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적인 문제
벱페 페놀리오 지음, 이소영 옮김 / 인간희극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띠지(라기보다는 오비obi)에는 촌스러운 카피 한 줄이 있다. "이탈리안들이 가슴에 품고 다니는 단 하나의 러브스토리!" 그런데 제목은 '사적인 문제'이고, 표지는 웬 사선 구도의 도로와 여행객이다. 뭐지 이 책은, 대체 정체가 뭘까. 아마도, 아마도 나는 칼비노의 추천평과 '내가 아니면 1년에 한 명도 안 읽을 터'라는 지적 허세 겸 호기심에 이끌려 내용도 모르고 이 책을 샀다.
책을 펼치자 조금은 알 듯 말 듯. 주인공은 군인(파르티잔)이다. 배경은 반파시스트 파르티잔 활동이 벌어지던 2차대전 말기 이탈리아. 그렇군, 전쟁 속 러브스토리인가? 과연, 몇 쪽 안 지나 기가 막힌 회상 장면이 나오는데,
"다음 편지는 어떻게 시작할 거야?"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편지는 '눈부신 풀비아'로 시작했네. 정말로 내가 눈부셔?"
"아니, 넌 눈부시지 않아."
"오호, 아니라고?"
"넌 눈부심 그 자체니까."
"너, 너, 너..." 그녀가 말했다. "너는 어떤 단어를 너만의 방식으로 말하는 재주가 있어... 예컨대, 꼭 내가 눈부심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것 같았거든."
"이상할 거 없어. 너 이전에 눈부심이란 없었으니까." (13쪽)
여기 읽으면서 빵 터졌다. 아, 물론 웃긴 했지만, 적어둘 가치는 충분히 있다. 아름답기도 하고. 이런 게 웃기게 여겨지는 세태가, 사실 나는 조금 슬프다.
예상할 수 있듯, 이 문학청년 주인공 밀턴은 문어文語에는 능할지 몰라도, 사교적이고 빛나는 여인 풀비아에게 썩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미도리와 와타나베 혹은 니나와 슈타인과 같았다. 거기에 풀비아에게는 훨씬 더 어울리는 다른 남자 조르조도 있었다. 전쟁 중에 풀비아가 떠난 빌라에 돌아온 주인공은 빌라 관리인에게 풀비아와 조르조 사이에 모종의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 조르조(그 역시 파르티잔이다)를 찾아가 팩트!를 확인하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여기까지가 책 1/4 내용이다. 풀비아와의 회상이 섞여 조금은 애틋하게 읽히는 면이 있다. 나머지 3/4는 어떻게 보면 전쟁 영화에 가깝다. 하필이면 밀턴이 조르조를 찾아가기로 한 날 밤, 조르조가 실종된다. 파시스트 군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밀턴은 그와 교환할 포로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어차피 나 아니면 읽을 사람도 없을 테니 마저 쓰자면, 밀턴은 천신만고 끝에 파시스트 군 하사관 한 명을 생포하지만, 이송하는 도중 달아나려 하는 바람에 죽이고 만다. 허망하게 풀비아의 빌라를 다시 찾아가는 밀턴. 거기엔 50여 명의 파시스트 군이 있었고,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 필사적으로 달아나다 끝내 쓰러지는 밀턴을 보여주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렇다. 사랑은커녕, 꿈도 희망도 없다.
1963년작으로, 당대 많은 작가가 앙가주망을 쓴 데 반해 전쟁 속에서도 '진실 게임'에 목숨 거는 개인에 초점을 맞춰 인간 조건을 그렸다는 점이 참 특별하다면 특별하다. 작가 자신이 파르티잔으로 활동했고 그 경험을 살려 썼다고 하니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독자인 내게도 굉장히 특별한 소설로 남을 만한 작품인가 하면, 그건 역시 좀 애매하다. 상기한 미도리와 와타나베 혹은 니나와 슈타인을 떠올려보면, 대충 납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