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레이첼 모랜 지음, 안서진 옮김 / 안홍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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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좋은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답이 다 들어있다.


저자 '레이첼 모랜'은 열다섯살에 성매매에 유입되어 7년간 성매매를 하고, 탈성매매후에 10년간 이 책을 집필했다.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며 쓴 책이 아니라 그 과거로 돌아가 이 글을 썼고, 그 때 느꼈던 언어의 왜곡을 이제는 제대로된 언어로 찾아와 적어낼 수 있게 되었다. 과거는 그저 과거에 불과한 게 아니라, 미래를 막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 '단지 과거야'라며 휘휘 저어 떠나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나 성학대가 기반이 된 성매매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저자 본인의 것이었다면 오죽할까.


누구나 아프고 괴로운 과거가 있을 것이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그 과거의 시간들. 그런 과거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 때의 생각이나 느낌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금세 그 때의 내가 되어 다시 그 상처를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나 역시 그랬다. 글을 쓸 때는 물론이거니와 애인이나 친구와 대화를 할 때도 아픈 과거의 나로 돌아가면 나는 현재에도 반드시 아팠다. 어느날은 그 아팠던 시절에 대해 얘기하다가 지금도 그 때의 아픈 내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대화를 중단해야 하기도 했다. 레이첼 모랜 역시 이 책을 쓰기 위해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책의 처음에 밝히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 아픔속으로 들어가 다시 그 때의 내가 되어 그 때를 기술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하여 마치는 글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레이첼 모랜은 열다섯살에 성매매에 유입되었다. 레이첼 모랜의 어머니는 조현병을 앓고 있었고 아버지는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두 성인 어른이 만나 사랑이란 걸 하고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는데, 그 병은 치료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약물에 중독된 부모들이라 레이첼 모랜을 비롯한 자녀들은 가난과 폭력의 상황에 놓인다. 깨끗한 옷을 입고 좋은 학용품을 가지고 학교에 가는 대신 늘 입었던 지저분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한다. 다른 아이들은 지저분한 아이들이라며 이 아이들을 무시한다. 게다가 이 어린 형제들은 언제나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다른 형제가 아닌 내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야 이 가정에서 버틸 수 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나름 영악해져야 하고 수시로 모든 것들이 내 탓이라는 필요없는 죄책감까지도 아이들의 몫이다.



레이첼 모랜은 분명 자기의 어린 시절에도 행복한 시절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부모를 원망하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러나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 역시도 계속 가지고 있다. 헌사도 부모들에게 바친다. 자신 안의 긍정적인 성격이라든가 강인하게 이겨내는 것들은 부모로부터 온 것일테니, 그런 자신을 만들어준것에 감사한다고. 그러나 나는 아마도 레이첼 모랜이 아닌, 레이첼 모랜의 책을 읽는 사람이어서인지, 그녀의 부모에 대한 감사는 별로 들지 않는다. 원망이 매우 크고, 결정적으로 '사랑이 답이 아니다'라는 답을 얻고야 만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인과 성인이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사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기에 용납되어야 하는가? 아니, 아이들 다섯을 가난과 폭력에 방치한 것을 '그래도 사랑했으니까' 라며 고개 끄덕일 순 없는 법이다. 나는 그녀의 부모에 대한 원망이 매우 크다. 사랑이 답은 아니고, 그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면, 그토록이나 무책임한 사랑이라면 당신들에게 사랑은 아무 변명도 되지 않는다.



그런 가정에서 열네살이 되자 레이첼은 엄마로부터 내쫓긴다. 이제 다 컸으니 쉼터에 가서 네 살길을 모색하라는 거였다. 쉼터에 간다고 뚜렷한 대안도 없어 열넷에 레이첼은 노숙자 신세가 되고, 열다섯에 스물한살의 남자 애인을 만나 남자 애인으로부터 성매매를 권유받는다. 그렇다. 레이첼 스스로가 성매매가 답이라고 생각해 그 길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애인이 제안했고, 그러자 그것은 안될것도 없는 답이 되어 그녀 앞에 놓여진다. 성인 남성이 미성년자 여성을 성매매로 유입시켰다. 성매매로 그녀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고, 그녀가 성매매를 선택했으니, 성매매는 레이첼 모랜, 그녀의 자유의지일까? 레이첼은 자신 앞에 놓인 성매매를 자기가 붙들었고, 자기가 인신매매되어 강제된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성매매를 성매매된 여성의 주관적 자유의지라 볼 순 없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림이 남았을 테다. (p.127)



성관계를 즐기려고 내린 결정이 아닌, 경제적 이유로 내린 결정이 과연 '그녀가 원한거야', '그녀의 선택이야'로 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의 2부에서는 그녀가 철저하게 과거로 돌아간다. 성매매하던 당시로 돌아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얘기한다. 그 안에서 자신이 느꼈던 상실과 고통을 얘기한다.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성학대를 어디가서 신고도 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서, 계약된 것 이상의 행위를 성구매자가 할 때에도 그것을 폭력으로 신고할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 안에서 성매매된 여성들의 인권은 사라지고 자신의 가치 역시 상실한다. 성매매는 성매매된 여성과 구매자 모두에게 상실을 준다. 며칠전 페이퍼에서 언급한 것처럼 타락의 상호작용 역시 마찬가지. 남자들은 결코 자신의 아내나 여자친구에게 요구할 순 없는 지독한 행위를 성매매 여성에게는 시도함으로써 그 나쁜 행동을 고치지 못하고 유지하며 자신의 가치를 상실하고, 성매매된 여성은 다른 여자들이라면 허락하지 않을 행위를 허락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타락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타락하는 가운데, 세상은 더럽고 역겨운 행동을 요구할 수 있는 여자와 그럴 수 없는 여자로 나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라고 말하는 성매매된 여성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것은 비참한 현실에 놓인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얘기일 뿐이라며, 그 안에서는 절대로 존중받을 수 없다고, 행복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2부 전체에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얘기하며, 그 일로부터 그녀가 보게된 것, 느끼게 된 것을 토로한다. 그녀에게 성매매는 성매매이며 성학대였고 폭력이었다. 이것은 노동이라고만 부를 순 없었다. 노동이라면 그안에 몸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술을 터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역겨운 상황에서 토하지 않을 수 있는 기술, 위험한 상황을 알아채는 기술들만이 늘어갔다 했다. 이것은 그저 노동일 수 있을까. 닫힌 문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 안다해도 그 일에 대해 신고나 처벌을 할 수 없음에 침묵해야 하는 것이, 과연 노동이라고만 불릴 수 있는 일일까. 폭력을 수반한 노동이라면, 그것을 그저 노동이라고만 불러도 되는 것인가.



이 책의 추천사에 정희진 쌤은 '나는 성매매를 성폭력으로 환원시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라고 썼는데, 어떻게 이 책을 다 읽고서도 저런 문장을 써낼 수 있을까 심히 유감스러웠다. 성매매는 성학대고 성폭력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건 바로 그것이었다.



레이첼 모랜은 그저 겪었던 잔혹한 일에 대해 드러냄으로써 성매매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파악한다. 하나하나 자신이 겪었던 일이, 자신의 성매매 친구들이 겪었던 일들이 눈앞에 보이는 폭력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녀들의 영혼이나 눈빛이 왜 사그러든지에 대해 그녀는 끊임없이 깊이 생각하고 그 일로부터 많은 것들을 깨닫는다. 그것들이 이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3부에서는 탈성매매 이후에 대해 얘기한다. 성매매는 성매매했던 과거 자체를 감추고 싶기에, 성매매가 뻔히 드러나는 세상이지만 성매매에 몸담았던 여성은 그것을 감춰야 하기에 그 후에도 고통스런 시간들이 이어진다. 책의 초반에 그녀는 빈이력서를 앞에 두고 자신의 이력을 쓸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녀는 성매매된 여성으로서, 성매매를 반대한다. 성매매는 성매매에 유입되기 전 생각했던 것들과 완전히 다른 비참한 것이라고, 실상은 매우 다르다고 얘기한다. 또한 책들을 읽고 그녀는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책을 쓰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것은, 그녀가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그녀가 되었기에 고통스러웠다는 걸 의미하며 동시에 현재로 돌아와 책을 읽고 그 때의 일들에 담긴 의미들을 파악한다는 데에도 역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성매매에 대해서는 당사자성을 갖고 있지 않아 성매매에 대한 입장을 보류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과연 당사자가 아니기만 한가? 성매매가 존재함으로써 여성을 나누는 데에 어느 쪽에든 내가 들어갈텐데, 내가 성매매된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당사자가 아니니 입장을 정리할 수 없어, 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레이첼 모랜은, 성매매된 여성이 아님에도 성매매에 대해 연구하고 생각하고 발언해준 사람들이 있었음에 놀라워하고 고마워한다. 그녀는 성매매된 여성으로써 성매매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고자 한다. 목소리가 없었던 자신을 대신해 주는 목소리가 저 밖에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우리가 확실하게 고립되기는 했었지만, 성매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밖에서 우리를 생각하고 우리에 대해 글을 썼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나는 목소리가 없었다.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은 저 밖에서 나를 위해 말해주려 하는 큰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p.401)



나는 이제 내 입장을 확실히 알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성매매에 반대한다. 그것이 내가 성매매에 대해 가진 입장이다.



