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문학과지성 시인선 444
이준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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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 출신이라 그런지 시 같은 운문의 형식적 특성에 관심이 많다. 구사하는 어휘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이제니라든가, 낯선 이미지를 랜덤해 보이게 나열하는 가운데 기묘한 정서의 층위를 쌓아나가는 작가들(시인은 아니지만 이 모범 사례는 정영문이다)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터다.

짧은 글은 응축성이 생명이므로 복잡한 문장구조가 들어설 곳이 없다. 여기에서 ‘컴퓨터가 랜덤한 어휘를 조합하여 생성한 시’라는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다. 실은 정말 옛날부터 있던 시도이고, 최근에는 머신 러닝이나 딥 러닝의 부상으로 더욱 현실적인 얘기가 되었다.

이준규의 시를 읽으며 이러한 ‘조합 가능성’의 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에서 대부분의 작품은 문장구조가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이따금 등장하는 대구(對句) 역시 확률을 도입해서 프로그래밍 가능해 보인다. {황조롱이}가 한 예다. 수식어나 목적어를 뺀 이 시의 전문은 이렇다. ‘여자가 갔다. 그는 쫓아갔다. 그가 말했고 그녀가 말했다. 페페가 있었고 사사가 있었다. 경대가 있었고 분무기가 있었다. 나는 씻었다. 황조롱이도 있었다.’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구도 하나 있는데 뺐다.) 여기서 사용된 명사는 여자, 그, 페페, 사사, 경대, 분무기, 황조롱이가 전부다. 동사는 모두 과거형으로 갔다, 말했다, 있었다(이수명이 지적하듯 이 시집에는 ‘있었다’가 정말 많이 나온다), 씻었다가 끝. 요컨대 얘네들을 적당히 조합하고 특정한 정서로 유도해나감으로써 시를 쓸 수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멍}도 비슷하다. ‘커피가 있었다. 비극은 없었다. 보이는 건 등대였나.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너는 있었다. 상관이 없었다. 이미지는 없었고 그것이었다. 그뿐이었다. 커피는 있었다. 그러나 비극은 없었다. 흐렸다. 나는 기다린다.’ (이 작품에는 접속사도 하나 있는데 빼지 않았다.) 이 시의 경우 어미(語尾)의 문제가 대두되고, 다른 시들로 확대하면 이러한 예외적인 요소가 많아지긴 하나, 예외는 예외라는 이름의 규칙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규칙과 알고리즘으로 기본적인 뼈대를 생성하고 후처리 시 인간적인 감성과 불규칙성을 덧입히면 뭔가 이런 시를 쓸 수도 있을 것만 같다.

… 바보 같은 얘기다. 그런 프로그램을 짜고 수동으로 후처리를 가하는 노력을 기울일 바에야 대충 졸문을 쓴 다음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가공해나가는 게 효율적인 작법일 터다. 하지만 또 창작이라는 게 효율을 추구하는 활동은 아니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모순의 모순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형식에 관한 이야기만 한 것은,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딱히 그의 문장에서 정서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한 탓도 있다. 이건 문장구조나 시어의 문제는 아니다. 단순히 정서적 코드가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이 옅은 감정의 농도가 애초에 시인이 의도한 바일 수도 있다(시인 본인은 ‘슬픔만을 남기고 싶었다’라고 썼지만 말이다). 나는 미원 넣은 음식을 찬양하는 쪽이고, 이 시집에서는 미원 비슷한 맛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사족이지만, 이준규 역시 2016년 말 문인들의 성추문 폭로에 연루되었다. 물론 그래서 까겠다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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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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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같지 않은 서늘한 바람이 분다. 여름에 나는 공선옥을 읽고 김애란을 읽고 정유정을 읽었다. 남루하고 상처투성이에 때로 영화보다 더 잔혹해서 외면하고 싶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포착한 문장들. 나는 오랫동안 현실에 고개를 돌리고 장르소설에만 탐닉했던 것 같다. [퍼니 게임]은 아무렇지 않게 보면서 [대학살의 신] 같은 영화는 도저히 눈뜨고 보지 못하곤 했다.

