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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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쓰기에 적당한 공간은 연구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집필 작업은 연구실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어디를 가든 태블릿 피시와 함께했다. 첫 원고는 도쿄 롯폰기힐스 앞의 스타벅스에서 시작되었지만, 방콕 발 깐짜나부리행 기차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리즈번에서 골드코스트로 가는 기차에서 쓴 원고도 있다. 어떤 원고는 사람들이 사랑하고 다투기도 하고 심지어 공부까지 하는 일산 웨스턴돔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서, 또 다른 원고는 물건 파는 잡상인도 등장하고 노약자 배려석을 두고 언쟁도 벌어지는 지하철 3호선 안에서 썼다. 그렇게 쓴 원고는 잠이 부족한 직장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잠들거나 이어폰을 기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음악도 듣고 다운받은 '미드'도 보고 팟캐스트도 듣는 일산과 강남을 오가는 M7412번 버스에서, 강남역에서 아주대학교까지 가는 3007번 버스속에서 수정되었다. (p.9)



이 책을 읽으려고 펼치면서 머리말에서 만난 위 문장들이 천천히 눈앞에 그림처럼 그려졌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쓰기 위해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틈틈이 몰두하는 저자의 모습과(나는 저자의 얼굴을 모르지만), 지구상의 이쪽과 저쪽,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어딘가에서 집필하는 모습들이. 그리고 그 모습들은 꽤 낭만적이고 이상적으로 여겨져서 부럽기까지 했다. 왜 나는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장소에서 매일 같은 일을 하고 있는걸까, 하고. 만약 내가 집필활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나 역시 노트북을 들고 포르투갈로, 미국으로, 덴마크로, 스웨덴으로 가서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삼아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당연히 해보았다. 그러나 이건 꿈같은 일이다. 포르투갈로, 미국으로, 덴마크로, 스웨덴으로 갈 돈이 어디있담? -_-



머리말에서 만난 이 낭만적인 기분을 느끼는 건 잠시뿐. 이 책을 넘기다보면 자꾸만 뜨끔뜨끔한다. 나라는 인간. 합리적이고 나름 성실하게 한 사람의 역할을 다 하며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나 모순된 인간인지를 노명우가 자꾸 콕콕 찔러주는 것 같았달까. 특히 '유권자'와 '소비자' 부분에 대해서는 더 그러했다. 뜨끔뜨끔..






좋은 삶은 선물 받을 수도 없다. 좋은 삶은 삶의 주인의 오랜 습관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좋은 삶은 착한 삶과 동일하지 않다. 착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바보'는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이지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좋은 삶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선한 의지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현실은 선한 의지만을 가진 사람을 겉으로는 칭찬하지만, 그 사람에게 좋은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의 현실적 삶은 좋은 삶이라기보다, 빈한한 삶에 가깝다. (p.17)

우리 시대의 '럭셔리 열품'은 여성적 현상만은 아니다. 미국이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있다는 유명한 말처럼, 된장녀는 반지하에 살면서도 골프라는 럭셔리한 취미를 즐기는 남자, 손수 자동차를 몰지만 에쿠스만을 고집하는 남자, 21년산 위스키를 맥주와 섞어 구정물 맛이 나는 폭탄주로 만들어 삼키는 남자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사치에 관한 한 양성평등은 법률적 양성 평등보다 더 빨리 이뤄졌다. 된장녀를 희생양으로 내세울 경우, 우리는 오히려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럭셔리 열풍'이라는 마법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된다. (p.36)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ㅇ르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은 럭셔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나도 탐이 난다. (p.39)

최소한의 비용으로 상층의 과시적 소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느라 '면세점 100퍼센트 활용법'과 명품 아웃렛 정보 수집에 두뇌 활동의 대부분을 할애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유권자는 소비자로 변화한다. 유권자일 때 유효하던 1인 1표제라는 민주주의의 놀라운 평등은, 소비자로 변화하자마자 구석에 처박힌다. 유권자는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 축적된 부를 단죄하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지만, 소비자로 변화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승자와 패자로 분리된다.(p.40)

세련된 국제 수준의 표준화된 간판과 실내 인테리어 그리고 포장지까지 화려해졌지만,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의 합리화된 외양과는 달리, 그 체인망이 제공하는 일자리는 고작해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일 뿐이다. 합리화의 끝에서 만나는 어이없는 비합리성은 합리화된 대학도 피해갈 수 없다. 강의 평가로 강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면, 높은 강의 평가 점수를 받기 위해 강의는 오히려 하향 평준화된다. 대학 경쟁력을 높인다고 영어강의 비중을 대학 평가의 지표로 사용하면, 대학들은 앞다투어 영어강의 비율을 확대한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강의실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학문 탐구라는 진지한 목적이 아니라 영어로 강의를 한다는, 영어로 강의를 듣는다는 만족감 뿐이다. (p.50-51)