레이첼 모랜은 성매매에 대해 돌아보고 고찰하며 책을 쓰는 것만으로 그녀의 행위를 끝마치지 않았다. 그녀는 <스페이스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체를 만든다.


스페이스는 학대적인 성매매 현실에서 생존한 여성들에게 목소리를 주기 위해 새로 형성된 국제단체이다. 스페이스에는 현재 아일랜드, 독일, 덴마크, 프랑스, 영국, 미국, 캐나다 출신 회원들이 있다. 독자적 기구이며, 이 책의 저자가 창립자이다. (.431)



레이첼 모랜은, 아일랜드 정부에 노르딕 모델을 수용하기를 권고하였고, 아일랜드 정부는 그러기로 했다. 이야말로 한 인간이 자신의 최대치를 끌어내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게 아닌가.



레이첼 모랜은 스페이스 인터내셔널의 아일랜드 구성원 세 명중 한 명이고, 2013년 2월 6일 아일랜드 정부를 상대로 성매매 경험을 증언했다. 아일랜드 정의, 국방, 평등에 관한 국회 합동 위원회는 그 해 여름 6월 27일 아일랜드 법이 노르딕 모델을 수용하기를 권고하였다.

2014년 11월 27일, 아일랜드 정부는 노르딕 모델 강령을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공식 발표하였다. (p.430)



한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최대치, 통찰할 수 있는 최대치가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고 한 인간이 살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책안에 쏟아 부어져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인생에 앞으로 성매매를 놓아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는 여성들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고, 성구매자들이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필수적으로 읽어야할 책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성매매라고 포장되어 일어나고 있는, 두 눈 감고 용인하고 있는 성학대를 없애야한다. 여성들은 더이상 포르노에, 스트립쇼에, 성매매에 유입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들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기만을 그만둬야 한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태도와 의견들은 대개가 절대로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매매 당사자는 성매매의 범주 내에서만 수용되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 P34

성매매 여성이 이력서를 작성한다면 금방 채울 수 없는 빈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P35

어머니의 관심은 담배 가격 인상과 복지 지원금 인상 이 두가지에 쏠려 있었다. 운전을 하지는 못했지만 할 수 있더라도 차를 갖는다는 꿈은 꿀 수도 없었기에 기름값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집을 소유한다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이자율이나 융자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거의 대부분 실직 상태였고, 어머니도 출산 후로는 직업이 없었기에 직장을 다니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율에도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저소득, 저학력층에 속하는 가정주부였고 남들과는 전혀 다른 현실 세계에 살아서 무역, 상업, 사업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도 관심이 없었다. 위에 언급한 대부분은 우리와 관계가 없었고 관계 있던 적이 전혀 없었다. - P45

물론 그 당시에는 내 경험을 정확하게 명명할 수 없었다. 단지 명백하게 합당한 이유들로 동네 이웃과 학교에서 내가 다르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다. 나의 환경에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생각은 옳았지만, 내가 그 그릇됨의 한 부분이었다고 믿은 것은 실수였다. - P48

노숙은 성매매 유입 경로로 알려져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경우엔 종종 가출의 결과로 나타난다(내무성, 2004a). 가출은 견딜 수 없는 가정으로부터 벗어나 새 출발을 하는 수단으로 긍정적인 행동을 취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젊은 여성은 삶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려는 시도를 함과 동시에 기만 행위에 더욱 취약해진다. -쿠식 외, 2003 - P88

첫 성구매자는 40대 중반이거나 어쩌면 그 이상인 듯했고, 대머리에 안경을 쓴 사람이었다. 하얀 차가 도로 한쪽에 섰고 남자친구가 운전석 쪽 열린 창문으로 그에게 말했다.
"살살하쇼, 이 아이 처음이니까."
그곳에 나를 데려간 주제에 아끼는 체하던 그 위선을 보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움찔했다. - P94

이제 글을 쓰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 순간 산문적 말더듬증을 경험하고 있다. 한 줄을 쓰고는 10분간 그저 응시한다. 적당한 길이의 문단을 써내는 작업은 고된 위업이다. - P95

성매매 집결지에 서 있도록 강요도게끔 내 자신을 최초로 허락했을 때, 이상하고 역설적이게도 과감한 결단을 내린 듯한 기분이 샘솟았다. 가출 이후 처음으로 삶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느꼈듯이 말이다. 몇 년 후 과거를 돌아보고 깊이 들여다본 뒤 그 감정이 주도권 상실에 대한 반작용이었음을 자각하고는 얼마나 어리석게 느꼈는지 모른다.
성매매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성매매는 자라난 가정에서 독립하는 일반적인 나이 혹은 권장되는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독립한 10대 여성들이 흔히 진입하게 되는 삶의 국면으로 널리 인식된다.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정말 알아야 할 때는 몰랐다. - P96

성매매되는 많은 자들의 경우 성인이 아니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성인과의 성관계에 ‘합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또한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비율이 나처럼 최초 성매매에 ‘합의‘하였을 당시 성인이 아니었다.
- P97

실상은 매우 달랐다. 삽입 성교를 하지 않았기에 벤버브 거리에서 하룻밤 동안 벌 수 있는 돈이 너무 적어 백 파운드를 벌려면 구매자를 열 명까지 만나며 내 몸이 사용되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특히 겨울이 오면 벤버브 거리에서 특히 녹초가 됐고, 암울했으며, 비참했다. 열 명의 구매자들에게 성적으로 이용되고 난 후 여성이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물론 합의한 유사 성행위에 멈추는 경우는 드물었다. 구매자가 성기를 삽입하지 않겠다고 합의했더라도 손가락이나 다른 물체들을 몸 안에 집어넣어 상처를 입히고 물고, 혀를 목구멍 여기저기 깊숙이 쑤셔 넣으며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 P99

성매매에 유입되어 있는 동안 행복하기란 그저 불가능할 뿐이라고 일찍이 결론에 도달했고, 내가 옳았다. 성매매 여성 중 행복한 여성은 한 명도 보지 못했고 그 후로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내 경험상 ‘행복한 창녀‘란 없다.
내게 성매매에 잠식된다는 말은 삶의 범위가 좁아져 모든 것이 그 당시 생활의 중심에 놓여 있던 성매매로 귀결된다는 의미였다. 성매매는 모든 것을 침범하고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취침 습관, 구매하는 옷, 대화, 내가 하던 것 못지 않게 하지 않던 행동들도 지배했다. - P109

때때로 ‘영원히 이게 전부이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표면 위로 떠오를 때 심장이 갈비뼈 안에서 쿵쿵거리며 요동쳤다. 마치 실수로 잘못 날아들어 와 방 벽에 부딪히는 새처럼 느껴졌다. 에워싸인 벽에 대한 두려움과 도망가고자 하는 절실함이 동일하게 작용하여 미친듯이 구는 새처럼 말이다. - P109

성매매 유입 한참 뒤 ‘아동 성매매‘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10대 초반의 나를 묘사하는 말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성매매‘라는 말과 나를 동일시하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내가 하는 게 뭔지, 그게 나를 어떻게 만드는지 잘 알았지만 당시 나는 스스로를 전혀 아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항상 또래보다 더 성숙하다고 느꼈고 당시 열다섯이었는데 스스로 젊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내 나이보다 더 큰 아이를 둔 엄마가 된 지금에서야 그때 내가 얼마나 어렸는지 알게 됐다. - P109

존경받거나 선망되는 삶은 내게 불가능했다. 내가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 P111

열다섯 살을 ‘어린이‘로 부르는 것이 가능한가? 가슴이 발달하고 클리토리스가 기능하기 시작하면 여성이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갖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10대 초반의 아이들과 사춘기 이전의 어린이들을 향한 성적 관심을 구별 지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항상 수상히 여겼다. - P111

성인이 되는 정말 중요한 분기점은 가슴이나 생긱기가 아니다.
물론, 그 모든 세월이 지나고, 엄마가 된 지금의 나는 열다섯 살은 아이라는 사실을 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그 당시 아이였던 나의 이미자와 여전히 씨름한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충분히 납등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내 아이가 당시의 나와 같은 나이가 되고 난 이후로 그 이미지를 외면하기 더 어려워졌다. 불가피하게 비교를 하게 된다. 아들이 열다섯에 얼마나 어렸는지, 세상을 상대할 준비가 얼마나 안 됐는지를 생각한다. - P111

사실 내게는 냉혹한 현실만큼이나 더 깊고, 괴로운 무언가가 있다. 그런 라이프 스타일에 내가 유입되고 그로 인한 영향력이 초래한 어떤 특정한 결말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게 성매매가 유일한 길이며 내가 다른 아무것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믿게 했다.
삶의 모든 면이 성매매에 잠식되며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거짓에 잠식됐었기 때문에 그릇된 믿음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안다. - P112

남성에게 자신의 몸을 파는 것보다 더 모멸적인 것이 있다면 또 다른 남성의 이득을 위해 남성에게 몸을 팔아야 할 때이다. - P124

어떤 여성들은 포르노에 반대하지 않지만, 나는 반대한다. 성적으로 노골적인 포즈를 취한 채로 사진 찍히는 경험을 해봤기에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 뒤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산업 안팎으로 여성을 막대하게 훼손하는 모욕적이고 착취적인 산업이다. - P126

