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일들은 전혀 가혹하다 여겨지지 않을 때가 있다. 돌로레스가 남편 조를 죽인 일이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살인은 나쁜 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게 더 나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가 그랬다. 조가 돌로레스를 '패는' 남편이어서가 아니다. 그것도 나쁘지만 그보다 더 나쁜 짓을 그는 저질렀고, 그래서 그의 살아있음이 누군가에게 내내 두려움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라면, 나는 일말의 동정심도 내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렇게 옷의 먼지를 털듯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말끔하게 지워낼 수도 잊혀지는 종류의 일도 아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돌로레스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갇혀 살아야 했으니까. 



오래전에 스티븐 킹의 단편선을 한 권 읽고는 우앗, 너무 무서워서 나는 앞으로 스티븐 킹을 읽지 않을 거야, 라고 결심했더랬다. 그때의 그 공포라니! 기억하기로는 <옥수수밭 아이들>이 가장 무서웠다. <트럭>도 무서웠고, <금연 주식회사>도 무서웠고 ㅠㅠ 아아, 이 사람이 쓰는 소설을 나는 읽어낼 수 없을 것 같아, 라고 생각해서 이 책도 사두고 몇 년을 그냥 꽂아두기만 했는데, 하필이면 연휴끝인 어젯밤 집어 들었고, 아아, 스티븐 킹 아저씨가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게 쭉쭉 빨려들어가게 글을 써주셔서 ㅠㅠ, 아니, 그랬기 때문에!! 나는 새벽녘까지 책을 한 순간도 덮지 않고 다 읽어버리고 만것이다. 덕분에 세 시에 잤어요. ㅠㅠ 잠들기전에 이런 책을 읽으면 안되는데.. ㅠㅠ 오늘 아침에 내가 일어나기 힘들었겠어, 안힘들었겠어.


게다가 세 시에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잘 오지도 않았다. 이 책에서 느꼈던 공포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에. 무서워 ㅠㅠ 그래서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자꾸 끄집어내야 했다.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책이었다.

킹 아저씨 작품을 이제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다 읽어봐야겠다. 공포물은 좀 빼고 ㅜㅜ


곳곳에 명문들이 있다. 이런 문장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의 책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자네는 항상 착한 아이였지. 남자 아이치고는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자네가 공정한 사람이라는 얘기야. 게다가 이제는 버젓한 남자가 됐어. 하지만 너무 으스대지는 말라고. 자네도 다른 남자들하고 똑같이 자랐으니까.빨래를 해 주고, 콧물을 닦아 주고, 자네가 잘못된 쪽을 향하고 있을 때 돌려세워 줄 여자가 항상 옆에 있었다는 얘기야. (p.16-17)

우리 아버지가 벌을 내리면 엄마는 그걸 받아들였어. 하지만 아버지나 엄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은 없어. 어쩌면 엄마는 남편의 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엄마를 벌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으면 항상 같이 일하는 남자들한테 얕잡아 보였을지도 몰라. 그때는 시절이 달랐으니까. 지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하지만 말이야, 내가 애당초 얼간이처럼 조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그 인간이 그런 짓을 하는 것까지 참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남자가 여자한테 주먹질을 하는 거냐, 나무 상자에서 꺼낸 장작개비로 매질을 하는 건 절대 가정 바로잡기가 아냐. 그래서 나도 조 세인트 조지 같은 사람, 아니 그 어떤 남자라도 나한테 그런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p.98-99)

내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까 그 여편네가 좀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마치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가끔은 여자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해 못된 년이 되는 수밖에 없어."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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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02-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킹은 대단한 작가이지요. 저도 가끔 그의 작품을 손에 들면 그대로 끝까지 갑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6-02-12 15: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아, 새벽까지 읽느라 고생했어요. 그리고 내내 감탄하며 읽었답니다. 명문이 가득한 좋은 소설이었어요!

moonnight 2016-02-1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예요. ^^

다락방 2016-02-12 15:15   좋아요 0 | URL
저도 기꺼이 엄지를 줄 수 있는 작가에요! 다른 작품들도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스티븐 킹의 작품이 많아서 좋아요! 꺅 >.<

hnine 2016-02-1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옛날, 극장 (영화관이 아니라 극장이라고 부르던 시절)에서 봤어요. 미저리의 여주인공, 누구더라...캐시 베이츠! 그녀가 돌로레스 클레이본으로 나오지요? 미저리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도 꽤 무서웠던 기억이 나네요. 스티븐 킹이 쓰고 재미없는 책이나 영화도 있을까 싶어요.