공감은 동정이라는 따듯한 감정으로 냉혹한 현실을 잠시나마 가릴 수 있다는 낭만적인 태도와도 거리를 둔다. 동정의 다리 위에선 이따금 불우이웃돕기 모금이나 자선바자회가 열리지만, 공감의 다리 위에선 복지라는 제도의 나무가 자란다. 공감이 복지를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복지는 공감에 제도의 옷을 입힌 것이다. (p.127-128)

개인적 성공은 소유한 승용차의 크기와 은행 잔고로 측정될 수 있겠지만, 사회의 성공 여부는 공감이 제도화된 복지의 크기와 넓이로 가늠할 수 있다. 하늘이 혹은 계급이 선택한 소수의 사람만 성공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동정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독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회가 홀로 성공하는 게 더 좋다. 복지국가는 성공한 소수의 개인보다는 성공한 사회가 공공선에 가깝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성공의 단위는 하늘이 돕는 개인뿐이라는 오래된 사유의 관습과 이별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지국가와 만날 수 있다. 그 나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기계발서가 그 나라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기계발서는 읽을 만큼 읽었다. 이젠 그 책을 덮고 한번 물어보자.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인지,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 이었기 때문인지. (p.128)

강제에 의해 억지로 해야 하는 행위를 하며 신바람이 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구나 억지로 하는 일은 하는 시늉마 내지, 자신이 하는 활동에 대한 애착도 긍지도 몰입도 없다. 하지만 자신이 원해서 행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돌변한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동작이 굼떴던 사람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며,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던 사람도 하룻밤쯤은 거뜬히 지새울 수 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자발성이다. (p.153)

먹고살기 위해 취직으로 시작한 임금노동을 사표를 내던지며 그만둘 수 있다면 그보다 짜릿한 순간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나 홀로 탈출을 기도하는 임금노동자는 매일매일 마음속으로는 사표를 쓰지만, 의지할 곳은 복권뿐이다. 복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김대리 앞에는 전문가처럼 보이지만 사실 임금노동자에 불과한 대학교수도, 월급쟁이 의사도, 마트의 비정규직 종업원도 서 있을 수 있다. 복권을 사는 사람의 소박한 소원은 당첨이 되어 마음속으로 수백 번 쓰고 또 썼던 그 사표를 마침내 내던지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복권의 유일한 효용가치는 이런 백일몽을 꿀 수 있는 권리이다. 퇴근길 혼잡한 지하철에서 혼자 웃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선 복권 당첨이라는 짜릿한 백일몽이 상영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해결책은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고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복권 따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세상에는 여전히 복권을 사는 사람과 더이상 복권에 기대하지 않고 연대라는 죽어 버린 단어에 귀 기울이는 두 종류의 임금노동자가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p.193)

'콜드 팩트'와 마주했을 때 발생할 고통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고, 고통을 치유해 준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에 당신은 책임이 없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당신 마음 속의 고통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어떤 존재가 있다. 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콜드 팩트'라 부를 수 있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삶은 상처받은 사회를 치유하지 않은 채 치유될 수 없다. 이 명확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혹은 마치 상처받은사회가 치유되지 않아도 개인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우리가 좋은 사회 속에 살고 있지 않아도 개인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권유는 성공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긍정성으로 뒤범벅된 자기계발서만킁이나 거짓말에 가깝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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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6-2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참 괜찮지요?
글을 쉽게 알아 먹게 잘 써주고
또 꽤나 여러번 뜨끔뜨금하게 만들어주니 말이에요.





다락방 2014-06-23 13:46   좋아요 0 | URL
제가 밑줄을 그어놓질 못해 여기에 옮기질 못했는데, '보수는 사람을 향해 거짓말을 하고 진보는 사물을 향해 말한다'는 구절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 보수인 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강경히 유지하고 있고, 진보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자들은 '우리편은 무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뭔가 머리가 띵-해지는 구절이었어요.

아무개 2014-06-23 14:10   좋아요 0 | URL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도 좋은 글이 참 많아요.
제목만으로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 안드십니까? ^^:::

저는 첫 부분에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라'양식'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 있었던게 제일 기억에 많이 남네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내가 믿고 있는 상식이 언제나 옳은것은 아니라는걸...
여러모로 내 생각을 깨주는 부분이 많아서 좋더라구요.

단발머리 2014-06-24 10:06   좋아요 0 | URL
저는 위의 책을 어서 읽고 싶은데, 아무개님이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도 좋은 글이 많다고 하시니, 저는요, 무척이나 바쁘답니당~~~ *^^*

단발머리 2014-06-24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바로 읽어야겠는데, 머리를 팡팡! 내려치는 좋은 구절이 많아 줄을 치다보면 읽는 게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저는 특히 요 대목...

<'면세점 100퍼센트 활용법'과 명품 아웃렛 정보 수집에 두뇌 활동의 대부분을 할애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유권자는 소비자로 변화한다.>

...이 눈에 들어 오네요. 합리적 소비자로 살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사실 눈먼 소비자가 되는 건데요.
대단하네요, 이 책이요. 노명우라는 사람도요.