솔직히 말해 현재 포르노를 보는 습관이 있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고, 맺을 수도 없다. 포르노를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설득하려는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인간됨을 지키는 일은 때때로 무엇을 수용할지에 대한 경계를 세우는 일을 필요로 한다. 나는 스트립과 포르노가 초래하는 폐해와 수모를 겪었다. 무해한 산업이 아니다. 구별 지을 수 있는 산업도 아니다. 성매매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들이다. 이 체제는 그 정점과 핵심 모두에 상품화를 배치함으로써 여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저하시킨다. - P127

타락의 상호작용이라 함은 심리적으로 취약한 남성의 마음이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성매매 여성이 고의적으로 이용하여 조종한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
(…)

우연히 목격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내가 통제권이 있는 듯 보였을는지 모르겠지만 지갑을 쥔 사람은 그였기에 궁극적으로 권력은 언제나 그의 것이었다. - P133

그가 자신을 비하하는 방식으로 말 걸기를 요청하면 결과적으로 그에 밀접하게 연관되는 방식으로 내 자신의 가치도 저하된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내 천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널드의 행동은 그야말로 벌레 같았다. 그의 성도착은 인간보다 못하게 취급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 욕망의 본질 자체가 타락했고, 그 타락을 조장하면서 내 자신도 타락한 방식으로 행동했다. - P136

서로에게 해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쪽 모두 알면서도 그중 누구도 신경 쓸 자비심은 없다는 점은 타락이 상호작용하는 또 다른 본질이다. - P137

‘살아 있는‘것을 단순히 진행하고 커나가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이 경험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성매매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국제적이거나 문화적 수준뿐 아니라 미시적 수준에서도 살고 자란다. 그것이 손대는 각각의 삶에서 발달하고 진화한다. 성매매를 목격한 모든 곳에서 성매매의 진화를 보았고, 이 성장과 발달이 긍정적이었던 예는 결코 없었다. 타락의 상호작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성격과 부합하지 않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생산해내지 않는다. - P138

쇼엔메이커는 벽에 쓰여 있는 낙서를 통역한다. ‘성구매자들에게, 우리는 당신 같은 남자들을 싫어한다. 당신에게서 가능한 많은 돈을 받고 싶다‘ 반대편에 쓰인 대답은 ‘재수 없는 매춘부들, 너희가 고꾸러질 때까지 박아줘야겠구나. 우리는 네 성기가 아주 아플 때까지 씹하고 빨거다. 고맙다‘ 였다. -줄리 빈델, 『가디언』, 2004년 5월 15일 자

여성의 마음속에는 섹스를 위해 돈을 지불하는 남자와의 평범한 인간적 유대감이 자라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성구매자들이 성매매 비용을 지불하는 여성들 중 몇몇에게 깊은 애정을 형성하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적어도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이런 현상은 성매매가 지니는 특이성이 아니다. 오히려 모욕적인 본질을 더욱 환신시키는 그 무엇이다. 인간의 감정이 한 방향으로 흐를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 P144

이야말로 성매매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자신과 인생을 공유하는 여성에게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이성적으로 기대를 할 수 없는 변태 성향을 다른 계층의 여성에게 떠넘기려는 남성의 고집이다. 여성들은 존중과 경멸, 품위와 천박, 존경과 비난이라는 두 부류로 구별되게 나뉜다. - P145

‘고급‘ 성매매 시장에서 겪었던 경험들만큼 ‘고급‘같지 않은 일은 없었다. 섹스를 위해 돈을 지불하는 데 품격이 있을 리 없고, 성매매가 일어나는 환경이 상관있을 리 만무하다. - P152

고급 창녀 신화는 대체로 그 신화를 믿으려고 섹스에 큰 돈을 지불하는 구매자들의 욕망과 맞닿으므로(성매매의 다른 신화들과 같이) 계속 지속된다. 많은 성구매자들이 에스코트 에이전시에 전화하면 고급의 질이 집 문 앞에 도착할 거라 짐작하고 싶어 하며, 그 질에는 고급의 여자가 부착됐을 거라는 생각이 뒤따른다. 고급 창녀의 개념은 성매매 시장을 극대화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고, 그로부터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 P157

성매매의 본질은 그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거친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하얀 리넨에 엉덩이를 비빈다고 성매매가 다른 것으로 변하진 않는다. - P164

우리 ‘직업‘에서 겪은 경험을 학대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다. - P174

성매매 여성이 실제로 하는 일이란 자신의 몸이 성적으로 학대되도록 돈을 받고 허락하는 것이다. 성학대와 관련된 모든 부정적인 느낌들을 겪지만, 본인이 수용했기에 사실상 스스로에게 재갈을 물리고야 말았다. 말 그대로 표현할 권리를 팔았다. 이는 성매매의 또 다른 쌍둥이이고, 이 두 번째 요소는 적어도 첫 번째 만큼이나 해롭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학대를 숨기고 내면화해야 하는 상황 또한 학대이다. 강요된 침묵은 학대적이다. - P175

그녀를 아프게 하는 기쁨을 누리려고 돈을 지불한 폭행범이 덜 학대적인걸까? - P175

성매매는 상업화된 성학대이다.
정확하게는 성매매가 성학대라고 인정되지 않은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학대라는 진실된 이름이 성매매에 부여되지 않았고, 성학대가 방해 없이 맹렬히 지속될 수 있는 상업화된 무대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성매매에 성학대라는 진실된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성매매의 진정한 본질로 주의를 환기시켜 합당한 이름을 부여하고자 한다. - P185

우리 성매매와 인신매매 피해자들은 오늘 이 기자회견에 모여 성매매는 여성 폭력이라고 선언한다. 성매매 여성들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 성매매 여성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가난, 성 학대 경험, 우리의 취약함을 이용하는 업주들에 의해 선택당한다.
- 『선언문』, 여성 인신매매를 반대하는 연합체 회의, 2005 - P201

"아니, 난 정말로 신경 안 써요."
그녀의 얼굴 표정과 눈에서 어떤 여성들은 성매매 여성으로서 꽤 만족하며 스스로 낙인감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놀랍고도 새로운 이해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틀렸다. 그녀는 속았다. 나는 어떤 여성들이 왜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성매매가 진실로 함축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거짓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내 자신이 그랬다. 수년 전 그 기자가 재차 물었던 바가 정확하다. 나는 내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질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진실로부터 내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날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특히나 대중 매체에서 내 말을 반복할 사람에게는 정직했어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나는 성매매가 실제로 사회와 인류에 해악이며, 여성을 멸시하며 착취하는 성매매를 다른 것처럼 포장하는 행위는 폐단이라고 생각한다. - P206

에로틱 댄서의 증언.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남자들에게 함부로 만져지고, 찔리고, 건드려지고, 성구매 되는 걸 아무도-나 자신도, 다른 여성들도-즐기지 않는다." -페기 모르건, 『아슬아슬한 삶』 - P248

성매매 여성들이 성적 즐거움을 느낀다는 신화는 ‘성매매 여성들이 남자에 의해 구조되고 싶어 한다‘는 유의 사회적으로 통요되는 신화와도 다소 관계가 있다. 성매매에서 이 신화가 유희되는 건 여성들이 아닌 남자들에 의해서다. 구조된다면 구조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 P255

부끄럽게도 어떤 말들은 너무 뻔한 거짓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가 일어나지 않는 다른 곳에서 그런 주장을 했는데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그랬어야만 했기에 그렇게 말했다. 그랬어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그렇게 말했다. 성적인 무력함을 받아들이기보단 주도권 있는 척하는 게 덜 고통스럽고 창피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피해자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싫었음을 증명한다. - P262

성매매 여성들이 주도권을 가진 체하는 주된 목적은 공공연히 당하는 수치를 없던 일처럼 만들려고 함이다. 이렇게 하는 많은 성매매 여성들의 입장을 백분 이해하지만 성매매가 그 진정한 본질에 부합되려면 쓰디쓴 진실은 폭로될 필요가 있다. 성매매는 주도권의 부재로 정의된다. - P263

성매매를 옹호하는 입장의 허황된 생각 중 일반적인 한가지는 성매매되는 여성이 선택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성매매되는 여성들의 몸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고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타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성매매의 의도이자 목적이며, 여기에 신체적 자주성이란 아주 조금도 없다. - P267

이 구매자들이 여성들의 아버지, 오빠, 남동생, 남편, 아들, 그리고 파트너임을 감안해봤을 때 일반적으로 어떻게 남성과 여성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구매자 자신 또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데, 이는 기록되지도 검토되지도 않은 거대한 상실이다. - P280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기능해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열다섯 소녀에게 성매매를 하라고 부추기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을 텐데 그러려면 사람이 얼마나 손상되어야 할까? - P285

(성매매)비범죄화와 합법화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개념은 성매매의 또 다른 신화이며, 특히나 위험하다. - P314

성매매가 합법이 된 나라들에서 업주들이 근절되었다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겠다. 그렇지 않다. 업주의 역할이 지방정부의 조직된 역할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정부가 업주이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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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2-0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성매매 여성들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운 구조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 저자는 어떤 계기로 어떻게 그 산업에서 탈출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참 그리고 인용하신 구절 중 첫번째 구절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추를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에서 착취로 수정하셔야... ㅎㅎ

그리고 그 다음 <스페이스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체를 설명하면서 인용하신 구절 중 ‘스페이스는 학대적인 성매매 현실에서 앳존항 여성들에게 목소리를 주기 위해 새로 형성된 국제단체이다.‘에서 ‘앳존항‘은 오타인지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다락방 2019-12-02 14:00   좋아요 1 | URL
오타 지적 매우 감사합니다 ㅠㅠ
제가 글을 등록한 뒤에 다시 살펴야 했지만, 이렇게나 길게 인용해놓고나니 다시 보기가 싫더라고요. 내심 ‘다음에 보자‘ 이러고 패쓰했어요 ㅋㅋㅋㅋㅋ 그리고 인용문 이렇게나 많은 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도 이게 최대라서 이만큼에 그친겁니다. 입력칸 추가하기가 더는 안되더라고요? 아직 인용하지 못한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앳존항은 생존한으로 밝혀져.... 쿨럭.)