다락방 2016-02-12 15:16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래전에 이 영화의 예고편을 봤던 기억이 나요. 이 책을 읽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아 정말 읽기를 잘했어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책이었어요. 영화를 본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영화도 좋다고 칭찬하더라고요. 저도 기회가 되면 영화를 봐야겠어요. 물론 책으로도 충분했지만요.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clavis 2016-02-1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만개의 좋아요를 던집니다용♡♡

다락방 2016-02-12 15:17   좋아요 0 | URL
백만개의 좋아요를 기꺼이 받습니다용 ♡♡

2016-02-12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2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6-02-1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한다는
소설의 한 구절이 인생의 한 단면을 축소시킨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사람은 한번씩 못된 사람이 되어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인 것 같아서... *^^

다락방 2016-02-15 08:27   좋아요 0 | URL
특히나 여자들이라면 못된년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못된 년은 문자 그대로 못된 년 이라기 보다는 남자들이 보기에 못된인거지만요. 정말 좋은 소설이었어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왜 수키시리즈 그 다음은 나오고 있지 않는거죠? 심지어 왜 나와있는 것들까지 죄다 품절인겁니까? 네? 왜죠? 제가 얼마나 수키를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열린책들의 책들중 절반이 수키 시리즈인 거, 보이십니까??? 제가 아무리 중고샵에 책을 팔아도, 수키 시리즈는 팔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그 다음 시리즈도 계속 내달란 말입니다, 열린책들!!

 

 

 

 

 

 

 

난 당신이 수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건 들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당신이 이 여자와 섹스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수키가 다른 사람에게 빠져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나보다 수키를 더 원한다는 것도 알아요. 난 나를 동정하는 남자와 섹스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를 원하지 않는 남자와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보다는 더 가치가 있어요. 내 생의 나머지 시간이 다 걸린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없앨 거예요. 당신이 여기 조금 더 머물 거라면, 나는 당신 집에 돌아가서 내 물건을 싸서 사라질게요.(pp.212-213)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말하건 그건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내게 당신을 위해 시체를 묻어 달라고-아니면 시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게 할 겁니다.
우리 사이에는 안 좋은 과거가 있어요, .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할 거예요.  (
p.48) 

 

 

 

 

 

 

 

 

 

「내 육체적인 욕망은 무척 강해요. 정말정말 강한 육체적 욕망을 갖고 있죠. 하지만 난 하룻밤 자고 마는 그런 여자는 아니에요.」 (p.50)

 

 

 

 

 

 

 

 

 

 

 

우리는 함께 있으면 서로 즐거워해요. 나는 내 침대 안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너무 심해서 아플 지경이에요. 우리가 함께 더 지내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지금 당장 살 곳이 필요하잖아요. 내게는 슈리브포트에 아파트가 하나 있어요. 당신이 나와 함께 머무는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214

 

 

 

 

 

 

 

 

 

 

 

당신 바쁘네요. 전화하지 말걸.
나는 금세 주눅이 들어 말했다.
농담해요? 당신 전화는 하루 종일 내가 겪은 일 중에서 최고로 좋은 일이었어요!(
p.139)

 

 

 

 

 

 

 

아, 이벤트 참가 페이퍼까지 썼더니 배가 고파졌다. 어떡하지..

놋북이 느려졌네.. 제부가  ssd를 교체하면 빨라진다고 하는데, 뭔말인지..그냥 맥북.. 살까.. 할부..같은 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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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0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그보다는 더 가치가 있어요!!!멋져요!! 수키 읽어볼까요????저도 놋북이 넘느려서 어케 방법없을까했더니 옆방남자가 새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ㅠㅠ

다락방 2016-02-11 12:19   좋아요 0 | URL
저도 저 문장 정말 좋아해요! 저건 수키가 한 말은 아니지만, 정말 좋았어요. 샬레인 해리스 좋구나! 했어요. 수키가 여자주인공인데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이 느낀 바를 거리낌없이 말하고자 하거든요. 그런 점들이 저는 정말 좋았어요. 저 위의 인용문에 `내 육체적 욕망은 무척 강해요` 같은 말을 보시면 짐작 가능하시죠? 아하핫. 욕 할 때는 욕도 잘해요! 수키 좋아요!

단발머리 2016-02-10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키시리즈, 올려주신 인용글들이 완전 멋진대요.
수키시리즈의 주인공은, 그러니까 수키인거죠? ㅎㅎ
책 사진 올리려면 다락방님 정도는 되줘야~~ 각도나오고, 구도 나오는데....

저도 노트북 없어서 하나 사고 싶은데, 산다면 맥북으로 사고 싶어요.
엄청 폼나더라구요.
근데 생각보다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윈도우랑 많이 다르다고요.