다락방님 페이퍼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제목만 아는 책이 되었을텐데, 다락방님이 많이 인용해 주셨지만, 저도 직접 읽어보고 싶어요. 추천 감사해요~~~~~

다락방 2014-06-24 11:55   좋아요 0 | URL
저도 소비자와 유권자 부분에서 뜨끔했어요, 단발머리님.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게다가 중산층이 럭셔리풍을 좇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도 사실인 것 같고요. 제 자신이 모순적이란 걸 들여다보게되서, 허황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참 씁쓸한 독서였습니다.

네, 단발머리님도 읽어보세요.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도 살짝 끌리지만 전 음...중고알림등록 해놔야겠네요. ㅋㅋㅋㅋㅋ

dreamout 2014-06-2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를 읽으시면 아마도 폭풍공감하실껄요~ ㅎㅎㅎ

다락방 2014-06-24 14:10   좋아요 0 | URL
폭풍공감...이란 말씀이십니까??? 이런 ㅋㅋㅋㅋㅋㅋ 읽어야겠군요!
 

일하면서 내가 계속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더라.


하지마안- 이미 그대는 다른 사랑에 빠져있다했지--





어느날 문득 나는 보았네 내 마음속의 사랑을
오직 친구로 알았던 그녀를 나는 사랑하고 있었네
바람이 불어와 허황한 거리에 나뭇잎만 흩어지던 날
그날 처음 느꼈던 내 속에 숨은 그대 그리움
지난 세월속에 천천히 커져왔던 나의 사랑을
하지만 이미 그대는 다른 사랑에 빠져있다 했지
못다한 나의 고백만 내귓가에서 바람따라 울고 있었지

바람이 불어와 허황한 거리에 나뭇잎만 흩어지던 날
그날 처음 느꼈던 내 속에 숨은 그대 그리움
지난 세월속에 천천히 커져왔던 나의 사랑을
하지만 이미 그대는 다른 사랑에 빠져있다 했지
못다한 나의 고백만 내귓가에서 바람따라 울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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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0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0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0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0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4-06-2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 노래 무지 오래된 노래인데! ^^
다락방님 덕분에 오랜만에 좋아하던 7080노래 듣고 갑니다.

'어느날 문득' 느끼게 되는 것이, 있더군요...

다락방 2014-06-20 14:40   좋아요 0 | URL
좋지요, 노래? 문득문득 옛날 노래들이 생각나고 그래요. 오늘은 유열의 노래네요. 어느날 문득~ 좋아서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하핫

2014-06-22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6-23 12:49   좋아요 0 | URL
이게 당시엔 몰랐는데 요즘 돌이켜보니 가사가 예술이에요 ㅠㅠ

자작나무 2014-06-23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를 알다니.

다락방 2014-06-23 12:48   좋아요 0 | URL
저 이 노래를 아는 세댑니다.

단발머리 2014-06-24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신난다~~ 저는 이 노래를 모릅니다람쥐~~~~

다락방 2014-06-24 11:53   좋아요 0 | URL
아니, 저랑 세대가 비슷한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 노래를 왜 모르신단 말입니까! ㅎㅎㅎㅎㅎ
 
정사
파트리스 쉐로 감독, 케리 폭스 외 출연 / JC인더스트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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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식으로 자꾸 만나는 건 좋지 않아요. 당신에 대해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지니까요. 점점 더 헤어지기 힘들고 갖고 싶어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여전히, 또 만나고 싶어요. 가지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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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쿡이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죄책감'인것 같다. 그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해 감추고 살아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 마음 깊은 곳의 불편한 그 느낌. 그래서 언제나 토머스 쿡의 책을 무겁게 읽을 수밖에 없는것 같다. 싸이코패스를 그리는 게 아니라, 토머스 쿡은 '우리'를 그린다. 나쁜 의도로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나쁜 의도가 아니었는데 작은 실수-혹은 장난-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를-혹은 죽음까지도-남기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그 잘못이나 실수 전과 후에도 그런 실수를 다시 하지는 않지만, 그 한 번의 실수가 불러온 것은 치명적이었던, 그런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인 줄리언 웰즈가 자살을 했고, 그의 친한 친구와 여동생은 도대체 왜 줄리언이 자살한건지 그간 그와 했던 대화들을 돌이켜보고, 그가 썼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고,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고, 그가 갔던 장소에 다시 가본다. 줄리언은 언제나 공포를 주는 사람, 잔인한 사람, 학살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는데, 그 중에 《쿠엥카의 고문》이란 책의 이야기는 다른 책들의 이야기보다 더 아팠다. 아래 인용문은 쿠엥카의 고문을 다시 읽은 친구 필립이 요약한 줄거리이다.