이 책의 3부에서 탈성매매 이후가 나오는데요, 저자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야해서 코카인 중독에서도 벗어나려고 노력하거든요. 탈성매매도 그런 계기라고 이해합니다. 탈성매매 당시에 아이가 이미 있었어요. 탈성매매후에 코카인 중독에 심하게 시달리는데, 결국엔 벗어나게 되거든요. 전문적인 도움이 있었으면 더 나았을 거라는 얘기를 저자가 해요. 구조적으로는 아마 저자가 빚을 지고 어딘가에 소속된 게 아니라 더 나은 상황이었던 걸로 보여요. 저자는 남자친구의 제안(?!)으로 거리성매매로 시작했고 중간에 그 남자친구랑 헤어지거든요. 에스코트도 해보고 업소에도 들어가지만 그런 업소 자체에 구속력이 있었던 것 같진 않아요.

우울과 자살충동에도 시달렸고 동네 사람들이 불편해 아이를 데리고 이사를 가서 새 학교에 넣기도 했어요. 저자가 언제 아이를 낳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그건 아마도 이미 성장하긴 했지만 본명으로 이 책을 쓰라고 해준 아들에게 혹여 누가 되진 않을까 싶어 아이를 낳게된 배경은 생략한 것 같아요.
탈성매매 한 후에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존재조차 몰랐던 이모와 고모를 알게 되고, 그래서 중도포기했던 교육도 다시 받게 됩니다.

저자 개인의 능력도 충분히 발휘된 걸로 보여요. 그 안에서 문제점을 보고 인지하고 어떻게 해야 겠다는 의지를 다잡고 하는 것들을, 마음먹는다고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건 아닐테니까요. 여러모로 대단한 책이었어요.

잠자냥 2019-12-02 14:09   좋아요 0 | URL
역시 약물중독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군요.... 저자가 암튼 여러모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본인 의지도 대단하지만 이모와 고모라는 존재도 참 행운이었군요.

(‘앳존항‘ 과연 어떤 단어에서 나온 오타일까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사전 찾아본 1인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12-02 14:23   좋아요 0 | URL
네 다른 사람들보다 더한 의지와 실행력도 있었고 운도 작용했다고 보여요. 야속하게도 그 운이 성매매 유입 전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합니다만... ㅠㅠ


사전 찾아보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앳존항은 도대체 어떤 항구의 이름일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2019-12-02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친구와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됐다. 내 인생에 내가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의 자아'라고 말했다. 친구는 내게 '그렇게 보여' 라고 말했다.


나는 좀 더 깊은 사람이 되고 싶고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거기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닌, 내 힘으로 스스로 그렇게 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계속 사랑하면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게 내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이지만, 끊임없이 계속 읽고 쓰기를 지속하고 싶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라는 것, 사유라든가 통찰이라 불리는 그 모든 것들을 놓지 않고 싶다. 책을 읽는 족족 지식이 되어 머리에 쌓인다면 나는 박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머리가 좋은 사람 같은 것은 아니기에, 읽는대로 족족 그것들을 내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도 계속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글로 써내는 것은, 내가 나를 좀 더 단단하고 깊은 사람이 되게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출근길의 독서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 출퇴근의 독서는 일상이긴 하지만, 퇴근길의 독서는 포기할 때도 있는 한편(그럴 땐 영화를 본다), 출근길에는 결코,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 경험상 출근할 때 지하철 안 집중력이 하루중 최고다. 그 때 읽는 것들은 정말로 내 몸이 쭉쭉 빨아들이는 것 같고 사고가 확장되는 게 막 느껴져. 그래서 너무 좋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그 순간을 다른 일로 낭비할 수 없어. 그 때만큼은 꼭 책을 읽으려고 한다.




















요즘 출근길에는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를 읽고 있는데, 와, 이 책은 진짜 너무 좋다. 내가 다 읽으면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또 리뷰를 잘 못써? 그렇지만 이 책은 내가 아침에 생각하며 읽기에 진짜 맞춤한 책이고, 저자의 통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라 너무 좋다.


레이첼 모랜은 인생의 순간순간을 어릴 때부터 그냥 넘겼던 사람이 아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눈앞에 닥친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거기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것인지,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되는지를 분명히 파악하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지난 후에 돌이켜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거나 비판하는 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렇게나 좋은 책이 나왔겠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깊은 사유와 통찰이 가득해서 형광펜 들고 밑줄 긋기를 수시로 하고 있고, 포스트잇 플래그도 덕지덕지 붙여가며 이제 겨우 절반을 읽었다. 매번 이렇게나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한 문장들을 토로할 수 있다니, 이런 책을 써줌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응원도 격하게 보내고 싶다. 당신은 글을 더 써야 합니다. 이 책은 이 책 자체로 매우 의미있고 대단하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당신의 생각과 통찰을 드러내는 글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매 꼭지가 다 인상적이지만, 특히나 나는 '타락의 상호작용'에서 뒷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성구매자와 성매매여성이 서로 함께 타락해가는 것.


성구매 경험이 있는 남자, 그리고 성구매를 계속 하는 남자들은 무수히 많다. 남자사람 친구들로부터 그런 경험을 듣기도 했고, 애인으로부터 들었던 적도 있다. 애인이나 아내가 있으면서도 성구매를 하고, 그것을 굳이 숨겨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건 우리 모두가 아는 일 아닌가. 일전에 회사 남자동료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내 여자친구는 자기 임신하면 내 성욕 어떻게 참냐고 성매매 하라고 했어' 라며 자랑했다. 오, 신이시여. 그는 여자친구가 매우 이해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맙소사. 그런 과정에서 아마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성매매를 대체 왜 하냐는 물음에 '거기서는 아내나 여자친구가 해주지 않는 걸 해주거든.' 어떤가, 다들 들어보지 않았는가.



자, 바로 이 지점에서 타락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그 남성은 생리혈에 성적으로 도취되었다. 그의 성향은 평생 성매매 여성을 방문하도록 이끌었는데, 당연히 사생활에서 만나는 여성들과는 이런 욕망을 공유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성매매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자신과 인생을 공유하는 여성에게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이성적으로 기대를 할 수 없는 변태 성향을 다른 계층의 여성에게 떠넘기려는 남성의 고집이다. 여성들은 존중과 경멸, 품위와 천박, 종경과 비난이라는 두 부류로 구별되게 나뉜다.

내 친구는 생리혈이 가장 많이 나올 때 그 구매자와 만나기로 하고 적어도 만나기 하루 전에 탐폰을 착용해서 피에 흠뻑 젖도록 했다. 그 구매자는 항상 단호하게 탐폰이 완전히 젖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만나면 그녀는 탐폰을 빼고 그 구매자는 어린 시절 경험을 다시 살게 된다.

나의 친구와 그 캐나다인 성구매자 사이 특이한 타락의 상호작용은 이렇다. 그 친구는 그 구매자가 만났던 모든 여성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갖게 만드는 그의 더럽고 역겨운 습관이 지속되어 그 구매자가 자신의 가치를 낮추도록 도모했으며, 그 구매자는 다른 어떤 여성에게도 제시하지 못할 역할을 감히 그녀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녀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성매매 내 타락의 상호작용은 바로 이와 같다. 영향을 주고, 반영하며 합병하면서 쌍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요구되면 제공되고, 찾으면 충족되고, 제시되면 받아들여진다. 타락은 스스로 갱신하고 재생하는 데 고수이고, 특정 박테리아가 습한 장소에서 가장 잘 번식하듯이 타락은 성매매를 가장 최적의 환경으로 여긴다. (p.146)




아, 너무 소름끼치게 완벽한 구절이 아닌가. 여기서 예로든 생리혈은 지나치게 자극적인 변태성향이긴 하지만, 다른 요구라 해도 마찬가지다. 감히 아내나 여자친구에게는 요구하지 못할 거라는 걸 스스로 알면서 성매매 여성에게는 요구하는 바로 그 지점, 그것으로 일단 여자들은 나뉘어진다. 이 변태를 요구할 수 있는 여자와 없는 여자로. 그리고 성매매시 그 요구가 허용됨으로써 그 남자의 그 변태성향, 사라져야 할 잘못된 욕망은 지속,유지될 수 있다. 그가 나쁜 행동을 없애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성매매 여성은 다른 여자들이 허락하지 않을만한 행위를 허락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게 된다. 레이첼 모랜은 이것을 '타락의 상호작용'이라고 표현한다. 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이런 일들을 듣고 보고 경험하면서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이면을 들여다 보는 게 아닌가. 그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가, 를 레이첼 모랜은 깊이 들여다보는 거다. 게다가, 그걸 글로 정리해 써낼 수 있는 사람이라니. 나는 너무 어마어마한 글을 만난 것 같다. 이 어마어마한 글을 만나는 바람에 나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을 생각해보게 되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지점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아, 리뷰 써야되는데 여기다 너무 할 말 다 해버렸네. 