다락방 2016-02-11 12:20   좋아요 0 | URL
네, 수키 시리즈의 주인공은 수키입니다! 매력이 철철 넘쳐요. 저는 수키가 너무 좋아요. 수키가 한 번은 냉장고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리는데 저도 울고 싶었어요. ㅠㅠ 수키의 감정들이 저는 저한테 너무 잘 전달되어서 수키를 좋아해요. 자기 욕망을 인정하는 것도 너무 좋아요. 헤헷.

저도 맥북으로 사고 싶은데 사용이 쉽지 않다고 해서 갈등중이에요. 물론 가장 큰 갈등은 돈.. 이지만요. 아하하하 ㅜㅜ

북깨비 2016-02-11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보니 저는 죽음의 계산부터 안 읽고 있어요. 그전까진 신나게 읽었는데 ㅠ 아무래도 트루블러드가 종영되고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아요 ㅎㅎ

다락방 2016-02-11 12:21   좋아요 0 | URL
전 번역되어 나온 건 다 읽었는데, 어쩐 일인지 1권 빼고 지금 다 품절로 떠요. 그 다음 시리즈도 나오질 않고. 저 수키 좋아하는데 ㅠㅠ 트루블러드는 안봤어요. 도무지 안나 파킨에게 몰입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1편 보고 안봤어요. ㅎㅎㅎㅎㅎ

북깨비 2016-02-11 16:35   좋아요 0 | URL
저는 안나 파킨을 좋아하지만 다락방님 심정 이해해요. ㅠㅠ 저도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제가 상상한 이미지와 맞지 않으면 못 보거든요. 하지만 좀만 참고 보시면 에릭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시즌이 더할수록 포텐 터지는 에릭의 매력. 마력! 결코 후회하시지 않을 거에요. ㅎㅎㅎㅎ 보시다시피 제가 에릭한테 완죤 미춋습니다아. ^^;;

다락방 2016-02-15 08:36   좋아요 0 | URL
그 드라마 보신 분들이 확실히 에릭한테 빠지시더라고요. ㅎㅎ
저는 안나 파킨에게 몰입이 안되는 것도 있지만, 드라마 자체를 잘 못봐요. 티븨 자체를 잘 안보기 때문에 저는 아마도 화면상의 에릭에 빠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영상으로 빠진 인물은 에드워드 였어요. 극장에서 트와일라잇 보고 에드워드한테 진짜 쑝 갔었죠. 영화가 만들어질수록 빠져나왔지만... ㅎㅎㅎㅎㅎ

아무개 2016-02-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책장에 열린책들은 <그리스인 조르바> 한권뿐이군요.

저는 요새 안읽은 아니 못읽은 양서들 다 내다 팔아서 먹고 삽니다 쿨럭~

다락방 2016-02-11 12:22   좋아요 0 | URL
저도 저기에 그리스인 조르바 보이네요. ㅎㅎ
저도 요즘 안읽은, 못읽은 책들 팔아서 근근히 먹고 살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
더 내다팔 책 없나 눈을 부라리며 책장을 보곤 하죠. ㅋㅋㅋ

무해한모리군 2016-02-1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네요. 딱 반정도 저도 가지고 있는데 이 사진을 보니 그리워서 다시 읽어야겠어요.

다락방 2016-02-11 12:2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립네요, 휘모리님. 아니 대체 다음 시리즈가 왜 안나오고 있나 몰라요. -_-

북깨비 2016-02-11 16:41   좋아요 0 | URL
저도 얼마전에 갑자기 이 시리즈가 그리워져서 다시 읽으려고 전에 마지막으로 읽은거 다음권을 딱 폈는데. ㅠㅠ 앞에 뭔일이 있었는지 완전 가물가물해져 가지고요 어디서부터 다시 읽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겠어요. 막 트루블러드 내용이랑 머릿속에서 막 뒤죽박죽. ㅠㅠ

다락방 2016-02-15 08:34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굵직한 줄거리는 기억이 안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시리즈를 좋아했던 게 스토리 자체보다는 캐릭터에 있었던 것 같아요. 뭣보다 자신만만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던 수키요. 예의를 알고 자신의 욕망을 알았던 수키라는 캐릭터요. 그 캐릭터가 정말 좋았어요, 북깨비님! 힛.

inblossom 2016-02-1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수키를 그리워하시는 분이 계셔서 넘 반갑네요.
저 열린책들 네이버 카페에 두 권인가 마저 번역해달라고 했는데, 계획에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뭔가 연판장이라도 돌려얄 듯 ㅋㅋㅋㅋ

다락방 2016-02-15 08:34   좋아요 0 | URL
아니, 뭐라구요? 계획에 없다구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너무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렇게 빠져들게 만들어놓고 계획에 없다뇨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현기증나네요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하아-

그나저나 슬픔이 캐릭터 예뻐요, 인블라썸님!
수키를 그리워하는 분이시라니, 반갑습니다!
:)
 

 

 

 

 

 

 

영화 [캐롤]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결국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간단해 보이지만, 보이는것만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내가 '내가'되는 일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인데, 영화속 캐롤은 그러나, 결국은, 내 예상을 깨고,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나는 캐롤이 울면서, '나는 나를 부정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할 때, 함께 울었다. 아, 그렇게 말하기까지, 그러니까, '내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하기까지,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그녀에게 당신 자신이 되어도 된다고, 결국 그게 맞는 거라고, 일어나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해 나는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라서.

