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애인과 이별한 친구에게 '너는 미래에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릴 수 있었냐' 고 물은 적이 있었다. 친구는 '그렇다'고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간혹 내가 그리는 나의 미래에는 나의 애인들 중 누구도 없었으니까. 이상하게도 앞으로의 그림을 그려볼라치면, 거기엔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라고 해서 외로워하거나 슬퍼하진 않지만, 혼자 있는 집이 그려졌다. 다만,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어도 바깥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는 할 것 같았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하진 않을거라 생각했다. 친구에게 그리 물었을 때, 나는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누군가와 함께 하는 모습을 그리는 지를.


물론 영화속에서도 드라마 속에서도 '나는 너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어' 라든가 '너와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어' 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오긴 했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그 당시 그 커플들에게 낭만적인 말이었을지언정, 나를 유혹하는 어떤 멘트도 되지는 못했다. 그 말은 내게 다가와 닿지 못했고, 그것은 아마도 내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실질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늙어간다는 것이 내게는 구체적인 상상으로 그려지지도 않았고. 내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면 나는 그와 앞으로 함께 하는 삶을 꿈꾸기 보다는 지금 즐거운 것을 더 많이 추구하곤 했다. 심하게 열병을 앓을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서도 미래를 그리기 보다는 '그는 어떤 어린이었을까, 어떤 학생이었을까, 학생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를 생각해보는 일이 더 많았다. 내게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는 마치 공상과학영화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매일 밤마다 아빠와 엄마가 한 방에서 잠들고, 아침에 함께 눈뜨고, 자기 전이나 일어나서 투닥대는 모습을 볼 때조차도 그것은 '내 부모의 삶' 이었지, '언젠가 나의 것이 될 수도 있을것' 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건, 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당신과 함께 남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말에 진정성이 있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그냥 하는 말' 같은 거였다. 이 책,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읽기 전까지는. 정확히, 그의 이런 문장을 읽기 전까지는.



우리는 3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살이었고, 그녀가 죽었을 때는 쉰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내 삶의 심장이었다. 내 심장의 생명이었다. 그녀는 늙는다는 개념을 증오했다. 이십대부터 자신이 마흔을 넘기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둘이 함께 이어나갈 삶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했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고요해지기를, 함께하는 옛 추억들이 늘어나기를 고대했다. (p.111)




이 문장들을 천천히 읽는데, 그의 말이 거짓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에 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 같아 나는 아주 꼭꼭 단단하게 읽었다. 아, 그럴 수 있는거구나, 했다. 앞으로 함께 이어나갈 삶을 고대할 수 있는거구나, 함께하는 추억이 늘어나기를 바랄 수가 있는거구나, 그런 걸 고대할 수 있는거구나! 내게 이것은 사랑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주었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나의 확신에, '어쩌면 그렇지 않은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결혼 생활이 결국은 의리와 정으로 지탱되는 거라는 생각 앞에, 꼭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일종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해주는 문장이었다. 그러자 이내 근사해졌다. 아, 나와 함께 하는 삶을 고대하는 사람이라니. 아니, 내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을 고대할 수 있다니!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만나 꿈꿀 수 있는 어떤 최대치가 아닐까. 