이런 독서를 대체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나는 더 읽고 싶다. 더 읽고 더 알고 더 생각하고 싶다.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 역시 나의 시야가 넓어지고 사고가 확장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내 안에 많은 것들을,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차곡차곡 쌓고 싶다. 사람이 단단해지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정말이지 독서가 으뜸이다. 독서가 진짜 최고되는 것이야.



여러분, 책을 읽자. 여러분 페이드 포 읽자. 페이드 포 진짜 너무 너무좋다. 너무 너무 좋아 진짜. 한 인간이 사유랄 수 있는 최대치, 통찰할 수 있는 최대치가 바로 이 책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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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1-30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 최고! 에 공감합니다. 책은 사랑이죠ㅎㅎㅎ. 명료하고 깔끔한 리뷰 읽고 많이 생각하고 도움받고 갑니다.

다락방 2019-12-02 09:00   좋아요 1 | URL
으흐흐 알라딘은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좋아요. 독서 좋다는 말에 호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예요.
월요일 아침입니다. 즐겁게 시작하세요!

붕붕툐툐 2019-11-3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길 지하철 독서의 매력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저도 읽고 싶지만 젤 안 읽히는 책을 그 시간에 읽어요~ 페이드포 읽고 싶은 책에 눌러 담았습니다:)

다락방 2019-12-02 09:01   좋아요 0 | URL
오오 븅븅툐툐님도 출근 시간에 제일 집중이 잘 되시나요? 후훗. 오늘 아침에도 역시나 책을 읽으면서 왔어요. 그럴 때는 정말이지 출근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집니다. 우리 언제나 좋은 책 읽으면서 생각 많이 많이 하면서 살아갑시다!
 


















기존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볼 때마다 재미있고 좋다는 말로 가득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읽어보자 싶어서 사두었는데, 정작 내가 이 책을 읽게된 건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때문이었다. 보부아르는 이 책이 지식을 가진 남자가 창녀를 구원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거다. 물론 다른 책을 깐 거에 비하면 잠깐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가긴 하는데 나는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 어차피 사둔 책, 보부아르 님이 무슨 말을 하는가 보자, 하고 읽기 시작했다.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다. 그러니 고전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것일테다. 누군가 이 책 재미있냐, 라고 물어오면 나는 고민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게다가 의미도 있다. 남자 주인공 '래리' 는 어떤 면에서 너무 닮고 싶고 부러우니까. 내가 딱 원하는 그런 타입이다. 물론 내가 만나고 싶다거나 사귀고 싶은 타입의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다'는 그런 타입. 삶 전반에 걸쳐서는 절대 닮고 싶지 않지만, 그가 공부를 열망하고 알고 싶어하고 열심히 해서 외국어도 몇 개나 마스터하는 그 과정들에 있어서만큼은 '으윽 나도 이러고 싶다'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부아르가 지적한 부분이 무엇인지는, 아마 최근에 몸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이 책 속에서 그려내는 여성, 그 여성을 보는 편협한 시각에 대해서. 이 책속에는 다양한 생김새와 다양한 성격의 여자가 나오지만, 그러나 그 여자들 모두 남자에게 기대어 사는 여자들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한계 때문에 그런 면도 분명 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중산층의 백인 남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여성에 대한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래리'와 '이사벨'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참전한 군인이었던 래리는 참전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살면서 세속적인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계속 공부하고 싶고 삶의 진리를 알고 싶다. 이에 이사벨은 그를 설득하고자 한다. 세상이 그런 게 아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취업을 해야 한다, 고. 계속 공부만 하고 살고싶다는 건 나태하고 책임회피라고. 그러나 래리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내 대답은 이거야. 모든 미국인이 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야.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길을 따라가니까. 당신이 미처 모르고 있는 건, 공부하고 싶다는 내 욕구가 대단히 크다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레이가 큰돈을 벌겠다는 열정을 가진 것처럼 말이야. 몇 년쯤 공부를 하며 보낸다고 해서 그것이 조국에 대한 배신이 되는 일일까? 이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내게도 미국에 기여할 만한 무언가가 생길지도 몰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 말이야. 물론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 하지만 설령 실패한다 해도, 적어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보다 더 궁색하게 살게 되지는 않을 거야." (p.119)



이사벨은 그런 그가 너무 답답하다. 결혼을 해야 되는데, 결혼할 남자가 공부만 하겠다고 하니 미치겠다. 자기는 파티에도 가야 하고 예쁜 옷도 입고 다녀야 하는데.



"당신은 정말 너무 현실감각이 없어. 내가 뭘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구. 나는 아직 젊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 남들이 하는 것들을 하고 싶단 말이야. 파티에도 가고, 춤추러도 가고 싶고, 골프도 치고 승마도 하고 싶어. 예쁜 옷도 마음껏 입고 싶고. 친구들처럼 멋진 옷을 못 입는 게 여자한테는 얼마나 속상한 일인지 알아? 친구들이 싫증나서 파는 헌 옷을 사서 입는 게 어떤 기분일지, 누군가 딱한 마음에서 새 옷을 선물해 주면 그것을 고마워하며 받아야 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마음에 드는 헤어스타일을 하러 좋은 미용사한테 가지도 못할 거야. 전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난 싫어. 내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싶어. 당신이 도서관에 책이나 읽으러 가 버리면, 나더러 하루 종일 혼자 뭘 하라는 거야? 가게의 유리 진열장이나 들여다보며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뤽상부르 공원에 앉아서 애가 놀다가 다치지 않는지 보기나 하란 말이야?" (p.121)




나는 위의 래리의 입장도 밑의 이사벨 입장도 둘다 너무나 이해가 간다. 그리고 나는 래리 같은 삶을 살고 싶을지언정, 내가 만나는 남자가 래리 같은 남자라면 나 역시도 거침없이 이별을 말할 것이다. 공부하면서 돈을 벌지 않는다면, 그가 먹고 살아갈 돈은 누군가가 벌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어 자신은 계속 공부를 하고 삶의 진리를 깨닫는다면 아, 너무 싫다. 그런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책 속에서 래리는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돈을 상속받아 괜찮다. 다만, 이사벨이 원하는 그런 부유한 삶을 사는 데에는 못미칠 뿐. 이사벨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은 직장을 가져야만 한다. 래리가 원하는 삶은 지금 래리의 형편으로 가능한데, 나 역시 그러한 형편이라면 아마 래리처럼 말하고 래리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건 지금 현재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고.


책 읽고 여행다니는 게 얼마나 재미있고 좋은데. 책 읽고 영화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고 글 쓰는 삶이 얼마나 즐거운데. 새벽같이 일어나 회사에 출근해 퇴근까지 갇혀있다가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삶은, 그 자체로 짜릿함도 없진 않지만, 나는 좀 더 여유있게 좀 더 오랜 시간을 책 읽으며 살고 싶다. 물론 노력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겠지만, 래리처럼 공부에만 몰두해서 원하는 책을 읽을 수단인 외국어들도 다 배우고 싶다. 그렇지만 회사에 출퇴근 하면 퇴근 뒤에 녹초가 되어버리는 것이 현실의 내 삶이야. 알고 싶은 게 많아서 공부하고 싶고 여기와는 다른 세상을 돌아보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자꾸 질문하는 삶을 사는 것 자체는 내가 하고 싶은 거다.


또한 이사벨의 입장도 역시 알겠다. 나 역시 편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다. 이사벨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파티며 춤.. 같은 거 안좋아하고 골프.. 관심 없다는 게 .. 뭐 그렇지만 승마라면 좀 좋은데? 아무튼 나도 좋은 곳으로 여행 다니면서 먹고 싶은 거 맛있게 먹고 즐기는 삶을 살고 싶어. 그러니까 젊은 이사벨이 요구하는 삶이란 것이, 나랑 디테일은 다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다. 이사벨이 저런 얘기를 몇 년전의 한국에서 글로 쓰거나 말로 했다면 아마 남자들이 김치녀 된장녀라고 욕했겠다, 라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했다. '뭐야, 남자가 고생해서 돈 벌어오면 너는 그걸로 예쁜 옷이나 산다는 거냐?!' 하는 비난을 아마 대부분의 한국남자가 하지 않을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 여기서 이사벨과 나의 차이가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왜? 내가 직장에 다니니까.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해서 회사에 나를 가둬두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내가 살고 있어. 그렇게 한달동안 일하면 통장에 잠깐이지만 월급이 똭- 꽂힌다. 나는 그 돈으로 책을 사고, 와인 냉장고를 채우고(요즘은 못채우고 있다. 돈이 ... 돈이.. ), 비행기를 예약한다.



내가 원하는 삶과 상대가 지향하는 삶이 다르면, 같이 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일테다. 한쪽은 공부만 하고 싶고 한쪽은 놀고만 싶은데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어울리는 한쌍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저들은 어떻게도 헤어지는 게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또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도 더 낫다고 보여진다. 나였어도 래리랑 헤어질 것이었지만, 그것은 삶의 방식이 달라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이 래리랑 헤어지는 건, 래리가 그녀에게 그녀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내가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벨에게는 그것이 어렵다.