 

내가 나 자신이 되기도 힘이 들고, 비슷한 크기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이 든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내는 것은 어떠한가. 그러나 캐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임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한다. '나와 함께 살지 않을래요?'

 

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결국 이렇게 늙어가는가 보다. 이렇게 나이들어가는가 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그들이 결국은 함께 살고 싶어한다는 걸 보면서, 아, 결국은 함께 살고 싶어하는거구나, 하는 걸 깨달으면서, 그렇게 깨달으면서 늙어가는구나. 나는 어쩐지 예전의 내가 아닌 것 같다.

 

'당신을 놓아줄게요' 라는 말에서는 엉엉 소리내서 울고 싶어졌다. 도저히 그 말을, 등장인물들만의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랑을 놓고야 마는, 아니 잃고야 마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놓지 말아요, 라고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놓고 싶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놓아준다고 말할 때,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나를 놓지 말아요, 라고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왜 놓는다는 거야, 왜. 놓는다고 말하지마.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친구랑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좋지, 참 좋지, 했다. 나는 나를 부정하지 않을거야,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친구 J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 친구라면 이 영화를 좋아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함께 사는 이야기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아내와 오래 함께 살았던 것이라든가, 함께 살고 싶어서 결혼하기로 결심한 친구라든가, 그리고 함께 살자고 제안하는 남자가 나오는 수키 시리즈라든가.

 

 

 

 

우리는 함께 있으면 서로 즐거워해요. 나는 내 침대 안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너무 심해서 아플 지경이에요. 우리가 함께 더 지내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지금 당장 살 곳이 필요하잖아요. 내게는 슈리브포트에 아파트가 하나 있어요. 당신이 나와 함께 머무는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214쪽

 

 

 

 

 

 

 

 

 

친구 한 명은 이 영화의 엔딩씬을 언급했는데, 나 역시 그렇다. 오래전에 '우마 써먼'이 나오는 영화 [프라임 러브]의 엔딩씬이 좋다고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맞먹는 엔딩씬이다. 엔딩씬이 너무 완벽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ㅜㅜ

아름다운 엔딩보다 더 아름다운 '나는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 거에요' 때문에, 그 장면을 대체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해서, 나는 책도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2016년에 책 한 권도 사지 않기, 같은 계획은 다 무의미해..

인생...

 

 

 

 

 

 

 

 

 

 

 

 

 

 

 

 

 

작년에 툭 튀어나와서 나를 놀래켰던 새치 하나가, 늘 그자리에서 나를 신경쓰이게 만들었다. 저걸 뽑아 말어, 하고 내내 고민하다가 뽑지 않고 여태 두었었는데, 볼 때마다 고민하는 나를 두고 여동생이 그냥 뽑아 버려, 하고는 툭, 뽑아주었다. 뭔가 앓던 이 빠지는 기분이라, 좋았어! 나는 이제 새치 없는 여자사람이야! 라고 꺅꺅 거렸는데, 오늘 보니 그 자리에 다시 새치가 있더라.... 이건....... 뭐야? 이렇게 늙어가는거야? 아, 벌써 2016년 2월이구나.

 

 

일요일엔 친구를 만나 영화 캐롤을 보고, 충무로에서 합정까지 세 시간을 걸었다. 합정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는 와인 두 병을 마시고 피자와 스파게티, 피시앤칩스를 먹었다. 우리는 2016년에 우리의 계획들을 얘기했다. 이런 굵직한 계획들을 소화해내다 보면, 어느틈에 올해도 빨리 가게 될 것 같다고. 그 계획들 중에는 친구와 내가 함께 하는 것도 있었다. 3월달에 있을 결혼식엔 함께 참석할거라 2박3일로 강원도에 가기로 했고, 7월달엔 매튜본을 함께 보기로 했다. 그리고 각자의 굵직한 계획들을 얘기하다보니, 정말 빨리 가겠더라, 올해도. 그렇게 나이를 한 살 또 먹겠지. 나는 널 만나는 게 즐겁고 좋다, 라고 얘기하고 친구 역시 네가 즐거운만큼 나도 즐겁다, 라고 답했다. 다음날엔 다리통이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았지만, 우리가 걷는 내내 즐거웠으므로, 봄이 오면 또 여름이 오면 이 길을 이렇게 또 걷자, 라고 말했다. 여름엔 수건도 꼭 준비해서 수시로 땀 닦으면서 걷자고도 말했다.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소매 바깥으로 나의 겨털이 뭉쳐 있어도 놀라지 말아....-0-