그러니까 [바깥은 여름] 역시 내게는 정말 읽는 게 고역인 책이었다. 극적인 갈등이나 파국, 자극적인 소재 따위 없이 오히려 너무나 단단히 현실과 삶에 발을 붙이고 있어 읽기 힘든 소설들이 모여 있었다. [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이미 읽었던 {침묵의 미래}는 예외였다. 이 소설집에 같이 묶이기엔 다소 이질적인 알레고리인데, 나중에 알았지만 오히려 김애란의 초기작들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

나머지 수록작들에는 뭔가 공통되는 면이 있다. 사별(이별), 좌절, 당혹 같은 것들. 어떤 작품에서는 과거사이고 어떤 작품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한번 깊이 새겨진 상처는 여간해선 아물지 않고, 하나의 비극적 감정은 다른 비극적 감정을 부른다. 혹은 반복된다. 우리는 일단 마음에 깃든 어떤 어두움도 다시는 극복하지 못한다. 비애감은 시간이 흐르며 감쇠 사인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계속 랜덤하게 진동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아주 커지면 진동의 주기는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진폭 자체가 규칙적으로 감쇠하는 일은 없다. 책을 여는 {입동}은 이를 잘 보여주는 단편이다. 누군가를 잃고, 잃지 않은 것처럼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 책에서 김애란의 문장은 덤덤하고 먹먹하다. {건너편}과 {풍경의 쓸모}는 흔한 헬조선의 이별과 좌절의 과정을 그린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도 {입동}처럼 사별을 겪은 화자가 또 한 번 모종의 좌절을 겪는 내용이다. 스마트폰이라는 현대적 소재를 잘 활용했고, 마냥 슬프다기보단 웃프면서 어딘가 실낱만큼은 희망을 제시했다고 볼 수도 있어 책을 닫는 작품으로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리는 손}은 조금 중의적으로 읽힌다. 아마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지만, 작품의 태반을 이루는 독백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고 문단 단위로 따로 노는 듯해서 더 그런 인상을 받는다.

{노찬성과 에반}은 딱 다섯 쪽을 넘기는 순간부터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나지 않으리란 걸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가난하게 살던 어린아이가 휴게소에 묶인 유기견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 같은가? 모두가 행복한 결말 따위 있을 리가. 특히 이 소설이 더 슬픈 건, 이야기를 비극(이랄까 조금은 덜 슬플 수도 있는 결말이 아닌 결말)으로 몰고 가는 주체가 타인이 아닌 화자 자신이라는 점이다.

동시대 동년배 한국 작가가 쓴 이 소설들은, 읽기 괴로웠지만 동시에 내 주의를 환기해주었다. 거지 같은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있는 그대로 쓸 것. 갈 길이 머니 일단은 한국 소설을 읽는 양을 늘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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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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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을 읽지 않은 지 오래지만, 애니메이션에 반해 사둔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이 두 권 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사서 바로 읽고 오탈자를 정리해 장문의 이메일을 출판사에 보내기도 했다(답장은 받지 못했다 슈발). 나머지 하나인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최근에 읽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애니메이션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보게 된 건 [케모노즈메]를 보고 유아사 마사아키의 스타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원작과 99% 싱크로율로 애니메이션화하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는 애니메이션 감독 1순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핑퐁]이야 원작이 자타공인 천재의 작품인지라 논란의 여지가 없다만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가 내게 준 기묘한 감동의 쓰나미의 본질이 감독의 힘인지 원작자의 힘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원작 소설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먼저 애니메이션은 TVA에 맞게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추가하는 등 에피소드 개수가 더 많은 반면, 원작은 네 개뿐이다. 페이지가 적은 건 아니지만, 네 개 에피소드 모두 99% 똑같은 문장이 상당 부분 반복되므로 아쉬운 면이 있다. 당연히 애니메이션은 각 에피소드마다 베리에이션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많고, 한 에피소드가 한 분기를 다루는 만큼 횟수가 많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루프물로서의 면모가 강화되는 효과도 있다.

여기에 의고체(擬古體)를 텍스트로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게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애니메이션 또한 독백을 속사포 랩(아웃사이더보다는 의고체를 빠르게 읽는다는 점에서 가리온의 템포를 높인 버전이 가까울 거다)으로 처리할 만큼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제공한다. 게다가 문체의 맛을 느끼기에는 애초에 번역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더 나아가면 의고체로 유명한 히라노 게이치로와는 아예 용례가 다른 이 작가의 문체를 의고체라고 부를 수 있기나 한 건지도 의문이고.