사건 당일, 그리말도스는 가끔씩 일을 했던 프랑시스꼬 루리즈의 농장에서 자신의 초라한 집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다음 날 여동생이 치안당국에 오빠의 미귀가 사실을 신고했다. 그녀는 실종 당일 오빠가 양 몇 마리를 팔았는데 오빠가 양을 팔고 받은 돈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적어도 두 남자가 알고 있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발레로와 산체스라는 남자였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들은 틈만 나면 그리말도스를 조롱하고 괴롭히고 학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리말도스의 돈을 빼앗고 살해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사가 시작되었고, 다른 주민들도 수사관들에게 발레로와 산체스가 의심스럽다고 진술했지만, 그리말도스의 시신이나 직접적인 살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1911년 9월에 수사가 종료되었다. (p.58-59)



그리말도스의 가족들이 오빠를 찾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잠깐 며칠전에 읽었던 《리뎀션》이 생각나는데, 그들은 발레로와 산체스로부터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점점 더 그들이 범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들은 용의자들을 계속 주시하며 때를 기다렸고, 1913년 쿠엥카에 새 판사가 임명이 되자, 증거부족을 이유로 발레로와 산체스 사건을 기각한 전임 판사와는 달리 새 판사가 이를 번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칼을 빼들었다.

새 판사는 젊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미해결 사건이라는 망령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발레로와 산체스는 다시 체포되었고, 이번에는 치안경비대가 호세 마리아 로뻬즈 그리말도스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도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했다.

발레로와 산체스에게 끔찍한 고문이 가해졌다. (p.60)



이 책을 다시 읽는 줄리언의 친구 필립은, 여기에서 줄리언이 고문 장면을 고문 피해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자세하고 잔인하게 묘사했는지를 얘기한다. 고문자의 얼굴 표정이라든가 채찍 소리 같은것들. 그러나 나는 이 책 속의 책, 쿠엥카의 고문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했다. 끔찍한 결말이니 당연히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그러나 내 짐작이 틀리기를 바랐다. 



고문을 당한 발레로와 산체스는 호세 그리말도스를 살해한 후 시신을 훼손했다고 자백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말하지 못했다. 줄리언이 주목했듯이 이 사실은 자백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들었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추가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p.68)


그리고.


수많은 범죄 혐의에 대하여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지만, 재판은 스페인 사법부의 미로 같은 방들을 거치면서 질질 끌었고, 1918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피고인들에게 각기 18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은 6년 후에 가석방 되었고, 그러부터 2년 후인 1926년 봄, 줄리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토록 오랫동안 잔혹하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던 가엾은 엘 세빠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엘 세빠는 그 십수 년 동안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p.69)



아...나는 이 책을 책 속의 책으로 만났기에 다음 책장을 넘길 수 있는거란 생각을 했다. 만약 쿠엥카의 고문이란 책이 현실에 존재하고, 내가 지금 이자리에서 그 책을 읽었다면, 엘 세빠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는 문장을 읽는 순간 책장을 덮어버리지 않았을까. 답답하고 또 답답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내 가슴을 몇 번이나 치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에서 내가 미워해야 할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왜 엘 세빠는 다른 마을에 살면서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 한 마디 안부만 전했던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그들에겐 대체 무슨일이 있었기에, 어떻게 지냈었기에, 그들은 그간 어떤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일이 이렇게 된걸까. 사랑하는 가족이 사라지고, 거기에 분명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사람이 연루되었을 거라는 느낌, 그것을 단순히 피해망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연히, 의심은 확신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 확신, 그 확신은 얼마나 위험한가. 발레로와 산체스는 자신들이 벌이지도 않은 일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하고, 수감된다. 그들의 그 고통의 시간들을, 이제와서 '판단을 잘못했구나' 라고 말한들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숨 막히는 작은 공간 안에서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살해되지 않은 자 엘 세빠는 쿠엥카의 먼지 자욱한 거리들을 그리워하면서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부담이 가장 적은 운수 게임의 복권을 팔고 있었다. 이렇게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지만, 관 속 같은 공간에 갇혀 그 어둠 속에서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자신의 죄를 잊고 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p.69-70)



자신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오랜동안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된 엘 세빠 역시, 편안한 삶을 살 수는 없었다. 줄리언 웰즈는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고, 그런 줄리언 웰즈가 자살을 했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악에 가득찬 사람들을 혹은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을 책 속에 녹여냈던 줄리언 웰즈가 자살했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다뤘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줄리언은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도, 책을 한 권 내고 또 내고 또 내도, 자신이 저지른 일, 그리고 그 일이 불러온 그 결과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 그리고 그 잘못이 가져온 치명적인 결과는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일테니까.


나 역시 잘못 혹은 실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제는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불현듯 초등학생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때 내가 저질렀던 잘못. 내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때 그게 잘못이란걸 알지 못했다는 것뿐인데, 지금은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안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혹여라도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가 그 일을 살아오며 내내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에. 아무리 어렸다고한들, 나는 왜그랬을까. 이 생각을 하면 끝도없이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계속 떨어지기만 하는 기분.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는 추락하고 있는데, 아무도 내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지 않는다. 애초에 추락의 길로 들어선 게 나였으므로.