그렇기에, 모든 사랑은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라는 그의 말이 옳다. 우리는 언젠가 죽고, 함께 산다면 누군가가 반드시 먼저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함께 산다고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그것이 우주의 순리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약하디 약한 존재이니까. 사랑이 끝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리고 그때마다 언제나 아프고 쓰라리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사랑의 절정에 있었던 젊은 시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이 더 늘어가고, 그래서 이제는 '이제껏 하나인 적 없었던 두 가지'가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그때 찾아오는 이별이야말로 비탄과 고통속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우리는 평지에, 편편한 면 위에 발을 딛고 산다. 그렇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망한다. 땅의 자식인 우리는 대로 신 못지않게 멀리 가 닿을 수 있다. 누군가는 예술로, 누군가는 종교로 날아오른다. 대개의 경우는 사랑으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날아오를 때, 우리는 추락할 수 있다. 푹신한 착륙지는 결코 많지 않다. 우리는 다리를 부러뜨리기에 충분한 힘에 의해 바닥에서 이리저리 튕기다가 외국의 어느 철로를 향해 질질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아니었대도, 결국 그렇게 된다. 누군가는 예외였다해도, 다른 사람에겐 어김없다. 때로는 둘 모두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p.60-61)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좋아한 문장이다. 사랑으로 훌쩍 날아오르지만, 우리는 추락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자명한 이치인가. 또한 푹신한 착륙지가 많지 않을 뿐더러 철로를 향해 질질 끌려가게 되는 고통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명백한 사실인가. 모든 사랑 이야기가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당신과 함께 살고 당신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도 고통이지만, 그것이 싫어 지금 당신과 헤어지는 것 역시 추락이니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어떻든 우리는 둘이 함께 영원할 수가 없으니까. 아내를 잃은 줄리언 반스의 조용한 회고 앞에, 나는 먹먹해진다. 그에게도 역시, 사랑은 비탄의 이야기였다. 그녀의 빈자리를 느껴야 했으니까. 




전에는 함께였던 적이 없는 두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해보라. 어떤 때는 최초로 수소 기구와 열기구를 견인줄로 함께 묶었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추락한 다음 불에 타는 것과, 불에 탄 다음 추락하는 것, 당신은 둘 중 어느쪽이 낫겠는가? 그러나 어떤 때는 일이 잘 돌아가서 새로운 뭔가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머지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p.109)




차곡차곡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이 책을 써나갈 때, 일단은 비상의 죄로부터 시작해 결국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 때, 그는 차분하게 이 글의 구성을 하였을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109쪽의 저 문장을 쓰다가 무너지지 않았을까, 다시 오열하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보았다. 그는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답게, 무척이나 유려하게 이 책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추슬렀던 감정이,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는 문장을 쓰면서, 폭발해버리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그가 아프게 이 글을 썼다는 거야 충분히 짐작 가능하지만, 결국 저 문장에 이르서야 나는, 함께 엉엉 울고 싶어졌으니까. 극도의 사랑 앞에서 그렇듯 극도의 고통 앞에서 역시, 우리가 깨닫는 사실은 굉장히 단순하다. 네가 가버리고 난 뒤, 그 자리는 너무나 크다. 이것만큼 상실의 고통을 잘 표현할 만한 말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아내를 잃은 그에게 친구들이 건네는 위로는 대체적으로 다 쓸모가 없다. 그는 자신 나름의 기준으로 그들을 친구명단에서 제외시킨다. 그는 지금 아내를 잃기 전과는 다르니까. 비탄에 빠져 있으니까. 그들이 위로라고 건넨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 앞에서 조심하려는 걸 알지만, 그에겐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하물며 무신론자인 그가, 종교적 위로 앞에 어떻게 감사해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기독교도 중 한 사람에게 아내가 중병을 앓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내 아내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나는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충격적이게도 곧바로, 얼마간은 씁쓸한 태도로 그의 하느님이 크게 소용이 된 적은 없엇던 것 같다고 일러주고 말았다. 그는 대답했다.

"아내 분이 훨신 더 고통스러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나는 생각했다. 아, 그 정도가 당신의 핏기 없는 갈릴리 남자와 그의 아빠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거군? (p.155)  




하물며, 그녀와의 헤어짐이 우주의 할 일이라고 한들, 그가 우주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우주가 제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한들, 그것은 그저 그 자신을 위로하기위한 수단에 다름아닌가 말이다.




나는 차를 운전해 병원에서 집까지 다녔는데, 철도교가 나타나기 직전의 어느 길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나는 소리 내어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곤 했다.

