것을 활자로 대할 때 느껴지는 열패감이란. 신음에 가까운 끙,소리가 절로 났다. 

물론 선생은 폴리나의 재능을 이미 알아보았고, 어쩌면 오래 기억하게 될 소녀라는 것도 감지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재능있는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 타협은 없었다. 춤꾼의 기질을 타고났더라도 연습을 하지 않고 그것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보진스키 선생은 말한다. "더 경쾌하게, 쉽게 하는 것 처럼 보여야 해"  물론 이 말이 갖는 의미와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이런. 말이 쉽소! 막, 이렇게 대들고 싶었다. 너무 몰입하나 싶었다. 늙었나?

 

여튼 폴리나라는 한 소녀의 성장기가,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환장하게 우아한 그림들로 변해 200쪽 그림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극적인 상황도 없고, 뒤숭숭한 암시도 없고, 애타는 관계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예술이라는 것에 투신한 소녀의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희열이 과장 없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인으로 성숙한 폴리나의 춤이 그리고 보진스키 선생과 왈츠를 추는 장면이 그려진 마지막 장면은 꼭 실제하는 장면을 보는 것 처럼 아름다웠다. 쉽게 그려진 것 같은 그래서 어떤 기교도 없는 것 같은 바스티앙 비베스의 천재적인 그림 실력이 끌어낸 감동이었다.

 

뭐든 대가의 그것들은 다르구나. 그것이 그림이건 춤이건 연주건 노래건 전혀 힘을 들이지 않은 것 같은 아무렇게나 슥슥,하는 것 같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런 건 정녕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타고나야 하는 것, 보진스키의 입을 빌려 작가가 하는 말 "춤은 예술이고, 타고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이 이가 갈리도록 분하지만 할 수 없는 노릇.

여튼 이 아름다운 그림책은 이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랑하는 소녀, 더 나아가 심정적으로 여전히 소녀로 머물러 있는 그녀들에게 선물할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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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1-1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은 예술이고, 타고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 - 글쓰기도 이렇다고 하면 저도 이 갈리도록 분해요. ㅋ

저를 큰엄마라고 부르는 조카 초등생들에게 선물하면 될까요? 저도 읽고 싶은데...ㅋㅋ

좋은 소개, 보고 갑니다.

굿바이 2012-01-19 00:28   좋아요 0 | URL
pek0501님의 글을 종종 그것도 열심히 읽는 제 속내를 말씀드리자면 충분히 타고난 게다가 훌륭한 글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비장한 어투로 말씀드리는 것인데...보이지가 않으니 참...아쉽습니다.

너무 어린 초등학생이 아니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치니 2012-01-1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가 갈리도록 분하다 - 으흑흑, 동감 동감요.
이런 책을 딱 알고 선물해주는 이모가 있는 조카 님은 얼마나 좋으까요. 그나저나 요새 조카 님 이야기가 뜸해요 ~ 궁금. :)

굿바이 2012-01-19 00:31   좋아요 0 | URL
우리 귀연양이 요즘 쫌 이상합니다요.
뭐랄까 소녀적 심술이 살짝 보이려고 하는 듯!!!!

아~ 우리 귀연이는 대한민국의 모든 이모가 다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할겁니다. 저는 뭐 평균이죠 ㅋㅋㅋ

風流男兒 2012-01-18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나쁜 책이군요. 사야겠어요.

굿바이 2012-01-19 00:32   좋아요 0 | URL
오~! 보이 ^^
집에 오거든 훔쳐가시오!

라로 2012-01-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왜 여아들이 웃통을 벗고 춤을 추나요??;;;;
이런 책을 딱 알고 선물해주는 이모가 있는 조카 님가 부러워요,,,우리 딸이 갑자기 막 불쌍해요,,ㅠㅠㅠㅠㅠㅠ

참! 저 겉은 쭈글거려도,,,,심정적으로 여전히 소녀로 머물러 있는 그녀인데요,,( ")ㅎㅎㅎㅎㅎㅎ

굿바이 2012-01-19 00:35   좋아요 0 | URL
음...저도 그게 살짝 궁금했는데, 어린 나이라 그런게.... 딱히 몸에 맞는 발레복이 없나???? 아님 발레스쿨에 입학해야 옷을 사줄까요???? ㅋㅋㅋ

에이~ 나비 님 같은 엄마를 둔 딸이 불쌍하면...에이~ 그건 아니죠~!
아이고...부담스럽지 않으면 비밀글로 주소 남겨주세요^^

cyrus 2012-01-1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베스의 신간이네요. 아직 안 읽어봤지만 이 만화가가 그린 <염소의 맛>이 생각났어요.
한 번 읽어보려고 했는데 제가 이용하는 공공 도서관에 없어서 아쉽기도 했어요.
리뷰 덕분에 처음으로 비베스의 일러스트를 보게 되었네요 ^^

굿바이 2012-01-19 00:38   좋아요 0 | URL
역시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을 알고 계셨군요.
cyrus님 만세!!!ㅋㅋㅋ
<염소의 맛>도 좋았지만 <폴리나>의 데생과 이야기도 참 근사합니다.