줄리언은 세상에 일어났던 많은 악한 일들을, 그 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으로 알렸다. 그가 자신의 죄를 사하는 방법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꽤 고마운 대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좋은 일을 한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주기도 했을 것이고, 누군가의 인생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지른 잘못이 기억에서 지워지지는 않는다. 좋은 일 하나에 나쁜 일 하나를 상쇄시키는 일 따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나는, 스스로 다독이는 방법을 찾을 수는 있다. 이것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그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실감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줄리언 역시 마찬가지였을텐데, 줄리언에게도 이런 합리화가 있었다면 자살까지 이르지 않았을 수 있었을텐데,  줄리언이 가져온 결과는 지독하게 끔찍하였으므로, 그는 다시 일상에 발붙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일이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만, 일이 그렇게까지 되었다. 이 책속에는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아이들은 장난으로 개구리를 죽이지만 개구리는 정말 죽는다'는. 잔인한지 모르는 채 인간은 가장 잔인해질 수 있지 않은가.



그제 아침에 출근길에 길고양이를 만났다. 잽싸게 멈춰서서 가방을 뒤져 소세지를 꺼냈다. 소세지 껍질을 벗기고 소세지를 고양이 쪽으로 던졌는데, 고양이는 잠깐 경계하고 도망가더니 좀처럼 소세지 근처로 오지는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거다. 내가 없어야 먹겠구나 싶어 나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어제 퇴근길. 또 고양이를 마주쳤고 나는 얼른 가방에서 소세지를 꺼냈는데, 이번 고양이는 경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얼른 먹을 걸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껍질을 까고 소세지를 던져주니 잽싸게 물고는 뛰어가는거다. 오호라. 소세지가 두 개 남았는데 하나는 내가 좀 먹어야겠다. 배가 고프네. 각설하고,



토마스 쿡은 이 책에서 인간의 잔인함이 비단 인간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투견장의 장면이 그것인데, 와, 나는 특별히 더 동물을 사랑하고 애착을 갖는 사람이 아니고, 집에서 동물을 기르거나 하지도 않고, 길고양이에게 소세지를 준 것도 이제 겨우 시작한 사람이지만, 와- 나같은 사람도 보기 힘든 이 장면을 동물에게 애착을 갖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굉장히 힘들겠구나 싶었다. 개들을 훈련시키고 싸움터에 내보내는 인간들, 그 싸움을 보며 즐거워하고 흥분하는 인간들. 그들이 대체 뭐가 다른가. 그러나 투견에 가장 능숙한 개인 '도고 코르도바'는 멸종이 됐다고 한다. 



"도고 코르도바는 이젠 멸종이 됐네." 개싸움에 대한 묘사를 마치면서 소보로프가 말했다. "투견장에서 죽기도 많이 죽었고, 살아남은 놈들도 아주 예민해져서 딴 놈들과 붙여만 놓으면 서로 물어뜯고 죽여버렸거든. 그래서 멸종된 거야." 그는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흉포성만 가지고는 삶이 유지될 수 없다는 말이 맞아." 그가 말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마음에 와 닿는 말이더구먼." (p.259)






흉포성만 가지고는 삶이 유지될 수 없다는 말이, 내게도 와 닿았다. 흉포성만 가지고는 삶이 유지될 수 없고, 먹을거리가 있다고 해도 삶이 유지될 수는 없다. 삶에는 그보다 좀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감정을 건드리는 것들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이 끼어들어야만 한다. 얼마전에 조카와 함께 서점에 가서 보았던 그림책인 《프레드릭》이 떠올랐다. 모아놓은 식량이 없어지자 많은 쥐들이 프레드릭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영화 《그레이트 뷰티》의 배경은 이탈리아 로마이고, 주인공인 '젭'은 65세의 노인이다. 어마어마하게 부자인 그는 파티를 즐겨하고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노년을 즐기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첫사랑의 남편이 찾아와 첫사랑의 죽음을 알린다. 젭의 일상이 그 일을 계기로 갑자기 변하거나 하진 않지만, 그는 점점 생각이 많아지게 되고, 시간이 흘러 첫사랑의 집에 찾아가보니 첫사랑의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재혼을 했다며 자신의 아내를 소개시킨다.


젭은 그들과 헤어지기전, 그들에게 '이제 무얼할거냐' 라고 묻는다. 젭과는 형편이 많이 다른 그들은 별로 할 일이 없다는 듯' 아내가 다림질을 마치면 같이 와인을 한 잔 마실거고, 그 후엔 티브이를 보다 잘 거' 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젭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무얼할거냐고. 그러자 젭은 사람들과 어울려 파티를 할거고 술을 마실거라고 말한다. 아마 당신들이 일어날 때쯤 자신은 잠이 들게 될거라고.