 

 

 

설 당일에는 우리집에 왔던 여동생네 가족을 따라 남동생과 내가 여동생네 집엘 갔다. 가는 길에 내가 쟁여둔 와인을 한 병 가져갔다. 평소에 여동생과 조카들이 잠들고 제부와 남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술자리를 갖다가 파하곤 했는데,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술 마시던 제부가 첫째 조카를 데리고 들어가 잠들었고 여동생이 둘째조카를 데리고 들어가 재우고서는 혼자 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삼남매가 모여앉아 술자리를 갖게 된 것.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여동생이지만, 그날은 잘도 마시더라. 내가 가져간 와인을 다 마시고 내가 지난번에 남겨둔 와인까지 꺼내와 다 마셨는데도 모자라, 제부가 우리엄마랑 마시려고 뒀던 와인까지 가져와 다 마셨다. 소주와 맥주는 냉장고에 있었지만, 1차로 소주를 마신 터라 계속 와인을 마시고 싶어, 이제는 없는 와인 대신 정종을 따서 마셨다. 우리는 작게 신해철의 음악을 틀어두었다. 여동생이 듣고 싶다던 신해철의 노래들을 듣다가, 에메랄드 캐슬의 노래를 듣다가,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가 어릴적부터 함께 했었기에 같이 들었던 노래들이었고, 신해철에 대해서라면 우리 삼남매는 공통적 감정을 가진 터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조카들 이야기 그리고 직장 이야기, 우리 가족 이야기와 각자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사소하고도 사소한 이야기들을 자정이 넘어서까지 도란도란 나누다가, 각자 자러 들어갔는데, 여동생은 따라 들어와서는 내 다리며 어깨를 모두 안마해주었다. 덩치는 내 절반밖에 안되는데 손목 힘은 나의 두 배가 넘는 것 같다. 언니 그렇게 많이 걸어서 아픈 거 다 풀어야 해, 하면서는 아주 꾸욱꾸욱 주물러 줬다. 나는 괴성을 질렀다. 그 야밤에...

 

그 시간 내내,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아 이 시간이 정말 좋다, 오랜만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가보았다. 여동생은 다음날 우리가 돌아가고나서 단톡방에 메세지를 보냈다. 정말 좋더라, 라고.

 

 

 

아직 쟁여둔 와인이 세 병이나 남았고(후훗), 와인과 먹으려고 사둔 촉촉한 초코칩과 칙촉도 내 방 책장에 있다. 방금전에 남동생이 가지고 나가려는 걸 '그거 제자리에 둬' 라고 말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지켜냈다, 내 초코칩!!!!! 냉장고엔 체다치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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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0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너무 좋아요~전부 다~ 마지막으로 체다치즈까지!!!

다락방 2016-02-11 12:10   좋아요 0 | URL
책장에 초코칩 쿠키가 있고 냉장고에 체다치즈가 있고, 와인도 있는 제 방에, 제 집에 너무나 가고 싶습니다! 회사 싫어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목동 2016-02-10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

다락방 2016-02-11 12:10   좋아요 0 | URL
땡큐! ㅎㅎ

아무개 2016-02-10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엔딩장면에서 눈물콧물 찔찔ㅠㅠ

단발머리 2016-02-10 21:16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도 그 영화 보셨군요.@@

강동원 보러 가겠다, 설레이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두 분의 코멘트에 심히 고민되는 상황이네요. ㅎㅎㅎ

아무개 2016-02-11 08:47   좋아요 0 | URL
단발님 검사외전은 나중에 걍 티비에서 공짜로 보셔도 무방하실듯 합니다만 ^^:::


단발머리 2016-02-11 08:50   좋아요 0 | URL
텔레비전 집에 없잖아요~~~
아흐.... 아시면서 ㅋㅎㅎㅎㅎㅎㅎㅎ

아무개 2016-02-11 08:52   좋아요 0 | URL
아...맞다...
ㅡ..ㅡ:::::::::::::::::

다락방 2016-02-11 12:1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굳이 한 편의 영화라면, 저는 검사외전을 보진 않았지만, 캐롤을 추천드립니다. (단호!)