결정적으로, 소설을 읽으며 내가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에 왜 그토록 경도했는지 다시금 자각할 수 있었다. 과거의 선택을 돌이킬 수 있다면 현재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가? 루프물이나 타임리프물에서 흔히 볼 수 있듯, 그렇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과거의 선택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해도, 우리의 현재는 그 전과 똑같이 여전히 불행할 것이다.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를 떠올려보자.

결과를 떠나, 몇 번이고 몇만 번이고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이 작품에서는 화자와 오즈와의 관계다. [11.22.63]식의 사랑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사랑이긴 한데, 어쨌든 사랑이다. 소설은 네 에피소드 모두 아카시와 맺어지는 것으로 끝나며 ‘성취된 사랑만큼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라는 폭력적인 서술도 서슴치 않지만, 애니메이션에서 거의 모든 에피소드 마지막에 부각되는 것은 오즈다(아카시라는 ‘진히로인’에 이르는 과정의 걸림돌로 의도적으로 설정한 장치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변하지 않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강한 감정을 목격하고 그 ‘운명의 검은 실로 맺어져’ 있는 그 ‘나름의 사랑’에 전율을 느낀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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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는 말한다
시모 지음, 유나니.정영리 옮김 / 민음사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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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들.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UMC식으로 말하면 “작년 여름 피자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 배달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나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소리치던 넌 정말 예뻤어”의 순간들. [릴라는 말한다]는 에로티시즘의 탈을 쓴 장광설 속에 그런 순간들을 빚어 넣는다.

소설의 1/4 지점에서 묘사되는 자전거 위에서의 아크로바틱한 핸드잡은 그런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다. 하지만 삶의 어떠한 강렬한 순간도 결국에는 흐려지듯, 이 장면 역시 희석되고 만다. 화자는 이 작품이 릴라의 말을 전술했을 뿐이라고 밝히며, 실제로 지면의 많은 부분이 릴라와의 대화로 점철된다. 대화의 주제는 물론 섹스, 모르는 사람들과의 섹스, 관음적인 섹스, 사탄과의 섹스 등이다. 앞에서 이를 두고 ‘장광설’이라고 말한 것은, 간단히 말하면 에곤 실레의 누드가 에로틱하게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지면의 나머지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비외쉔’이라는 마을에 대한 화자의 설명적 묘사다. 이곳은 한마디로 복마전이다. “동네 곳곳에 지린내가 나고” 화자는 “머리 위로 헌 냉장고가 날아올지 몰라” 결코 건물 가까이로 지나다니지 않는다(34쪽). “목요일 오후 이곳에 날씨가 좋을 때는 보통 섹스 장사를 하는 날이다. (…) 요컨대 이곳의 매춘은 이곳의 삶과 같은 것이다.”(76쪽) 여기에 아랍인, 파키스탄인, 말리인, 중국인 등이 얽혀 혼돈은 가중된다(프랑스의 이민자 문제는 대중예술의 단골 화두다). 19세 화자는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조금이라도 정기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나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을 한다. / 진료소에 가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달에 딱 한 번 피를 파는 것. 이미 얘기했듯이 피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108쪽)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두 번 말했다) 삶 속에서도 화자는 릴라에게 사랑(?)을 품는다. 사랑이랄까 애정이랄까 정욕이랄까, 흔히 10대의 첫사랑이란 복잡하다고들 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자(배경이 달랐다 쳐도, 성기 노출부터 시작된 관계인 만큼 성욕과 떨어뜨려 바라보긴 어려울 감정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예상대로, 이 사랑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장면의 피는 반전의 장치인 동시에, 존나 사족이다.