무슨 말이냐면, 이 책의 초판은 1944년에 쓰여졌다. 게다가 이 책의 배경은 1940년대 전이었다. 그 당시에 여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자체가 지금의 나와 달랐다는 거다. 여자들에게 일자리도 그리고 남자와 같은 임금도 보장되지 않았다. 여자의 삶은 전적으로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 여자가 부자로 살고 싶다면, 부자인 남자랑 결혼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돈이 필요하다면 아버지에게 그 다음엔 남편에게 기댔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이사벨이 래리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나와 다르다. 그 후에 이사벨은 부자 남자 '그레이'를 사귀고 결혼해서 대단한 부자로 산다. 게다가 그레이는 이사벨을 너무나 사랑해 굉장히 다정하게 잘 대해준다. 그러니까 래리를 선택하지 않은 것까지는 나와 이사벨이 같지만, 그 후의 삶은 나와 이사벨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사벨은 1940년대를 살아가고 있고 나는 2019년을 살고 있으니까. 남녀 임금차이가 결코 그때보다 나아지진 않았지만, 나는 내가 일을 한다는 선택지가 내 앞에 있고 이사벨에게는 다른 남자라는 선택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다.



나는 예쁜 옷을 마음껏 입고 싶다고 말하는 이사벨을 그려 넣은 것이 여성 혐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건 그저 이사벨이란 사람 자체의 욕망일 것이다. 게다가 남편에게 그걸 기대하고 바라는 것 역시도 여성혐오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책 전반에 걸쳐 서머싯 몸이 그 시대적 배경과 여자들이 놓여있었던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서머싯 몸은 '이런 여자도 있고 이런 여자도 있지' 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단지 썼을 뿐이고, 딱히 그런 여자들에 대해 나쁜 시선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자들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해 자체는 전무한 것. 그에게 삶을 아름답게 구성하고 삶의 진리에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달려가고자 애를 쓰는 건, 남자들만의 몫이었다. 이게 너무 당연한 지점인 거다, 그에게는.

쉽게 얘기하자면, 서머싯 몸 속의 소설에서 남자들에게는 미래가 있었지만 여자들에게는 현재만 있다는 것.



래리는 남편을 잃고 알콜 중독에 약물중독이 되어 이 남자 저 남자랑 자고 다니는 구제불능의 소피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자신이 어릴 적에 알았던 소피는 시를 쓰는 맑은 영혼이었다며. 이에 이사벨은 격분한다. 그렇게 막돼먹고 지저분한 여자에게 래리를 줄 순 없다고. 하아..


자, 래리가 소피랑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왜 결혼하려고 한걸까? 그것은 막돼먹은 소피의 인생을 구원하고자 한 것. 이것부터가 너무 괘씸하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랑 함께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구원이 가능할거라고 믿은 것. 내가 소피였다면, 내가 아무리 구질구질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내 인생을 바꿔줄 의도로 결혼하자고 한 남자에게 예스를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자기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몸은 말한다. 그러니까 어떤 일? 남자가 매춘부를 현모양처로 바꾸는 일. 화자인 몸이 분노하는 이사벨에게 말한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야.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매춘부하고 결혼한 친구들이 있지. 한 명은 스페인 사람이고 두 명은 동양 사람인데, 전부들 아내를 현모양처로 바꿔놨다구.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줬으니 고마워서라도 잘하겠지. 게다가 남자를 만족시키는 방법까지 잘 알고 있으니까." (p.343)



매춘부란 무엇이고 현모양처란 무엇인가.

인생의 저 깊은 수렁에 빠진 건 매춘부이고 궁극적으로 추구할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은 현모양처란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해주었기에 남자에게 감사해야 하는것이 그녀들의 몫인가. 그렇다면 매춘부를 매춘부로 만드는 건 누구인가..

몸은 매춘부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여자라고 할 순 없지. 존경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술을 좋아하고 아무하고나 자는 사람도 많아. 물론 좋은 습관이라고는 할 수 없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 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 혹은 불친절한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거든." (p.341)



이런 몸의 말에 이사벨은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냐고 방방 뛰는데, 그러니까 이거다. 매춘부가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들을 혐오하거나 하진 않아, 그렇지만 그 인생은 남자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어, 그건 가능해!


이게 뭐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매춘부는 왜 매춘부다? 매춘부로부터 성을 구매하는 건 누구다? 다시 말하지만, 여자들에게 일자리가 풍족하고 남녀와 같은 임금이 보장되어 있었다면, 여자들에게도 자신들이 관리할 수 있는 경제권이 있었다면 여자들이 매춘부로 내몰렸을까? 참나원 어처구니가 없고요. 이러니까 보부아르 님이 제2의 성에서 까주신 겁니다. 네? 알겠어요? 나는 성매매를 하는 남자도 싫지만, 매춘부에 대해 시혜적인 시선을 가진 남자도 개역겹다 진짜. 그래봤자 동등한 위치에 놓고 보지 않는거니까.



그렇게나 망가진 여자를 비난하는 이사벨과, 그런 여자들이 나쁘진 않지만 어쨌든 남자들은 그녀들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말하는 몸에게, 요즘 읽고 있는 책,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에서 가져온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으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은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p.127)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 오래 함께 간다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오래 함께 간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라보는 곳이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사소한 많은 부분들이 다른 걸 이해하며 지낼 수 있지만 가장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그것이 선이라는 바로 그 지점으로(어쩌면 악이라도) 같아야 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함께 생각하는 윤리도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의 윤리와 나의 윤리가 충돌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함께할 수 있을까.



요즘 페이드포 읽으면서 또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한가득이다. 페이드포 추천사는 정희진쌤의 것인데, 드워킨의 포르노그라피 책을 언급한다. 아, 또 얼마나 포르노그라피 읽고 싶어지는지! 그러나 알다시피 그 책은 절판인 상태. 어딘가에서 재출간을 앞두고 있는 게 맞긴 한건가요? 진행되고 있나요?


나는 안되겠다, 원서라도 사서 천천히 매일 한 줄씩이라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얼라리여~ 원서도 절판이여? 알라딘에서는 살 수가 없어. 나는 아마존으로 갔다. 얼라리여~ 이것은 새 책으로 구매하려면 몇 만원을 줘야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또 중고가 몇 권 나와있어? 나는 배송료 포함 2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일단!! 주문을 마쳤으나, 그러나... 그 다음은 어찌될 것인가.. 나는 매일 한 줄 읽기에 도전할 것인가. 내가 이 책을 샀다는 소식에 친구는 앞으로 밑줄 긋는 부분 공유해달라 했는데, 아아, 신이시여, 저는 그 책에 밑줄을 그을 수 있겠습니까?




자, 면도날로 시작한 이 페이퍼는 포르노그래피로 끝마친다. 이제 밥 때가 되었으므로. 이만총총.














그가 말한 남자는 이전에 그녀에게 두세 번 수작을 건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적당히 거절했더랬다. - P283

"직업이야 구하면 되잖습니까."
"그게 문젭니다. 직업을 구하려고 노력을 안 하니까요. 아무 일도 안 하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아마 전쟁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테니 좀 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벌써 1년이나 쉬었는걸요. 그 정도면 충분하잖습니까."
- P39

이사벨은 매우 아름다웠다. 새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좁고 긴 스타일의 치마 밑단이 통통한 다리를 감춰 주었다. 드레스의 가슴께로 풍만한 젖가슴 라인이 도드라져 보였다. 맨살이 드러난 양팔도 통통한 편이었지만 목선은 매우 아름다웠다. 다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틀림없이 굉장히 아름답고, 탐나도록 매력적인 아가씨였지만, 만일 몸 관리에 신경 쓰지 않으면 보기 흉하게 뚱뚱해질 것이 분명했다. - P43

그녀는 확실히 다른 아가씨들보다 말수가 적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끝이 약간 위로 들린 조그만 코와 큰 입, 녹색이 도는 푸른 눈을 가진 재미있는 얼굴이었다. 엷은 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굉장히 마른 몸매라서 가슴이 남자의 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납작했다. - P43

"나는 내 형제들과 달리 케임브리지 대학에 가지 않았다네. 기회는 있었지만 거절했지. 그보다는 사회에 나가고 싶었거든.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말이야. 케임브리지에 들어갔더라면 그 많은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네. 경험 많은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으면 더 빨리 많은 걸 깨닫게 되지. 이끌어 줄 누군가가 없으면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어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법일세." - P58

그즈음 엘리엇의 나이는 65세였다. 이제 머리도 더 하얗게 세고 얼굴에 주름도 늘었으며 눈 아래에 살도 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세월을 당당하게 버텨 내고 있었다. 변함없이 날신하고 자세도 꼿꼿하게 유지했다. 언제나 모든 생활 습관에서 절제와 적당함을 추구했으며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다. 세월이 자신을 유린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은 사람 같았다. 옷은 런던의 최고급 양복점에서 맞췄고, 머리 손질과 면도는 단골 이발사에게 맡겼으며, 최상의 컨디션과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마사지를 받았다. - P199