단발머리 2016-02-11 12:13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검사외전과 캐롤을 두 개 다 보는걸로 하죠~~~ ㅎㅎㅎ

단발머리 2016-02-1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게 너무 좋아요
다락방님도 그런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좋네요, 진짜... ㅎㅎㅎ

다락방 2016-02-11 12:11   좋아요 0 | URL
그치요? 우걀걀걀.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만큼 행복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제일 좋아요, 최고 좋아요!! >.<

저도 단발머리님 좋아해요. 단발머리님은 어쩐지 그냥 좋아요. 아무것도 안해도 그냥 좋아요. 꺅 >.<

단발머리 2016-02-11 12:14   좋아요 0 | URL
앗싸라비요 콜롬비요 닭다리잡고 뜯어뜯어~~~!!!

나와같다면 2016-02-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생에 단 한 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었어요..
오직 단 한번.. 축복같은 경험..

다락방 2016-02-11 12:12   좋아요 0 | URL
그런 경험을 해봤다면, 그건 정말 축복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와같다면 님.
:)

아무개 2016-02-11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다락님 캐롤 책은 번역이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다고.
캐롤을 남자 이성애자처럼 묘사해놓았다고 하더군요.
엄청 욕들어먹고 있다고 해요...

다락방 2016-02-11 12:13   좋아요 0 | URL
번역 얘기가 많은 것 같던데..그런가요 ㅠㅠ
그치만.. 읽어보고 싶은데 ㅠㅠ
제가 신뢰하는 리뷰어가 좋다고 해서 기대도 하고 있었는데 ㅠㅠㅠ
생각 좀 해볼게요. ㅜㅜㅜㅜ

2016-02-11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 - 소박한 미식가들의 나라, 베트남 낭만 여행
진유정 지음 / 효형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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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는 좋을 확률이 적다. 내게는 그렇다. 가고 싶은 곳에 대해 알아볼까 싶어 찾아봤다가는 지루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글과 사진들만 보게 되어서 심드렁해지곤 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도무지 여행기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여행기란

 

1. 가보고 싶게 만들 것

2. 지나치게 자기 감상에 젖어있지 말 것

 

이었는데, 이 두가지의 조건을 충족하는 여행기를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우연히-도무지 내가 이 책을 왜 샀는지 모르겠다 ㅎㅎㅎㅎㅎ- 읽게된 이 책은 내가 생각하는 이 두가지 조건을 다 만족시켜 주었다. 나는 베트남에 대해 그간 관심이 1도 없었는데 베트남에 가고 싶어지는 거다. 게다가 글들이 정갈하고, 저자가 좋아하는 국수에 대해 성심성의껏 적어둔 터라, 아, 나는 면덕후도 아닌데, 심지어 면은 별로 좋아라 하지도 않는데!! 국수 먹으러 베트남 가고 싶어지는 거다. 꺅 >.<

 

책을 읽다 말고 달력을 펼쳐두고서는 언제쯤 가볼까, 가만가만 따져보았다. 비행기 가격이 저렴하다 싶으면 내가 시간이 안되는 때였고, 내가 시간이 되는 때에는 비행기 가격이 높더라. 에헤라디여~ 한 이박삼일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저자는 베트남을 사랑하는데,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수를 찬양한다. 국수 때문에 베트남에 가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딱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여행이며, 딱 내가 원하는 바로 그런 여행기가 아닌가. 이 여행기는 자신이 해야할 몫을 충실히 해냈다. 국수 먹으러 베트남에 갈것이다!!

 

먹고 싶은 국수에 대한 글들을 밑줄긋기 해놓고 이 책을 중고샵에 팔려고 했는데, 너무 많아서 옮겨 적다가 팔 빠질 것 같아 일단 그냥 가지고 있기로 했다. 와, 국수 먹으러 베트남에 가고 싶어지다니. 살면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여행은 결국 먹는 것인가...

 

 

 

 

살면서 꼭 한 번은 만난다.
아무도 내가 당도할 것을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는 낯선 정거장에서 버스나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그리운 얼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도 있겠지만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설사 그런 행운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떠나고 싶은 곳, 닿아야 하는 곳이 있다는 건
틀림없이 멋진 일이다. (p.25)

(분보후에) 살짝 데친 야채를 넣고 맛본 첫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힘줄이 섞여 쫄깃쫄깃한 소고기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싹 비워버렸다. 학교에 가기 전이라 땀을 그렇게 쏟으면 안 되는데 화장이 지워지는 것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 이후로 분보후에를 혼자도 먹고, 학생들과도 먹고, 호찌민에 놀러 온 친구들과도 먹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먹으면서도 질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p.60)

