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는 핑계로 사람 구실을 못하니 원성이 자자하다. 예감했던 일이라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저 내가 바쁜 동안 다들 무탈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심지어 열심히 빌었다. 물론 기도로 해결된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나도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늙어 시작한 공부는 더디기만 한데, 늙어 시작한 공부라는 이유로 다들 뭔가 잘해주기를 바라니, 짜낼 수 있는 시간은 다 짜낼 수 밖에. 결국 생명줄을 끊어서 가방줄로 연결하는 셈이다. 어리석고 무모한 나의 가을은 이렇게 가고 있는 중.

 

그런 와중에 김양의 방문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다. 김양이 많이 참은 것이지, 몇 번을 달려와도 왔을 터인데 나를 많이 배려한 것이지. 그러나 올 것은 온다. 그럼 그렇지. 가을인데. 사랑이야기가 빠질 계절이 아니지. 진짜 가을이니까. 김양의 가을은 늘 그러했으니까. 따순 정종에 오뎅탕을 혼자 먹을 수는 없는 일이며, 둘둘 감은 스카프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비밀같은 눈인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김양의 말대로 우리는 그렇게 사랑이 필요한 계절을 살고 있으며, 이 계절을 또 살아내야 하니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오로지 나만 빼고. 오로지 나는 기필코 제외하겠다는 신의 각오가 있는듯 뭐 그렇게. 엠병할.

 

어찌되었건 이번에는 잘되라. 그리고 이번에는 왠지 예감이 좋더라.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상대가 그렇고, 선한 눈매가 그렇고, 상식적인 생각들이 그렇다. 그러니 더는 어떤 아슬아슬함이나 애절함에 이끌리지 않기를, 그저 둔하더라도 따뜻하고,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맑기를, 스스로를 파먹지 않고 서로 단 것들을 그저 나눠먹기를, 그래서 지칠 마음도 내려앉는 한숨도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내가 못한 일이라 어쩌면 더 간절하게 바라는 일인지도 모르겠고.

 

집에 돌아와 신해욱의 산문집『일인용 책』을 잠깐 집어 들었다.

이 가면은 일종의 위선일까.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알량한 위선이나마 이기적 성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가려주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이 가면이 우리의 얼굴에, 우리의 마음에 들러붙어 아예 떨어지지 않기를, 시작은 가면이었으되 언젠가는 가면이 얼굴 자체가 되기를, 그날 친구와 나는 우리의 치사한 마음과 함께 이 소망을 눈빛으로 공유했다(41페이지).

 

12월에 방학하면 그때 보자. 우리 가을을 살고 보자. 햇빛을 따라다니지 말고, 바람의 방향으로 서지 말고, 나무에게 말 걸지 말고 그렇게 살살 이 가을을 살고, 눈 내리는 가을에는 그저 또 눈 내린다고 적당히 웃으면서 그렇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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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5-10-2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굿바이 님. :)
무슨 공부를 하시는진 모르지만, 무조건 응원 또 응원. 사람은 어차피 평생 공부해야 하는 거 같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위선 좀 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위선이라도 떨면 세상 그나마 겉으로라도 살 만하지 않을까 그런 패배주의적인 바람.

굿바이 2015-10-28 21:44   좋아요 0 | URL
치니님 잘 지내시죠??
어찌지내시는지 가끔 궁금합니다요:) 돈안되는 공부 하고 있습니다. 저는 늘 이래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