당시에는 여자들이 보통 낮에는 짧은 원피스를 입었는데 그녀 역시 그런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샴페인 색깔의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늘씬하고 맵시 있게 뻗어 있었다. 얼굴이 예뻐도 다리가 유일한 콤플렉스인 여자들이 많지만, 이사벨은 처녀 때 볼품없던 다리는 사라지고 이제 보기 드문 각선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과거에 넘치는 건강미와 쾌활함과 젊음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면, 이제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는 인공적인 기술과 육체적인 노력과 절제에서 기인한 것일 테지만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 P228

"그이를 진짜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랑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구요. 마음속 깊이 래리를 갈망했지만, 눈앞에 안 보이니까 그럭저럭 버틸 수 있더라구요. 전에 선생님이 그러셨죠? 드넓은 바다가 가로놓여 있으면 사랑의 고통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든다고. 그땐 참 냉소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맞는 얘긴 것 같아요."
"래리를 보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우면 안 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천국과도 같은 고통인걸요." - P270

"성적인 열정 없이 사랑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간혹 열정이 죽은 후에도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일테면 애정이나 온정, 혹은 취향이나 관심사의 공유, 아니면 습관 등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습관일 가능성이 높지. 평소에 밥 먹던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파지듯이 성관계도 습관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어. 물론, 사랑이 없어도 욕망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욕망하고 열정은 엄연히 다른 거야. 욕망은 성적 본능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라구.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다른 기능과 똑같은 거지. 그러니 남편들이 적당히 때와 장소를 봐 가면서 시시덕거리는 걸 갖고 여자들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그게 꼭 남자들한테만 해당된다고 할 순 없죠." - P279

이 그림으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게 된 그는 돈과 지위를 가진 과부와 결혼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수잔은 그에게 독설을 퍼붓기보다는 그와의 관계가 끝났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 P284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강렬한 욕정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색욕의 가면 같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토록 방자하고 음탕한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 짐슴에 가까웠다. 그녀의 얼굴은 더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음탕한 표정 때문에 섬뜩하고 무섭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교미 중인 암캐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듯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래리의 손뿐이었다. 무심하게 등받이를 감싼 그 손이 그녀를 광란의 욕정으로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 P313

"저는 여자들을 잘 알아요. 여자는 한 번 그렇게 망가지면 그걸로 끝이에요. 절대 회복될 수 없다구요. 소피가 그렇게 된 건 원래부터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소피가 래리한테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조만간 헤어질 거예요. 타고난 피가 그런 애니까. 소피가 원하는 건 야수같은 남자예요. 그런 남자와 있을 때 흥분이 되니까요. 그러니 결국 야수를 찾아 나설 거예요. 래리까지 지옥으로 밀어 넣고 말걸요." - P342

우리는 하숙집에 방 두 칸을 얻어 하나는 침실로, 하나는 거실로 썼죠. 일은 그만둰다고 했지만 그녀가 계속 하겠다고 했어요. 저 역시 낮에 혼자 있을 수 있으니 그 편이 좋았죠. 부엌도 맘대로 쓸 수 있어서 그녀는 출근 전에 제게 아침을 해 주고 정오에는 집에 들러 점심을 만들어 줬어요. - P426

"이제 진짜 그 사람을 잃은 거군요."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의자 등받이에 얼굴을 기댄채 흐느꼈다. 사랑스러운 얼굴이 숨길 수 없는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내가 전한 소식이 산산이 부숴 놓은 그 희망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따금씩 그를 만나면서 적어도 그가 자신의 세상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그녀에겐 얄팍한 유대의 끈이 되어 왔다는 정도만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 유대의 끈을 마침내 끊어 버림으로써 그는 그녀에게 영원한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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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11-27 14: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너무 너무 좋아요!!!!!!
피곤한 오후인데 눈이 번쩍 뜨입니다! @@
왼쪽에 코너 하나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다락방과 함께 하는 고전 다시 읽기>

공쟝쟝 2019-11-27 21:36   좋아요 1 | URL
다락방과 함께하는 고전 뚜까패기!! ㅋㅋㅋ

공쟝쟝 2019-11-27 21:37   좋아요 0 | URL
다락방 그는 오래 전 보부아르가 철학자를 먼지로 만들어 버렸 듯 숱한 고전들을 가루가 되어 흩날리도록 두드려 부쉇다고 한다..

단발머리 2019-11-27 21:37   좋아요 1 | URL
뚜까패기,가 훨씬 낫네요!
역시 공쟝쟝님 감성~~~^^

공쟝쟝 2019-11-27 22:03   좋아요 0 | URL
감성이라뇨.... (폭력에 대한 열린 감슈성..???ㅋㅋㅋ)

다락방 2019-11-28 08:18   좋아요 1 | URL
어휴 여러분 ㅋㅋㅋㅋㅋㅋ
무슨 말씀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지들 마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우 좋아하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고있다)

다 뚜까팹시다!! 으르렁-

초록별 2019-11-2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을 통해 많은 분들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이 낙입니다~~^^;
오늘 글은 피로회복제 박...스네요. 시간도 없으실 텐데 재미난 글로 한바탕 웃었습니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연재 부탁드려요... 즐거운 하루되세요...

다락방 2019-11-28 08:17   좋아요 0 | URL
제 글 되게 긴데 초록별님 꼬박꼬박 잘 읽어주시네요. ㅎㅎㅎ
북플로 보면 엄청 길텐데요. 제가 너무 피씨 서재활동 하는 사람이라.. 글이 길어요. 하하하하.
즐거운 북플활동 하세요!!

비연 2019-11-28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성> 다 읽은 후 (꼭!) 이것도 읽어야지!

다락방 2019-11-28 08:16   좋아요 1 | URL
비연님, 이제 12월입니다. 한 달 남았습니다?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으하하하

비연 2019-11-28 13:12   좋아요 0 | URL
흠? 흠? 흠!!! ㅜㅜㅜㅜ 한달 남았다니. 지금 수많은 송년회를 뚫고 나름(!) 열심 노력 중입니다..(철푸덕)

jiny5677 2021-01-0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리뷰를 읽다가 블로그에 있는 페미니즘 서적 관련 리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요. 종종 찾아올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1-01-05 08:2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저는 계속해서 여성주의 책 읽으며 글 쓰고 있으니 지니님 오셨을 때 읽을거리 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음화화핫!!

밥이좋다 2022-01-19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미스터리세계로 인도하신 다락방님을 이책으로 다시 뵙네요. 이책도 거의 100년이 된 책이라서 요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저는 남자라 쉽게(?) 받아들였지만) 내용이 많았다는 것을 다락방님 페이퍼로 깨닫습니다.
 
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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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에 토종이 있다면
영국엔 백남 문학이 있구먼.
이 책은 가히 백남 문학의 정수라 할만한다. 토종하고 겨뤄 싸우면 누가 이길것인가..
재미는 있지만 백남 문학의 정수여...
보부아르가 왜 깠는지 너무 잘 알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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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1-27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남 문학의 정수 ㅋㅋㅋㅋㅋㅋ 저도 곧 읽어보겠습니다.

다락방 2019-11-27 10:31   좋아요 1 | URL
저 지금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쓰고 있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스피 2019-11-2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백남이 뭔말인가 했더니 백인남자였네요^^

다락방 2019-11-28 08:18   좋아요 0 | URL
네 한남은 한국남자 백남은 백인남자 으흐흐

책식동물 2019-12-2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안 읽어서 중고로 판매하려고 했는데 이걸 보고 판매하지 않기로 했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12-27 18:32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ㅋㅋ 이 책에 대해 제가 길게 쓴 페이퍼도 있으니 살펴보셔요 ㅋㅋㅋㅋㅋ

junha9814 2023-07-07 2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여자의 천박함은 고전명작에도 오물을 뿌리는 구나. 이런명작을 읽고나서 느낀점이 그런거라니. 제발 그런 천박한 지성가지고서 고전명작 더럽히지 말고 니들 수준에 딱 맞는 82년생 김지영 ,bl물 ,아이돌 오빠들 보면서 노세요
 














'톰 리플리(맷 데이먼)'는 피아노를 치는 일로 돈을 벌고 있다. 하루는 다른 반주자를 대신해 한 파티에서 잠깐 연주를 하게 되는데, 그때 그 연주자의 자켓을 빌려입었고, 그 자켓은 '프린스턴' 대학의 자켓이었다. 그 자켓을 보면 누구나 '아 저사람은 프린스턴을 나왔구나'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자켓.


그걸 보고 조선업계의 어마어마한 부자 미스터 그린리프 씨는 그에게 '내 아들도 거기 다녔다'며 알은체를 하고, 그런 인연으로 그에게 '이탈리아에서 돈이나 흥청망청 써대는 아들을 좀 데려와달라'고 부탁한다. 여비를 챙겨 주면서.


리플리는 프린스턴에 다닌 적이 없지만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아들인 '딕키 그린리프(주드 로)' 역시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지 않은 채로 여비를 챙겨 이탈리아로 떠난다. 딕키를 만나기 전 딕키에 대해 공부하고, 딕키가 좋아한다는 재즈에 대해 공부한다. 그리고 우연히 이탈리아에서 만난 척 딕키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프린스턴 동창이라고 말한다. 그 일로 그들은 친해지게 되고, 딕키는 자신이 약혼녀 마지(기네스 팰트로)와 함께 사는 집에서 함께 거주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형제처럼 둘도없는 친구가 된다.