뭐니 뭐니 해도 분짜의 가장 큰 매력은 직화에서 비롯된다. 불 맛을 풍기는 고기에 달콤한 소스가 살짝 스미면 그야말로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동남아시아 음식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한 입만 먹어보면 앉은자리에서 두 그릇도 먹게 되는 음식이 바로 분짜다. 하노이를 여행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분짜 냄새와 연기에 꼼짝없이 이끌리게 될 것이다. 숯불에 굽는 맛있는 냄새와 연기에 사로잡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길모퉁이에 작은 선풍기가 놓여 있다면, 탄을 피우고 있다면, 석쇠에 무언가 굽고 있다면 일단 못 이기는 척 들어가라. 한번 맛보면 뿌리칠 수 없는 맛이 거기에 있다. (p.106)

이별 후에 무엇을 먹어야 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헤어진 그날에는 아무것도 넘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이란 존재는 간사해서 곧 허기를 채울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진짜 배고픔에서 기인하든 마음의 허기에서 비롯되든 말이다. 바로 그때, 아직은 무언가를 만들어 먹을 힘은 없지만 어김없이 배가 고파와 당혹스러울 때 국수만큼 어울리는 음식은 없을 것이다. (p.120)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동네에 모여 가까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어릴 적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들이 나를 위해 모여 살아주겠는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겠지만 상상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 허무맹랑한 그 바람은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신 내가 사랑하는 나라들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행운을 얻었다.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테국이 모두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으니 여행자로서 나는 대단한 행운아다. 다정하게 옆에 붙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이웃 나라들로 언제라도 훌쩍 넘나들 수 있으니. (p.187)

손님이 그릇을 비우면 가인항은 의자를 한쪽에 걸고 유유히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눈앞에서 바로 요리해주는 따뜻한 음식이 길거리에 넘치는 나라, 베트남. 멋진 시설을 갖추고 빠르게 달리는 푸드트럭 부럽지 않은 수천 개의 `푸드 가인항`이 여기에 있다. 여행에 지쳐 걷기도 힘들고, 식당을 찾아 헤매기도 싫다면 가만히 그 자리에서 기다려보라. 푸드 가인항이 곧 당신에게로 걸어올 것이다. (p.155)

(퍼싸오보) 재빨리 소고기를 볶고, 라우까이라고 불리는 야채를 숨이 죽을 정도로만 살짝 볶고, 거기에 미리 볶아둔 면을 넣어 한 번 더 볶아 수분을 날려준다. 이 과정으로 면발은 더 쫄깃해진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삭힌 고추 소스를 더해주면 금상첨화다.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하고 매콤한 자극에 야채의 신선함까지.

안 되겠다.
아무래도 맥주 한 병 시켜야겠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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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L 2016-02-10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베트남 호치민입니다 ㅋㅋ
이렇게 맛있는 국수는 못 먹고 귀국할 것 같지만... 다락방님 글을 보니 반갑네요ㅋㅋㅋ;;

다락방 2016-02-11 12:04   좋아요 0 | URL
아니, 호치민에 계십니까!!
저는 베트남에 다른 음식들은 뭐가 더 있는지 몰라서, 일단 국수 먹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국수를 못 드시고 귀국하신다뇨. ㅎㅎㅎㅎㅎ

반가워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힛.

프레이야 2016-02-10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트남쌀국수 좋아하는데‥훅 당기네요. ^^ 마음 먹으면 가까운 곳인데 말이죠

다락방 2016-02-11 12:0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우리가 간혹 먹는 그 쌀국수 말고 다른 국수들이 지천인가봐요! 어쩐지 신나요! 꺅 >.<
물론 언제갈지는 알 수 없지만 말예요. ㅎㅎ

단발머리 2016-02-1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날 연휴에 아빠랑 단 둘이 만나 베트남 쌀국수를 후르룩 먹었다지요. ㅎㅎㅎ
역시 여행에는 음식이 가장 중요한가요?

다락방 2016-02-11 12:07   좋아요 0 | URL
여행에는 음식이 가장 중요하다기 보다는... 저는 음식 때문에 여행 가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6-02-11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 동주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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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책을 먼저 읽은 친구와 또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친구 덕에 윤동주가 죽기 전 생체실험의 대상이었단 사실을 알게 됐다. 머리가 멍해지더라. 뭐라고? 그리고 오늘 알았다. 감옥에 갇힌 동안 윤동주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뭔지 알 수 없는 주사(생리식염수였다)를 맞았고 결국 그렇게 그들처럼 죽어갔다는 것을.