오늘 저녁의 나는 진부함이라는 단어로 이 소설을 반추한다. 삶의 강렬했던 순간. 감정, 사건, 동선. 결국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앉곤 했다. 소설 속 빛나던 파편도 장광설 속에서 그렇게 빛을 잃었다. 유감이지만 내용 면에서도 그렇다. 화자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볼 정황은 충분하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다. 때로 삶은 픽션보다 더욱 잔인하다. 때로 사람들은 다른 선택이 있는데도 다른 많은 사람과 똑같은 결정을 내리고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길을 택한다. 슬픈가? Whatever. 슬픔은 냉소로 이어지고 이 진부함의 순환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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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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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바닥에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몰아낼 수 없는 검은 정념의 소용돌이. 그것은 결코 말에 닿지 않고, 타인의 어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리 내어 말하기 저어되는 이 비관을, 헤세답지 않은 헤세만의 방식으로 담아낸 게 [황야의 이리]다.

석탄 때는 난로 냄새와 오래된 양장본 냄새로 차 있던 시골 중학교의 작은 독서관에서 헤세를 읽어나갔다. [데미안]이 시작이었고, 고2 여름 [황야의 이리]를 끝으로 장편은 모두 읽었다. 당시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같은 것도 없었고, 학교 도서관에서 세로쓰기로 된 판본을 빌려서 읽었다. 그렇지 않아도 구도자 헤세의 이미지를 배신하는 아방가르드(당시 내 인상으로는 그랬다)에 세로쓰기, 수험 공부와 무더위가 겹쳐, 지지리도 지난한 마지막 헤세 독서였다. 그러다 20대에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판본으로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헤세는 인간의 양면성을 탐구하는 구도자이나 도(道)를 외부 세계 어딘가 혹은 초월적인 존재에서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자아의 내면과 심층에서 추구한다. 여기에 데미안 같은 주변 인물을 활용하는 것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황야의 이리]에서는 그 역할이 헤르미네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흐려진다. 일단 헤르미네라는 인물이 실존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할러의 의식에서 비롯된 그 이름부터가 허구라는 심증을 더 굳히는 역할을 한다.

할러는 여러 인물을 만나며 자아의 내면으로의 항해를 계속해나가고, 그 결과 ‘살인’이 일어나지만 헤세는 이를 모차르트와 괴테의 ‘유머’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다시 한번, 여기서도 살인이 실제인지 허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헤세답지 않은 어둠이 파고든다.
 
사실 헤세 자신은 당대 평론가와 대중이 퍼부은 비판을 작품의 비관주의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결과로 봤다고 한다(물론 후대에는 반문화적 정서에 힘입어 컬트 소설로 등극하긴 했지만). 즉 헤세 본인은 유머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할러의 구원을 의도했다는 이야기다. 이를 아주 알기 쉽게 해설한 글로 최근에 발견한 ‘무능력한 사람의 만화연구소장’ 권성주의 포스트(http://bit.ly/2lS39SC)가 있다. 보너스로, 아니 실은 이게 글의 원래 주제이긴 한데, [황야의 이리]의 핵심 키워드인 ‘유머’를 마츠모토 타이요와 엮는 창의력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건 공자님 말씀 같은 이야기다. 자살을 꿈꾸던 할러는 성공적으로 자살하는 대신 또 다른 자아인 헤르미네를 살해한다. 이를 과거와의 단절이나 모종의 각성이나 구원으로 보고, 힘들지 몰라도 할러의 앞날을 응원해보자? No way 말도 안 돼. 헤세 본인이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만큼, 알테르 에고의 상징적 살해로 ‘앞으로 나아감’을 그렸다고 보는 시각이 여러모로 타당함에도,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머리로는 알아도.

교과서적인 해설은 빛을 잃고, 유머라는 키워드에 공감할 수 있는 반문화 추종자는 자신이 믿는 그대로를 보면 될 것이다. 나머지 마음에 어둠이 깔린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여전한 비관뿐이다. 헤세는 정말 작품 활동으로 자살을 극복했을까? 어쩌면 헤세의 변명은 작가로서의 거짓말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사실이라고 해도, 작가가 아닌 소시민에게 위안이 되는 건 없다. 그의 어둠의 크기가 21세기 현대인의 자존감 부재에는 못 미친다고 생각하면 나아질 게 있을까? 정신승리는 자유다. 하지만 타인의 어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가정과 모순된다. 이렇게 ‘낭만주의 마지막 기사’의 소설은 이미 어둠에 속한 이들을 다시금 비관과 조우하게 한다. 극단적이지 않아 도리어 받아들일밖에 없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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