이때, '다림질을 마치고 같이 와인을 마시고 티브이를 보다가 잠드는' 그 부부가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요란한 파티가 아니어도, 사람들 틈에서 들썩이거나 화제가 되질 않아도,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저 일상의 조용조용한 장면장면마다 누구와 평화롭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 일상은 딱히 누군가에게 강요받지도 또 강요하지도 않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가장 행복한 장면은 가장 조용하게 찾아오고, 굳이 누군가에게 드러내지 않아도 좋은 것. 인생 최고의 순간은 그런 순간들이 주는 게 아닐까.




로레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 여행도 끝이 보이는 것 같으니까 미리 말해두는데, 오빠랑 함께 해서 즐거웠어. 오빠랑 함께 여행하고 이야기를 하고 오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어."

"나도 그래, 로레타."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대화를 책에서 읽는다면 손발이 오글거리는 장면이겠다, 그렇지?"

"그래, 그럴 것 같네." 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감상에 젖는 순간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일 때가 많아." (p.272)



같이 일상을 공유하는 것, 사소하지만 조용한 시간들을 함께 하는 것이 '감상에 젖는 순간'으로 바로 직행하는 건 아니지만, 그 일상 틈틈이 나라면, 감상에 젖기엔 충분하다. 그래서 그 순간들을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마침 어제 꾸었던 꿈 생각도 난다.


어제 꿈에 나는 한 남자와 같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무슨 학원인지는 모르겠는데 수강생이 엄청 많았고, 학원 근처에도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학원이 끝나고 그와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시간이 무척 다정하게 느껴지는거다. 그 다정함에 힘입어 나는 슬쩍 그에게 팔짱을 꼈다. 이러지 말라고 말하면 어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는 이러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조용히 내 팔짱을 빼면서 그대로 손을 잡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손을 잡는 사이는 아닌데, 이렇게 손을 잡아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래도 되는건가? 라는 생각. 그러나 그와 손을 잡은 게 무척 좋아서 모르는 척 손을 잡고 그 다정함을 한껏 즐기며 걷고 있는데 손에 너무 땀이 차는거다. 내 손이 아니라 그의 손에서 나는 땀 같았는데, 다한증인가, 하고 생각하며 나는 손을 살짝 놓고는 '땀' 이라고 작게 말한 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을 닦아주었다. 닦아주고 나니 그는 잠깐 갈 데가 있다며 어딘가로 가버려서, 아이씨 땀 나도 그냥 잡고 있을걸, 하고 생각하다가 깼는데,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감으면서 으응, 이 꿈은 뭐지, 왜 이런 꿈을 꿨을까, 했다.



앗! 그러고보니 저 영화 그레이트 뷰티에 다한증으로 고생하는 수녀 얘기가 나오는데, 그래서 꿨나??????????????????????????????????????????????? 어쨌든.




토머스 쿡의 번역된 소설은 이제 《심문》을 빼놓고 다 읽었다. 처음 《붉은 낙엽》을 읽었을 때는 내가 이 작가의 책을 계속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채텀 스쿨 어페어》가 좋아서-다른 말로 엄청 불편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내 나름의 순위를 정해봤다. 《줄리언 웰즈의 죄》가 좋은데, 그럼에도불구하고 내 순위 안에서는 4위다. 이 정도가 4위라면, 앞으로 나올 그의 소설을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믿을만한 작가다.












며칠전에 만난 친구가 나더러 회사 그만두고 세계 곳곳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방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는데, 흐음, 그거 하다보면 금세 200키로 찍을 것 같아 거절했다. 역시 나한테는 평범한 직장인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밥이나 먹자.



마지막으로 어제 친구가 보내준 독특한 노래.









"줄리언은 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들이 감방벽에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많이 써놓은 단어가 있다고 했네.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어, 어머니나 아버지, 하느님 같은 단어가 아니라고 했지." 에두아르도는 또 내 오랜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심각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쳄'이라는 단어였네."
"자쳄이 무슨 뜻이죠?"
"'왜'라는 뜻이지." 에두아르도가 대답했다. 당혹스럽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말이 줄리언의 마음에도 쓰여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배신이 적어놓은 단어라는 생각도 들고."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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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0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0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06-20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저는 지금 누구누구님들이 좋다고 강추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절반 정도 읽었습니다.
참...특이한 소설이네요.

2.'왜?'라는 질문은 부조리한 세상속에서는 더욱더 절망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거 같아요.
아무리 왜냐고 자신에게.... 신에게.... 물어봐도
자신이 겪는 이 일이 이해가 될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그저 뭐 내 팔자가 이렇지 뭐 자포자기 하고 사는것이 오히려 조금은
더 편하게 살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잘 쓰는 뭐라더라
그...지금의 시련은 하나님이 다 널 사랑해서 그런거다 뭐 이딴거 믿으면서요....