 

 

이 무렵 만주의 일본군은 중국군이나 조선 독립군 등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 페스트균이나 콜레라균을 주사하기도 하고, 사람의 몸이 동상에 걸리는 시간과 정도를 본다며 포로를 냉동고에 가두기도 했다. 전방에서 관동군 731부대가 그러한 실험을 하고 있다면, 후방에서는 육군성의 지원을 받은 제국 대학 의학부가 맡아 하고 있었다. 규슈 제국 대학 의학부도 그중 하나였는데, 실험 대상자는 감옥 안의 죄수들이었다. 규슈 제대 의학부의 제1외과장 이시야마 후쿠지로는 혈장 대신 생리적 식염수를 사람의 혈관에 넣어도 되는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만약 식염수로 대체해도 된다면 식염수는 전쟁터에서 그 어떤 무기보다도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시급하게 수혈해야 할 부상병들은 많았고, 필요한 혈장을 다 감당할 수도, 공급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포로나 죄수들이 생체 실험 중 사망해도 책임지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실험을 계속해 갈 포로와 죄수는 많았다. 독립운동 관련 조선인 사상범들을 후쿠오카와 구마모투 형무소로 모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시야마 교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실험을 계속했다. 포로가 된 미군 B29기의 조종사와 승무원들도 실험 대상이었는데, 그들은 농도 짙은 식염수 주사를 맞고 생체 해부까지 당하다 결국 죽어 갔다. (p.294-295)

 

 

 

책을 읽다보면 날짜가 자꾸 나오는데, 그래서 초조해졌다. 이미 마지막을 알면서 읽는 책인데도 초조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조금만 더 버티면 해방이다, 라고. 그러나 윤동주는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죽었고, 이미 끝을 알고 있던 나였지만, 하염없이 무력함을 느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지난해 말에 나와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는 「애수의 소야곡」이었다.계절에 관계없이, 마음을 뜯는 기타 전주가 들려오면 순식간에 가을 저녁의 쓸쓸함에 젖어 들게 되는 노래였다. 삼불이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의 노래인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다는 목소리의 주인공, 바로 그 남인수가 아닌가!"

삼불은 노래를 따라 불렀고, 동주와 벗들도 함께 흥얼거렸다. 유성기 소리는 멀어졌지만, 동주와 벗들의 노래는 광교 거리에서 계속되었다. 젊은이들이 끝까지 부르는 3절 노랫말은 더욱 애틋했다.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거마는

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은

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p.46-47)

하숙방에서 뜨거운 차를 앞에 두고 동주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동주의 문학 공부는 그새 더 풍부해지고 깊어진 것 같았다. 영어 실력도 크게 늘어 시나 소설은 우너서로도 많이 읽는 모양이었다. 금서가 되어 볼 수 없는 책도 학교 도서관에는 잘 찾아보면 있다 했다. 도서관의 책들을 보며 동주는, 양심적인 지성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며, 사람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보편적인 선함, 정의감, 인류애 등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끔찍하고도 삭막한 이 시대를 버텨 갈 힘이 되기도 했다. 동주의 이야기는 당숙 윤영춘에게도 모처럼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전쟁 구호와 총궐기의 함성으로 가득한 수도 도쿄에서, 언제 없어질지 모를 영어 가르치는 일에 맥 빠지고 지치기도 했던 것이다. (p.251)

외국 문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의 책들을 두루 읽다 보니, 새삼 발견되는 게 있었다. 연전에 있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말과 글이 다르고 지내는 곳이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놓인 시대와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이 던져 주는 질문을 붙들고 열심히 해답을 찾으며 살아간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 자신의 삶에서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이 세상에 사유하는 인간이 스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대를 이어 가며, 좀 더 많은 살마들을 거쳐 가며,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도 빼앗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마저 빼앗아 버리는 야만의 시대라 해도……. (p.253)

병욱은 동주가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고 싶어 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자필 원고를 아직도 갖고 있었다. 학병이 되어 전쟁터로 떠나기 전, 광양 망덕리 집의 어머니에게 맡기며 신신당부했다. 일본 순사의 눈에 띄지 않게 동주 형의 원고를 잘 간수해 달라고. 조선이 독립되고 자신이나 동주 형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원고를 꼭 연희 전문으로 보내 달라는 부탁도 했다. 조선 글자를 보기만 해도 벌벌 떨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두려워하면서도 마루 밑 항아리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전쟁터로 나간 아들의 당부를 끝내 지켰다. (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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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6-02-11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주>개봉하면 꼭 보러 가려구요.
동주역의 강하늘도 좋지만, 몽규역할의 배우 연기가 정말 좋다고 하더군요.

이책 일고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아 진짜 뭔가 되게 서러웠어....ㅜ..ㅜ

다락방 2016-02-11 12:03   좋아요 0 | URL
계속 괜찮다가 다 읽고나니까 가슴이 뻐근하더라고요. 다 읽고 밥먹었는데, 뭔가, 내가 이렇게 밥 먹어도 되나 싶고.... 그래도 다 먹었지만 --;;

분하고 서러웠어요, 아무개님. 영화는 안볼래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