비로그인 2012-01-1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제 맘에 쏙 들어요.. 봐야겠어요!!!

굿바이 2012-01-19 00:38   좋아요 0 | URL
후회없으실 겁니다. 만약 실망스럽다면 말씀하세요.
환불 및 교환이 가능하다고....ㅋㅋㅋ

W 2012-01-1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마법사가 저에게 이 책을 매일 추천해줘서 보관함에 담아놨었는데요. 역시나 사야겠어요! 히힛. 느끼는 바가 매우매우 많을 것 같아요. 너무 좌절하면 어쩌죠? ㅜ_ㅜ (나도 무용은 바라지 않고 요가나 어떻게 좀;;;; ㅋㅋ)

굿바이 2012-01-20 17:30   좋아요 0 | URL
오늘도 요가를 가야하는데, 무섭다 ㅜㅜ

네꼬 2012-01-19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땡스투예요. 몰랐던 세계! 굿바이님 감사해요!

굿바이 2012-01-20 17:30   좋아요 0 | URL
우와~! 감사해요!!! 네꼬님!!!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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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신작 <黑山>의 후기 중 일부분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儒者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 격절의 벽에 내 말들을 쏘아댔다.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  

누구도 단념할 수 없는 삶,이라니. 이 대목을 중얼거리며 소설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복기했다. 
이내 누구도 단념할 수 없는 삶,이라는 말에 가로막혀 한 발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말의 낭떠러지 앞에서 상념들이 거침없이 풀렸다.
남풍이 부는 초겨울의 해안가를 벗어나 흑산으로 들어가는 약전에게 뭐 그리 큰 희망이 남아 있었을까, 상복을 입고 배론으로 떠나는 안개 자욱한 새벽 황사영에게 기약할 날들이 있었을까, 제 목숨 하나를 위해 염탐하고 밀고하는 박차돌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준비되어 있었을까, 군소리없이 약전을 받아들이는 순매의 몸에는 또 어떤 열락이 허락되었을까, 그럼에도 고등어나 날치나 게처럼 누구도 단념할 수 없는 삶이라니. 기막히고 뒤숭숭한 마음은 절로 터져 누군가에게 따진다. 신기하게도 돌아오는 응답은 황사영이 무릎 꿇고 바치는 기도문이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 기도문 안에는 낡고 무력하고 위압적인 세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리고 기도문 밖에는 매 맞지 않고 굶지 않고 사람이 가축처럼 팔리지 않는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 또한 새로운 세상은 노래같은 기도문을 타고 사람들의 가슴에 이미 세워졌다. 꼭 올 것만 같은 세상이고 반드시 와야만 하는 세상이 매 맞고 굶어 죽는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었다. 방울 세 개를 단 기발로는 어쩔 수 없는 마음들이 이미 차고 넘쳤음을,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분명하기에 두려운 세상이고 갈급한 기도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돌아온 저 기도문이 나는 더 싫었다. 차라리
어서 맞아 죽게 하소서. 
어서 굶어 죽게 하소서.
당신 보기에 이런 우리가 불쌍하거들랑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엎어서라도 우리를 구하소서.
그럼에도 주여 당신이 새로운 세상을 내어 줄 수 없거들랑 
삶을 단념하는 우리를 기꺼이 품에 안으소서.
이렇게 고쳐서 기도하고 싶었다. 
기도가 될 수 없는 말이고 말도 안되는 말이다.  
       
책을 덮고 속표지에 그려진 '가고가리'라는 괴수의 그림을 보았다.
김훈이 시조새의 화석 사진을 보면서 그렸다는 괴수 '가고가리'는 어딘지 엉성하고 조악했다. 괴수는 태초로부터 하늘과 바다와 땅에 함께 있어야 할 풍경 같았지만 그럼에도 열외 존재처럼 느껴졌다. 모든 불행의 근원이 그림 한 장 안에 다 들어있는 듯 했다.
저리 생긴 것이 가고 또 가는구나.
가고 또 간다,라는 말이 그제야 눈물겨웠다.
처음부터 이 소설은 가고 또 가야만 하는 것들의 이야기였구나. 그러니 처음부터 함부로 가늠하고 휘저을 수 없는 이야기였구나. 뭐든 끝까지 가보지 못한 내가 끝도 없이 가는 것들의 속내를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에서 문학이라도 불온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무참했다. 끝까지 버텨보지 못한 나는 말도 마음도 아꼈어야 했는데 후회는 늘 이렇게 아무런 힘이 없다. 