3.기분이 계속 우울하니까 댓글도 삐딱~~ =..=


다락방 2014-06-20 11:52   좋아요 0 | URL
1. 저는 지금 노명우의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읽고 있습니다. 뜨끔한 문장들이 나올때마다 뜨끔뜨끔 합니다. 유권자와 소비자 부분에서 특히..

2. 지금의 시련은 하나님이 다 날 사랑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이겨내야하는 거구나, 하며 내 몫인가보다, 체념하게 되는 경우가 저도 더러 있긴 합니다.
아니, 그래야 버텨지기도 하고 말이지요.
너무 싫잖아요, '너를 사랑해서 그래' 라는 말. 싫어요 진짜.

3. 저는 조울증인듯 우울했다 웃었다 합니다. 얼마전엔 다정한 남자사람 친구로부터 '요즘 나한테 왜이렇게 잘해줘?' 란 말을 들었어요. '며칠전엔 짜증냈잖아' 하면서요..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레와 2014-06-2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더욱 탄력붙은 다락방의 리뷰러쉬~ 좋아요!!! (엄지척!) 히히..

다락방 2014-06-20 11:52   좋아요 0 | URL
탄력붙었다는 말은 종종 듣고 있는데 댓글은 점점 줄어요...뭐징.. ㅎㅎ

자작나무 2014-06-2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 - 길 잃은 아이들의 길 찾기 프로젝트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 효형출판 / 2014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걷는 동안 아이에게는 카메라가 지급되고, 그는 이것을 통해 보는 연습을 한다. 돌아간 후에는 추억을 담은 사진첩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출발할 때 그에게 여행 수첩을 주고, 걷는 동안 기록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다른 몇 가지 요소들도 젊은 보행자의 정신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게 된다. 쉬는 날에는 일정에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다. (p.157)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감옥에 보내는대신 '걷기'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사실이 꽤 매력적으로 들린건 사실이지만, 효과에 대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물론 걷는걸 좋아하고, 걷는 동안 아주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지만, 설사 그렇다한들 걷는것이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을 좀 더 나은방향 혹은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른과 함께 걷는다고 해도 그저 무심히 자기가 갈 길만 가고 자신이 선택한 음악을 듣고, 핸드폰으로 SNS에 몰두한다면, 그건 별로 가져다주는 게 없을것 같은데? 3개월간 걸으며, 그저 몸이 건강해지는 것, 그것 뿐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는 확실히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멀리 내다볼 줄 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걷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속한 곳과의 단절이 필수였다. 동행하는 어른의 핸드폰으로 간혹 가족들과 통화를 하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들이 핸드폰을 소유할 순 없었으며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허락되어지는 건 하루에 3유로의 용돈과 카메라 뿐이었다. 프랑스의 아이들, 불어만 할줄 아는 아이들은 독일이나 스페인 이탈리아등 낯선 곳을 걷는다. 그저 걷는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같이 걷는 동행자(어른)와 함께 요리를 하고, 함께 설거지를 하고, 함께 텐트를 쳐야하며, 혹여나 닥쳐오는 난관들 역시 함께 극복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청소년 범죄는 그들의 어릴적 좋지 않은 환경으로부터 비롯되고, 그 아이들의 대부분은 어른들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3개월간 낯선 길을 낯선 이와 함께 걸으면서 그들은 어른과 대화를 하고 함께 행동하고 이해하면서 어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도 한다. 외국어를 쓰는 사람들을 마주치며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걸 배우고, 그들에게 환영받거나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그간 자신들이 속한곳에서 잘 해내지 못했던 사회화를 경험한다. 


물론 갑자기 낯선이와 걷기, 라고 한다면 거부반응이 올 수밖에 없을터. 쇠이유에서는 이들이 걷기에 참여하기전 일단 동행자와 함께 연수기간을 준다. 가방을 싸는 것도 함께 배우고 앞으로 가야할 여정에 대한 것도 공유한다. 낯선곳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연수과정을 갖고 걷는걸 연습한다. 걷기가 끝나고나도 마찬가지, 그것으로 끝, 이 되는게 아니라 그들은 다시 연수 과정을 거친다.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느꼈는지 걷는 중에도 주간보고서를 작성하지만, 그들은 걷기를 마치고나서 앞으로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 충분한 상담을 거치고 다시 '이곳'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왜 어른 하나에 아이 하나일까, 어른도 여러명이며 아이도 여러명인 것이 재미나 협동심 면에서 더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대한 의문 역시 이 책은 풀어준다.


