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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평점 :
마음 바닥에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몰아낼 수 없는 검은 정념의 소용돌이. 그것은 결코 말에 닿지 않고, 타인의 어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리 내어 말하기 저어되는 이 비관을, 헤세답지 않은 헤세만의 방식으로 담아낸 게 [황야의 이리]다.
석탄 때는 난로 냄새와 오래된 양장본 냄새로 차 있던 시골 중학교의 작은 독서관에서 헤세를 읽어나갔다. [데미안]이 시작이었고, 고2 여름 [황야의 이리]를 끝으로 장편은 모두 읽었다. 당시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같은 것도 없었고, 학교 도서관에서 세로쓰기로 된 판본을 빌려서 읽었다. 그렇지 않아도 구도자 헤세의 이미지를 배신하는 아방가르드(당시 내 인상으로는 그랬다)에 세로쓰기, 수험 공부와 무더위가 겹쳐, 지지리도 지난한 마지막 헤세 독서였다. 그러다 20대에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판본으로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헤세는 인간의 양면성을 탐구하는 구도자이나 도(道)를 외부 세계 어딘가 혹은 초월적인 존재에서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자아의 내면과 심층에서 추구한다. 여기에 데미안 같은 주변 인물을 활용하는 것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황야의 이리]에서는 그 역할이 헤르미네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흐려진다. 일단 헤르미네라는 인물이 실존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할러의 의식에서 비롯된 그 이름부터가 허구라는 심증을 더 굳히는 역할을 한다.
할러는 여러 인물을 만나며 자아의 내면으로의 항해를 계속해나가고, 그 결과 ‘살인’이 일어나지만 헤세는 이를 모차르트와 괴테의 ‘유머’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다시 한번, 여기서도 살인이 실제인지 허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헤세답지 않은 어둠이 파고든다.
사실 헤세 자신은 당대 평론가와 대중이 퍼부은 비판을 작품의 비관주의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결과로 봤다고 한다(물론 후대에는 반문화적 정서에 힘입어 컬트 소설로 등극하긴 했지만). 즉 헤세 본인은 유머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할러의 구원을 의도했다는 이야기다. 이를 아주 알기 쉽게 해설한 글로 최근에 발견한 ‘무능력한 사람의 만화연구소장’ 권성주의 포스트(http://bit.ly/2lS39SC)가 있다. 보너스로, 아니 실은 이게 글의 원래 주제이긴 한데, [황야의 이리]의 핵심 키워드인 ‘유머’를 마츠모토 타이요와 엮는 창의력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건 공자님 말씀 같은 이야기다. 자살을 꿈꾸던 할러는 성공적으로 자살하는 대신 또 다른 자아인 헤르미네를 살해한다. 이를 과거와의 단절이나 모종의 각성이나 구원으로 보고, 힘들지 몰라도 할러의 앞날을 응원해보자? No way 말도 안 돼. 헤세 본인이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만큼, 알테르 에고의 상징적 살해로 ‘앞으로 나아감’을 그렸다고 보는 시각이 여러모로 타당함에도,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머리로는 알아도.
교과서적인 해설은 빛을 잃고, 유머라는 키워드에 공감할 수 있는 반문화 추종자는 자신이 믿는 그대로를 보면 될 것이다. 나머지 마음에 어둠이 깔린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여전한 비관뿐이다. 헤세는 정말 작품 활동으로 자살을 극복했을까? 어쩌면 헤세의 변명은 작가로서의 거짓말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사실이라고 해도, 작가가 아닌 소시민에게 위안이 되는 건 없다. 그의 어둠의 크기가 21세기 현대인의 자존감 부재에는 못 미친다고 생각하면 나아질 게 있을까? 정신승리는 자유다. 하지만 타인의 어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가정과 모순된다. 이렇게 ‘낭만주의 마지막 기사’의 소설은 이미 어둠에 속한 이들을 다시금 비관과 조우하게 한다. 극단적이지 않아 도리어 받아들일밖에 없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