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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작가와 독자도 나름의 '궁합' 혹은 만나야 할 '때'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다수의 독자에게 지지를 받지만 내게는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책들도 있었고, 나는 좋았는데 주위의 반응이 썰렁했던 경험도 있었다. 또한 그 책을 읽은 시기에 따라 이해나 감동이 달랐던 적도 있었다. 특히 외국 작가의 작품들이 종종 그랬던 것 같다. 아마, 작가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가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는 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번역이 주는 문제도 있을 것이고. 여튼 도스또예프스키가 그런 작가였던 것 같다. 그의 위상을 어느 대목에서 느껴야 하는 지 잘 모르겠는, 어느 대목에서 박수 쳐야 하는 지 잘 모르겠는, 계속 어리둥절하게 만들거나 혹은 불편하게 만드는 작가. 그런 작가의 평전을 읽는 일은 그의 소설을 읽는 일보다 좀 더 힘들었다. 물론 어느 부분은 그에게 씌운 선입견을 걷어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혹자는 작가 도스또예프스키와 인간 도스또예프스끼를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 문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철저히 고민하고 대답해야 할 대목이겠지만, 개인적인 선호를 넘어 사회적으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는 경우 그 둘을 분리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물론, 나의 이런 잣대는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친일의 흔적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내가 좋으니까, 그런 것들을 슬쩍 무시하고 '작품'을 좋아하는 건데 뭐 어떠냐는 식으로 자기 변명을 하기도 했다. 화가의 경우는 더 많고. 그런데 유독 도스또예프스키에게 왜 이런 촘촘한 자를 들이댔었는가. 그것은 작품에서 작가와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인 성향을, 혹은 그의 좀 덜 떨어진 행동들을 부러 끄집어내서 내 비판을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못났다.
여튼 E.H.카의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중 19장 '시사평론가로서의 도스또예프스키' 는 그의 정치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어 특별한 부분이었다. 그의 <작가 일기>를 읽어 본 적은 없지만, 러시아 문학을 부분적으로 소개한 박노자의 글이나 다른 평론가들의 인용구를 통해 짐작만 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이 부분에서 좀 더 보충할 수 있어서 유용했다. 1877년 4월 <작가 일기>에 도스또예프스키가 쓴 글의 일부 구절들을 옮겨보면 이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 우리는 터키인들에게 억압받고 있는 우리의 형제 슬라브족들을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어나고 있다. 전쟁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무력한 부패와 정신적 질식 속으로 몰아는 공기를 말갛게 씻을 것이다.
사회가 불건전하고 병들었다면 지속적인 평화라는 훌륭한 것도 사회에 혜택이긴커녕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유럽의 역사에서 한 세대라도 전쟁을 겪지 않고 지나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전쟁은 분명히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며 건강을 주는 것이고 인간성을 키워주는 것이다. (p.326)
정보를 장악하는 사람이 권력도 장악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러시아 문학을 특히 도스또예프스키의 문학을 소개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작가 일기>와 같은 저널의 소개는 왜 슬쩍 뒤로 미루어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밥벌이는 늘 고달프기 때문에,라고 이해하자니 입이 쓰다. 여튼 카의 말대로 러시아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작가의 이런 정치적 성향은 고스란히 그의 종교적인 성향과 같은 스탠스를 유지할 것이다. 여기서 그의 종교관이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의 모든 소설에 종교적 수난과 회심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튼 주전론을 말할 수 있는 작가라면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도 정통주의에 가까웠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다. 유독 수난과 회심을 강조하는 그 마음도 좀 알겠고.
다시 책으로 돌아와 E.H.카의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은 일방적인 상찬도 아니고, 일방적인 비아냥도 찾기 힘든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책이다. 또한 책의 구성 중 3,4부가 인상적이었는데, 많은 부분 작가의 작품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사고의 틀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가를 갑자기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 곡해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죄와 벌>의 경우 나는 도통 그 결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논리적이고 치밀한 주인공이 범죄 행위를 저지른 후 갑자기 벼락맞듯이 회심하는 과정은, 아주 버릇없고 거칠게 표현하면 작가의 정신세계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카는 이렇게 적고 있다.
라스꼴리니프로부터, 그를 둘러싼 후광과 그의 무모성과 그의 일관성 없음과, 그의 애타적 충동을 떼어 보라. 그러면 거기에 개인주의적 자기만족을 궁극의 선으로 설교하는 완벽한 쾌락주의가 드러난다. (P.236)
인간에게 일관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냐고, 늘 주절거리면서도 막상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 앞에서 신경질을 내는 꼴이니, 나야 말로 내가 주장하는 일관성 없는 인간을 대표하는 격이다. 본인이 믿는 것을 실천까지 하는 놀라운 재주다.
그럼에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분명 놀라운 구석이 있다. 아마 그를 위대한 작가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이 지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비슷한 맥락의 글을 이문열에게서도 읽은 적이 있다.(물론 이문열씨가 도스또예프스키를 높이 평가하는 맥락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한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예언자적인 그의 통찰은 당연히 신의 존재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현대 세계는 도스또예프스키의 전제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의 결론은 거부한다. 그의 종교에 따르면 그는 구질서에 속해 있고, 그의 심리학을 따르자면 그는 새로운 질서에 속해 있다.....그는, 그의 신관과 떨어진 그의 인간관이 불가피하게도 오늘날 함몰되고 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불모성.비관주의로 인간을 몰고 가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역사적 책임은 남는다. 도스또예프스키는 대중을 벼랑 끄트머리로 안내하고는 그들이 가파른 파탄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쯤 썩은 낡은 재목으로 엉성한 울타리를 친 사람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p.383)
카는 작가의 신학이 낡은 것이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의 진정한 비중이 드러날 것이라고 썼는데, 이 알쏭달쏭한 말에서 오히려 나는 도스또예프스키의 문학을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하는지 감을 잡은 셈이다. 작가와 그의 작품에 애정을 가질 수 있을 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작품을 읽어 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꽂이에서 맥없이 잠자고 있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다시 쳐다보며 '죄와 고통'에 관한 그의 '신학'을 잘근잘근 음미하는 한 주가 될 것이다. 이 또한 내게는 찬란한 수난이 될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