클럽들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고 좋은 집에서 생활하고 호화로운 개인 요트를 타고 항해를 하는 것 모두는 그동안 가난하게 살아온 리플리가 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이 생활은 그에게 너무너무 좋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딕키는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말한다. 자신들은 이탈리아 북부로 옮길 것이고, 너도 이제 네 갈길로 가라, 고. 돈 한 푼 없이 자신들에게 붙어 사는 게 너무 싫다면서 그에게 지루하고 지겹다고 말한다. 이 부유한 생활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리플리는 그와 다툼 끝에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살아있는 척 연기를 한다. 로마로 가 호화로운 호텔을 잡아 그곳에서는 딕키가 된 자신이 살고, 허름한 호텔을 잡아 그곳에서는 리플리가 되어 산다. 그러면서 서로를 찾는 연락을 하면서 그가 계속 살아 있는 듯 딕키의 행세를 하며 딕키의 반지를 끼고 딕키의 옷을 입고 딕키의 돈을 쓴다.



그러나 이 생활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딕키를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친구인 '프레디'는 단번에 리플리가 딕키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걸 눈치챈다. 그의 행동이며 딕키의 집이라고 마련해둔 곳이 수상하기만 하다. 눈치챘다는 걸 알게된 리플리는 프레디도 죽여버린다. 그리고 계속 딕키인 듯 행동을 한다.




이 영화 역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을 듣고 보게 됐다. 이 영화는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의 리메이크 작품이고,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시리즈가 이 영화들의 원작이다. 이 책으로 '리플리 증후군'이란 말이 생겨났는데, 리플리 증후군이란 병적으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이수정 교수님은 이렇게 병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자존감이 지극히 낮아서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지금 초라하다는 자존감 낮음이 자신의 신분에 대해 거짓말을 해도, 그렇게 해서 교수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해도 만족할 수가 없어서 더 나은 것, 더 나은 위치로 거짓말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
















나 역시 이런 거짓말들이 자존감 낮은 데서 시작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리플리가 프린스턴 대학 조끼를 빌려입었다 해도, 만약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어? 우리 아들도 프린스턴 나왔는데?' 라는 누군가의 알은체에 '아, 이거 내 조끼 아니야~ 나는 거기 안나왔어~' 라고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거기를 나오지 않았으니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괜히 프린스턴 나온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 순간에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날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이야' 하고 굳이 고쳐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약 계속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된다면 고쳐줄 것이다. 아, 사실은 내가 그날은 말을 안했는데~ 하면서. 그러나 리플리는 프린스턴 대학생이 되고, 딕키의 친구가 된다. 그러다 결국 딕키까지 되어버려. 그러면 그가 딕키가 되었다면, 그렇게 딕키와 프레디를 죽였다면, 그러면 끝일까?



누구나 살면서 거짓말을 해본 경험은 있을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해봤다면 당연히 거짓말하는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페이퍼로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거짓말은 보통의 에너지로 되는 게 아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편한 것은 정직하게 사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머리를 써서 말을 꾸며내지 않아도 되고, 언제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정직하다면, 진실을 말하는 게 어렵지 않다. 내가 하버드를 나오지 않았다면 누군가의 물음에 '나 하버드 안나왔는데' 라고 말하면 된다. 왜냐면 나는 하버드를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내가 하버드를 나왔다고 거짓말을 해버리면, 다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계속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그 거짓말 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쌓고 쌓고 쌓아야 한다. 친구도 알아야 하고 교수도 알아야 하고 전공도 말해야 하고 교정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고..... 아, 이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쉽계 예로 들면 양다리를 걸치는 게 거짓에 거짓을 쌓는 일 아닌가. 왜 '쿨'의 노래에도 있잖아.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겉과 속의 이름이 달라서 양다리 들통난 일...



한번 받던 영화 또 보고, 했던 얘기 다시 또하고, 저녁 식사 두번 했더니 왜 이렇게 헷갈리던지~ 같은 편지 적어 보냈어. 며칠 후에 날 벼락이 떨어졌어. 겉과 속에 이름 틀렸었나봐








이 영화를 보는 일은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다. 거짓말을 하면 누구나 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갖고 지내야 하잖아. 혹여라도 이게 탄로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리플리 역시 스트레스 였겠지.  경찰의 압박이 오고 딕키의 약혼녀인 '마지' 마저도 눈치채는 것 같을 때, 그 스트레스는 얼마나 극에 달했을까. 거짓말이 탄로 나는 것도 스트레스지만, 자신은 그 거짓말을 지속하기 위해서 살인도 저질렀다.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으면서 고생 안하고 사는 걸 지속하기 위해,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계속 쫄린채로 딕키인 척 살아야 하는데, 대체 왜 그렇게 사는가.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도 없고 그러니 리플리의 그 순간순간의 선택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없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리플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으으 나였다면 어땠을까, 를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대입해서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하잖아? 리플리는 되기 싫었다. 초반에 거짓말 할 때부터 이미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이렇게나 스트레스가 심한데 리플리는 왜 대체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가. 그렇게 계속 거짓에 거짓을 쌓다가 리플리는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잃어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도 뭔지 모르고, 그건 엉망이 된것에 다름아닌데 대체 왜...




딕키의 아버지도 딕키의 아버지가 고용한 사립탐정도 진실로부터 멀리 있어 리플리를 신뢰한다. 딕키의 약혼녀였던 마지만이 리플리가 딕키를 죽였다는 걸 의심하지만, 딕키의 아버지는 마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오히려 '남자에겐 여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하면서 진정하라고 해... 하아- 이 얼마나 상징적인 장면인가. 진실을 아는 여자는 미친 여자가 되어 침묵을 강요당해버려. 그렇게 세상은 남자들에게 계속 범죄를 저지르게 또 판이 돌아간다.. 아, 이 얘기 하니까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 얘기로 이어가고 싶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았고 페이퍼가 너무 길어질 것이니까 그러지 말기로 하자.




수사는 종료됐고 딕키가 프레디를 죽인 살인범이 되어있고, 딕키의 아버지는 리플리를 신뢰하여 많은 돈을 그에게 주기로 한다. 리플리는 이제 피아노 치는 일을 업으로 삼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뜻밖의 행운에 활짝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세상에는 딕키를 아는 사람이 또 있고, 리플리를 아는 사람도 또 있고, 그리고 그를 의심하는 일들은 또 생길텐데, 그럴 때마다 리플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분명한 건, 자신의 거짓말을 지속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부유함을 지속하기 위해 살인을 한 사람은, 그 다음 살인까지 결정하기가 더 쉬워진다는 거다. 진실을 아는 자를 죽임으로써 거짓말을 견고히 하려는건데, 진실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거짓에 거짓을 쌓고 또 거짓을 쌓아 이룬 세상은 결국 악으로 가득차게 된다. 아니, 대체 스트레스로 가득한 그 삶을 왜 선택하는가.




나는 예전부터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어느 학교 졸업했어?'라고 묻는다면 '하버드 나왔어' 라고 심드렁하게 답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로망은 로망일 뿐, 하버드 근처에 가본적도 없으므로...

정직하게 사는 게 답이다. 정직하게 사는 게 결국은 자신을 위한 선이다. 정직하게 사는 게 자신에게 가장 편한 길이야. 정직하게 산다면 언제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갑자기 누가 뭘 물어도 그러하다. 고민하지 않아도 돼. 거짓을 말하면 잠깐 하버드 졸업한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내게 남는 게 무어람? 하버드 졸업했다한들, 남들이 그렇게 믿는다한들, 나는 지금의 나인데..



대학시절 편의점 알바할 때 다른 알바생들한테 이런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나 원래 재벌집 딸인데 아빠가 서민의 삶을 체험해보라 해서 알바하는 거야' 라고. 물론, 아무도 믿지 않고 다들 빵빵터지기만 했다... 흐음.. 이 직장에 들어와서도 다른 직원들한테 이렇게 거짓말 해보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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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11-27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맷 데이먼의 리플리는 아마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의 리메이크 작일 겁니다.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가 5권으로 나온것을 나중에 알았는데 절판 되어서 책을 구매하지 못했내요.사진에서 보듯 박스셋이 넘 멋있는데 절판이라 많이 아쉽네요.

다락방 2019-11-27 21:22   좋아요 0 | URL
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 라는 작품의 리메이크라고 제가 본문에 이미 적었습니다. 그걸로 볼까 리플리로 볼까 망설이다 리플리로 본겁니다.

카스피 2019-11-27 23:56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그만 그부분을 놓쳐 버렸네요^^;;;

slobe00 2019-12-04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하버드 법대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라니.. 그런 이야기를 툭 던지실 수 있다니 정말 존경합니다.. 저희 강아지 눈꼽만도 못한 자존감의 소유자인 저는 이런 이야길 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요...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나 닥터스를 읽은 세대라면 아마도 그런 로망 다 갖고 있을 텐데 ㅎㅎ

다락방 2019-12-10 17:44   좋아요 1 | URL
저는 영화 [투 윅스 노티스]에서 ‘산드라 블럭‘이 ‘휴 그랜트‘가 물었던가, 무심하게 ‘하버드 법대 나왔어요‘라고 대답하는 걸 보고 진짜 너무 멋있어서 그때부터 로망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미 대학 졸업해버린 훌쩍 후에 말입니다. 철이 덜들었달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너무 있어 보이잖아요. 하버드 법대출신 이라니.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