"이건 그냥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바로 '이것', 이토록 거대하고 강렬한 '이것'이 '모든 것'의 이유일 뿐이었다. 그 말엔 어떤 위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말은 가짜 위안에 저항하는 대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가 다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우주 자신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을 터이니, 우주 따윈 될 대로 되라지. 세상이 그녀를 구할 수도 없고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세상을 살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p.121-122)




결국 그가 잃은 건, 종교보다 큰 무엇, 우주 따위보다 더 대단한 무엇이었음을, 그의 큰 고통을 담은 잔잔한 고백 앞에 깨닫는다. 섣부른 위로가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얼마나 무용한가를 깨닫는다. 어설픈 격려의 말이 그들에게 닿을 수가 없다는 사실도 역시 깨닫는다. 나는 그에게 섣부른 위로 대신, 어설픈 격려의 말 대신 무엇이 좋을까 생각해보지만, 설사 내가 좋다고 생각한 것을 시도해봤자 그것이 그에게도 좋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다. 어쩌면 나는 그저 먼 곳의 그의 독자임을 스스로 다행히 여겨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줄리언 반스의 책은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어본 게 전부이고, 그 두 권은 모두 내게 그렇게 크게 재미있거나 좋진 않았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그 두 권을 합친것보다 더 좋다. 이 책이라면, 한 번 더 읽어도 좋겠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p.11)는 그의 말을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본다. 어쩌면 하나인 적 없었던 두 가지가 하나가 되었을 때, 그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악몽에 시달리고난 아침,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 누군가와 함께 되짚을 추억을 만들어내는 걸 고대하는 삶은, 마치 줄리언 반스의 글처럼 근사할 수도 있겠다. 그의 고통 앞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모두가 명치를 맞은 듯이 충격을 받은 건 단연코 지구가 솟아오르는 광경이었다‥‥‥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행성을, 우리가 진화한 곳을 되돌아본 것이었다. 거칠고 우툴두툴하고 낡아빠진데다 따분하기까지 한 달 표면에 비하면 우리의 지구는 참으로 알록달록하고 예쁘고 섬세했다. 아마도 거기 있었던 우리 모두는 달을 보려고 386242.56킬로미터나 왔는데, 정작 절대 놓쳐선 안 될 장관이 지구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p.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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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4-08-13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언 반스의 소설에서는.. (화자가) 몰래 감쳐둔 감정 같은 것을 불현듯, 일순간에 느낄 때가 꼭 있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아직 못 읽고 있습니다. 그 일순간에 느낄 감정에 대해 제가 이미 너무 준비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요..

다락방 2014-08-14 10:10   좋아요 0 | URL
저는 줄리언 반스의 매력을 이 책에서 처음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이미 팔아버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다시 읽어봐야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 뭡니까. 저는 그게 그렇게 좋진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이 책은 정말 좋습니다, 드림아웃님. 드림아웃님도 읽어보시면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차분하고 매력적인 글이에요. 천천히 읽기에 참 좋은 글입니다.

몰래 감쳐둔 감정을 불현듯 느낄 때, 그걸 제가 이 책에서 느꼈네요.

2014-08-18 0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8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봐봐 2014-08-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말 좀 들어봐, 를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내 말 좀 들어봐,를 읽고 줄리안 반즈의 팬이 되어 이후 플로베르의 앵무새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로 읽었죠.

다락방의 포스팅을 열심히 읽고 있는(덧글은 첨) 독자인데, 분명히 그 책을 좋아하시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락방 2014-08-18 18:01   좋아요 0 | URL
댓글 읽자마자 후다닥 <내 말 좀 들어봐>를 검색했는데요, 봐봐님, 이게 품절이네요? ㅜㅜ 그래서 알라딘중고알림등록 신청해두었습니다. 중고 등록 문자 오는대로 후다닥 결제해서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궁금하네요.
추천 고맙습니다!
:)

봐봐 2014-08-22 17:4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하.. 중고도 없다니.. 제 책이라도 빌려드리고 싶네요.

택배로 빌려드릴까요? ^______^

다락방 2014-08-25 14:11   좋아요 0 | URL
ㅎㅎ 중고알림등록 해두었으니 문자오기를 기다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