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는 말한다
시모 지음, 유나니.정영리 옮김 / 민음사 / 1996년 7월
평점 :
절판


순간들.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UMC식으로 말하면 “작년 여름 피자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 배달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나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소리치던 넌 정말 예뻤어”의 순간들. [릴라는 말한다]는 에로티시즘의 탈을 쓴 장광설 속에 그런 순간들을 빚어 넣는다.

소설의 1/4 지점에서 묘사되는 자전거 위에서의 아크로바틱한 핸드잡은 그런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다. 하지만 삶의 어떠한 강렬한 순간도 결국에는 흐려지듯, 이 장면 역시 희석되고 만다. 화자는 이 작품이 릴라의 말을 전술했을 뿐이라고 밝히며, 실제로 지면의 많은 부분이 릴라와의 대화로 점철된다. 대화의 주제는 물론 섹스, 모르는 사람들과의 섹스, 관음적인 섹스, 사탄과의 섹스 등이다. 앞에서 이를 두고 ‘장광설’이라고 말한 것은, 간단히 말하면 에곤 실레의 누드가 에로틱하게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지면의 나머지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비외쉔’이라는 마을에 대한 화자의 설명적 묘사다. 이곳은 한마디로 복마전이다. “동네 곳곳에 지린내가 나고” 화자는 “머리 위로 헌 냉장고가 날아올지 몰라” 결코 건물 가까이로 지나다니지 않는다(34쪽). “목요일 오후 이곳에 날씨가 좋을 때는 보통 섹스 장사를 하는 날이다. (…) 요컨대 이곳의 매춘은 이곳의 삶과 같은 것이다.”(76쪽) 여기에 아랍인, 파키스탄인, 말리인, 중국인 등이 얽혀 혼돈은 가중된다(프랑스의 이민자 문제는 대중예술의 단골 화두다). 19세 화자는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조금이라도 정기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나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을 한다. / 진료소에 가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달에 딱 한 번 피를 파는 것. 이미 얘기했듯이 피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108쪽)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두 번 말했다) 삶 속에서도 화자는 릴라에게 사랑(?)을 품는다. 사랑이랄까 애정이랄까 정욕이랄까, 흔히 10대의 첫사랑이란 복잡하다고들 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자(배경이 달랐다 쳐도, 성기 노출부터 시작된 관계인 만큼 성욕과 떨어뜨려 바라보긴 어려울 감정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예상대로, 이 사랑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장면의 피는 반전의 장치인 동시에, 존나 사족이다.

오늘 저녁의 나는 진부함이라는 단어로 이 소설을 반추한다. 삶의 강렬했던 순간. 감정, 사건, 동선. 결국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앉곤 했다. 소설 속 빛나던 파편도 장광설 속에서 그렇게 빛을 잃었다. 유감이지만 내용 면에서도 그렇다. 화자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볼 정황은 충분하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다. 때로 삶은 픽션보다 더욱 잔인하다. 때로 사람들은 다른 선택이 있는데도 다른 많은 사람과 똑같은 결정을 내리고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길을 택한다. 슬픈가? Whatever. 슬픔은 냉소로 이어지고 이 진부함의 순환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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