눈 앞에 흑산이 보이고 해안에서 무심히 생선의 아가미를 들여다보았을 약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심 나도 그렇게 가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싶다.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어설프게 떠들지 않고 어줍잖게 휘젓지 않으며 그렇게 가고 또 가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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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1-12-0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사실 별 생각안하고 들었다가, 많이 멍했었어요.

굿바이 2011-12-08 12:02   좋아요 0 | URL
그대처럼 나도 짧게 남길 걸....

나는 배론성지도 갔었고, 절두산도 갔고, 흑산도 갔는데... 그래서 더 멍했었어. 진짜 멍-------

風流男兒 2011-12-09 09:26   좋아요 0 | URL
길게 쓸 능력이 안되서 짧게 남기고 있어요 요즘은 :)
쓰다가 어느 순간 보면 너무 어설프고 부끄러워요 ㅎㅎㅎ

W 2011-12-09 12:13   좋아요 0 | URL
저도요. ㅜㅜ 길게 쓰는 것이 뭐든 어려운 것 같아요.
굿바이님의 글을 읽는 걸로 늘 아쉬운 마음을 달랜달까요.

그러니까 글좀 많이 많이 써주십셔~ 굽신굽신

흰 그늘 2011-12-0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굿바이님.. 그동안 홉스골 호숫가로 가신줄 알았드랬어요^^
흑산에도 가셨던 거여요..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어설프게 떠들지 않고 어줍잖게 휘젓지 않으며
그렇게 가고 또 가면 좋겠다 싶다.' 정말이지 마음에 담을수 있엇으면 하는 말이네요..

굿바이 2011-12-08 12:04   좋아요 0 | URL
아이고, 흰그늘님 잘 지내고 계시죠?
참으로 반가워요~:)

그나저나 홉스골 호숫가에 정말 가고 싶은 날들입니다~!

비로그인 2011-12-07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남한산성]에 여러 번 등장하는 말이 떠오르네요.
그리 되었으니 그리 알라. 김훈은 늘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는 걸까요? ( '')~

굿바이 2011-12-08 12:06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런 마음으로 쓰지 않을까 싶네요 ;)

저는 작가의 <현의 노래>와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이후의 작품은 어떤 건 기대가 컸던 것도 있고...여튼 한 편이라도 더 남겨주시면 좋겠다 싶어요 :)

2011-12-08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8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1-12-1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을 휘젓고 다니는 요상한 한 뇨자가 있는가 봅니다..
(어흥, 그러면 쓰나?...)

흑산에 계속 눈길이 가긴 가는데.. 언제 읽지 싶네요...
줄세워둔 책들에 밀려 한 일년쯤 뒤? ㅎㅎ엄살이고요 굿바이님 리뷰 읽고 나니까
급속도로 거리가 가까워진 느낌이네요..

굿바이 2011-12-14 12:38   좋아요 0 | URL
꽃도둑님도 알고 계셨군요?^^

저도 책상에 쌓인 책이...아무래도 몽땅 팔아야겠습니다 ㅋㅋㅋ
김훈작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찌찔한 삶을 위로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고, 그래서 또 답답하고!

블리 2011-12-1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제 리포트 마감이라 [흑산]으로 7장짜리 글을 썼는데 여기서 또 언니의 흑산을 만나니 반갑고 아프고;; 이런 책을 독서 과정 분석 과제로 내주신 교수님께 고맙기도 하고 -리포트 아니었음 읽지 않았을테니- 따지고 싶기도 하고 -아니, 분석을 하기엔 너무 절절한 얘기들이 잖아요;- 뭐 그런 맘으로 썼어요. 전 박차돌과 한녀의 얘기 이후로 계속 속이 울렁, 왈칵~ ㅠㅠ 교수님 덕에 분석하다 보니 평정심으로 돌아왔지만. 마침 이번 주 `낭독의 발견` 녹화가 김훈 편이란 걸 알게 돼서 방청신청 했는데 되려나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제 방학입니다. 너무~ 좋아요! ^^

굿바이 2011-12-20 08:44   좋아요 0 | URL
오호~ 블리의 리포트 굉장히 궁금하다.

그나저나 이제 방학이구나. 얼굴 한 번 보자 :)

Tomek 2011-12-2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고 양화진성지에 갔었어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토요일 오후였는데, 매일 그곳을 지나다니면서도, 유심히 바라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빗물이 베어든 잠두봉은 흡사 핏물이라도 흘리는 듯...

이곳에서 목이 베이고 허리가 끊긴 사람들은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하긴, 그곳은 봄에도 항상 쓸쓸한 풍경이었어요...

굿바이 2011-12-21 17:42   좋아요 0 | URL
무섭고 외로웠다,는 표현이 제일 정확할 것 같아요.
몇 번 다녀온 곳이지만 그곳에 가면 매번 몸도 마음도 아팠던 것 같아요.
상상을 하면 저는 정말 참아낼 수 없는 공포와 고통이었을 것 같아서...

봄에도 쓸쓸하던가요?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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