혼란을 겪고 있는 아이 두 명과 함께 걷는 일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초반에 이 방법을 시험해보았지만,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2인조'(네 달 동안 아이 두 명과 2,500킬로미터를 걷는 것)보다 짧고 더 효과적인 '솔로'(세 달에 1,900킬로미터를 걷는 것)를 선택했다. 같은 시기에 오이코텐도 이 방식을 채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p.66)



미성년자 사법 보호 감찰기관 또는 아동 상담소의 교육자들이 걷기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는 첫 번째 요인은 쇠이유가 걷기 이후의 계획을 확실히 세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집단적인 관리는 현 상황에 더 이상 맞지 않는다. 쇠이유에서는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책임지며 담당 성인의 지원하에 아이가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제공한다. (p.108)



쇠이유 프로젝트의 독창성은 성인 동행자와 함께하는 일상적인 만남과 시간을 제안한다는 데 있다. 소수가 만들어내는 긴밀한 관계는 주도권 다툼과 집단적 흥분, 그리고 정체성의 상실을 피하게 해준다. 아이는 이 긴 모험 속에서 스스로를 책임지며, 자신의 역할을 정의하고 실천한다. 예상치 못한 일과 직면했을 때는 아이도 어른도 각자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p.l54)



중간 코스마다 보조 동행자가 참석하고 또 중간에 상담사도 동행하는 등, 걷는 중에도 계속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이 걷기 프로젝트는 실제로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해결방법은 아님은 명백하다. 쇠이유는 이 걷기 프로젝트를 마쳤음에도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다시 수감되는 아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 걷기가 빠른 시간에 아이들을 교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고도 말한다. 천천히 변화할 수도 있고 설사 지금 당장 다른 범죄를 재차 저지른다해도, 이 걷기에 몰두했던 시간은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걷기를 함께한 사람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운 일이다. 걷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했다. 그러나 재발 가능성 때문에 의사가 치료를 단념해야 할까? 범죄자가 재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그들을 다시 교도소에 보내는 것보다 비용이 훨신 덜 든다는 걸, 이 사회는 언제쯤 깨달을까? 재범의 위험에 대해 우리에게 자꾸 묻는 이유는 우리의 방법을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p.45)




하지만 쇠이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걷기가 즉각적인 효과를 얻진 못했을지라도 아이에게 그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서 결국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걷기 여행이 끝나고 나면, 아이는 '머릿속에서' 걷기를 이어나간다. (p.82)


이 걷기 프로젝트에 대해 관심은 있었지만 그 효과에 대해 미심쩍어 했던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며 이 계획이 내 생각보다 훨신 더 철저하게 잘 짜여져 있음에 감탄했다. 내가 생각해내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준비했다는 생각도 들고. 제일 처음 청소년 범죄자들과 함께 걷기를 실행했던 벨기에도, 그리고 지금 이 책의 배경인 프랑스도,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 청소년들과 함께 3개월간을 걷고 또 그 전과 후에 연수과정을 함께하는 동행자들은 자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곳으로 가 있는 자원봉사자들인 경우가 많다. 이 아이들과 낯선 곳을 단 둘이 함께 걸어야 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일것이다. 그러나 분명 용기를 가지고 이 일에 임하는 어른들이 존재한다. 


나는 자원봉사자가 되어서 그들과 함께 걷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단체가 혹여 우리나라에도 생긴다면 기부금을 낸다든가, 걷는 도중 읽을 책을 기증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작게나마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법부에서는 자꾸만 청소년범죄자들을 '가둬두려고'만 하며 그 아이들이 '나쁘니' '처벌해야한다'고만 할때, '그 아이들의 환경이 좋지 못한 것이지 아이들이 나쁜게 아니다' 라는 걸 믿고 함께 하며 그 아이들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려고 하는 이런 어른들과 이런 단체라면, 기꺼이 도울만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저 좋은 의도만으로 무작정 시행하는 게 아니라, 쇠이유처럼 철저한 연구와 검증으로 계획을 세웠다면, 믿을만하지 않겠는가.



걷기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다시 쇠이유로 돌아와 연수 프로그램까지 마쳐서 이제 어떤식으로 사회의 일원이 될것인가를 결정하고 나면, 그제서야 이 프로젝트가 완전히 끝난다. 그리고 그때, 이 청소년의 가족들과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함께모여, 아이들의 '귀환파티'를 해준다. 그 파티의 주인공이 되는 아이는 '내가 무언가를 이뤘다'는 느낌에 그전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들이 그전보다 더 성장해 있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에, 그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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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4-06-1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이 올린 트윗에서 이 책을 보고, 어떤 책일까 궁금했어요.


^^

다락방 2014-06-18 09:39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엔 정말이지 놀라운 사람들로 가득해요.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 말이죠. 읽기를 잘한 책이었어요. 흐흣.
잘 보내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

레와 2014-06-20 10:07   좋아요 0 | URL
어제 쓰다가 지운 댓글인데,
세상엔 바보같은 사람들이 천지삐까린데, 그중에 한명이 그 바보들을 이끌고 가는듯한 느낌?
내가 그 한명이 될 생각과 행동은 못하고, 난 그냥 바보같은 인간이야. 뭍어가자..고 결론지어 버리는 변명만 늘어가는 감..

2014-06-18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4-07-10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워낙 책을 많이 올리시니 ㅋ 당선 된 것도 까먹으시겠지만 ㅋ
축하드려요! 당첨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